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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퇴계학파의 분석
이장희 추천 0 조회 46 14.08.30 22: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퇴계학파의 분석 낙서장

2007/04/25 10:29

http://blog.naver.com/kumho1983/120037168153

退溪學派의 分析과 敎育的 意味*1)



李 東 基(영남대 학교교육연구소)


 

 

< 목차 >

 

 

 

 

 

 

 

 

 

 

 

   Ⅰ. 문제 제기                           Ⅲ. 퇴계학파의 교육적 의미

   Ⅱ. 퇴계학파의 분석                        1. 심학적 인간관

     1. ≪陶山及門諸賢錄≫의 분석             2. 실천지향적인 학문관

     2. 대표적 문인의 師承關係             Ⅳ. 맺음말

 



Ⅰ. 문제 제기

  

  퇴계학파는 조선사회의 핵심세력으로서 유학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으며, 재야학자들로서 사림정신(士林精神)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퇴계와 그의 제자들은 서로 진리와 인간 속에 만남으로써 민족사에 하나의 거대한 정신산맥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퇴계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그 이후 정신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나침반 역할을 하였다. 특히 퇴계학파는 조선 중기 이후의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퇴계학파의 학문적 사유구조는 민족문화의 산실이 되었으며 전통철학과 정신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퇴계학파의 정치사회적․교육문화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퇴계학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생애와 학문, 정치사상과 철학사상, 심성론과 문학세계를 다루었다1). 이런 연구경향 때문에 퇴계학파의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는 등한시되었고,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교육학적인 입장에서 퇴계학파의 교육사상을 고찰한 논문은 정순목 교수가 유일하다. 정순목 교수는 퇴계학파 중에서 한강의 교학사상을 연구하였다2). 때문에 퇴계학파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하여 교육학적인 입장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3년동안 퇴계학파 문인 중에서 15인을 선정하여 해마다 5명을 중심으로 학문론, 수양론, 교육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퇴계학파의 교육사상을 탐구하기 위한 시론에 불과하다. 즉 퇴계학파의 교육사상을 논의하기 전에 퇴계학파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퇴계학파의 학문적 특징과 교육적 의미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여기에 이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 논문에서 고찰하려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산급문제현록≫을 중심으로 퇴계학파를 분석하고, 대표적인 문인의 사승관계를 고찰한다. 예컨대, 퇴계 문인의 거주지․성씨(본관)․관직․師生形式․학문적 연원 관계 등을 분석한다.

  둘째, 퇴계학파의 교육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명한다. 즉 퇴계학파를 분석함으로써 퇴계학파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인간관 및 학문관을 통해 퇴계학파의 교육적 의미를 추론한다.



Ⅱ. 퇴계학파의 분석


      1. ≪陶山及門諸賢錄≫의 분석

  

  전통사회에서 학파를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은 대체로 두 가지로 논의할 수 있다. 하나는 사우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학문적 특징의 공유이다. 우리는 퇴계학파3)를 논의하기 위해서 퇴계 이후의 사우관계와 학문적 특징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즉 퇴계학파의 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일차적으로 퇴계문인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퇴계학파의 문인들이 주장했고 계승하고자 했던 학문적 성격을 밝혀야만 한다.

  한편, 전통적인 교육의 형식으로서 스승과 제자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이다. 직접 급문(及門)하여 배움을 청한 것이 대표적인 형식이지만, 다만 서한으로 문목(問目)을 하였거나 사후에까지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스승으로 모시는 사숙(私淑)의 형식도 있다. 이러한 사생(師生)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퇴계 문인록을 처음으로 작성한 사람은 權斗經(1654-1726)이다. 그는 100여명의 문인록을 작성하여 ≪溪門諸子錄≫이라 이름하였다.4) 그 후 퇴계의 6대손인 李守淵(1693-1748)이 60여명을 추가하였고, 이를 이름하여 ≪도산급문제현록≫이라 하였다. 다시 李守恒(1695-1768)이 10여명을 추가하고, 선생의 언행록과 문집 가운데서 선생의 가르침, 왕복 서신, 그리고 문인들의 만(挽), 제(祭), 소(疏) 등을 첨가하였다. 퇴계의 9대 손인 李野淳(1755-1831)이 다시 수십 명을 추가함으로써 260여명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도산급문제현록≫은 5권 2책 혹은 5권 4책으로 간행되었다.5)

  ≪도산급문제현록≫의 내용은 먼저 범례, 목록, 퇴계의 <自銘>, 奇大升의 <後敍>, 趙穆의 <言行總錄>을 수록하였으며, 이어서 1권에서 5권까지 모두 309명의 문인에 대한 성명, 자, 호 본관, 거주지, 생몰년(生沒年), 퇴계와의 관계, 관력(官歷)을 기록하였다. 또한 퇴계와의 사제 관계를 나타내는 書, 詩, 挽, 祭, 錄을 제시하였다.6)

  퇴계학파 중에는 관료로서 진출한 인물들이 많은데, 대제학을 지낸 문인이 10명이고, 정승을 지낸 문인이 11명이며, 시호를 받은 문인은 37명이다.7) 이들은 아래의 표와 같다.

  

〔표-1〕퇴계문인 중 대제학(10인, 취임순)

朴淳 李珥 李山海 柳成龍 李陽元 洪聖民 尹根壽 沈喜壽 柳根 李好閔


〔표-2〕퇴계문인 중 相臣(11인)

朴  淳(領) 盧守信(領) 鄭志衍(右) 鄭惟吉(左) 李山海(領)

鄭  澈(左) 柳成龍(領) 尹斗壽(領) 鄭  琢(左) 沈喜壽(左)

    金命元(右)


〔표-3〕퇴계문인 중 시호를 받은 사람(37인, 기록순)

盧守信(文懿公) 柳希春(文節公) 朴  淳(文忠公) 金富弼(文純公) 具思孟(文懿公)

具鳳齡(文端公) 鄭志衍(文憲公) 鄭  琢(貞簡公) 朴光前(文康公) 奇大升(文憲公)

鄭  澈(文淸公) 成  渾(文簡公) 李  珥(文成公) 尹根壽(文貞公) 李山海(文忠公)

許  曄(文簡公) 金明元(文翼公) 金誠一(文忠公) 鄭崑壽(文翼公) 李誠中(鄭簡公)

金  玏(敏節公) 金宇顒(文貞公) 洪可臣(文莊公) 柳成龍(文忠公) 禹性傳(文康公)

洪言愼(榮襄公) 李敬中(文敬公) 鄭  逑(文穆公) 曺好益(文簡公) 金悌甲(文肅公)

金  睟(昭懿公) 沈喜壽(文貞公) 柳  根(文靖公) 尹卓然(憲敏公) 李好閔(文僖公)

李陽元(文憲公) 尹斗壽(文靖公)


  ≪도산급문제현록≫에 기록된 퇴계 문인 전체 309명 중에서 관직을 받은 문인은 150명으로 48%를 차지하였다. 정1일품의 관직을 받은 인물이 8명, 종1품의 관직을 받은 인물이 7명이었다. 그리고 정2품과 종2품의 관직을 받은 인물이 8명과 13명으로 나타났으며, 정3품과 종3품의 관직을 받은 인물이 32명과 3명이었다.

  관직을 받은 퇴계 문인 150명 중에서 당상관인 3품 이상의 관직을 받은 문인은 71명으로 47%를 차지하였다. 이런 사실로 보아 퇴계 문인은 상당히 높은 관직에 제수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퇴계학파의 학문적 성장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 문인의 관직에 대한 분석은 아래의 표와 같다.


〔표-4〕퇴계 문인의 관직 분석

구  분

문인수

문인수 소계

正 一 品

8

8

從 一 品

7

15

正 二 品

8

23

從 二 品

13

36

正 三 品

32

88

從 三 品

3

71

三品 以下

79

150

합  계

150

  다음으로 퇴계 문인의 성씨별 문인수를 분석하였다. 퇴계 문인의 성씨별 문인수를 분석해 보면 在地士族의 영향력과 향촌사회의 학문적 기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산급문제현록≫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역시 퇴계가문인 진성 이씨 가문이다. 이는 퇴계의 子姪들이 문인록에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李德弘 가문인 영천 이씨, 權好文 가문인 안동 권씨, 琴蘭秀 가문인 봉화금씨, 金士元 가문인 안동 김씨, 金誠一 가문인 의성 김씨 등의 순이다. 그러나 전체 성씨수가 120여 종류 이상이므로 퇴계 문하에는 성씨가 고루 분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8) 퇴계 문인의 성씨별 문인수의 분석은 아래의 표와 같다.


〔표-5〕퇴계문인의 성씨별 문인수

성(본관)

문인수

성씨수

문인수 소계

이(진성)

30

1

30

이(영천)

14

1

14

권(안동)

13

1

13

금(봉화)

11

1

11

김(안동)

10

1

10

김(의성)

9

1

9

김(광산)

7

1

7

윤(행평) 정(청주) 이(전주) 박(함양) 홍(남양)

5

5

25

박(밀양) 구(능주) 이(연안) 조(창녕)

4

4

16

김(광주) 변(밀양) 류(풍산) 남(의령) 배(흥해)

박(반남) 김(순천) 김(경주) 허(김해) 허(양천)

3

10

30

(너무 많은 관계로 생략함)

2

22

44

(          ″            )

1

72

72

본관을 기록하지 않은 경우

28

 

28

 

120

309


  그리고 퇴계 문인의 거주지역을 분석해 보았다. 거주지역을 분석함으로써 퇴계학의 지역적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급문제현록≫을 분석한 결과, 퇴계 문인은 예안 56명, 안동, 49명, 영주 12명, 예천 10명으로 예안과 안동의 주변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배출되었다. 이들 지역에서 전체 문인 309명 중에서 127명이배출되어 전체의 41%를 차지한다. 이는 지리적 여건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서울 지역에서 거주한 문인이 예안 다음으로 49명이나 되었다. 이는 퇴계가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인물들이 퇴계 문하에 출입하였음 알 수 있다. 퇴계 문인의 거주지별 분석에 의하면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산청․함안․창원 등의 경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고, 소수이지만 강원․호남․호서 지방에까지 분포되어 있다.9) 이러한 분포는 퇴계의 학문적 명성과 위상이 전국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 문인의 거주지별 문인수는 아래의 표와 같다.


〔표-6〕퇴계문인의 거주지별 문인수

거 주 지

문인수

지역수

문인수 소계

예안

56

1

56

서울

49

1

49

안동

46

1

46

영주

12

1

12

예천

10

1

10

성주

6

1

6

선산․영천

5

2

10

풍기

4

1

4

영해․의성․해남․현풍․밀양

3

5

15

파주․호남․용궁․대구․충주

2

5

10

강릉․서울→안동․고령․고양․광주․광주․군위․기계․보성․봉화․사천․산음․산청․상주․순천․순흥․신령․아산․안덕․안동→예천․안산․안의․양근․용궁→안동․용인․원주․의령․장흥․창원․창평․청송․청주․칠원․함안․함창․호서․화순

1

37

37

거주 지역을 기록하지 않은 경우

54

 

54

 

56

309


  다음으로 퇴계 문인의 사제관계를 분석하였다. 사제관계의 형태는 퇴계와 문인간의 학문적 유대 관계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도산급문제현록≫에는 사제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들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수업, 수학, 유문, 등문, 종학, 출입, 서질 등이다. 이러한 용어를 몇 개의 범주로 유목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선행 연구의 결과를 그대로 활용하고자 한다.10) 선행 연구 결과에 따르면, A유형이 전체 문인 309명 중에서 157명으로 나타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B유형은 49명으로 16%를 차지하였고, 형태를 기록하지 않은 경우도 77명으로 25%를 차지하였다. 퇴계 문인의 사제관계를 형태별로 나타내면 아래의 표와 같다.


〔표-7〕퇴계문인의 사제관계 형태별 문인수

유형

사제관계의 형태

문인수

비율(%)

A

수업, 수학, 유문, 등문, 입문, 취문, 지견, 종학, 사사

157

50.8

B

배알, 왕래, 출입, 논변, 질의, 강질, 서질, 왕복서한

49

15.9

C

기타

26

8.4

D

형태를 기록하지 않은 경우

77

24.9

 

309

100



      2. 대표적 문인의 師承關係11)


    1) 학봉문파의 學脈

  퇴계 문하의 인물들은 조선사회에서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사림정신의 根源地가 되었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퇴계 제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柳成龍․趙穆․金誠一은 함께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하고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領袖로 삼는다.12)


  퇴계의 제자 중에서 이 세 사람을 영수로 기록한 점으로 보아 이들이 학행이나 학문 및 경세에 있어 출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퇴계 제자 중에서 學峯 金誠一(1538-1593)은 차지하는 비중과 위치가 두드러졌다. 학봉은 퇴계학파의 계승과 전개과정에서 보면 嫡統으로 인정되었고, 특히 퇴계의 예학과 의리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민족적 위기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학봉문파는 퇴계학파를 적통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남학맥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학봉문파는 “퇴계학파의 本幹이요 中樞라고” 평가한다.13)

  학봉의 학통은 敬堂 張興孝(1564-1633)를 거쳐서 외손인 葛庵 李玄逸(1672-1704)에게로 이어졌으며, 이현일의 학통은 아들 密庵 李裁(1657-1730)에게 전해졌고, 이재의 학통은 외손인 大山 李象靖(1710-1781)에게 전해졌다.

  이상정의 학통은 損齋 南漢朝(1744-1810)에게 전수되어 定齋 柳致明(1777-1861)에게로 전해졌다. 유치명의 학통은 西山 金興洛(1827-1899)과 拓菴 金道和(1825-1912), 寒洲 李震相에게로 이어져 나아갔다. 김흥락의 학통은 省齋 權相翊(1863-1934)과 秀山 金秉宗(1871-1931)에게로 이어졌며, 권상익의 학통은 春樊 權命燮(1885-1940)에게로 전해졌다. 또한 김도화의 학통은 東山 柳寅植(1865-1928)에게로 전해졌다. 그리고 이진상의 학통은 아들 韓溪 李承熙(1847-1916)와 俛宇 郭鐘錫(1846-1919)에게로 전수되었고, 곽종석의 학통은 晦峯 河謙鎭(1870-1946), 省窩 李寅梓(1870-1929), 重齋 金榥(1896-1978)에게로 이어졌다.

  이제까지 논의한 학봉문파의 사승관계를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

 김성일 󰠏󰠏 장흥효 󰠏󰠇󰠏 이현일 󰠏󰠇󰠏 이  재 󰠏󰠇󰠏 이상정 󰠏󰠇󰠏 남한조 󰠏󰠏 유치명 󰠏

                   󰠌󰠏 이휘일  󰠉󰠏 김성택  󰠉󰠏 이광정  󰠉󰠏 유도원            

                              󰠉󰠏 권두경  󰠉󰠏 김한조  󰠉󰠏 유장원             

                              󰠌󰠏 권두기  󰠉󰠏 권정택  󰠉󰠏 남장희            

                                         󰠉󰠏 김낙행  󰠉󰠏 최주진            

                                         󰠉󰠏 김익명  󰠉󰠏 이종수

                                         󰠌󰠏 김  굉  󰠌󰠏 김종덕

  󰠏󰠇󰠏 김흥락 󰠏󰠇󰠏 권상익 󰠏󰠏 권명섭

   󰠉󰠏 권연하  󰠌󰠏 김병종            

   󰠉󰠏 이만징              

   󰠉󰠏 김도화 󰠏󰠏 유인식․김용희․송기식․정창조․김인수․홍의흠

   󰠉󰠏 유필영 

   󰠌󰠏 이진상 󰠏󰠇󰠏 곽종석

              󰠉󰠏 이승희

              󰠉󰠏 이정모

              󰠉󰠏 윤주하

              󰠉󰠏 김찬우

              󰠉󰠏 장영석

              󰠉󰠏 이두훈

              󰠌󰠏 허  훈


    2) 한강문파의 學脈

  寒岡 鄭逑(1543-1620)은 퇴계와 남명 같은 홍유석덕(鴻儒碩德)을 한꺼번에 스승으로 모실수 있었던 행복한 학인(學人)이었다. 한강은 두 스승의 장점을 고르게 물려 받아 敬과 義를 조화롭게 협지(夾持) 할 수 있었다.

  퇴계는 한강을 만나 보고 나서 “자질이 영민하며 학문에 뜻을 두고 선을 좋아하니, 한훤당 후손의 여풍이 어찌 없겠는가”14) 라고 하여 한강을 칭찬하였다. 한강의 학문적 연원은 다음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아아, 사현(四賢)이 나와서 정학이 밝아졌도다. 이를 절충하여 집성한 분은 오직 퇴계 선생이시다. 한강 선생은 직접 보고 깨달아 홀로 전함을 받았으니, 주자를 모범으로 삼고 퇴계를 지남(指南)으로 삼았다.15)


  한강은 퇴계의 학문을 지남으로 삼은 결과 다수의 문인 가운데에서 학문이 가장 순수하고 심원한 경지에 이르렀다. 한강이 38세 때에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벼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선조가 한강을 직접 인견하고 퇴계와 남명의 인품과 학문에 대하여 물었다. 한강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퇴계는 덕기가 원만하고 두터우며 행실이 독실하고 공부는 매우 높으며 계급이 분명하며 배움이 쉽지만 깊이가 있다. 남명은 기국이 반듯하고 재기가 호매하며 배움에 초연하지만 자득하고 우뚝 서서 홀로 행하며 배움이 어렵지만 긴요하다.16)


  스승에 대한 평가를 조심스럽게 하였지만, 두 스승을 곡진하게 존숭하는 모습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한강의 인품에 대한 평가는 사관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鄭球로 昌寧縣監을 삼았다. 球는 예학에 힘써서 몸단속을 심히 엄하게 하며 의론이 英發하고 淸名이 날로 드러났다. 여러 번 벼슬을 시켜도 나서지 아니하더니 이번에 상경하여 拜命하였다. 上이 불러보시고 배운 것을 물어보시되 天語가 온순하시니 듣는 사람이 감격하였다. 球가 이에 부임하였다.17)


  퇴계선생과 흡사한 점이 많은 한강은 학문에 전심하여 예학과 심경에 통달하였다. 그래서 한강은 많은 명유들을 배출하였으며, 한강문파는 번성하였다.

  퇴계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을 모방하여 한강의 문인들을 기록한 책이 있다. 이름하여 ≪檜淵及門諸賢錄≫이다. 이 급문록에는 한강의 문인에 관한 성씨․자․호․본관․생몰년․과거․官歷․사제 관계 등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문인은 총 342명이다.

  한강문파의 학통은 尾叟 許穆(1595-1682), 旅軒 張顯光(1554-1637), 樂齋 徐思遠(1550-1615), 石潭 李潤雨(1569-1634)에게로 전해졌다. 허목의 학통은 星湖 李瀷(1681-1763)에게 전수되었으며, 이익의 학통은 다시 順菴 안정복(1712-1791)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안정복의 학통은 下廬 黃德吉(1750-1827)에게 전해졌으며, 황덕길의 학통은 性齋 許傳(1797-1886)에게 이어졌고, 허전의 학통은 后山 許愈(1835-1904)에게 이어졌다.

  이제까지 논의한 한강문파의 사승관계를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

 정  구 󰠏󰠇󰠏 허  목  󰠏󰠇󰠏 이  익 󰠏󰠏 안정복 󰠏󰠏 황덕길 󰠏󰠏 허전 󰠏󰠇󰠏 허  유

         󰠉󰠏 장현광   󰠌󰠏 이태춘                              󰠉󰠏 노상직

         󰠉󰠏 이윤우                                          󰠉󰠏 조병규

         󰠌󰠏 서사원                                          󰠉󰠏 노근수

                                                            󰠉󰠏 강병주

                                                            󰠌󰠏 이수형


    3) 서애문파의 學脈

  西厓 柳成龍(1542-1607)은 학봉과 월천, 그리고 한강 등과 더불어 영남지역의 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그는 퇴계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사회가 위급해지자 신하로서 조선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 충성을 다한 사대부였다. 서애는 관료로서 성장하였으며, 성리학에 깊은 학식을 겸비하자 많은 사림들이 그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다. 서애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출입한 수 많은 제자들에게 根本과 體用을 중시하는 학문을 강조하였다.


제왕의 학문은 경륜을 귀하게 여기는데 반드시 本末을 함께 거행하고 體用을 두루 갖춥니다. 안으로는 심신과 성정의 미세함으로부터 바깥으로는 정사를 베풀기까지 차례를 따르고 조목마다 통하여 고운것과 거친 것, 큰 것과 작은 것을 어느 하나도 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큰 것으로 말하면 천지 사방을 경륜하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추호같이 세밀한 일에도 힘을 씁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서 본체에 밝고 쓰임에 적절한 학문이 되는 것이니, 본체는 있으나 쓰임은 없는 문제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18)


  ≪서애전서≫의 문현록에 등재된 문인수는 118인이었다. 이들 문인에 의해 서애의 학문과 사상은 전수되었다.

  서애의 학통은 愚伏 鄭經世(1563-1633)․아들 修巖 柳袗(1582-1635)․蒼石 李埈(1560-1635)에게로 이어졌으며, 정경세의 학통은 無忝齋 鄭道應(1618-1667)과 서애의 손자 拙齋 柳元之(1598-1678)에게 전해졌다. 정도응의 학통은 다시 南野 朴孫慶(1713-1782)에게 전해졌으며, 박손경의 학통은 凝窩 李源祚(1792-1872)․立齋 鄭宗魯(1738-1816)․江皐 柳尋春(1762-1834)에게로 전해졌다.

  그리고 이원조의 학통은 寒洲 李震相(1818-1886)에게로 이어졌으며, 이진상의 학통은 俛宇 郭鐘錫(1846-1919)․后山 許愈(1835-1904)․韓溪 李承熙(1847-1916)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곽종석의 학통은 重齋 金榥(1896-1978)․心山 金昌淑(1879-1962)․성헌 이병희(1859-1938)에게 전수되었다.

  이제까지 논의한 서애문파의 사승관계를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

 유성룡 󰠏󰠇󰠏 정경세 󰠏󰠇󰠏 정도응 󰠏󰠏 박손경 󰠏󰠇󰠏 이원조 󰠏󰠇󰠏 이진상 󰠏󰠇󰠏 곽종석 󰠏󰠇󰠏 김  황

         󰠉󰠏 이  준  󰠉󰠏 유원지            󰠉󰠏 이규진  󰠌󰠏 박시묵  󰠉󰠏 허  유  󰠉󰠏 김창숙

         󰠉󰠏 유  진  󰠉󰠏 김종일            󰠉󰠏 허  강             󰠉󰠏 이승희  󰠌󰠏 이병희

         󰠌󰠏 이  전  󰠌󰠏 전익회            󰠌󰠏 문정유             󰠌󰠏 장석영 



Ⅲ. 퇴계학파의 교육적 의미


      1. 심학적인 인간관


  유학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 역시 인간 문제에 충실하였다. 퇴계는 인간을 上智와 下愚로 분류하였으나, 그 분류가 고정불변의 차별성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인간은 훌륭한 기질을 타고났다할지라도 자칫하면 下愚의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고, 下愚로 태어났더라도 얼마든지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학문을 통해 도덕적 자아의 내면적 계발과 각성을 중시하였다.


학문의 길은 기질을 잘 타고나거나 잘못 타고나는 것에 관계없이 오직 천리를 분명히 아느냐 모르느냐와 천리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을 따름이다.19)


  이는 상지와 하우를 막론하고 학문을 통하여 천리를 분명히 파악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밝혔다. 결국 퇴계는 학문을 통해 도덕적 자아의 확립과 완성을 도모하였다.

  퇴계의 심학적 인간관은 퇴계 문인이었던 月川 趙穆(1524-1606)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발전되었다. 월천은 퇴계 선생과 ≪심경≫에 관하여 토론한 왕복 편지를 <心經稟質>로 묶었다. 이 논변서신을 묶음으로써 월천은 도덕적 자아를 자각하고, 구도의 정신과 경건의 자세를 견지하는 퇴계 학맥의 학문방법론에 더욱 심취되었다. 월천의 <심경품질>에서 발견되는 특징 중의 하나는 朱子의 심성론을 철저히 추종하였다는 점이다.


≪심경≫에는 註文을 적용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만약 주문을 적용한다면 마땅히 주자집주나 그의 장구의 이론을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돈이) 이 <부주>를 인용한 것은 대부분 주자 본래의 주가 아닙니다. 간혹 주자의 주를 이용하였더라도 너무 간략히 줄였거나 註外의 문자를 택하였고, 인용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심한 경우 주자를 칭한 것에 자기 이론을 넣어 문자를 변환했거나 없는 것을 보태지 않으면 있는 것을 없앴으니, 篁墩 선생은 여기서 이미 의심받게 되었습니다.20)


  즉 월천은 ≪심경≫에 부주하려면 주자의 원주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퇴계보다도 월천이 심경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더 주자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실천지향적인 학문관


  유학은 修己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즉 개인적인 수양을 통해 理想政治를 실현하려는 것이 유학이다. 그렇다 보니 유학은 사색과 실천을 중요시한다. ≪논어≫에서 언급하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도 역시 학문의 宗旨를 知行互進으로 말한 것이다.

  퇴계학파의 실천지향적인 학문관은 학봉과 서애에 의해 발전되었다. 학봉은 현실주의적 입장에 따라 실천행동을 중시하였다. 학봉의 학문사상도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인 면보다는 일상적인 윤리실천의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그 중에서도 학봉은 성리학적 수양과 실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禮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 ≪학봉집≫에 수록된 문목의 대부분도 퇴계에게 질의한 喪祭禮에 관한 것이다. 즉 학봉은 퇴계에게 6차례의 걸쳐 문목을 올렸는데, 32개 조목 모두가 喪葬祭禮였다.21) 예시로 하나의 문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부형(父兄)들이 자제들의 글공부를 중요시하여 가묘(家廟)에 제사 지낼 때 산방(山房)에 있거나 혹은 근처에 있을 경우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니, 마음에 몹시 온편치 못합니다.


[답] 글공부를 중요시하여 제사에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은 '효제(孝悌)를 행하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한다'는 뜻으로 헤아려 보면 매우 온당치 못한일이네. 마땅히 부형에게 잘 말하여 허락받는 것이 첫째이겠으나, 만약 청했는데도 부형이 들어 주지 않으면 역시 어른의 명령에 따라야지, 경솔히 생각하여 곧바로 자기 생각대로 행해서는 안 될 듯하네.


  그리고 서애는 퇴계의 문하에서 성리학에 대한 공부를 통해 퇴계 학맥을 이어갔다. 특히 서애는 도학적 이론과 경세적 실천을 포괄하는 학자로 성장한다. 이 점은 퇴계의 학풍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 준다. 퇴계의 학풍은 성리설의 정밀함과 수양론의 진심함에서는 탁월하지만, 현실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서애는 조선조의 국난기의 격동 속에서도 외교와 민생 등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식견과 지략으로 방책을 제시하고 활로를 개척하였다.

  서애는 언어와 문자를 통한 경전 중심의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학문의 발전을 모색했었다. 즉 서애는 사색과 실천을 통해 지식을 체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애의 학문관은 그의 지행설에 잘 나타나 있다.


옛사람의 이른바 知는 眞知이다. (......) 오늘날 언어와 문자의 끝이나 주워 모아 性을 논하고 理를 논하면서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만 심신에는 대략적으로도 관계가 없는 것은 모두가 덕을 버리는 것이니, 공자의 이른바 佞이라는 것이다.22)


  따라서 서애는 의리 혹은 도리가 심신에 확고해야만 근본적인 덕을 체험하고 체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애가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도록 한것은, 퇴계가 서애에게 답한 편지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때와 어느 장소에서든 자신의 힘을 헤아려 노력을 들이고 항상 義理로써 물주고 재배하듯이 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면, 연평의 이른바 “도리가 항상 心目 속에 있다”고 하는 말처럼 자기 몸에서 직접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생각건대 仁을 행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지, 남과는 무관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근본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비록 매일 스승과 제자가 상종하더라도 역시 끝내는 無益으로 돌아갈 뿐이다.23)


  퇴계가 편지를 통해 서애에게 의리로써 지행의 근본을 실천하라는 충고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충고는 서애가 실천지향적인 학문을 존숭하도록 하였다.

  퇴계학파는 이기의 문제보다는 실천을 중요시하였고, 심신에서의 체험과 체득을 통한 眞知를 강조하였다. 이는 유학이 공허한 관념적인 문제를 궁리하기 보다는 실천적 지행의 문제를 천착하도록 관심의 지향성을 변화하게 하였다. 결국 실천지향적인 학풍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의병활동으로 발전되었으며, 忠義精神과 大義精神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으로 귀결되였다.



Ⅳ. 맺 음 말


  조선조 사회에서 영남지역은 유학정신의 産室이며 유학문화의 精髓를 간직한 고장이었다. 때문에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유학은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유학의 시대사적 흐름에서 보면, 영남의 비중은 “泰山喬嶽”과 같았다. 예컨대, 퇴계를 頂點으로 그 이후 유학의 발전은 가히 ‘春秋戰國’을 방불케 하여 서애, 학봉, 한강, 갈암, 대산, 한주 등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대학자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퇴계의 사상과 학문은 지속적으로 전수되었고, 그 전수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退溪學團이 형성되었다. 퇴계학단은 전통사회에서 학파를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었던 사우관계의 형성과 학문적 특징의 공유를 겸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퇴계학단의 많은 문인은 관료로서 성장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재야사림의 泰斗로 추앙받았다. 예컨대, 학봉 김성일․월천 조목․서애 유성룡․한강 정구 등과 같은 학자는 도학적 이론 뿐만 아니라 경세적 실천의 방면에서도 현저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한편, 퇴계학파의 문인 중에는 당상관 이상의 관직을 받은 인물이 71명이었고, 대제학과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도 10명과 11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퇴계학파의 학문적 성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퇴계 문인의 거주지는 안동 지역 뿐만 아니라 서울 및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으므로, 퇴계의 학문적 명성과 위상이 전국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퇴계 문인의 師生形式은 대부분 及門과 私淑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수업, 수학, 유문, 입문, 배알, 출입, 논변, 질의, 왕복서한 등이었다.

  퇴계학파는 성리학의 본질인 인간문제와 실천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퇴계가 후학들에게 敎學하고자 하였던 핵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퇴계학파는 심학적인 인간관을 토대로 도덕적인 자아의 계발과 각성을 중시하는 학문관을 가졌다. 또한 퇴계학파는 실천지향적인 학문관에 입각하여 윤리적인 실천행동을 강조하여 수양과 실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禮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끝으로 이 논문에서 다루지 못했던 몇 가지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예컨대, 퇴계학파의 대표적 문파에 대한 정밀하고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퇴계학파의 학맥지도를 완성하는 문제이다. 또한 보다 많은 퇴계 문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 퇴계학파의 교육적 의미를 예학적인 의리관, 위기지학의 학풍, 淳厚한 鄕風과 典雅한 文範의 振作이라는 측면에서 탐구하는 문제 등이다.


참고문헌


≪도산급문제현록≫

≪밀암집≫

≪서애전서≫

≪월천집≫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천명도설≫

≪학봉집≫

≪한강전서≫ 

≪회연급문제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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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2002), ≪영남지방의 퇴계학맥도≫, 서울 : 예문서원

한국사상사연구회(1996), ≪조선유학의 학파들≫, 서울 : 예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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