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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말 (잠15:1-4절)
어떤 여자 집사님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고 목사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퍼렇게 멍이 들어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집사님이 남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물론 좋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남편이 당신을 때리기 직전에 어떤 말을 했나요.’ 대개 이런 경우에 대답은 거의 비슷합니다. 남편이 때리려고 하니까 화가 나서 ‘죽여라.’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남편은 참 착한 분이네요. 죽이라고 했는데 때리기만 했으니 착한 분 아닙니까.’ 그리고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물병을 하나 주면서 ‘이 병 속에 든 물이 기적을 일으켜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해결해 줄 것입니다.’
집사님이 어이가 없어서 ‘목사님, 이 물병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남편에게 가서 뿌리라는 겁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집에 가서 이 물을 입에 넣고 삼키지 말고 그냥 계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남편이 집사님을 때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것입니다.’
집사님은 즉시 깨달았습니다. 목사님이 나보고 ‘항상 입을 다물고 살라는 것이구나.’
우리 속담에 욕도 벌어서 먹고 매도 벌어서 맞는다고 했습니다. 또 ‘가루는 칠수록 고아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고 했습니다.
폭행만 폭력이 아니라 말의 폭행도 폭력입니다. 살인이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친 말 몇 마디가 곧 살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이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보통 사람이요, 친절한 사람에게 불친절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며, 불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마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 누구나 못합니까. 정말로 어려운 것은 불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원수사랑은 기초적인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원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도 원수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가장 쉽고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나도 사랑하겠다는 것,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사람은 간디입니다.
어느 날 간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길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면하였고 각기 제 길로 바쁘게 갔지만 간디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나는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 군요.’ 이 말 한 마디가 인도인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총칼에 눌려 실의와 절망과 가난과 질병에 고통당하는 인도인들에게 간디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랑의 말’에 힘을 얻어 무폭력,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을 외쳤습니다.
소련의 장수 학자 구리아닌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단명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사랑이 담긴 긍정적인 말은 희망을 낳습니다.
*잠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선한 말’은 유쾌한 말, 즐거운 말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사랑이 담긴 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건강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 건강을 지속적으로 보존시킵니다. 그러므로 유쾌한 말을 하여 영적, 육적으로 원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자의 삶과 우매자의 삶에 있어서 말의 사용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지혜자의 삶과 우매자의 삶이 언어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10장부터 계속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지혜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장이 바로 언어생활이며 이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규정짓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 없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그러므로 참 된 신자의 윤리적인 삶에 대해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70인 역은 ‘분노는 슬기로운 사람조차 미치게 하느니라.’라는 말씀을 이어서 추가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자기 자신은 물론 지혜로운 사람까지 미치게 한다고 합니다. 분노가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다른 분노를 낳으며....이렇게 격동하다보면 마지막에 터지고 맙니다.
이처럼 분노는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감당하지 못할 분노가 있습니다. 이 격분하는 분노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이것을 쉬게 해야 합니다. 분노를 잠재워야 합니다. 창은 솜으로 막지 창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분노를 쉬게 할 사람이 누구며, 이 격한 사람들의 분노를 누가 말릴 것입니까.
요즈음 뉴스를 보십시오. 난폭 운전이 비일비재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동차를 길에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길을 막으며 서로 치고 박고 싸웁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 싸우는 모양이 꼭 살인이 날 정도입니다.
왜 이래야 됩니까.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노하면 한 번 늙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크게 웃으면 암 세포도 죽고, 심장병을 일으키는 고지혈증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잠10: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10:11-14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이 시대는 말의 홍수 시대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말, 진실한 말은 적고 비난과 정죄, 냉소와 조롱의 말이 많습니다. 악인의 입술은 독을 머금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독은 거짓과 사악함, 참소를 말합니다.
악인의 입술은 패역하고 진실함이 없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모함합니다. 또 미련한 자의 입술은 말이 많고 지식이 없으므로 주위를 소란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모든 사람은 심판 날에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 기자도 제어할 수 없는 혀에 대해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는 쉬지 아니하는 악 즉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악인과 미련한 자의 말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고 허탄하고 무책임한 말을 내뱉는 것입니다. 이런 입술은 항상 실수와 허물과 패망을 일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인의 입술은 지혜가 있고 남을 교육하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여 생명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지혜자의 말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늘의 평화와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 입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는 겸손하고 정직하며 선한 말을 함으로써 분노로 가득 찬 자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며 노를 억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선하고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도록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의 맹자의 어머니는 가정교육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맹자가 어느 날 이웃에서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저들이 왜 돼지를 잡아요.’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하기를 ‘응, 너에게 주려고 잡는 거란다.’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들에게 농담을 한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곧 자기가 한 농담을 후회했습니다. 그녀는 즉시 상점에 가서 아들 몰래 돼지고기를 사다가 저녁에 구워 먹였습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날부터 무의미한 농담을 그쳤습니다.
녹은 모르는 사이에 쇠를 갉아 먹습니다. 우리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더러운 말이나 농담이나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진지한 것입니다. 무의식중에 또는 고의로 부끄러운 말이나 거짓말, 농담을 하는 경우에 이 같은 행동이나 말은 경건한 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수가 부잣집에 부탁을 받고 대문을 수리했습니다. 문짝을 떼고 문틀을 고치고 문빗장을 달고 문을 다시 달고 보니 이것 참 큰일이 났습니다. 문 안에 달아야 할 빗장이 문 밖에 달린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보고는 화가 잔뜩 나서 큰 소리로 하는 말이 ‘이 목수 양반 정신이 있나, 없나. 당신 눈을 달고 있는 거요.’
인정사정없이 대갈 일성합니다. 목수가 대답합니다. ‘글쎄요, 내가 눈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눈이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부자가 화가 더 나서 말합니다. ‘내가 왜 눈이 없단 말이요.’ 눈을 부라리고 목수를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릅니다.
목수도 할 말이 있습니다. ‘눈이 있다면 왜 나 같은 목수를 데리고 왔겠어요.’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이쪽에서 할 말이 있으면 저쪽도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울컥하고 소리를 지르면 저쪽은 더 할 말이 많습니다.
지혜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풉니다.
*잠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여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즐겁게 합니다. 지혜자는 복음을 증거하고 타인과 말할 때에 해야 될 말을 깊이 생각합니다.
*잠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또한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가르치며 진리와 지혜와 공의를 말합니다. 그는 선한 말로 듣는 자에게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되 담대하게 지식을 베푸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치료하는 말을 합니다.
*잠15:4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온량하다’라는 말은 ‘치료하다’ ‘건강하다’의 뜻으로 ‘온량한 혀’는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다시금 건강한 영적 생기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선한 말이 꿀송이 같이 마음에 달고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그로 인해 번뇌하게 되고 번거로워지지만 선한 말은 마음을 치료하여 즐겁게 하는 약이 되어 생명을 얻게 합니다. 지혜자의 말은 솟구쳐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잠18:4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또 은혜로운 말은 채소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32: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이런 말은 상처 입은 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치료하여 살리는 좋은 약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매자의 말은 노를 격동합니다.
*잠15:1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미련한 자는 말을 할 때 마음이 조급합니다.
*잠29:20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조급한 사람은 신중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미련한 자 보다 더 희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을 할 때 칼로 찌름같이 과격하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잠12:18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우매자의 말은 세상에 속한 무익한 내용들을 교만하고 강퍅하게 말함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폭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사람의 얼굴에 분노를 일으킵니다.
*잠25:23 폭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그래서 결국 우매자는 자기 입술로 입하여 매를 자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18:6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쏟습니다.
*잠15:2 미련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쏟는다’라는 이 말은 ‘용솟음치다.’의 뜻입니다. 미련한 자는 악의적인 말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상대를 가질지 않고 제멋대로 내뱉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입을 열 때마다 허망하고 망령된 것을 말하고 어리석고 어그러진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악한 말로 스스로 올무에 걸리게 되고 허물을 면하기 어렵게 됩니다.
*잠6: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성경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미련한 자는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잠15:4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우매자는 그 마음에 강포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 혀는 패려하고 잔해를 말하며 심한 폭언을 일삼게 되므로 타인의 마음에 번뇌와 상처를 남깁니다. 그의 입은 날카로운 삭도 같아서 독한 말로 상대방의 영혼에 아픔을 주며 그 마음에 피를 흘리게 합니다.*시52:2 네 혀가 심한 악을 행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교육 심리학자 블룸은 가정의 요건에 대하여 언어 환경과 물질 환경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물질적 환경이란 안락하고 좋은 의, 식, 주를 말합니다. 언어 환경이란 어떤 말을 주고,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중요한 것은 물론 언어 환경입니다.
어떤 말을 하며 어떤 말을 들으며 어떤 단어를 구사하느냐, 얼마나 친절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을 주고받고 사느냐 하는 것이 행복을 좌우합니다. 그것이 가정교육의 전부라고 합니다.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환경이 아니요, 언어 환경이 좋아야 좋은 환경입니다.
좋은 언어 환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고요함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거친 말이 오가고 아무리 소란해도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는 인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분명하고 믿음이 분명하고 사랑이 충만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 바로 그런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들 들면, 가령 박사 학위를 받은 유식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누가 ‘이 무식한 사람아.’ 한 마디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어도 그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자기는 많이 배웠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못 배운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말을 하면 생명을 걸고 싸우려고 덥빕니다.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가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정신 건강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신이 건강하고 그 영혼이 건강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자기 정체감이 충만할 때 어떤 말을 들어도, 어떤 것을 보아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분노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다짜고짜 일대일로 반응하는 반사작용을 일으킬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는 리액션 ‘reaction'으로 살고, 지혜로운 자는 리스판스 ’response'로 산다고 합니다. ‘리액션’이라는 말은 ‘반응’ ‘반작용’ 이라는 뜻이고, ‘리스판스’라는 말은 ‘응답’ ‘대답’ 이라는 뜻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상대방의 말에 즉각 반응을 하나, 지혜로운 자는 응답을 하되 좀 더 생각을 합니다. 분노한 자의 형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냉정을 찾고 화를 낸다고 같이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한 시간 후에는, 하루가 지나면, 일 년 후에는,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분노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그 순간에 문제는 해결됩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과로우면 나에게 화를 낼까. 내가 받아줄 줄 알고, 내가 해결해 줄줄 알고 화를 낸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노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엡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현대인이 언어의 풍요 속에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언어의 빈곤 속에 살고 있습니다. 로웰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말 여섯 마디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했다.’ 문제의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로, 당신이 잘했습니다.‘ 이것은 더 위대한 말입니다. 내가 잘못했고 당신이 잘했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 보셨습니까.
셋째로, ‘당신의 의견은 무엇입니까.’입니다. 내 주장을 철회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끝까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if you please' ‘가능하시다면’ 이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감사합니다.’입니다. 중요하고도 위대한 말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라는 말입니다. 모든 잘못과 싸움은 ‘너와 나’라고 할 때에 생깁니다. ‘우리’라고 하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해결의 길이 복잡한 것 같아도 결국은 언어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이 격동의 시대, 격분한 시대를 누가 평화롭게 할 것입니까. 이 충동적인 공기를 누가 잠재울 것입니까.
여호와의 눈은 어디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혀의 말을 모두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시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에 대해 보응하십니다.
*잠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이로 보건데 지혜자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구원을 얻어 생명 길에 이르며 결국은 영광을 기업으로 받게 되지만 미련한 자의 입술은 범죄하게 되고 그리 인해 심판을 받아 정죄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입술의 말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잠17:28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온유한 자, 유순한 말을 할 수 있는 자, 어떤 경우에도 유순함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 그리스도의 평화로 마음을 지키고 입을 다스리는 자, 그 사람이 이 시대를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선량한 말은 곧 생명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웃에게 새로운 힘과 소망을 주며 기쁨과 평화를 전달해 주고 마음껏 주의 복음을 외치는 선한 지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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