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노동자의 피로 물들인 1905년 ‘피의 일요일’
입력 2020.01.22 15:36 기자명: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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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일요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하던 노동자들을 유혈 진압한 날이었다.
1905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들의 탄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 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차르의 겨울 궁전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평화 행진 유혈 진압
2주 전인 1월 9일에 개최된 청원 행진은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주도해 진행됐다. 이들이 청원하고자 한 것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당시 일본에 완전히 열세였던 러일전쟁의 중지,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이었다.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 것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제’였다. 이는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소박한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이제 차르는 없다. 신도 없다.” - 게오르기 가폰 신부
“우린 거지가 됐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억압받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해오고 노예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린 힘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 우리는 삶 대신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노동자의 탄원
▲ 당시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실권자 라스푸틴
러시아 민중들이 청원의 형식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한 것은 이들이 정교회의 영향 아래 황제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러시아 제국 황제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기독교(정교회)의 수호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탄원을 하면 정세가 개선된다고 믿고 있었다.
행진에 앞서 시작된 파업의 참가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에 이르렀고 행진 참가자도 6만 명에 가까웠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중심가에 진입시키지 않을 방침이었지만, 너무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진입을 막지 못했다. 당시 실권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유혈 진압 지시에 따라 근위군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했다.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죽은 사람만 500∼600명, 부상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사건은 모스크바 시내로 빠르게 퍼졌으며, 시내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이뤄졌다. 이 학살이 일어난 날이 바로 ‘러시아 혁명’에서 말하는 ‘피의 일요일’이다.
‘피의 일요일’,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이 사건의 결과, 황제 숭배의 환상은 간단히 깨어졌다. 그때까지 단순히 차르의 전제에 반대했던 투쟁은 사건 이후 군주정을 부정하고 차르의 퇴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을 장악했고 가을에는 절반을 점령해 버렸다.
1월 중에 4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 숫자는 지난 10년간의 파업 노동자 수를 넘는 것이었다. 파업은 모든 공업중심지로 확산해 이때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약 28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 수병의 반란을 다룬 예이젠시타인 감독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1925)의 유명한 ‘계단 시퀀스’ 장면
▲ 1917년에 발발한 2월 혁명.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몇 해 뒤 소비에트연방이 세워졌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은 전제 정권을 떠받치던 군대마저 흔들어 놓았다. 러일전쟁에서의 패배와 혁명 세력의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했다. 결국, 그해 6월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함대의 다른 전함들은 포템킨 호의 수병들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고, 이는 뒷날 2월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됐다.
▲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함대의 다른 전함들은 포템킨 호의 수병들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군주정을 지키기 위해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입법권을 가진 두마(국회)의 개설, 헌법제정, 투표권 확대를 약속했으며, 언론·출판·결사·조합 결성의 자유·인권보장이 선언된 것이다.
혁명의 12월 20일에 일어난 모스크바 봉기로 정점을 찍었다. 모스크바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됐으나 모스크바 봉기는 9일 만에 패배로 끝났다. 1905년 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이 이를 계기로 세계사의 중심에 서게 됐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이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역시 1905년 혁명의 중요한 의의다.
민중들의 평화적 청원 행진을 유혈로 진압함으로써 야기된 ‘피의 일요일’은 결국 ‘1905년 러시아 혁명’, 또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이라고 불리는 전국 규모의 반정부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이후 극적으로 전개된 러시아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의 2월과 10월의 러시아 혁명을 완수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1905년의 ‘총연습’이 없었더라면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 레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가 출현했고 1922년에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성립했다. 그러나 이 세계 초유의 사회주의 혁명은 공식적으로 소련이 1991년 12월 25일 저녁 7시에 붕괴하면서 20세기 냉전의 종료와 함께 역사 저편으로 스러졌다.
▲ ‘피의 일요일’ 학살을 지켜보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제정 러시아 군주의 겨울을 위해 지어졌다.
▲ 겨울궁전. 2018년 7월
피의 일요일 학살이 일어났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설립한 도시로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한 이래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이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제2의 대도시는 한때 페트로그라드(1914~1924)로 불렸고 레닌이 죽은 뒤 레닌그라드(1924~1991)로 불리다가 1991년에야 옛 이름을 되찾았다.
레닌그라드 주의 행정 중심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과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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