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태산은 산동성(山東省)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별로 높지도 크지도 않은 산이지만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 가까이에 있어 공자가 자주 찾았기에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서 그 어느 산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옛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5악(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 중앙의 숭산崇山)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산으로 역대 황제들의 봉선(封禪) 의식이 행해 지던 곳이다. 또 중국역사에서 변방 지역에 해당하는 복건성(福建省)의 무이산(武夷山)은 주자(朱子) 이전에는 거론하는 사람조차 별로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산인데 주자가 이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삼삼곡(三三曲)과 육육봉(六六峯)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후로 태산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게 된 산이다. 특히 주자에 대한 숭모가 중국보다도 더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에게 무이산은 종교적 성지나 다름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여 실제로 무이산을 가본 조선시대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는 문인화의 중요한 화제(話題) 가운데 하나로서 선비들의 방을 장식하였다. 중국에서는 태산과 무이산이 그러하듯이 청량산 역시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의하여 새롭게 태어난 산이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갈라지는 산악지대인 경상북도 북부 일원은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서 명산이 많은 곳이다. 청량산과 이웃한 풍기군에는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毗盧峯), 연화봉(蓮花峯), 국망봉(國望峯)이 잇달아 흘립(屹立)하여 웅장함을 뽑내고 있으며 경치가 아름답기로 하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청송군의 주왕산(周王山)이 도립공원인 청량산보다는 한 등급 윗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와 그의 급문제자(及門弟子)들, 또는 퇴계학파의 후계자들이 다른 산을 제쳐놓고 청량산만을 줄기차게 탐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태산이 유학의 성지이고 무이산이 주자학의 성지이듯이 청량산이 퇴계학의 성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청량산은 퇴계에 의하여 새롭게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조선의 무이산이 되었고 청량산을 찾는 것은 단순한 산행(山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퇴계의 자취를 찾고 퇴계와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구도(求道)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 이후의 청량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퇴계와 청량산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퇴계가 청량산을 두고 지은 한 편의 시조이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을 아느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헌사하랴 못미들손 도화(桃花)ㅣ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가 하노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계는 성리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크게 도학파적 성향의 문인과 사장파적 성향의 문인으로 양대별할 수 있는데 퇴계는 도학파 성향 문인의 한 전범이 되다시피한 시인이었다. 이 짧은 한 편의 시조가 우리의 주목에 값하는 것은 퇴계가 일생동안 가장 존경했던 두 사람의 영향이 이 시조속에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퇴계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주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퇴계가 도연명을 이백이나 두보보다도 더 좋아하고 흠모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아니한 사실이다. 퇴계의 학문적 지향점이 주자라고 한다면 퇴계의 문학적 지향점은 누가 뭐라고 해도 도연명이다. 성품에 맞지 않는 벼슬길을 버리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전원에 묻혀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도연명이야말로 기질적으로도 퇴계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시인이었을 것이다. 이 시조에서 퇴계와 주자를 연결해주는 키워드는 육육봉(六六峯)이라는 표현이다. 원래 육육봉은 중국 무이산의 36봉을 말하는 것인데 이 시조에서는 청량산 12봉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육육봉이란 실상 무이산처럼 36봉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여야 하지만 청량산은 규모가 작고 높은 봉우리가 많지 않아서 원래 이름이 있는 봉우리는 여섯 봉뿐이었다. 그런데 주세붕이 두 봉우리 이름을 그대로 쓰고 네 봉우리는 이름을 고치는 한편 새로 여섯 봉우리에 이름을 붙여서 12봉이라 했던 것이다. 퇴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12봉을 육육봉이라 부름으로써 무이산 육육봉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청량산 12봉은 퇴계 이후로 관습적으로 청량산 육육봉이라 불리우게 된 것이다. 물론 청량산 12봉을 명명한 사람은 주세붕이지 퇴계가 아니다. 주세붕이 청량산은 찾았을 때 안내를 맡은 승려들이 일러주는 봉우리 명칭이 보살봉, 의상봉 같이 불교적 명칭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주세붕은 자기 나름대로 일부 고치기도 하고 새로 짓기도 하여 청량산을 12봉으로 나누어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임란 이후 청량산에서 불교의 자취는 점차 사라지고 퇴계학파의 유학자들이 청량산을 주로 찾게됨으로써 청량산 봉우리 명칭은 주세붕이 명명한 12봉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런 만큼 주세붕의 봉우리 이름짓기는 청량산을 불가의 산에서 유가의 산으로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세붕의 명명작업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여산을 염두해 둔 것이지 무이산을 염두해 두고 지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문공(朱文公)은 여산(廬山)에서 기이하고 뛰어난 곳을 대하면 곧 이름을 지었으니 (김종직처럼) 근거가 없다하여 이름을 짓지 아니하는 일은 없었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몇 백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없어서 참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자처럼 훌륭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름을 짓게 된다면 이름 얻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내가 잠시 이름을 지어 놓고 뒤에 현명한 사람이 나타나서 고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이 인용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와 같이 주세붕은 주자가 여산을 명명한 전례에 따라 청량산 12봉을 명명하였다. 그런데 퇴계는 주세붕의 명명한 12봉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이를 청량산 육육봉이라 부름으로써 무이산 육육봉과 연결시켜 청량산을 조선의 무이산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이 시조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이 같은 의도는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더욱 구체화되는데 퇴계의 후손인 이세택(李世澤) 등이 중심이 되어 “지금 청량산과 연관된 글이나 사적이 여러 기록 가운데 여기저기서 보이는 것을 상고하여 그 분류나 편차를 양항숙(楊恒叔)이 지은 <무이지(武夷志)>의 범례에 의거하여 <청량지>를 편찬(1771년) 한다고 하였고, 정조때에는 왕명으로 <도산구곡도(陶山九曲圖)>를 그려 받친 사실로 미루어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뜬 도산구곡이 또 누군가에 의하여 이름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도산 구곡을 도산서원이 있는 예안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는 아홉구비를 일컫는다) 또한 1901년 역시 퇴계 후손인 이만여(李晩輿)가 역시 <무이지>를 모방하여 <오가산지(吾家山誌)>를 편찬하였고 1963년 감홍기(金弘基)에 의하여 다시 한 번 <청량지(淸凉誌)>가 편찬되어 청량산은 세 차례나 산지(山誌)가 편찬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실제로 1771년 <청량지>를 편찬할 때 이세택 이외에도 일곱사람이 (李世源, 李級, 洪錫範, 李世聞, 李重定, 李綸, 金朝翼) 함께 참여하여 청량산과 관계된 기록을 광범하게 수집하였으나 16세기 이전의 기록으로는 겨우 <동문선>에서 천인(天因)의 시 한편을 찾아 내는데 그쳤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금강산에 버금갈 정도로 가장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산으로 바뀌게 되는데 예컨대 세 권의 청량산지 가운데서 가장 늦게 편찬된 김홍기의 <청량지>만 보더라도 모두 19편의 기문과 195수의 제영이 수록되어 있다.(여기서도 누락된 것이 많은 만큼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퇴계에 의하여 청량산이 조선의 무이산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청량산 육육봉’이라는 표현속에 함축되어 있는 퇴계의 의도를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시조 속에 등장하는 도화와 어주자(어부)의 관계는 퇴계(작중화자)가 청량산을 바로 도연명이 그린 이상향인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도연명은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도화원시(桃花源詩)>를 통하여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500여 년을 살아온 한 산 속 마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 마을 사람들은 BC 210년경 진(秦) 나라가 망하는 혼란기에 도화원에 들어온 뒤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가 AD 280년 진(晋) 나라 무제(武帝)의 태강(太康) 연간에 한 어부에 의하여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어부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수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 도화원을 발견하였으므로 복숭아꽃은 도화원에 외부사람을 끌어들이는 빌미가 되고 만 것이다. 곧 퇴계는 청량산 육육봉 속에서 갈매기를 벗하여 지내며 세속을 등지고 살고 싶은데 믿을 수 없는 도화가 어부를 유인하여 육육봉을 세상에 알릴까 두려운 것이다. 퇴계의 은거의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시조는 퇴계가 일생동안 왜 그렇게 청량산을 자주 찾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청량산에서 퇴계는 주자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에서 읊고 있는 벽수단산(碧水丹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이산은 홍색의 사암(砂巖)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산(丹山)이라 불리어지고 있는데 청량산 또한 퇴계가 자주 찾았던 남쪽 사면은 붉은 색의 이암(泥岩)과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무이산 육육봉의 모습을 청량산에서 찾아볼 수 있었기에 청량산 12봉을 굳이 청량산 육육봉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속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고픈 무릉도원으로 청량산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에서 어부에게 청량산 육육봉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청량산 육육봉은 퇴계에게 무이산과 무릉도원이 한데 결합된 이상적 공간이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은 오가산(吾家山)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퇴계가 한시로 지은 청량산 제영들은 청량산을 찾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화답시, 차운시가 숫하게 지어졌으나 이 <청량산가>는 그것이 국문시가라는 이유로 퇴계의 작품이면서도 퇴계 작품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읊는 시와 노래하는 시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노래하는 시는 한시가 아닌 국문시가로 지어져야 하기 때문에 도산십이곡을 짓는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퇴계의 후계자들은 퇴계의 모든 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유독 국문시가만은 본받으려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퇴계의 후계자들의 국문시가에 대한 인식 자체가 퇴계보다 훨씬 뒤져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박종의 <청량산가>는 작품으로서의 수준을 따지기 이전에 이런 노래가 지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 질 수가 있는 것이다. 박종(朴琮:1735~1793)은 1780년 청량산을 답사하고 일기형식의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을 남겼는데 당시 그는 영해(寧海)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박종은 퇴계보다 백년이나 늦게 태어나서 선생을 모시고 이 산을 찾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이 산속의 봉우리하나, 바위 하나, 계곡 물 하나, 돌 하나도 어찌 선생께서 유력(遊歷)하시고 애완(愛玩)하시던 것이 아니겠는가(此山之中 凡一峯一巖一水一石 何莫非先生之所遊歷所愛玩)”라고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동행한 박군이 퇴계의 <청량산가>를 노래부르는 것을 듣고 자신도 이에 화답하여 노래 한 편을 지었던 것이다.
청량산 육육봉아 퇴계선생 너와가치 노시더니 청산은 만고청(萬古靑)이로다마는 우리선생 어대 가신고 아마도 선생의 덕은 너와가치 맛차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