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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屋上架屋(옥상가옥)
지붕위에 또 지붕을 얹는다
동진(東晉)의 유천(庾闡)은 자가 중초(仲初)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아홉 살에 능히 글을 지었다. 그 어머니가 죽자 머리를 빗지도 목욕도 하지 않고 혼인도 않고 술과 육식을 끊었다. 그가 이렇게 20년을 보내자 향리에서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수도 건강(建康)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양도부(揚都賦)'라는 글을 지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귀하게 여겼다. 진서(晉書) 문원(文苑) 유천전에 나온다.
'양도부'와 관련하여 다른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시를 완성하여 친척으로 세력을 잡고 있던 재상 유양(庾亮)에게 먼저 보였다. 유양은 친척의 정리를 고려하여 과장되게 평을 했다. "이 '양도부'는 좌사(左思)가 지은 시 '삼도부(三都賦)'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시쳇말로 '주례사 비평'을 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이 다투어 '양도부'를 베껴 감상하느라 서울의 종이값이 올랐다[人人競寫 都下紙貴].
이 소문이 태부(太傅) 사안석(謝安石)에게도 들어갔다. 사안석은 '양도부'를 읽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허어, 이 시는 지붕 밑에 또 지붕을 만든 것일 뿐이로다[此是屋下架屋耳]. 중복되고 모방하여 새로 지은 것이 조금도 없군." 남송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편에 나온다. 여기서 屋下架屋(옥하가옥)이란 말이 유래했다.
송(宋) 호자(胡仔)의 '초계어은총화전집(苕溪漁隱叢話前集) 제49 산곡하(山谷下)'에도 "古人譏屋下架屋, 信然"이라 하여 屋下架屋(옥하가옥)이라는 말이 나온다. 북제(北齊) 안지추(安之推)의 '안씨가훈(安氏家訓) 서치(序致)'편에는 "위진(魏晉)이래 나온 책들은 내용이 중복되고 서로 흉내만 내 마치 지붕 밑에 지붕을, 평상 위에 평상을 만든 것과 같다[魏晉已來 所著諸子 理重事複 遞相模 猶屋下架屋 床上施床耳]"고 하였다. 여기서도 '屋下架屋'이란 말이 나온다.
지금은 대개 屋上架屋으로 쓴다. 屋上架屋은 지붕 위에 또 지붕을 얹는다는 말로 필요없는 일을 하여 공연한 헛수고를 하거나 이중으로 하여 낭비하는 것을 비유한다. 줄여서 옥상옥(屋上屋)이라 하며, 비슷한 말로 옥하개옥(屋下蓋屋:지붕 밑에 지붕을 덮는다)이라는 말이 있다. 문장(文章)에는 옥상가옥이 없어야 하지만,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데는 있어야 한다.
출처:전남일보 정유철 기자의 한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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