생사도(生死島) 1-46
그는 처음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자신의 모든 절기들을 다 쏟아
내야 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게 벌어진 그 공전절후의 대 격돌은
장장 칠 주야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승부는 나지 않
았고, 누가 이기고 질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뿐이었다.
공지는 자지도 먹지도 않고 계속된 그 칠 주야의 싸움에도 잘
견디고 있었으나 단목굉은 그럴 수 없었다. 자지 못하는 것이야
견딜 만 해도, 먹지 못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단목굉은 대식가였다. 또한 산해진미를 탐하는 식도락이 살아
가는 그의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그런데 칠일 동안이나 그 낙을
빼앗기고 있었다. 단목굉은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
다. 우선 무엇이든 좀 먹을 수만 있다면 까짓 이기고 지는 것쯤
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칠일 째 되는 날의 해가 기울어갈 무렵 그는 드디어 싸움을 포
기하고 말았다.
『에잇, 빌어먹을 짓이다! 중놈아, 내가 졌다. 그러니 우선 뭣
좀 먹고 보자.』
공지가 하하 웃으며 손을 털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단목 노괴. 아깝게 되었네. 사실 나의 진력은 이미 바닥이 났
다네. 자네가 만일 한 시진만 허기를 참아냈더라면 나는 손을 들
고 말았을 걸세.』
원통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걸신처럼 먹어치우고 난 단목굉이 배
를 두드리며 트림을 했다. 그로서는 이처럼 맛있고, 이처럼 만족
하게 무얼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식곤증으로 꾸벅꾸벅 조는 단
목굉의 머리를 두드리며 공지가 말했다.
『배가 부르면 이제 약속을 지키러 가야지.』
공지가 승자로서 그에게 제시한 부탁이란, 자신을 따라 소림으
로 가서 석굴에 들어앉아 참회수양을 하라는 것이었다. 단목굉은
기가 막혔다.
『중놈아, 나더러 죽을 때까지 빌어먹을 중 흉내를 내란 말이
냐? 너는 차라리 지금 나를 죽여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는 못 하겠다!』
공지가 생떼 쓰는 어린애를 달래듯 단목굉을 달랬다.
『언제든 내가 한 사람을 석굴에 넣을 걸세. 그러면 그 자에게
자네의 절기 중 가장 뛰어난 것 한 가지만 전수해 주게. 그 다음
부터는 자유일세.』
단목굉은 그거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절기 하나 전수해
주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놈이 되었든 내일이라도
절기를 전수해 주고 나서 소림사를 아예 평지로 만들어 놓고 말
작정을 했다. 그러면 분이 풀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단목굉은 그러나 그 뒤로부터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세상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쩝, 고약하다.』
실신해 있는 육초량을 바라보며 단목굉이 입맛을 다셨다. 간발
의 차이로 그가 주화입마에 드는 것은 막아 주었지만, 자신의 절
기 하나를 전수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아까운 마음이
든 것이다.
『공지, 민대머리, 이 나쁜 놈. 썩어 죽을 흉악한 중놈 같으니.』
단목굉이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욕을 했다. 한 번의 실수
로 삼십 년 동안이나 폐관수련 아닌 폐관수련을 해 온 것을 생각
만 해도 억울한데, 이제 자신이 그 동안 갈고 닦아 더욱 발전된
무공을 고스란히 빼앗길 것을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지독한 욕처럼 그렇게 큰 미움은 들어
있지 않았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루 한 끼도 거르지 않
고 주문한 음식을 날라주었던 공지였다. 그 정성을 생각하면 그
를 미워할 수 없는 단목굉이었다. 싸우고 욕하면서 든 정이 어느
덧 깊어 있었다.
『노괴야. 네놈이 예뻐서 이 부처님께서 손수 음식 수발을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네놈이 잘 처먹고 고이 살아 있어
야 이 부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니 그리 알아라. 식충이
같은 놈.』
공지는 음식을 가져다 줄 때마다 놀리고 욕을 했다. 그러나 단
목굉은 그 때만은 얌전한 중생이었다. 마주 욕이라도 했다가는
그가 음식을 다시 가져가 버릴 것이 겁났기 때문이다.
『히히... 그래도 소림사의 중놈이 아니라서 다행은 다행이다.』
한동안 발광을 하던 단목굉이 다시 육초량을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히히 웃었다.
<4>
대도(大都) 북경에도 어느덧 겨울은 찾아와 있었다. 금년의 겨
울은 그 어느 때보다 눈이 많이 왔다. 사흘을 두고 계속된 폭설
로 북경은 온통 흰 눈에 덮여 깊이 가라앉았다. 또 한 차례의 눈
이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아침나절부터 잿빛으로 머리 위에 무겁
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북경 전체가 거대
한 침묵으로 빠져든 듯 조용하기만 했다.
북경성 외곽의 서문로 밖에 있는 성시(城市)에도 사람의 발길
이 끊겼다. 상인들의 고함소리와, 물건을 사기 위해 모여든 사람
들로 밤낮 없이 북적대던 그 거리에 지금은 단 한 사람만이 느릿
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죽립을 깊이 눌러 쓰고 있어서 용모를 알
아볼 수 없는 사내였다. 한 의류점 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백의 한 벌과 백색 피풍 하나.』
그의 주문은 간단했다. 낮고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어
조에서 점원은 문득 겨울 하늘같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은자 석
냥의 대금을 치른 사나이가 옷 보퉁이를 받아든 채 다시 느릿느
릿 걸어 멀어져 갔다.
점원은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두 어
깨 가득 겨울 하늘을 지고 있는 사나이였다. 은자를 건네주는 손
가락의 희고 고움이 마치 규중 처자의 그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점원은 사나이가 골목을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가게문을 닫았다.
* * * *
북경 시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향산(香山) 기슭에 낡은 관
음당(觀音堂)이 있었다. 눈이 많이 온 데다가 날씨마저 좋지 않
아 이 겨울 내내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적막하기만 했다. 그 관
음당 안에 화톳불을 피워 놓고 홀로 앉아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초유성이었다. 그의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이 불빛에 붉게 달아
있었다.
창백한 시린 손을 불에 녹이던 그가 어두워져 가는 창 밖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 그 자를 벤다.』
그의 우울한 눈이 내성(內城)이 있는 동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
라보고 있었다.
외성이 서민들의 거주 지역이라면, 내성은 높은 관리와 부호들
의 대 저택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병부상서 양처량
의 집을 찾는 일은 쉬웠다. 지나가는 사람 중 아무나 붙들고 물
어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저택이었다. 담장의 둘레만도 일천 보가 넘는 어마어
마한 규모여서, 마치 작은 성을 보는 듯했다.
종일을 우울하게 내려앉아 있던 하늘이더니, 어두워지면서 기
어이 흰 눈을 다시 뿌려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자 눈발은 더
욱 굵고 촘촘해져서 폭설로 변했다. 눈앞의 경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뽀얗게 막을 두르고 쏟아져 내리는 눈이었다.
어둠과 폭설로 인해 인적이 끊긴 거리의 모퉁이에 초유성이 홀
로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뽀얀 눈보라 속을 뚫고 오직 양처량의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처럼 흰 백의와 피풍으로 몸을 감싸
고 있는 그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눈과 그를 구별하기가 어
려웠다.
잠시 주변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바람처럼 몸을 날려
골목을 가로질러 갔다. 순찰 무사가 교대하기 위해 잠시 시선을
늦춘 순간, 몸을 솟구친 그가 불어 가는 한 줄기 바람인 듯 가볍
게 담을 넘어 저택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석탑 아래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피풍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
자 초유성은 그대로 하나의 눈덩이가 되었다. 눈만을 내놓고 있
는 그의 앞을 순찰 무사들이 지나갔다.
초유성은 설백의 화원 너머 낮은 월동문이 있는 담을 보고 있
었다. 그 안쪽이 내원인 듯, 높은 전각의 지붕이 설목(雪木)들의
가지 사이로 보였다. 또 한 조의 무사들이 코앞을 스쳐 지나간
순간, 초유성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벌써 세 번씩이나 숨고 스며들기를 계속하고 있는 그였다. 이
제 이 담만 넘으면 양처량의 거처에 이를 수 있었다. 초유성은
월동문 곁의 잣나무 그늘에서 다시 한 번 웅크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
담을 뛰어 넘어 내원의 뜰 구석에까지 기척 없이 숨어든 초유
성은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매화나무 숲 건너 아담한 전각 한
채가 있었는데, 창문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곳이 양처
량의 거처가 분명했다.
초유성이 망설이고 있는 것은 그 매화나무 숲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은밀한 기운들 때문이었다. 고수들이 매복해 있는 것이 틀
림없었다. 정신을 기울여 오감을 활짝 열어놓자, 피부에 와 닿는
싸늘한 예기(銳氣)들을 느낄 수 있었다. 양처량의 경호 무사들일
것이었다.
초유성은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전각 앞쪽의 청석을 밟고 당당히 들어가지 않는 한 매
화나무 숲을 가로지르지 않고서는 후원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매복자들의 이목을 속이고 숨어 들어간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초유성이 가만히 검자루를 잡았
다. 서로 거리를 두고 넓게 흩어져 있는 자들이 미처 모이기 전
에 최단시간에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아직 저
들은 자신의 침입을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그 방법이 의
외의 효과를 볼 수도 있다고 여겼다.
피웃-!
결심한 순간, 초유성의 몸은 이미 한 줄기 섬광처럼 매화림 속
으로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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