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2-2
『끄으으-』
지옥신의 일도가 청성 문하의 고수 한 명을 양단했다. 그와 동
시에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날아온 채찍이 지옥신의 목을 휘감
았다. 비룡편(飛龍鞭) 왕여립의 교룡피 채찍이었다. 참혹한 비명
을 지르며 쓰러지는 지옥신의 목이 반 넘게 찢기고 뼈만 남아 건
들거렸다.
『죽일 놈!』
그것을 본 염라신의 검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일검을 가로
막고 나선 것은 비천맹의 천검 호소청이었다. 청수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피에 젖은 흉측한 악귀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그였다.
『흐흐... 귀문의 놈들은 오늘 노부의 손에서 한 놈도 살아가지
못한다.』
그의 검이 한 점의 자비도 없이 염라신을 쳐 나가려는 순간이
었다.
『멈추어라!』
머리 위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굉장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송
림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거대한 음파 앞에
서 견디지 못하고 떨며 우수수 솔잎을 떨구었다. 난전을 벌이고
있던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엄청난 사자후(獅子吼)에 더러는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
고, 그 중 내력이 고강한 자들도 안색이 창백해진 채 물러섰다.
한 소리 호통으로 군웅들의 기혈을 뒤흔들어 놓은 그 웅장한 힘
은 한참동안이나 사라지지 않고 웅웅거리며 머리 위를 떠돌았다.
하나 같이 악귀가 되어 혈투를 벌이던 자들이 모두 겁에 질린
얼굴로 주춤거릴 때, 언뜻 흐린 그림자 하나가 군웅들의 틈을 비
집고 뛰어들어 흥건한 핏물이 고여 있는 공터 한 가운데 우뚝 내
려섰다.
『헉, 표풍보(飄風步)!』
누군가의 입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위
맹한 장력이 사방을 쓸어가며 군웅들을 밀어냈다. 모두가 앗, 하
고 놀란 그 잠깐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덧 피에 젖은 비급을 집어들고 우뚝 서서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는 철협(鐵狹) 강사옥(姜獅玉)이었다. 그의 태양
처럼 이글거리는 눈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성한 구레나
룻이 꼿꼿하게 곤두서서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마음의 분노가
곧 터질 지경에 이른 모양이었다.
군웅들은 철탑처럼 버티고 서서 노려보는 그의 눈에 먼저 기가
질려 다시 우르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비명과 고함소리가
가득하던 숲 속에 갑작스럽게 무거운 정적이 밀려들었다. 한동안
무섭게 군웅들을 노려보던 강사옥이 음-, 하고 길게 탄식했다.
『이것은 천제무황경 상의 일부 비급인 만큼 무상의 가치가 있
음은 사실이요.』
그가 비급을 들어 보이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
속에 비통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군웅들은 오직 그
의 손에 들려 있는 비급을 보며 마른침을 삼킬 뿐, 감히 나서서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탐욕과 두려움 속
에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군웅들을 하나 하나 돌아본 강사옥이 무겁고 낮게 말했
다.
『허나, 이것으로 인하여 무림의 혼란이 가중되고, 이처럼 막대
한 인명의 피해를 가져오는 일이 계속된다면 이것은 이미 기보가
아니라 혈풍을 부르는 마물(魔物)에 불과할 터!』
『......』
강사옥의 어조가 점점 격해지자 군웅들은 모두 신경을 곤두세
우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휴, 하고 한숨을 쉬어서 마음
의 격동을 가라앉힌 강사옥이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잘못은 바로 이 물건에 있소이다.
내 어찌 그대들만을 탓할 수 있겠소. 해서, 나는 이것을 여러분
앞에서 없애버림으로써 더욱 확산될 추악한 살육을 미리 막고자
하오!』
『그렇게 되면 천고의 절기 하나를 유실하게 되는 것 아니요?
그것은 무림의 큰 손해외다.』
음침하게 말하며 나선 자는 천검 호소청이었다. 강사옥이 불타
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귀하는 무림 동도 간의 끝없는 살육이야말로 더 큰 해라고 생
각하지 않소?』
강사옥의 눈에 은은한 노기가 어리고 있었지만 호소청은 물러
서려고 하지 않았다.
『강 대협이야 그 무공의 성취가 이미 입신지경에 이른 터. 굳
이 그 한 부의 유마검급을 탐할 필요가 없는지 몰라도 그렇지 못
한 우리들 모두에게는 그것이 막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요.』
그는 조금 전까지도 살의를 가지고 대적했던 군웅들 모두를 이
제는 우리들이라는 말로 끌어들이며 동조를 구하고 있었다. 호소
청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린 자들이 여기 저기서 시끄럽게 떠들
어댔다.
『그렇소, 그의 말이 맞소!』
『본인은 그것이 필요하오!』
군웅들은 물론 귀문의 무리들까지 이구동성으로 호소청의 말을
지지하고 나섰다. 강사옥이라는 초인 한 명을 앞에 두자 그들은
모두 원한을 잊고 한 마음이 되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들을 돌아본 호소청의 얼굴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강 대협, 설마 우리 중 누군가가 그것을 손에 넣어 장
차 강 대협의 위명을 위태롭게 할까봐 그것을 염려하는 것은 아
니요?』
그의 말에 충동을 받은 군웅들이 모두 적의와 경계의 눈빛을
띄고 한 걸음 나섰다. 강사옥이 무서운 눈으로 호소청을 노려보
았다.
『호소청, 감히 당신 따위가 나를 저울질하다니. 그대가 이처럼
간교할 줄은 몰랐구나!』
호소청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군웅들을 돌아
보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용기가 생겼다.
『강 대협, 견물생심이라고 방금 전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소?
비급을 그대로 내려놓고 이 일에서 손을 떼시오. 당신이 비록 천
하제일의 고수라고 하나, 두 손이 열 손을 감당하기는 아무래도
벅차지 않겠소이까?』
『하하하하... 과연 쥐새끼 같은 늙은이로다. 네놈의 잔꾀 따위에
흔들릴 나 강사옥이 아니다!』
강사옥의 일지가 호소청을 향해 벼락처럼 퉁겨졌다. 맹렬하게
쏘아져 나가는 한 줄기 지력이 엄습해 드는 쇠뇌와 같았다.
『헛!』
크게 놀란 호소청이 비명을 터뜨리며 다급히 검을 휘둘러 그것
을 막았다.
땅-!
맑은 격타음과 함께 호소청의 검이 부러질 듯 크게 휘어지며
손안에서 웅웅 울었다. 경악한 호소청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듯이 물러섰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진땀이 흘러 내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보검의 검신에 콩알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 모두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보검의 검신을 간단히 뚫어 버리는 그 일지의 위력은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강사옥이 가볍게 보여준 한 수의 흉맹함이
찬물을 끼얹듯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나는 여러분과 하등의 원한도 없는 터. 무모한 살생을 하고
싶지 않소.』
강사옥의 말에는 한 마디 한 마디 충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누구도 감히 그의 말에 토를 달고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하하하... 강 대협 과연 훌륭하오!』
뜻밖의 곳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린 군웅들의 얼굴에 낙심한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강사옥 하
나를 감당할 수 없는데, 천천히 송림을 벗어나 다가오고 있는 일
단의 무리들은 모두 강북 무림맹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산뜻한 청색 유삼을 걸친 귀공자 옥풍규를 선두로 한 그들은,
맹주인 신기수사(神機秀士) 진필생(陳筆生)과 십여 명의 섬서 분
타 소속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지 못한 출현을 본 강사옥의 눈에 언뜻 의혹이 어
렸다.
『태상, 그리고 맹주를 뵈오.』
강사옥이 떨떠름한 얼굴로 가볍게 포권했다. 어쨌든 그들은 자
신의 상관이었다. 무림맹이라는 집단에 몸을 던진 이상 규율과
질서에는 엄격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웃으며 마주 포권하여 예
의를 갖춘 진필생이 옥풍규를 돌아보았다.
『태상, 강 통령이 수중에 넣은 저 비급은 천하제일의 검급이올
시다.』
진필생이 다시 한 번 강사옥을 힐끔 바라보고 나서 말을 계속
했다.
『누구든지 저것을 얻어 그 안의 오묘함을 깨우치는 자가 있다
면 머지않아 능히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을 누리게 될 것이외다.
그리 되면 흑룡보를 타도하고 신검문을 다시 일으켜 옛날의 영화
를 되찾는 일도 수월해질 것이요. 이제 강 통령이 힘써서 저것을
얻었으니 그 때를 위하여 정말 커다란 공을 세운 것입니다.』
강사옥의 노고를 치하하는 말 같았지만 속뜻은 그게 아니었다.
옥풍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탐욕과 망설임이 번갈아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뚫어지게 강사옥의 손에 들려 있
는 유마검급을 바라보며 어깨 너머로 숨을 몰아 쉬었다. 진필생
이 그런 옥풍규의 귀에 속삭이듯 다시 말했다.
『태상께서는 아직 백면서생에 다름없는 바, 험한 강호를 종횡
하며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할 힘을 지
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강 통령이 손수 비급을 취했으니 이는
실로 태상의 홍복이라 아니할 수 없소이다.』
공손하게 말을 마친 진필생이 다시 옥풍규 곁에 섰다. 그의 담
담한 얼굴에 한 줄기 시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 맹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강사옥이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진필생을 바라보며 책망하듯 물
었다. 진필생이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단지 나의 좁은 소견을 태상께 말씀드렸을 뿐,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외다.』
진필생의 말에 마음의 두려움과 갈등을 누르고 힘을 얻은 듯,
옥풍규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한 걸음 나서며 손을 내밀었
다.
『강 통령, 그것을 이리 가져오시오. 내 그대의 공은 돌아가는
대로 크게 치하하겠소.』
『태, 태상...!』
강사옥이 경악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놀람과 실
망이 어두운 그늘로 가득 떠올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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