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집부근 cgv영화관에서 '남한산성'을 관람하고 감동의 여운이 남아있어
잊어버리기 전에 나름대로 짤막하나마 관람 후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끙끙거리며 밤늦게 까지 독수리 타법으로 뚜드려, 아침에 동창카페와 단톡,
그리고 몇몇 지인들의 카톡에 보냈다.
그리고나서, 커피 한잔 들고 서재의 커텐을 여니, 저멀리 '남한산성'이 보인다.
갑자기 한번 잠시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치밀어 이것저것 팽개치고
차를 남한산성으로 몰아, 차창을 내리고 시원한 가을바람과 남한산성 오르는
길의 누렇게 변해가는 삼라만상을 눈과 가슴에 담으며 내달렸다.
수어장대의 마루에 걸터 앉아 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과 시내, 저멀리 한강을
바라보며, 눈을 지긋히 감고 날개를 달고 영화 속으로 날아 들어가 보았다.
내 자신이 4백년 전, 병자호란 당시의 세월로 되돌아가, 영화속의 모든 내용이
오버랩되면서 30여분간 눈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눈을 떠서 저 멀리 청와대쪽과 여의도를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나라를 덮친
시국의 불안과 혼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 인한 전쟁촉발의 위기,
우리에겐 발언권조차 없는 남북 문제에 대한 미,중의 첨예한 외교전술,
국내적으로 최악의 이념갈등과 뒤범벅된 정치현실과 갈길 찾지 못하는 외교상황,
또한 각박한 경제와 사회상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오며,
그 옛날 이곳 남한산성이 지닌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가 눈 앞을 가리어 시야를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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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해발 500m에 쌓아 올린,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성(城).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은 해발 500m에 달하는 남한산에 쌓은 성이다.
산성 전체의 길이는 11.76km, 면적은 2.3km제곱이다. 남한산성에 오르면 지금처럼
건설장비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성을 쌓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남한산성에 들어서면 올라온 꼬불꼬불한 산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은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음식점이 즐비하지만, 옛날에는 임금님이 머물렀던 행궁과
군사시설, 도시기능을 갖춘 곳이었다. 이곳은 넓고 평탄한데다 우물 80여 개와 연못
45개가 있어 식량만 있으면 수만 병력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올라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이 안에 들어오면 안심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이곳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한산성은 이런 입지적 조건에 오랜 세월 지은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건축술 등으로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남한산성에 이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이다.
남한산성이 지금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인조 2년 때였는데, 광해군 13년에
후금의 침입을 막느라 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됐다.
그러다 인조 때 들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2년 후인 1626년에 남한산성의
본성이 완성되자, 광주목(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성 안으로 옮겨오고 행궁도 지었다.
성을 쌓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적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인조 14년에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왕자 등 가족을 강화도로 피란시키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군사들과 이곳에서 45일간 청나라와 대항해서 싸웠다. 그러나 식량은 떨어지고
막강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까지 점령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청나라 요구에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항복 의식을 치렀다.
청나라는 죄인이 용포, 즉 왕의 옷을 입을 수 없다 해서 인조에게 청색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명령하고, 또 죄인은 정문으로 통과할 수 없다 해서 남한산성의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해야만
했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이 항복한 것을 기념해 비석을 세우라고까지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 비석이다. 남한산성에 오르면 인조대왕과
병자호란의 치욕의 역사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한산성에는 인조가 세자와 함께 내려간 서문을 비롯해 동문, 남문, 북문 등 네 문이
있다. 성문 밖은 험하고 거친 산길이, 성문 안쪽으로는 잘 닦이고 정돈된 길이 대비를
이루고 있어 묘한 느낌이 난다. 능선과 산세를 활용해 아름답게 지은 산성 밖으로
멀리 서울시내도 보이는데, 그 아픈 치욕의 역사 때문인지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슬프게 보이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남한산성을 찾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회는 그때그때 기분과 상념 따라 달라진다. 참으로 묘하다.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궁(宮)을 말한다.
조선시대 때 사용한 행군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등 20여가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었다. 인조 외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임금도 여주나 이천에 있는 능에 갈 때, 남한산성 행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첫댓글 국회는 고등사기꾼들의 집단이라고 세상 떠난 전 국회의원 배우들이 얼마나 코믹으로 풍자를 했나. 심지어 국회의사당에 고 김두한의원은 똥바가지를 들고들어가 뿌리기도 했다. 지금 386들은 그런 국회와 사회를 민주화했다고 촟불잔치를 즐기며 근대화세력들을 적폐세력으로 몰고 불태워야 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심오한 대책이 논의 되는 게시판이 되었으면 한다. 태극기동지들은 선봉에서 투쟁을, 좌파빨갱이가 아닌 중도우파, 젊은이들 모두 아우러야 나라가 산다.
우파 평론글을 읽는 기분입니다!
@恩波 김대중노무현문재인등등 주사파들은좌빨귀족노조같은행세를하고있습니다.어리석은국민들은 광우병같이속고있습니다.
국가지도자가 국제 정세의 어두우면 국민이 얼마나 피참한지 오늘날도 만찬가지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남한산성 ㅡ
기라성같은 배우만출연했지 ㅡ
지루하고 잼없었네요ㅡ
소문만 무성했지 ㅡ역사물로서는 몰라도
스릴액션등 요즘요구하는 영화엔 거리거 먼듯ㅡ
보는 관점은 제각각 이겠지만 ㅡ
바로 아래, 저의 관람후기를 한번 읽어주십시요!
남한산성은 우리민족의 굴욕의 치욕역사의 현장이요
또한 후세대의 안보및 역사관의 교육현장이요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자연의 오묘함이 숨쉬는 관광명소임을
찾을 때마다, 수어장대에서 저 멀리 삼전도를 바라볼 때마다,
아라비카라는 분위기 좋은 야외 커피점에서 자연을 바라볼 때마다,
깊이 느낍니다!
6.25때노근리사건? 북괴인민군들이피난민으로위장하여 피난민속에 섞여서 미군에게 총질해대니 사상자가나자 어쩔수 없이 자위수단으로 부득이 북괴 인민군에게 사격을 하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