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일정으로 강화군의 교동도에 있는 '화개정원'과 '화개산전망대', '대룡시장'을 찾았다.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로 연결된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왕족들의 유배지였으며, 특히 '연산군 유배지'로 유명하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259m의 '화개산'(華蓋山)으로, 이는 산정의 형태가 '솥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화개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교동대교가 개통된 후 관광자원 개발요구도가 높아지면서 교동도의 대표 산인 화개산 일대에 연산군 유배지를 포함한 새로운 관광지 '화개정원'과 '화개산전망대'가 2023.5.1 정식 개원하였다.
오늘의 여행지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본 섬이다. 인천 본토와 강화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 황해도 연안군과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북쪽에 있으므로 교동대교 입구에 있는 군부대 근무초소에서 인적사항(성명, 생년월일, 연락처, 차량번호)을 확인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물길이 험해서 탈출이 어렵고, 한양과 가까우며, 감시하기가 쉬워서 왕족들의 유배지로 각광받았던 곳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유배되어 사망했고, 광해군도 제주도로 이배되기 전 여기서 잠시 지냈으며, 그 외에도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화완옹주,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등이 여기에 유배되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2014.7.1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자동차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과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점 때문에 외부와 오랜 시간 단절되었는데,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최근에는 핫한 곳으로 소문이 나면서 강화도 여행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이번 여행코스는 '1일차'에 교동도 '화개정원'과 '화개산전망대', '대룡시장' 코스가 주 여행지였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아라뱃길트레킹'을 먼저 한 다음 일행들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교동도 여행을 하였고, '2일차'는 '전등사'와 강화읍내에 있는 '조양방직 카페'를 다녀 왔다.
(2일차) 전등사
'전등사'는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사적 130호) 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 지어진 이 사찰은 고려 충렬왕 때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한 데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다. 사적 1점, 보물 6점, 시 문화재 14점 등 많은 문화재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정족산사고, 가궐 터, 정족진지, 의병 전투지 등이 있는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한 유서깊은 곳이다. 전설의 나부상, 은행나무, 오래된 느티나무, 주엽나무, 엄나무, 왕소사나무, 수백년 수령의 단풍나무, 노송 군락지 등 다양한 수목이 사찰과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전등사 '남문주차장'에 주차하고, 소나무 숲을 옆으로 지나 전등사 입구를 향한다. 남문주차장 외 '동문주차장'이 있는데, 입구부터 전등사까지 긴 구간 전체를 보며 걷고자 한다면 남문주차장 쪽에서 입장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남문으로 입장하여 전등사를 보면서 약 500m 구간의 동문까지 다녀와도 괜찮은 코스 선택이다.
강화 삼랑성의 종해루(남문 방면)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한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전등사는 몇번 방문한 곳이기에, 오늘은 전등사로 곧장 가지않고 '종해루'를 통과하여 반시계방향(입장 후 우측편)으로 성곽 안쪽의 '성돌이길'을 둘러본 후 마지막 코스로 전등사를 둘러 보기로 했다.
종해루를 지나 '성돌이길'(성곽길)을 걷기 시작한다.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소나무들의 수형이 멋있다.
성돌이길을 조금 오르니 성곽 밖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옥'들이 보인다. 사찰의 외부 시설인지? 사찰 외 시설인지? 궁금하였지만 도통 알길이 없다. 다음에는 꼭 알아 보리라.
'언덕배기'(달맞이고개)에 오르니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가운데, 조망이 과히 일품이다.
삼랑성에서 '온수리시장' 방향으로 나가는 조그만 '출입문'이 보인다.
강화 장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인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분산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을 묘향산사고로 옮겼다가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 1년(1660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하고 옛 현판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다시 달았다.
전등사 뒷쪽 산에서 내려가며 보이는 '정족산사고' 건물 담장과 '성원보각' 건물 지붕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전등사 본관 건물을 뒷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강화의병 전투지 - 전등사
전등사는 1908.10.30~31 '강화의병'이 일본군 13연대 소속 70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한 곳이다. 강화의병은 1907.8.9 강화진위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해산 군인들이 '이능권'의 지휘 아래 항거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전등사 본관 앞마당과 느티나무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세워진 진종사(현 전등사)가 조선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15년 재건하였는데, 그때 풍치목으로 심은 나무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대웅전 앞에서 전등사를 찾는 이들의 쉼터로 주변의 큰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대조루'는 전등사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 시(詩)'에서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단풍나무
전등사 대조루는 1749년(영조 25) 주지스님 초윤이 재건하였다. 그 때 대조루 동편에 심은 나무로 추정되는 이 '단풍나무'는 수령이 약 280여 년된 청단풍으로 한 밑동에서 여러 가지가 나와 수세가 왕성하다.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며 전등사를 찾는 이들에게 시간(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보배같은 나무이다.
전등사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 지어진 이 사찰을 고려 충렬왕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한 데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678년(숙종 4년)에는 조정의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이 있는 고찰이다.
전등사 내 전통찻집 죽림다원
차를 마시는 시간에는 서두름을 멀리하게 된다. 특히 사찰 안에서 음미하는 차는 더욱 그렇다. 전등사에 있는 '죽림다원'은 천년고찰 전등사와 맞닿아 있는 공간이다.
조양방직 카페
강화도 '조양방직'은 일본주택 건축양식에 한옥의 미를 가미한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강화 갑부였던 홍재묵·재용 형제가 '1933년'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하였는데, 이는 1936년 서울의 '경성방직'보다 3년이 빠르다. 조양방직은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했고, 강화가 섬유산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13년 TV드라마 '백년의 유산'에서 조양방직 사무실이 '옛날국수집'으로 나오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조양방직의 '옛 모습' 사진이다.
도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현재의 '조양방직 카페' 정문 모습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입장하여야 한다. 전면으로 보이는 통로는 '출구'이다. 입구와 출구 사이에는 어디서 철거된 것인지 모르지만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놓여(세워)져 있다. 아래 사진은 입구쪽 모습이다. 중국인도 많이 찾는 곳인지 처음 만났을 때의 인사인 '니하오'(안녕)라고 적혀 있다.
(좌) 2층 야외 카페에 오르는 계단이다. (우) 조양방직의 전성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금고 건물이다. 원래는 사무동 안에 있었으나 1970년대 화재로 인해 지금의 금고만이 남아있다. 공장이 한창일 때는 일꾼이 돈을 지게로 져서 은행까지 날랐다고 전해진다. 현금과 금괴가 가득했던 좋은 기억을 되새기며, 부자되는 기를 받기위해 꼭 들러야 하는 곳이다.
공구실을 지나 마당(실외)에 들어서면 각종 장비, 공구, 비품들로 인테리어를 한 자연스런 공간들이 많이 있다. 곳곳의 실내외에 다양한 볼거리들이 가득한데, 사진으로 모두를 표현하기에 제한됨이 아쉬울 뿐이다.
조양방직 카페 내부
공장 건물을 개조한 '공장형 카페'로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래서 조양방직 카페는 해질녘에 방문하면 석양의 고즈넉함과 어두워진 후 돋보이는 여러 조명들의 화려한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무엇보다 여러 형태로 마련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자리마다의 색다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규모가 큰 카페라 여러 곳의 '출입문'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의 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곳 카페를 찾으면서 '소확행을 누려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2층 야외카페에서 아래(1층 마당)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