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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나라의 북경(北京)은 어디에 있었나?
http://blog.daum.net/hanmunhwa/10111950
(이하 참고문헌은 한국 고전 번역원의 글을 참조,인용했습니다.)
청(淸)나라의 북경을 찾기위한 그나마 가장 좋은 자료는 조선의 사신들이 남긴자료일 겁니다. 청(淸)나라로 가기까지의 여정 중에서 조선의 사신들이 기록한 자료들을 근거로 청나라의 북경은 어디에 있었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계산기정(薊山紀程),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를 보면,청나라로 가기위해서는 사막(沙漠)을 지나가야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압록강을 건넌 뒤부터 비로소 서남쪽으로 향해 가고, 구련성을 지나가서는 서쪽 혹은 북쪽으로 갔다. 요동에서 심양까지는 축방(丑方)으로, 심양에서는 술방(戌方)으로, 고가자(孤家子) 이후부터는 모두 미방(未方)으로 향해 갔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요동 벌판을 들어선 뒤부터 오가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고 모래가 먼지처럼 가늘어, 바람이 살짝 불어도 곧 휘날려 흡사 연기나 안개 같고, 이따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 듯 자욱하고, 사람의 의복ㆍ모자ㆍ얼굴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며, 입안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그래서 비록 열 벌 바른 상자일지라도 모두 스며든다. 또 시장 점포나 인가에 둔 기물과 수레 안의 자리는 닭꼬리비[鷄尾箒]로 끊임없이 털어 버려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한 치 남짓 쌓인다. 도성의 큰 거리는 매양 물을 뿌려 적셔 주고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영평부(永平府)-서쪽으로 연경이 500리 떨어져 있다.(중략)
사하역(沙河驛)-이곳에서는 길이 모래돌 가운데로 나 있는데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힌다. 만약에 바람을 만나게 되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사람은 길을 가지 못한다. 연(燕) 땅의 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곳인데, 모래 길이 수십 리나 된다. 역 마을에는 역시 무너진 성이 있다. 찬바람 눈을 불고 들판 길 평평한데 / 寒風吹雪野途平 바다 넓어 하늘 같고 해는 멀리에 가로놓여 있다 / 海闊如天日遠橫 말을 묻어 버리는 황사 삼십 리 / 沒馬黃沙三十里 넓은 수레바퀴 느려서 소리 없이 구른다 / 廣輪遲轉不成聲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책의 저자도 서로 다른 사람 입니다. 그런데 거의 동일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대륙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록입니다. 현재의 대륙은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는 모래땅이 아닌 거의 초원지대가 주를 이룹니다. 지금의 대륙이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이는 산업이 발달되면서 환경공해로 인한 환경재앙의 결과입니다. 이 책들이 기록된 시기가 약 250년 전후인데,250 여년 전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고, 지금처럼 환경공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지금처럼 사막화가 진척되기 훨씬 이전의 상황입니다.
어느 혹자는 제가 위의 기록을 토대로 청나라의 북경까지 가는 길은 사막의 길이었다.라고 말하자, 구체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단순 모래일수 있으므로 근거로서 빈약하므로 사막일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일반 평지의 단순모래라고 가정 합시다.그런데 어찌해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의 기록처럼,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일반 평지의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역이 사막 말고 그 어느 지역에서 가능하냐?고 묻자, 어느 혹자는 아무 답변을 하지도 못했습니다.사막이 아닌 지역에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압록강 건너서 부터 모래지역 즉 사막지역인데,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중에 요동,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부터 북경까지 모래였다고 했습니다. 그럼 북경지역도 모래땅인 사막지역 이라는 기록이 되는 겁니다. 북경지역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 인구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중략)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수레와 말이 갈고 다니는 통에,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점포들이 모두 닭털 총채를 들고 손 놀릴 새 없이 물건에 쌓인 먼지를 턴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불때고 숨쉬는 훈훈한 기운이 따뜻한 기운을 펼치는 것인가 보다." ---(담헌서(湛軒書)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연원직지와 담헌서의 기록도 사막지역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데,"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이 기록은 사막의 전형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는데,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의 사막의 겨울이 이러하다고 합니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북방에 위치해 있으나 사막일대의 겨울은 보기보다 그다지 춥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원직지와 담헌서의 기록은 북경은 어디에 있었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그중에서도 (사막의 모래먼지가)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이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북경의 모래먼지가 가장 심하게 부는데 이 모래먼지는 지역적인 특징이고, 북경지역의 지역적인 토질의 특징은 석탄의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이 가루가 쌓여있는 곳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원직지의 저자와 담헌서의 저자는 각기 다른 사람인데,다 같이 똑같이 북경의 토질은 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북경지역의 모래는 검은 빛깔의 모래라는 겁니다. 심하게 말해서 완전 연탄빛의 모래가 아니라 일반의 모래에 검은 모래 입자가 섞인 지역의 모래라는 겁니다.
이러한 검은 모래에 대해 알아본 결과 지역적으로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밖에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라쿰사막은 회색빛깔의 모래랍니다. 여타의 사막은 거의다가 황사로서 황토빛의 모래가 주종을 이루지만,카라쿰사막 만큼은 회색빛의 모래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야후백과"를 보면,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대사막. 면적 약 35만 ㎢. 서쪽에서 남쪽으로 걸쳐 있는 코페트다크산지와 카라빌리고지에 의하여 동쪽은 아무다리야강, 서쪽은 카스피해 연안 근처 옛 우즈보이강에 의해 경계가 지어진다. <카라쿰>은 터키어로 <검은 모래>라는 뜻이다. 지표면의 5∼10%는 사초(莎草)·쑥류가 듬성듬성 자라고, 그 밖에는 사구(沙丘)·비사(飛沙)·판(板)모양의 단단한 점토층으로 덮여 있다.
극단적인 대륙성기후로 연강수량 60∼150㎜인데 이중 70%가 1∼4월에 내린다. 7월평균기온 28∼34℃, 일교차는 최고 50℃이며 지표면에서는 80℃까지 올라가는 일도 있다. 1월평균기온은 남부 3℃, 북부 -5℃, 때로 -20℃도 되며 눈이 온다. 인구는 아무다리야강과 남부의 테젠강·무르가브강 등 하천가에 있는 오아시스에 집중해 있다. 약간의 염분이 함유된 풍부한 지하수를 6000개 이상의 우물에서 퍼올려 방목에 이용한다." 연원직지의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라는 기록과 담헌서의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의 기록과 야후백과의 "1월평균기온은 남부 3℃, 북부 -5℃, 때로 -20℃도 되며 눈이 온다."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여타의 다른자료에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겨울날씨는 사막기후의 특성으로 인해 비교적 온난한 날씨하고 합니다. 물론 변칙적으로 -20℃가 될때도 있지만,겨울철 평균적인 온도가 남부 3℃, 북부 -5℃라는 사실과 이 지역의 사막의 토양이 검은빛의 모래=카라쿰(혹은 회색빛의 모래)라는 사실을 연원직지,담헌서를 통해서 보면 청나라의 북경은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북경의 겨울날씨가 연원직지,담헌서,야후백과의 기록처럼 남방의 기후와 비슷할까요? 또한 오늘날의 북경까지 가는 길은 사막을 통한 길일까요?
그리고 오늘날 북경의 토양은 검은빛(혹은 회색빛)의 토양이며,조금만의 바람만 불어도 앞을 분간치 못할지경이며,창호지 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에 쌓일 정도의 지역인가요? 물론 오늘날의 황사현상은 제외 입니다. 이 황사현상은 산업의 발달에 따른 환경오염에 따른 자연파괴로 빨라진 사막화에 따른 결과치이지,지금부터 약 250여년 전의 기록된 사실은 환경오염과 거리가 멀며, 지금의 지나대륙에서 사막이 된 지역중에 상당수가 250여년전에는 사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지나대륙의 황사현상은 제외될수 밖에 없는 사항인 겁니다.
역사상의 진정한 철문관(鐵門關)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데,이 사마르칸트의 철문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난하(灤河)에 합류되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고죽산(孤竹山)은 부성의 서쪽 20리에 있다. 《수경(水經)》의 주(注)에 ‘고죽사(孤竹祠)는 산상(山上)에 있고, 고죽국 성(孤竹國城)은 산의 곁에 있는데, 일명 동산(洞山)이라고도 한다.’ 하였다.....(중략)...........
난하는 영평부성의 서쪽 5리 남짓한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이 독석구(獨石口) 밖 동북쪽에서 나온다. 옛날의 개평(開平) 땅을 지나서 700리를 흘러 구류하(九流河)가 되어 희봉구(喜峯口) 밖에 이른다. 유하(柳河), 관하(寬河), 철문관(鐵門關)의 물이 있어 모두 여기에 흘러든다."-(연행기(燕行紀) 제4권) "해가 뜰 무렵에 길을 나서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고,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길가에 세우고 말하기를, ‘난주서편지경[灤州西境]’이라 하였으니, 열하(熱河)를 또 난하(灤河)라 일컫는지라. 대개 난하물이 북으로 흘러 열하에 이르러 합하여 흐르기 때문에 열하를 또한 난하라 함이더라."-(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6권) 지도를 보면 사마르칸트의 철문관 지역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아무다리아강"에 합류되어 무오연행록의 기록처럼 북쪽으로(서북방향) 흘러 최종 귀착지인 "아랄해"로 흐릅니다. 위의 기록외에 난하 관련기록을 보면 난하의 최종 귀착지는 바다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아강"의 최종 귀착지 또한 바다입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내륙의 바다입니다. 즉 철문관은 사마르칸트에 있으므로 연행기의 기록처럼 이 철문관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합류되는 강이 바로 난하(灤河)입니다. 다시말해서 진정한 난하는 "아무다리아강"입니다. 이 "아무다리아강"이 난하이며,열하 였습니다.이 난하를 끼고 있던 지역이 청나라의 북경이었습니다. "아무다리아강"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사막을 지나갑니다. 카라쿰사막은 회색빛의 사막이며 터키어로 검은모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조선의 기록인 "연원직지"와 "담헌서"의 북경기록은 이 지역의 지역적인 특성을 기록한 겁니다.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 고대사에 해당되는 부분은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 지역은 조선의 중기까지만 해도 중조의 관할이었다가 청나라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전쟁이 병자호란이라 생각합니다.
그후 1800년대에 러시아에게 본격적으로 정복당했습니다. 지금에 러시아에서 독립한 각 나라의 영토와 역사는 러시아의 의도하에 지배당한 각각의 지역을 계승한 것이지 본래의 강역과 역사를 계승한게 아닙니다. 또한 공산주의 통치시절에 수많은 역사를 말살당해 독립한 나라들은 각기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문명조차 모릅니다.
다만 터키만이 한국더러 형제국이라며 묵시적인 암시만을 줄 뿐 입니다."
베이징[북경]의 옛 이름이 연경이라는데
http://cafe.daum.net/coreahistech/LHET/518
연경(燕京)은 과연 어디일까?
다들 북경(北京)의 옛날 이름이라고 하니,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지형을 설명하는 글을 보고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사료를 보자.
(1) 심양(瀋陽)을 거쳐 북진묘(北鎭廟)를 지나고 나니,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산기(山氣)가 있어 연경에까지 이르는데 도합 1000여 리이다. 서북쪽에 병풍같이 둘려 있는 것은 도무지 한 줄기로 뻗은 산맥인데 산세가 장대하였다. 대개 태항산(太行山) 남쪽의 한 산록으로 연경의 용호(龍虎 용은 왼쪽의 산맥인 청룡(靑龍), 호는 오른쪽 산맥인 백호(白虎))가 된다. 서산의 지록(枝麓)은 동남쪽으로 뻗어 발해(渤海)의 어귀로 들어간다.
<부연일기(赴燕日記)>(主見諸事 지리)에 나오는 것이다.
조선에서 어디어디를 거쳐 연경으로 가는 길인데, 그 과정에 보고 느낀 지형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심양을 거쳐가서 연경에 이르렀다.
그 서북쪽에 병풍같이 둘러져 있는 장대한 큰 산맥이 있다.
그리고 태항산 남쪽에 하나의 산기슭이 있다. 이 말은 동서쪽으로 뻗었다는 말이며, 그 남쪽에 연경이 있다는 말이다. 현재 태항산은 남북쪽으로 뻗어있다.
게다가 연경의 왼쪽 산맥, 즉 청룡이라는 동쪽 산맥이 있고,
연경의 오른쪽 산맥, 즉 백호라는 서쪽 산맥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태항산 중심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황당하게 하는 말은 서쪽 산의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발해도 들어간다는 것이다. 서쪽은 내륙이지 바다로 가지 않는다. 태항산의 서쪽 산줄기, 즉 백호라면 불툭 나와 굽이진 동쪽 황하강이다. 그 황하를 발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쪽 백호 줄기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역은 어디일까?
(2) 몽고 바깥으로 서쪽ㆍ북쪽ㆍ동쪽은 만 리의 러시아[俄羅斯(아라사)] 땅에 접해 있다. 책문 안에서부터 연경까지의 흙 색깔은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며, 백색은 많고 황색은 적으며 돌과 자갈은 거의 드물었다.
몽고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여기서 연경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흙빛깔이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며, 흰색이 많고 누른빛깔은 적다고 했다. 또 돌과 자갈은 거의 없단다.
여기서 사막이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특이한 것은 무엇보다 검푸른 흙이라는 것이다. '검다'는 말은 '카라(Kara)'이다. '카라 쿰'이라면 제격이다. 그 서쪽 바다는 카스피해이다. 이곳일지는 아직 모르괘라.
(3) 중국의 공로(貢路)는 모두 노구교(蘆溝橋)로 해서 연경으로 들어가니, 노구교는 곧 상간(桑乾)이다. 바다는 연경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떨어졌고 다리 밖의 큰길은 곧 천하의 문로(門路)로서 곧 연경의 외성인데, 천연적으로 세워진 문이다. 태항산의 동쪽 산맥은 반산(盤山)이 되고, 산해관이 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된다.오른편 산맥이 1000리 남짓을 가서 동남쪽에는 연경(燕京)ㆍ료주(遼州)ㆍ계주(薊州)ㆍ해주(海州)가 되는데, 한 큰 야산(野山)이 아득히 보이고 이북은 장성이 된다. 장성 내외와 료주ㆍ계주 이북은 모두 몽골[蒙古] 지방인데, 한계가 없다.
여기서 태항산 동쪽은 반산이고, 산해관이고, 의무려산이 된다는 말로써 그런 산들이 있다고 했으니 어지간히 현재 지리에 맞추어 놓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앞줄의 글을 다시 보자.
노구교(蘆溝橋)는 상간(桑乾)이라 했다. 상간하라는 강줄기이다. 지금도 이 강은 북경을 지난다. 맞는 말일 것 같다. 그런데 바다는 연경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연경에서 서남쪽에 바다가 있다는 말은 현재 지리에 전혀 맞지 않다. 북경에서 서남쪽에는 여전히 태항산 남쪽 줄기이다. 바다는 없다.
검푸른 흙이 있고, 그 서남쪽에 바다가 있는 곳은 역시 카스피해와 그 동쪽 지역이다.
(4) 강물은 혼탁하여서 색깔은 적황(赤黃)이고 맛은 쓰고 냄새가 나며, 물이란 것이 느릅나무즙[楡汁]과 같다. 샘물 맛이 나빠 소나 말도 마시려 하지 않아 매양 물을 길어 가지고 가는데, 관내(關內) 물맛은 좀 낫다.
강물이 흐리다고 했다. 누르끼리하다는 것이며, 냄새가 난다. 먹지 못하는 물이다. 짐승들도 먹지 않는다니, 아마 석유 등이 나는 모양이다. 그런 물은 누가 먹을 수 있겠는가.
이곳에는 정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하여 황, 암염, 수은, 석고, 구리, 아연 등의 광물자원이 다량 매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연경/북경은 중앙아시아에 있다는 말이다. 서쪽에는 카스피해를 두고, 동쪽에는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두고, ...
첫댓글 단순하게 현재의 주천을 옛북경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또한 장개석이 1940년대 중반 현재의 베이징에 갔을때 그곳의 지명이 북평이었다는것과 참모진이 북경으로 변경하라고 건의하는 모습이 김명호교수의 중국인이야기라는 책에 나와있습니다.몇몇고지도에도 현베이징이 북평으로 표시된것도 있고, 특히 시베리아횡단철도그림에는 명확히 베이징이 북평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박용숙선생님의 이론적 토대를 서지학적으로 접근하여 명확히 분석하시니 점점 확연히 드러나는것 같습니다...계속 응원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