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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이은미展_<그곳에 있다 >
전시기간: 2013년 10월1일(화) – 2013년10월10일(목)
전시 장소: 갤러리 담
110-2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7-1 Tel.Fax. 02)738-2745
www.gallerydam.com E-mail: gallerydam@naver.com /
Gallery hours: 월~토 12:00noon~06:00pm 일12am~05pm
오픈닝 2013년10월1일(화) 오후 6시
전시내용
평론/고지혜
그곳에 있는 것을 응시하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 진은영, <있다> 부분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서, 시간을 겪으며 살아간다. 화가 또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순간을 살아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단단해지는 것도 있고 허물어지거나 사라지는 것도 있듯이 캔버스 앞에 앉은 화가가 어떠한 열정이나 고뇌에 사로잡혀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몰입은 똑같은 상태로 지속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방향으로든, 시간은, 화가와 그의 작품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순간순간의 일이 전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당장에는 가늠해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작품이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다. 다만 그 시기에 작가가 갈구하던 순간의 진실만을 내보일 뿐이다. 그러나 순간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들여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도 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는 균질의 방식은 아닐지라도 분명,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작품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데, 한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부여되는 의미가 있다면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볼 때 비로소 해명되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한다는 것은 시간을 두고 그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며 작가가 겪어 온 변화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일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과정은 지금, 여기에 있는 작품을 보다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이 이은미의 여섯 번째 개인전 <그곳에 있다>를 두고 이전의 전시들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1. 숨결과 일렁임
이 작가가 지나온 길에서 유의미한 표지로 기록될 만한 전시는 2006년에 있었던 <숨이 깃든 사물>과 2011년의 <풍경, 결>이다. 시간의 흐름상 앞쪽에 위치하는 <숨이 깃든 사물>은 앞으로 작가가 나아갈 길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크다. <숨이 깃든 사물>의 작품들은 대개 2006년에 제작된 것으로, 방안이나 책상 위와 같이 실내에 있는 사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의도한 듯 남아 있는 붓질의 흔적을 들 수 있다. 푸른 계열의 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더 그러하겠지만, 얼핏 보면 이 사물들은 마치 물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만큼 색을 투명하게 처리한 것의 효과도 있지만 가로의 형태로 얇게, 가늘게 남아 있는 붓 자국은 사물이 유영(遊泳)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사물의 운동성을 드러내면서 이들이 숨을 쉬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버려진 듯 바닥에 펼쳐져 있는 책도, 오랜 시간 그렇게 쌓여 있었을 것 같은 잡동사니들도, 무심하게 걸려 있는 수건도 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르게 보인다. 무심코 지나치던 익숙한 장면들은 이렇듯 낯설게 다가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우리는 새롭게 환기된 사물들의 지난 서사를 상상하게 된다.
<숨이 깃든 사물>을 대표할 만한 작품은 <푸른영혼>일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화폭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초록색 사물은 소파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소파 위에는 무언가 큰 덩어리가 푸른색의 천을 덮어쓰고 있는데, 이 또한 형태로 보아 옆으로 누운 사람일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대상의 형태가 비교적 명징하게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소파의 윤곽은 흐리게 처리되어 소파의 색과 배경이 되는 색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또한 푸른색의 천이 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가로 모양의 붓 자국은 숨의 드나듦과 같은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드러낸다. 실내에 있는 정물을 표현하면서도 대상의 윤곽이나 형태를 분명하게 고정하지 않은 것은 이 작가가 의미의 모호함이나 다층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주제는 반복ㆍ변주되면서 <풍경, 결>에서도 지속적으로 탐구된다.
<숨이 깃든 사물> 이후 5년 만에 열린 <풍경, 결>은 여러모로 변모를 모색한 전시였다. 내용에 있어서나 기법에 있어서나 <풍경, 결>에서 작가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본다. <숨이 깃든 사물>과 <풍경, 결>의 작품들을 비교해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작가의 시선이 머무르는 대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풍경, 결>에서 작가는 트여 있는 공간으로 나가 바깥에 있는 벽과 문, 집과 나무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일렁임을 표현하는 데 힘을 쏟는다.
<풍경, 결>을 채우고 있는 일렁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빛의 의존Ⅱ>와 <집>이다. 이 두 작품에서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는 소재는 나무 그림자이다. <빛의 의존Ⅱ>에서 나무 그림자는 벽과 계단을 타고 오르거나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집>에서 나무 그림자는 집의 외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물살이 퍼져 나가듯이 바닥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나무 그림자들의 일렁임은 고정되어 있는 벽이나 계단을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이 또한 모호함을 추구하는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숨이 깃든 사물>에서는 가늘고 얇은 느낌으로 나타났던 붓질의 흔적이 <풍경, 결>에 와서 보다 부드러운 형태로 드러나거나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붓질은 고정된 형태나 윤곽을 부드럽게 지워가면서 풍경의 결을 채우고 있는 질감이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2. 그저 있는 것들
오로지 ‘있다’라는 말로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여기에 바람이 있다, 빛이 있다, 노래가 있다, 고독이 있다처럼,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은 그저 ‘있다’라는 말로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저 배경으로만 인식되어 왔기에 ‘있다’라는 말을 필요로 하는 존재도 있다. 여기에 벽이 있다, 계단이 있다, 모퉁이가 있다와 같이. 그림은 그러한 존재들을 화폭에 담아 그들이 이곳에 있음을 드러내게 되는데, <여기> 또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여기>는 벽에 붙어 있는 어떤 계단의 일부분을 보여준다. 두 단 정도만 보이는 이 계단은 보라색으로, 왼쪽의 벽은 노란색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노란색은 보는 이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더구나 이러한 노란색은 이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좀 더 오래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노란색의 입자가 차곡차곡 포개져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듯한, 그런 높은 밀도를 느낄 수 있다. 맨 위의 계단이 가장 밝은 톤을 띠고 있고 수평의 칸보다 수직의 칸이 더 어둡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곳은 빛이 가득한 공간이며, 노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빛임을 알게 된다. 즉 <여기>는 여기에 빛이 가득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대수롭지 않게 그저 존재하는 것들을 응시하고,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음을 말하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그곳에 있다>의 작품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하고,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사물이나 공간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벽과 계단과 바닥이다. 우리는 한눈에 이 대상이 무엇인지 아는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벽이고 계단이며 바닥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앎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가는 그러한 사물과 공간을 모사(模寫)하거나 재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마음을 통과한 벽과 계단과 바닥은 흔히 우리가 보아 왔고 알아 왔던 그 형태와 색을 지니고 있지 않다.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정확하게 재현하지 않는 것은 분명 의도한 것이다. 이는 <벽>과 <오래된 결>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두드러진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벽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로막지 않고 있다. <풍경, 결>의 벽은 담에 가까워, 이쪽을 보는 동시에 저쪽을 상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다>의 벽은 이곳과 저곳을 경계 짓지 않고 저 너머를 상상하게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 벽을 오래도록 응시하게 만든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서리 혹은 모퉁이다. 이 작가는 이전부터 여러 겹의 의미에 주목해 왔는데 모서리와 모퉁이는 이번 전시에서 이를 잘 드러내는 소재라 할 수 있다. 사각형은 수평과 수직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평과 수직의 선이 모여 사각형이 되면서 공간은 구획된다. 평면에서 사각은 닫혀 있는 체계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안정감과 균형감을 획득하며 완전함을 상징하게 될지 모르나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물론 이러한 사각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 낸 기하학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사각에 입체감을 더한 육면체에도 역시 수평과 수직의 선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평과 수직의 선이 만나는 부분에는 모서리가 생긴다. 모서리는 면과 면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모서리는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서리는 두 면이 만나는 부분으로 읽힐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곳에 있다>에서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공간은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 만들어진 것으로 대개 비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기보다는 어떠한 사물이 자리하다 사라지고 난 후 비어 있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가는 있던 것이 없어지고 난 후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상황, 비어 있으나 사라진 것의 보이지 않는 흔적이 남아 있는 상황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가의 캔버스에 담겨 있는 공간이란 ‘비어 있는 사이’, ‘비어 있는 틈’이라는 공간(空間)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그림이 ‘비어 있음(空)’의 관념 그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비어 있음’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 작가가 그러한 관념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표현하는 데 치중했다면 이 그림들은 좀 더 추상의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가 응시했던 것은 결국 비어 있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없어지고 난 후 그것이 머물렀던 자리와 흔적이다.
있던 것이 없어진 자리 혹은 그 흔적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닿을 수 없는 것을 그림 안으로 들여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러한 공간을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미련이라면 그러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그것이 있었을 때를 추억하거나 그러한 때를 복원하려는 욕망에서 눈길을 거두고 있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작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그저 그 공간 자체이다. 이 역시 그곳에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있다’라는 말로밖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이 작가가 그 대상이 사물이든 공간이든 존재 그 자체 혹은 존재하는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숨이 깃든 사물>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숨이 깃든 사물>에서부터 <풍경, 결>을 거쳐 <그곳에 있다>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작가는 사물이나 세상의 일면만을 보게 되거나 표현하게 될까 염려하고 있고 그 때문에 ‘의도한 모호함’을 추구한다. 이는 이 작가가 세상이나 삶의 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다>에서 작가는 모호함을 포기하지 않되 그것을 직접적으로 의도하지는 않는다. 이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면이며 이 작가의 세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우리는 그것을 “깊어졌다”라고 명명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3. 단단한 색, 담담한 마음
이 작가의 세계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작품은 <놓아두다>이다. <놓아두다>에는 어떠한 고요함이 있다. 왼쪽 벽에 있는 두 선은 벽이 더 깊숙하게 들어가 보이게 하고, 수직과 수평의 선의 비율이 어느 정도 맞춰지며 균형감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지칭하는, 즉 ‘놓아둔’ 것은 캔버스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이 회색의 벽이 만들어 낸 공간은 고요함과 단정함, 담담함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간의 깊이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얻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색이라 볼 수 있다.
맨 얼굴의 캔버스에 초벌칠을 할 때 작가는 이 캔버스에 담길 내용과 어울리는 톤을 결정하고, 아마 오래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톤은 작가의 직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직관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색에 대해, 어떤 색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마음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그리고자 하는 사물이나 공간이 이미 작가의 몸과 마음을 통과하며 다른 것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많은 화가들이, 풍경화를 주로 그리는 이들까지도 자연의 외부 모습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화폭에 담기는 색채와 형태는 자연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보거나 느낀 새로운 색에 대해 명징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화가의 소임이 아닐 것이다. 화가는 그러한 색을 만들어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색은 관람객의 감성에 접속한다. 이 작가 또한 색을 만들고 만지는 사람이며, 화가의 이러한 특성이 이번 전시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다.
이 작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색을 만진다. 여기서 ‘만지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작가가 색의 물질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벽돌공이 벽돌을 쌓는 것처럼 이 작가는 견고하게 색에 색을 더한다. 이는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과 <숨이 깃든 사물>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숨이 깃든 사물>과 <그곳에 있다>의 작품들을 비교해 본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나 소재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주제나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전체적은 색조나 색면의 질감을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색이 변화해 온 방향은 이 작가의 정신 작용이 다른 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준다. 우선 2006년의 전시에서보다 이번 전시에서 색은 훨씬 더 두터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엷은 빛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면, 그렇게 견고하게 쌓인 빛은 어떤 느낌일까. 빛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탁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색도 그러하다. 캔버스 위에 색은 겹쳐진다. 색과 색 사이에는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간 흔적 위에 다시 색은 겹쳐진다. 그러므로 이 작품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색으로 겹쳐져 있는 만큼 그 사이 사이의 결에는 시간이 스며들어 두터운 질감을 형성한다. 이렇듯 <그곳에 있다>의 작품들이 지닌 색은 이전의 그것보다 밀도와 부피감이 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색의 밀도가 강화되면서 색은 물질적 견고함을 획득했고, 그러한 색은 더 깊은 공간을 만들고, 담담함이란 감정을 길어 올린다.
<그곳에 있다>는 이 작가의 지난 7여 년의 작업이 일단락되는 동시에 다음을 위한 변화가 조심스럽게 모색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벽이나 계단, 바닥을 그린 작품들이 이전까지의 작업들을 정리하고 있다면, 다음을 위한 변모를 예감하게 하는 것은 <열매>라는 작품이다. 이제까지 이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드물게 발견되는 형태는 ‘구’이다. 저것이 무슨 열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열매는 시간을 품고 있다. 계절을 보내며 열매는 여물고 그 안에는 새로운 씨앗을 품는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 작가가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숨이 깃든 사물>에서부터 <그곳에 있다>에 이르기까지 벽돌을 즐겨 다루었던 이 작가는 벽돌로 쌓인 담의 모양처럼 반복과 반복의 변주를 계속해 왔다. 앞서 말했듯 이 작가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면 하나로 이어지는 길 위에 세 번의 표지가 있었다. 이러한 결절 지점들은 말 그대로 눈에 띄는 자리에 위치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때로 표지들만을 눈여겨보느라 표지와 표지 사이를 잇는 길을 못 보고 지나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표지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작가가 자신이 탐구해 왔던 주제를 반복하며, 또 그 위에 변화를 거듭해 왔다는 것이다. 반복과 변화를 거듭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는 더디게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순간이 섬광처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 더디게 그렇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가의 작업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작가를 신뢰하게 되고 이 작가의 다음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작가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천천히 그렇지만 아주 오래 걸을 것이다.
이 은 미 LEE, EUNMI
b. 1965년
1992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2008 경희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전공 졸업
개인전
2013 그 곳에 있다... 갤러리 담, 코너갤러리
2012 The Portrait of Gray... 코너갤러리
2011 풍경,결... 사이아트갤러리
2006 숨이 깃든 사물... 관훈갤러리
2001 숲에서 잠들다... 갤러리룩스
1997 태양에서 온 편지... 관훈갤러리
1996 고요한 풍경...관훈갤러리, 무심갤러리
단체전
2013 Healing...유나이티드갤러리
2008 즐거운 우리집...대안공간 봄
개조심-새로운 가족주의의 모색...평화박물관
2007 FIRST전...고운미술관
2006 pre-open...경희대학교 경희미술관
2005 광복60-미군주둔60...문화일보갤러리
나만의 앨범...조흥갤러리
1999 회화속으로의 여행...공평아트센타
1995 젊은 청주 10인...무심갤러리
충북 청년 미술제...국립청주박물관
1994 서울 현대 미술제...문예진흥원 미술회관
대전 트리엔날레...한림갤러리
의식의 확산...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GUERRILLA...송산화랑
1993 한국청년미술제-서울에서의 만남전...공평아트센타
홀로서기...후인갤러리
전환된 공간-새롬...서경갤러리
1992~2000 집...관훈갤러리, 갤러리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