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I. 핀컬슈타인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켜 '잊혀진 왕국'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대다수 사람들의 관념에서 북왕국의 존재는 희미하다. 구약성서 내에서도 북왕국은 남왕국 유다의 그림자 속에 전반적으로 묻혀버렸다. 성서를 구성하는 신명기계 역사서의 기본 사조는 기본적으로 다윗 왕가 중심, 예루살렘 성전 중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내에서 북왕국의 이미지는 대략 좋지 않다. 성서만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을 접한 이들에게 북왕국은 일련의 나쁜 왕들이 연속해서 즉위하다가 일찍 망해버린 나라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인구도 많았고, 영토도 넓었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강성했다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와 함께, 주변국들이 기록을 검토하면 북왕국에 대한 상당히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따지고보면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근동의 정세를 좌우하는 강대국이 되본적은 없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스라엘 왕국은 지난번 글에도 서술하였듯이 그 전성기때 지역강국의 지위는 누린 나라였다. 이 글은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한 짤막한 기록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려고 한다.
북왕국의 군대
1861년 영국의 고고학자 존 조지 테일러는 흔히 '쿠르크 비문'이라고 불리는 두개의 석비를 발견한다. 이것은 아슈르바니팔 2세와 그 아들 샬만에세르 3세의 치세를 기록한 비문이었다. 이 비문의 끝부분에는 샬만에세르 3세의 카르카르 전투와 관련된 기록이 서술되어 있었다. 기원전 9세기, 시리아 정복에 나선 샬만에세르 3세의 아시리아군은 11명의 왕들이 연합한 적군과 격돌하게 된다.
비문은 이 연합군의 구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람-다마스쿠스의 하닷-에제르의 전차 1200대, 기병 1200명, 보병 20000명.
하맛의 이르훌레니의 전차 700대, 기병 700명, 보병 10000명.
이스라엘(Sir-'-la-a-a)의 아합(A-ha-abu)의 전차 2000대, 보병 10000명.
.......
이 열두 임금을 그의 동맹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나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싸우러 왔다.
나의 주님이신 아슈르께서 내게 주신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내 앞장을 서신 네가르께서 내려주신 강한 무기들로 나는 그들과 싸웠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되는 비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성서 내에서 다소 '찌질하고 나쁜 왕' 정도로 묘사되는 아합과 북왕국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일단 비문에 기록된 동맹 왕들 중에서 아합은 가장 많은 전차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전차 2천대와 보병 1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면, 북왕국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무시 못할 강국이었다는 뜻이 된다.
문제-정말 아합인가? 정말 2천대인가?
이런 이야기가 성서 내에서만 나왔다면 '그거 뻥'이라고 결론내리고 치워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 비문은 엄연히 동시대 아시리아의 기록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우선 첫 번째 논점으로, 이 비문에 서술된 A-ha-abu가 정말 성서의 그 아합인가?라는 의문이다. 이 문제는 이미 비문이 처음 발견된 19세기때부터 제기되었고, 근래까지 계속된 의문이다. 일단 아시리아 기록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오므리의 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쿠르크 비문의 '이스라엘'이, 정말 이스라엘로 읽는게 맞다면, 상당히 독특한 케이스에 속한다.
비판적인 학자들은 비문의 해당 구절이 가리키는 왕은 북서부 시리아의 한 왕국의 통치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Gugler 1996, Woude 1986)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Bob Becking 선생이 1999년 저서에서 효과적으로 반박한바 있다. 반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이 시기 북서부 시리아에 우연히도 이스라엘과 발음이 유사한 나라가 있었고, 마침 그 나라의 통치자 이름도 아합과 발음이 비슷한 이름이었다고 가정해야 하는데, 그다지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아니다." 따라서 현재 대다수 학자들은 이 비문이 가리키는 것이 그 이스라엘의 아합 임금이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 제기는 비문이 묘사하는 병력에 대해서다. 비문에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동맹군에게 가장 많은 전차부대를 제공하고 있다. 일단 전차는 상당히 비싼 무기고, 전차부대는 양성하기 쉬운 부대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 시기 아무리 강성했다 한들 결코 근동의 초강대국 레벨은 아니었는데 전차를 2천대씩이나 보유할 국력이 되었을까?
실제로 아시리아 제국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때 동원한 전차부대가 2002대에 기병이 5542명이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전성기 아시리아 제국이 동원한 전차와 동일한 수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Na'aman 선생이 지적하듯, 히타이트 제국이 카데쉬 전투에서 동원한 전차가 2천5백 대였다는 점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합의 이스라엘 왕국은 히타이트 왕국의 전성기 때와 같은 국력을 자랑했단 뜻일까?
전차부대를 양성하려면 엄청난 수의 말이 필요하다. 아슈르바니팔 시대에 아시리아 전차는 네 마리 말이 끌었다. 이스라엘군 전차는 몇 마리의 말이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2천대의 전차부대를 유지하려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Na'aman 선생은 당시 이스라엘이 전국에서 말을 끌어올만한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제국은 아니었으니, 말을 구하려면 제값을 주고 말 산지에서 사와야 했을텐데, 과연 그만한 경제력이 있었겠는가에 의문을 표한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아시리아 전차
그렇다면 아합의 2천대 전차 설에 회의적인 학자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답은 매우 간단하다. 오타 낸 것이다. Tradmor 등은 실제로 쿠르크 비문에서 상당한 수의 필사 오류가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Na'aman을 비롯한 회의적인 학자들은 비문의 전차 2천대는 실제로는 2백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1982년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고대사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Lester L. Grabbe 선생은 Na'aman 선생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 내용인즉, 고대의 전차부대를 유지하는 것은 현대의 기갑 연대를 유지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말들은 상시적으로 마굿간에 두고 관리할 필요가 없다.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들도 말을 방목하기에는 충분할 수 있다. 둘째로 Grabbe 선생이 지적하는 것은 시리아 일대의 주요 세력들 중에 쿠르크 비문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시돈과 티레는 비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동맹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시기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의 봉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병력을 제공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 지역 동맹 세력들의 맹주로서 연합군 내의 또다른 연합군을 끌고 온 것이라면 전차 2천대는 문제될게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에 핀컬슈타인은 한가지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이 시기 북왕국이 누린 경제적 번영은 상당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올리브유와 와인 생산사업이 번창했음이 조사 결과 나타났는데, 이스라엘은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아시리아로 이들 상품을 팔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시기 Khirbet en-Nahas는 레반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구리 광산이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의 생산량은 10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정점을 찍었는데, 바로 오므리 왕조 시기와 겹친다. 여기서 생산된 구리는 이른바 '임금의 큰 길'이라 불리던 고대 근동의 주요 교역로를 따라 이동했는데, 이 시기 이 통로의 상당부분은 오므리 왕조의 요새들의 감제 하에 있었다.
추가적으로, 이 시기 전차부대를 구성하던 말들의 원산지는 이집트였다. 핀컬슈타인에 따르면, 아시리아가 남쪽으로 팽창하기 이전까지, 이집트의 말을 북쪽 지역으로 옮겨주는 중개무역 역시 이스라엘의 번창하던 사업 중 하나였다. 이는 므깃또에서 발굴된 대규모 말 사육 및 훈련 시설로 증명된다.
여기에 더해서 Robin Archer 선생은 당시 이스라엘 전차부대가 실제로 근동 세계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정예부대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침내 아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사마리아를 정복했을때, 이스라엘의 전차부대는 그대로 아시리아군에 흡수되어 제국의 수도인 칼후(님루드)에 배치되었다. 정복된 국가의 잔존병력이 정복군에 흡수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외국인 부대를 편제를 유지한채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에 배치한 기록이 남아있는건 이 경우가 유일하다. Dalley는 이를 이스라엘 전차부대가 가진 특별한 기술과 명성 덕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오며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해보면, 물론 실제 2천대는 과장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기원전 9세기에 이스라엘 북왕국은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던 강력한 대규모 전차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이 명확해 보인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유다 왕국에게는 사실상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다른 주변국들에게도 맹주 노릇을 하던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연합 군대를 유지할만큼,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왕국이었다.
즉, 이 시기 이스라엘 북왕국은 우리가 성서에서 접하던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흔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영향력 있고, 부유한 국가였다.
참고문헌
Lester L. Grabbe, 1&2 Kings: History and Story in Ancient Israel (London, 2017).
Israel Finkerstein, The Forgotten Kingdom: the Archaeology and History of Northern Israel (Atlanta, 2013).
Garrett Fagan and Matthew Trundle (eds.), New Perspectives on Ancient Warfare (Leiden, 2010).
Nadav Na'aman, Ancient Israel and Its Neighbors: Interaction and Counteraction (Eisenbrauns, 2005).
Bob Becking and Marjo Christina Annette Korpel (eds.), The crisis of Israelite religion: transformation of religious tradition in exilic and post-exilic times (Leiden, 1999).
첫댓글 별로 상관없는 말이지만, 동시대 고조선이 있었다는 지역에서 저런 전차를 발견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네요. 중국에도 있었건만;;
전차란 게 결국은 말을 더 쉽게 타기 위해서라서 유목민한테 전차는 쓸모 없었어요 등자 등장하면서 말 타기 쉬워지니 전차도 같이 사장됐죠
@쿠쿠쿠쿠 오 안그래도 전차는 왜 고대이후 없는가가 궁금했는데 답이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쿠쿠쿠쿠 등자가 등장하면서 없어진게 아니라, 안장이 제대로 발달하면서 없어진 거죠..
아무래도 수레보다는 말을 직접 타는게 돈이 덜 들었으니까요..
@델카이저 그게 등자의 등장입니다 안장은 단순히 말에 타기 편하게 해주는 역할인데 여기에 몸을 고정할 수 있는 등자가 등장하면서 전차를 타는 것보다 말에 직접 타는 게 더 쉽고 경제적이니까 전차가 사라진 거죠
@쿠쿠쿠쿠 등자의 등장만으로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실재 춘추전국 이 후 후한 삼국시대에도 전차는 그다지 많이 나타나지 않은듯 한데요. 로마의 경우도 있고, 등자의 등장만이 아니라 전술의 발전에 기반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차가 안정적이기야 하지만 전장여건에 많이 구애받을 수 밖에 없는게 사실이었을테니까요.
@땅콩버터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등자에요 등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비유목민이 기병부대를 만들 수 있냐 없냐로 나눌 정도로 차이가 커요
@쿠쿠쿠쿠 저 당시 고조선이면 전차병이 아닌 기병을 운용했다는 말씀인가요??
@스노틀링 그냥 한반도에서 전차 썼다는 얘기를 못 들어봤어요 좀 위로 올라가면 그쪽은 유목민이니 전차는 쓰지도 않을 테고요
@쿠쿠쿠쿠 안장과 등자는 별개입니다. 고대 말안장은 등자를 달았다간 말 허리 나가게 하기 딱이었지만 전차를 도태되 마땅한 구식 무기로 만드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쿠쿠쿠쿠 전차는 등자의 등장 이전부터 사장되기 시작합니다
@쿠쿠쿠쿠 BC. 3000~4000년 고대 말은 지금보다 체격이 훨신 작았기 때문에..-_-;; 사람이 올라탔을 때 말 등뼈의 부담을 덜어주는 구조의 발달된 안장이 없었을 때는 말 엉덩이에 걸쳐 탔습니다. 이런 자세에서는 창질은 고사하고 활쏘기도 수비지 않았죠..
그런데 나중에 안장이 발달하면서 말 엉덩이 쪽이 아니라 등에 탈 수 있게 되면서 군사적 용도의 전차가 급격히 쇠퇴하게 됩니다. 최근 연구 결과는 전차 자체도 중동지역이 아니라 초원지대에서 먼저 발달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쿠쿠쿠쿠 실제로 실험결과 창질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장의 구조지 등자는 아니라는 역학을 발혀냈습니다. 어차피 과거에는 말 자체가 흔한 것은 아니었고,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말 위에서 창질 할 정도로 잘 무장된 사람들은 적어서 등자 유무에 관계없이 잘만 창질하고 다녔습니다. 애초에 말 위에서 등자같은 거 없이도 창질할 능력되야 제대로 된 "전사"로 인정받는지라..
성서에서 악한 왕으로 불리는 북왕국 오므리왕조의 건국자 오므리대왕이 역사적으로는 전성기 아시리아의 남진을 저지한 연합의 수장격이었다고 추정되기도 합니다 그런걸보면 전성기 북왕국과 그 북왕국과 호각으로 다툰 유대왕국의 국력도 실제로는 만만한 국력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유다왕국은 별로 호각으로 다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북왕국의 봉신 비슷한 위치인때가 더 많았지요.
@mr.snow 서로 통일을 노리고도 끝까지 밀어붙히진 못한 국력으로 알았는데 시종일관 열세였나보군요
@환상 그렇게 봐야 할 듯 해요. 실제로 성경 내에서 남왕국이 북왕국에게 군세에서 밀리거나 왕이 북왕국으로 직접 찾아가는 경우들이 나오기도 하고요.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그러더군요. 구약에 나쁘다고 하는 왕들 중 상당 수가 세상 기준으로 훌륭한 군주들이었다고 ㅎㅎㅎ
백성 기준으로 훌륭한 군주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저 시기는 정확히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사회의 양극화와 있는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횡포를 지적하던 시기와 겹칩니다.
@mr.snow 원래 크고 아름다운것들은 다 누군가의 등골을 뽑아서 만드는거라서요....
@mr.snow 제 머리속에는 '야훼하나님께 불순종한' 아합왕은 부인 이세벨과 함께 '야훼하나님께 순종한' 엘리야 선지자를 높여주는 악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존재로 각인 되어있죠 ㅋㅋㅋㅋ
@mr.snow 22. 국력은 강화시켰는데 백성들 피를 쥐어짠것이 분명하다고 까더라구요. ㅋㅋㅋ
생각보다 이스라엘이 강한 나라였군요.
이스라엘은 약해서 주변국에게 핍박받았다는 식의 피해의식과 남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은 아시리아에게 망하고 나서 생긴 걸까요.
정작 이스라엘 북왕국만 놓고보면 레반트 지역에서 큰 소리 좀 치다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국가들과 딱히 다른 게 없는듯...??
제가 예전에도 글 올렸는데,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다 전형적인 고대 근동 왕국입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의식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별로 특별할것도 없는 거였지요. 다만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뿌리가 뽑힌 사건은 공동체의 집단기억에 미친 영향이 확실히 컸습니다.
항상 재미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의 이야기가 혹시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렇게 북왕국을 까는 성서에서도 여로보암 2세 기간은 어찌되었든 '은총을 얻은' 구간으로 봐서 상당히 궁금하더군요. 그 부분을 이 글로서 유추해볼 수도 있겠습니다ㅎㅎ
그것까진 저도 잘..
성경에서야 공처가에 맨날 예레미아에게 데꿀멍하는 사악하지만 좀 어벙한 왕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성경의 내용만 잘들여다 봐도 상당한 능력자지요
그리고 와이프부터 페니키아 공주입니다. ㄷㄷ
처가덕도 무시 못하겠지요
어 성서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니라 '불마차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한테 당하는이야기 아닌가요???? ㅋㅋㅋ 예레미야는 '성서'상 남유다가 바빌로니아 한테 망할때 예언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욥 ㅎㅎㅎ(그래서 그 다음다음에 나오는 인물이 바빌로니아에 채식주의를 전파한(?) 다니엘이고 ㅋㅋㅋㅋ)
애초에 능력도 별로 없다면 빵빵한 집안을 처가로 두지도 못했겠지요
@배달민족 예 헷갈렸네요. 엘리야입니다 ㅋ
아 그나저나 저 전쟁결과는 어찌 되었나요????? 결국은 아시리아가 승리하고 다른 11명 왕의 국가는 다 패했나요???
아시리아 기록이야 당연히 승리했다고 자랑하는데, 그 뒤의 상황을 보면 별로 그런것같지는 않습니다. 고대 기록은 당사자가 우리가 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한쪽 기록만 있는 경우 진상 파악이 꽤 힘듭니다.
@mr.snow 람세스 2세도 그렇고 진 싸움을 이겼는데 내가 봐줬다 식으로 적는 케이스가 많나 보군요
@bookmark 역사서술의 본질 자체가 이때는 사실을 기록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군주의 위업과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게 가장 큰 프로파간다성 기록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때문에 고대 근동사는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제목만 보고 지금 이스라엘에 전차부대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네요 ;;;
제목에도 북왕국이라고 써놨지요
잘 읽었습니다. 고대 근동역사 꾸르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