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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李沂(1848~1909)】 "국권 회복 위해 유교의 개혁을 주장한 우국지사"
1 개요
이기는 전라도 출신 시골 선비이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46세의 나이로 뒤늦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는 유교적 사상에서 출발하였지만 이를 묵수(墨守, 자신의 의견만을 고수하는 것)하지 않고 근본적 개혁을 도모한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였다. 그가 이렇게 유교 개혁을 주장한 이유는 유교가 국권의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간 외교와 을사오적 처단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가 의지한 것은 단군이었다.
2 전라도 출신 시골 선비
이기는 1848년 전라도 만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백증(伯曾)이며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 등의 호를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성리학에서부터 천문 지리까지 두루 통달하였지만 유형원(柳馨遠)에서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는 조선 후기 실학에 특히 밝았다. 저서로는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이기는 전라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전라도의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어려서 구례에 거주하는 선비인 왕석보(王錫輔)에게 배웠다. 젊은 시절에는 이정직(李定稷)·최보열(崔輔烈)·황현黃玹) 등과 같은 전라도 내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장년에 이르러서는 나인영(羅寅永, 나철)·오기호(吳基鎬) 등 전라도 출신의 후배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그는 장년에 이르러 서울에 올라와 활동하면서 교유망도 넓어졌다. 이건창(李建昌)과 김택영(金澤榮)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다. 김윤식(金允植)이 전라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을 때에는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다. 어윤중(魚允中)이나 박영효(朴泳孝)와 같은 개화파 정객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3 동학농민전쟁에 뛰어들다
이기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는 처음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 편에 서려 했다. 하지만 농민군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농민군과 맞서 싸웠다.
이기는 농민군이 봉기하자 곧바로 전봉준(全琫準)에게 달려가 ‘서울로 진격하여 간신들을 제거하고 임금을 받들어 국헌(國憲)을 일신할 것’을 제안하였다. 전봉준이 그의 뜻을 받아들이고 남원에 가서 김개남(金開南)과 합세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김개남은 만나주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는 간신히 도망쳐 구례로 돌아왔다.
이기는 구례에서 수백명의 군민을 이끌고 성을 방어 하였다. 당시 토포사(討捕使) 이두황(李斗璜)은 그가 한 고을의 추대를 받아 성을 지키고 있으니 특별히 벼슬을 내려 백성들을 이끌도록 하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농민전쟁 당시 정부 측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록한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도 그가 군대를 모아 성을 지키고 도적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이는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4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다
이기는 이렇게 농민전쟁에서 공을 세운 다음 서울에 올라와 관직에 진출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는 당시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탁지부대신 어윤중에게 토지제도의 결함을 논하며 개혁할 점을 지적한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제출했다. 이 제안은 채택되지 못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 어윤중이 실각한 것도 그의 제안이 채택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기는 1896년 3월 안동부관찰사로 임명된 이남규(李南珪)의 막료(幕僚)로 초빙되었다. 이남규가 그를 초빙한 것은 당시 그가 부임해야 할 안동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안동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전임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의병들에 의해 축출된 상태였다. 이남규는 이러한 행적 공백 상태를 수습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이기와 같은 유능한 참모가 필요하였다.
이기는 안동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조련하는 일을 맡았다. 그가 동학농민전쟁 당시 구례에서 군민을 모아서 성을 지켰던 경력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임무가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동부참서관으로 홍필주(洪弼周)가 임명되어 그와 손발을 맞추었다. 이때 맺어진 홍필주와의 인연은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대한제국은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였다. 이기는 이미 1895년에 「전제망언」을 통해 토지제도 개혁을 건의한 바 있으므로 이 사업의 적임자였다. 그는 1899년 양지아문의 양무위원(量務委員)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충청도 아산에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을 주관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총괄하던 사람이 바뀜에 따라 면직(免職)되고 말았다.
5 민족의 위기를 미리 감지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은 1910년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기는 이러한 대한제국의 운명을 일찌감치 예감하였다. 그리고 우국지사로서 경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1900년 8월 18일 중추원의장에게 제출한 헌의서(獻議書)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이기는 이 헌의서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분할하여 나누어 가지려고 하니 서둘러 대책을 수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민들도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하였다. 당시에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두 나라 사이의 타협 방안 가운데 하나로 한반도의 분할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기는 일본인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오는 것에 대해서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1902년에도 중추원 의장에게 헌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이 헌의서를 통해 일본인 이민을 통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처럼 우리 민족의 앞날에 대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 구례에 은거하고 있는 황현을 방문해서 나라가 위태로운데 한가롭게 시만 짓고 있다고 질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기감은 1904년에 폭발하였다.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라고 하는 일본인이 대한제국 정부에 이른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기는 윤병(尹秉)·홍필주·이범창(李範昌) 등과 함께 회의소를 설치하고 황무지개척권 강요의 부당성과 그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경향에서 모인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보안회(保安會) 운동으로 이어졌다.
6 실패로 끝난 민간 외교
1905년에 들어서면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면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이 열렸다. 이기는 이 강화회담에서 한국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보고 대표를 파견할 것을 외부대신에게 건의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기는 직접 미국에 건너가 회의를 참관하기 위해 여권을 신청하였다. 하지만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방해하는 바람에 이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차선책으로 일본에 건너가 외교활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기는 1905년 9월 나인영·오기호 등 전라도 출신 후배들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였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이토에게 한국을 병탄(倂呑)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책망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토는 이 서신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으로 건너가 을사늑약을 강행하였다.
이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실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다. 그는 일본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데다가 부친의 상까지 당하는 바람에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갔던 나인영·오기호 등도 이때 그와 함께 귀국하였다.
7 ‘도끼 하나로 낡은 것을 깨부수자’
이기는 일본에서의 외교활동에 실패하고 귀국한 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906년 4월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것과 동시에,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기는 대한자강회 이외에 서울에 올라온 전라도 출신 인사들을 모아 호남학회를 조직하였다. 호남학회도 활동 목표가 대한자강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남학회는 기관지로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였다. 그가 이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대부분의 기사를 그가 직접 집필하였다.
그가 『호남학보』를 통해 발표한 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도끼 하나로 낡은 것을 깨부순다고 하는 제목처럼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는 낡은 유교사상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 혁신을 통해 유교의 정신을 되살리자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8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다
이기는 애국계몽운동에만 만족하지 않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그는 1907년 1월 나인영·오기호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이름은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는 겉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단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을사오적 처단을 위한 단체였다.
이 단체가 만들어질 무렵 그의 나이는 이미 환갑에 가까웠으므로 을사오적 처단을 위한 행동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이 단체는 나인영·오기호 등 그의 전라도 출신 후배들이 주도하였다. 그는 행동에 직접 나서는 대신 자신회의 취지문을 작성하는 등 이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자신회는 1907년 3월 25일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을사오적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처단하지 못한 채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나인영이 먼저 자수하였으며 그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재판을 받은 결과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지만 채 다섯 달도 다 채우지 않고 11월 28일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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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군에게 의지하다
1909년 1월 15일 한성부 북촌 재동에 위치한 취운정에서 나인영을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모여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고 단군(檀君)을 교조(敎祖)로 하는 민족종교 즉 단군교의 부활을 선포하였다. 단군교는 포교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약 2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이기도 대종교의 부활을 선포하는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종교의 부활을 주도한 나인영의 열다섯 살 연상의 선배였다. 그와 나인영은 일본에 건너가 민간외교를 벌일 때부터 줄곧 행동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바 있다.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단군에게 돌아가 의지한 것이다.
이기는 대종교의 확산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종교가 부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가 서울의 어느 여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까운 벗이었던 황현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였으며, 그의 뜻을 이어받아 대종교를 부활시킨 나인영도 1916년 6월 구월산에서 순교(殉敎)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