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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3주일설교 소유냐 삶이냐(마가복음12:18-27)
본문: 마가복음12:18-27
제목: 소유냐 삶이냐
오늘은 마가복음12:18-27의 말씀을 가지고 “소유냐 삶이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소유냐 삶이냐”
우리는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있습니다. 그만큼 살아온 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집이든 전세든 월세든 집이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에게 땅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되었든 아니든 농사를 짓는 땅이 있습니다. 또한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더 나가 내가 사는 마을이 있고, 떠나온 고향이 있고, 내가 사는 나라가 있습니다. 학력 난에 쓸 것이 많은 사람이 있고 적게 쓰거나 아예 쓸 것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살면서 부모나 형제로부터 배웠고 여기저기서 만난 선생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배웠기에 지금 내가 있고 나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화려한 것이 아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습니까? 똑 같은 것을 가졌다고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집이 있습니다. 돈이 있습니다. 학벌이 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그 집에 나 혼자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쉬기도 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그런 집도 있습니다.
그저 내 집으로 소유만 하는 사람과 집을 통해서 삶을 나누어지는 삶이 있는 그런 집이 있습니다.
소유하는 것과 삶을 사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소유가 아닌 삶이 아닐까요?
돈이 얼마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사는가 그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삶을 삽니까? 그래서 어떤 것을 세상에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인 성도입니다. 성도로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아주 훌륭한 말을 하고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교인이라고 합니다. 중직자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전도했다고 합니다.
요즘 논란이 되는 유명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것도 유명한 명망 있다고 하는 기독교인입니다. 간증도 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분명 그들은 참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잘났고, 공부도 많이 했고, 권력도 가졌고, 돈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에게 천국의 삶이 있습니까?
아니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니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갑니까? 세상을 보면서 혼란을 느낍니다.
도대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천당 불신지옥하는데 천당과 지옥은 어떤 차이일까? 우리가 천당에 있는 것인지 지옥에 있는 것인지 참 궁금합니다.
진정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그 속에 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런 궁금함을 오늘 말씀에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누가 가는 곳일까요?
무엇이 있는 곳일까요?
우리가 천국에 간다면 누구를 보게 될까요?
나는 정말 천국에 가게 될까요?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소유로 사는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에 이어서 이번에는 다른 질문자들이 예수님에게 옵니다.
주권의 문제를 가지고 다가왔던 그들과 달리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헤롯당원들처럼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부정하고 그런 그들과 같이 온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흙에서 난 것은 흙으로, 물에서 난 것은 바다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흙에서 난 자들이기에 죽으면 썩어지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기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땅의 것이 전부인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의 불합리성을 신명기 25:5-10절이 제시하는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여 그 형의 씨를 낳아야 한다”는 법을 가지고 질문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식”은 “씨”와 동일시됨으로써 아들을 지시합니다.
이 법은 이스라엘 여인으로 하여금 이교도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과부 보호가 그 하나의 목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남자의 이름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존속시키려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계승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우리나라도 농경사회에서는 그랬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 있어서 가부장적 남성 우월 사상은 아주 엄격하고도 뚜렷하였습니다.
예컨대, 결혼 후 10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면(그 이유가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다는 전제하에) 남편은 그 아내와 이혼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남자 아이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사내와 계집이 없으면 세계가 존재할 수 없으나 사내자식을 두는 이는 복되지만 딸자식만 두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랍비적 가르침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같은 문화적 유산 속에서 하나의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어 부활의 비합리성을 주장합니다.
곧,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모두 “씨”가 없이 한 여자와 결혼했다가 죽었다, 후에 부활한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는 문제입니다.
그 까닭은 “일곱 사람이 그 여자를 아내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3b)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내가 되는 것은 남성의 소유가 됨”이라는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면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주요 관심은 부활 자체의 타당성, 가능성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계승이나 소유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와 누리는 권력에 중점을 두는 자들입니다.
현세의 삶에서 향유하던 것이 끝장나는 죽음 이후의 삶이 만약에 있다면 그 세계에서는 어떻게 그 소유가 계속될 것인지를 관심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는 없기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 사상이 얼마나 어리석고 웃기는 이야기인지 증명하는 이야기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이런 사두개파의 질문 앞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꼬집어 말합니다.
이 예수의 답변은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여 아주 강력한 부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철저히 인간적인 합리성이나 계산에 의존한 기존 체계만 인정하는 불신앙에 서 있음을 폭로합니다.
다시 말해 사두개파 사람들은 어리석은 차원의 사람이고 너무 신앙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두개파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꼬집고 난 후 예수는 부활의 상태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곧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5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답이 부활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세와의 연속성의 빛에서 부활을 거부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의 삶이란 결코 기존 세계의 연속이 아니라 불연속의 세계임을 밝힙니다.
기존 세계와 단절하고 전혀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 부활이라는 말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15:42)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고전15:53)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음식을 먹지도” “결혼도 하지 않으며” “나이도 먹지 않는”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이해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구원 조직과 그것이 가져 올 힘의 재구성의 빛에서 조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 신앙이란 곧 소유와 권력으로 살려고 하던 특권층의 가부장적 세계를 허물어 버리는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혁명입니다. 부활은 변혁입니다. 세상의 가치에서 하늘의 가치로 높이는 것입니다.
부활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소유물”로 여겨지던 여자와, 그 여성들을 사용하고 소유하던 남자 사이의 사회 계층적 구별이 깡그리 무효화 되는 세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소유의 관계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사건”으로 주어질 뿐임을 명백하게 제시해 줍니다.
존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저 옛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사건화시켰던 그 하나님의 현재적 존재와 연결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 내용을 들어 부활을 거부하는 데 반하여 예수님은 모세에게 제시했던 하나님의 존재로 부활의 실체를 밝힙니다.
소유와 기존적 특권의 연장을 바라는 차원의 사람들은 부활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현세적 안정과 특권에만 집착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기존적 세계를 넘어서 개시될 해방적 사건을 주도하고 자유를 주는 존재의 차원에서 부활을 설명합니다.
그 해방적 사건은 모세에게 위탁된 것이었지만 그 위탁의 주체인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과 야곱에게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계시해 온 삶의 사건의 주역임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죽어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일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살아 있는 삶 곧 부활의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신앙적인 지식이 신앙은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지식이 부활은 아닙니다. 부활이 명사와 같은 쓰임을 갖고 있지만, 동사처럼 작동할 때만 부활이 부활의 삶이 됩니다. 부활은 행동 되어 질 때 그때 진정한 부활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죽음과 부활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것이 부활입입니다. 나는 죽고 그래서 나는 없고 그래야 신앙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 속에서 살아나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부활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에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소유는 자랑이 될 수 없고 또한 내 세울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이 땅에 것으로 신앙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신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숫자로 셀 수 있는 어떤 것이 신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었다고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몇 년 다녔다고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었으니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봉사를 하고 전도를 몇 명하고 교회를 세웠으니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숫자로 셀 수 있고 보여 지는 어떤 것으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경력이 아닙니다. 신앙은 또한 업적도 아닙니다. 신앙은 또한 자랑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간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냥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안에 살아 있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거창하게 말하는 어떤 사람들의 행동을 우리는 부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앞에 왔던 사두개인들이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부활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전부이며 이 세상에 자신들이 나타나고 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없으며 그렇기에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사랑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사랑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며 세워주어야 할 대상이며 섬김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내려놓고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인 것도 내려놓고 사셨습니다. 오직 사랑하며 섬기는 자로 사셨습니다.
요한은 그런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1:14)
오직 예수님께 보인 것은 영광이었습니다.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께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이 비추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습이 잘나고 아름다웠던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눈으로는 다시 말해 예수님이 가지신 것으로는 정말 볼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으로는 부활의 삶 곧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생활입니까?
신앙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드러난 그 어떤 경력이나 그 어떤 업적이나 그 어떤 숫자나 그 어떤 나의 자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소유입니다. 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썩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자랑일지 몰라도 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천국까지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그것을 위해서 살고 결국 천국의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지 않고 그 나라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죽는다고 그 나라를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어리숙할까요? 세상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애쓰며 힘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눈에 보여 지는 그 어떤 것입니까?
내 귀를 기쁘게 하는 그 어떤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그 어떤 것입니까?
지금까지 애서 쌓아온 경력이나 공력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부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고 그 나라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삶입니다.
어떤 삶입니까?
예수를 믿어 나타나는 삶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입니다.
은혜와 진리의 삶입니다.
자유의 삶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삶입니다.
이런 삶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이며
이런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아 살게 됩니다.
그런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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