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불교대학에서 제가 갖고 있는 정확한 신분은 “객원연구원”입니다. 처음 일본으로 간다고 했을 때, 학생들이나 많은 분들이 제게 묻더군요.
“객원교수로 가는 것입니까?"
“강의도 하십니까?”
어느 경우도 제게는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참, 죄송스러웠습니다.
분명 '객원교수'와 '객원연구원'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객원교수는 강의를 얼마나 하든지 상관없이 아마도 월급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석좌교수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문적 역량이 인정되지도 못하고, 또 일본어에도 능통하지 못하여 강의를 할 수도 없는 신분이었으므로, 생각해 보면 “객원연구원”이 적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대학에서는 저처럼, 교수는 교수여서 대접은 좀 해주어야겠고, 강의를 할 수는 없고 …. 그래서 '객원교수'로 모실 수 없는 경우에 ‘객원연구원’으로 대우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외국대학의 교수로서 인정하고, 물질적으로는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학교에 연구실을 주는 것입니다. 저도 이 정도 대우를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버클리에서 온 박창환씨도 “특별대우”라며 놀라워 하더군요.
그런데, 객원연구원에게는 지도교수가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교수님인데, 불교대학에 가면서는 무슨 지도교수가 있어? 마치 학생들처럼 대접받는 게 아닌가?”
그것은 여기 와서 상당 부분 오해가 풀리더군요. 우선, 법무성으로부터 비자에 필요한 서류를 받는 데 초청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초청자는 대학이라는 법인이 아니라, 대학에 소속된 개인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교수라고 해서, 초청자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보증인” 비슷한 역할을 지도교수가 하는 것입니다.
제 지도교수는 불교학과에서 유일하게 인도철학을 전공하신 다나카 덴곤(田中典彦) 선생입니다. (스님의 경우 그 이름은 음독을 한답니다. 그래서 “다나카 노리히코” 가 아니라 “다나카 덴곤”이랍니다.) 연배도 저보다 높으시고, 학문적으로도 여러가지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언제나 찾아가도 성심성의를 다해서 대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보증인” 이상 “스승”으로 모시면서 공부해 갈 생각입니다.
객원연구원! 저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객원연구원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객원연구원이라기 보다는 청강생입니다. 물론, 여기 대학에 서류에 적어 제출한 연구주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수회의(불교학과 교수회의, 전체교수교직원합동회의)에서 지도교수가 저를 소개할 때에도 반드시 연구주제, 「관세음보살의 불교적 아이덴티티 연구」를 읊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료를 찾고, 유관한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생각입니다. 이 외에도 해야 할 숙제가 몇 가지 더 있긴 합니다만, 반드시 1년 안에 해야 되는 것이 아닌 이상,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연구보다 공부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지난 5년동안(전임강사 2년 + 조교수 3년) 꼭 20편의 논문을 썼습니다. 질은 모르겠습니다만, 양은 그다지 적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논문을 또 쓰게 되면, 노하우가 축적된 만큼 쓸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얻기 어려운 1년을 “유학생으로서 살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유학생으로 사는 것, 그것은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저로서는 일종의 한(恨)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원효(元曉, 617~686)스님과 같은 경우는 한이 맺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 한은 유학 여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실력의 부재에서 생겼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일가를 이룸(體)이 문제가 아니라 역할(用)이 중시되는 시대적 흐름을 감안할 때 아무래도 유학한 분들이 이뤄놓은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게는 정보라든가, 언어라든가, 학문세계의 국제적 교류 같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었음이 사실이었습니다.
유학! 저도 이제는 유학생활을 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 실천이 일단은 청강입니다.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고심에 고심을 거쳐서 결정한 수업시간표는 7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쁘게 지냅니다.
우선 “기초일본어”와 “영어”가 있는데, 모두 타야마 히로꼬(田山博子) 선생의 강의입니다. 불교학과 소속 교수로서 칸트철학을 전공한 타야마 레이시(田山令史) 선생의 부인으로서 함께 런던대학에 유학했다 합니다. 불교대학에 유학 오는 외국학생들에게 “유학생의 어머니”로 불리는 분입니다. 일어 수업은 독해이며, 영어 수업은 영어를 일본어로 옮기는 일어작문을 연습합니다. 독해든 작문이든 일어를 쓰니까 회화도 늘겠지요. 일어가 늘 것 같은 예감을 얻게 됩니다.
다음, 인도 관련 수업인데요. 여기 불교대학에서 인도를 연구하는 학자는 인도철학을 강의하시는 제 지도교수 다나카 선생하고, 사학과에 계시는 인도사 전공의 곤도 오사무(近藤 治)교수 두 분입니다. 다나카 선생은 80년대 초반에 타고르(R.Tagore, 1861~1941)가 세운 샨티니케탄(Shantiniketan)으로 유학하신 분인데, 주전공은 바이세시카(Veishesika, 勝論학파, 인도의 자연철학)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대학원 수업이 없어서 학부에서 하는 『도간경(稻竿經)』 한문 3본의 강독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학과의 곤도 교수를 보면, 인도사를 공부하고서도 전임이 될 수 있는 일본학계를 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사)학계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요. 그분은 무갈제국의 역사가 주전공입니다. 아라비아어와 페르시아어를 해독합니다. 교재는 『인도, 중국, 일본 여행기』(Taylor Bayard)라는 영어책을 읽는데, 19세기 중엽 미국의 여행가가 쓴 여행기입니다. 현재 진도는, 이미 인도를 지나서 중국 샹하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곤도 교수와 친해지기 위해서, 어떻게든 인도사 지식을 얻어보려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공부도 다 인연이 맞아야 하는 것같습니다.
“책이 필요하면 빌려가라.”
바라고 있었지만, 감히 청하지 못하던 일을 스스로 열어주었습니다. 곤도 교수님의 책들 중에 필요한 책들을 차차 복사하려고 합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교수인데, “사계(斯界)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분입니다.
다음에, 오노다 슌조(小野田俊藏) 교수입니다. 지난 겨울부터 교분을 맺어왔는데요, 티벳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티벳어 통역으로서, 티벳어 회화는 물론 티벳 탕카까지 직접 그립니다. 현재 몽고와의 학술교류를 추진 중인데요. 티벳의 학승 샤캬 판디타(Sakya Pandita, 1182~1251)의 격언집인 『샤캬 레끼쉐(sa kya legs bshad, 샤카 판디타의 격언)』라는 책을 교재로 배우고 있습니다. 용곡대 박사과정의 김재권 군이 한번 청강하더니, “확실히 다른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를 정밀히 분석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교학과에 소속된 무라오카 기요시(村岡 潔) 선생의 “의학각론”이 있습니다. 이 분 이야기는,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왜 의학각론을 듣는지는 「치료하시는 부처님」(『동국대학원신문』, 2002년 9월호)을 읽으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모두 불교대학 강의는 여섯 강좌입니다.
아, 오따니(大谷大)의 아라마끼 노리토시(荒牧典俊) 선생의 『유식삼십송』 강의도 있습니다. 강종원 군과 함께 자전거 타고 원정 가서 듣는 청강입니다. 역시 지난 겨울로부터의 교분을 이어서 청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라마끼 선생은 일본학자로서는 매우 특이하게 깊이만이 아니라 넓이까지 자랑합니다. 인도철학부터 인도불교, 그리고 놀랍게도 중국불교까지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그 어느 분야에서도 그 분야만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 이상의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일본에서도 마지막 학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아직 다 알아듣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만, 종원이는 강의를 듣고 나면 연일 감탄, 감동을 연발합니다. 이런 강의를 학부생, 석사과정 학생들부터 모여서 듣는 것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은 보물섬이다.”
이런 좋은 교수님들 강의를 정신 없이 듣고 다니면서 드는 저의 느낌입니다. 이 보물섬은, 아직은 노다지입니다.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은 보물들이 널려져 있는 것입니다. 보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배의 크기만이 문제입니다. 이 노다지들을 다 실어나르기에 저의 준비는 너무나 허약한 듯 하고, 세월은 또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새벽에 깨어나서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꿈 속에서 버얼떡
일어납니다,
마흔 셋의 가을 밤
2002년 10월 8일
후기 : 학기 중간부터는 수업에 몸이 적응되기도 하고, 의외로 휴강이 많아서 2과목을 더 듣게 되었습니다. 사사끼 히까리(佐佐木日嘉里) 선생의 “일본어 독해”와 데이빗(David, 영국인, 역사학 박사)의 “영어회화”입니다.
첫댓글 교토통신의 한 편이지만,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에는 싣지 않았습니다. 딱히 일본불교에 관한 글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근래 카페에 오시는 분들께서는 못 읽으신 분도 계시리라는 생각에서 다시 리바이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