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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4일 63세의 강 지사가 부산 영도 영선동 월세 판자집에서 신병으로 작고하자 생계가 막막해진 젊은 미망인은 부산 미군 하야리아 부대에 가면 허드렛일이라도 하여 어린 두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 듣고 이훈장을 들고 미군부대를 찾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청소나 노역공사에 뽑혀 나가 젊은 미망인만 남게되었다. 29세의 젊은 미망인을 정문 초병들은 `양공주'로 오인했던 것이다. 한 한국인 초병이 왜 왔느냐고 하길래 일을 찾아왔다고 하니 "네가 할 일은 없다."고 하면서 움켜쥐고 있는 보따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남편의 미국 무공훈장이라고 하며 보여주니 한 미군사병이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미군장교가 지프차를 타고 급히 나오더니 미망인을 태워 부대장실로 안내했다. 미군 사령관실에 들어가니 사령관은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보고 먼저 거수경례로 경의를 표했다.남편은 2년 전에 작고하였고,어린 아이 둘을 두고있다고 하자 통역을 통해 "이제는 걱정하지말라"고 위로하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하고 물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울수만 있다면 청소도 좋고, 주방일도 좋다."고했다. 사령관은 다시 "아이 둘과 생활하려면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으면 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월3,000원정도면 생활할 수 있겠다고 하자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0원을 주면서 며칠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돈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한 달치 쌀과 반찬거리를 사고 아이들의 옷도 샀다. 정확하게 1주일만에 미군 지프차가 사령관실로 오라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다시 만난 미군사령관은 어린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일이 될 거라고 하면서, 미망인을 하야리아 부대가 운영하고 있는 부산 망미동 소재 한 고아원 보육사로 취업시켜 주었다. 이때부터 미망인 가족은 생활고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40여년전 미망인의 아픈기억을 새삼 소개한 것은 이것이 미국 무공훈장과 한국 무공훈장의 차이라는 점 때문이다. 미망이는 2년여를 총무처와 국방부,육군본부를 찾아다니며 진정을 한 끝에 한국 무공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미군 사령관은 훈장과 훈장증서 하나만 보고도 외국인 무공자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많다. ........................................... |
첫댓글 빛나는 은성무공 훈장에 경의를 표합니다.자손대대로 가문의 보배가되기를 기원합니다.지금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영광의 훈장같은것은 안중에도없이 혹 그런사람이 인기가 집중되면 지난 과거사를 귀신같이 찾아내여서 왜곡하고 격하시키는 재미로 비웃기만하니 너무나 한심한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