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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대의 「평창 인문지리 책」의 해부
후세백작 20.12.21 04:53
지난해에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에대한 필자의 감상의 이해와 그 문젯점을 발표하기 이전에 필자로서는 동 책의 저자에 대해 역사소명의 증언 채록분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지만 이러한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서 정역의 평창역사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본 글을 제시합니다.
일전에 저자에게 구두로 동 책은 한두곳 애러가 아닌 책 전체에 관한 논술의 문제와 또한 각 역사 개체의 서술이 오류도 있고 왜곡된 바도 많아서 이에 해결점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묵묵부답이라 동 책에대한 필자의 이해를 분석적으로 작성하여 저자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낸바 정확히 읽었다면 무엇인가 대책이 있었어야 하는데, 동 책에 출간에 앞서 교정시 어디선가 자기 원고도 아닌 다른 글이 실렸다고 남의 핑게만 잡지말고 앞으로 동 책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책이 출간되자 저자 본인의 자랑으로는 길위의 역사란 책의 공동저자인 김진백씨는 동 책은 옵셋의 칼라사진에 평창에서는 제일가는 역사서라고 칭찬했다지만 필자는 다른 이해입니다. 이 책을 대하는 뭇사람들은 동 책이 역사가 아니라 자칭 미화하는 동화책같은 점을 못 느끼는 까막눈 입니까?? 또한 먼 후일에도 동 책을 대하는 사람들은 동 책의 저자를 지탄할 것이기에 이렇게 두고두고 비판과 웃슴거리를 자아낼 것 아닌가 합니다.
지금이라도 동 책에 오류를 수정하여 잡으면 되는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기에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에 대하여 오류및 왜곡 그리고 논술서술의 부족분등 여러사안을 조금 지적함으로 이는 게시성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 당사자에게 3자적 객관적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함이다.
「평창의 인문지리」책의 구성과 서술의 문젯점
◆ 동 책의 오류를 앞으로 수정판이라하여 과연 글씨 몇 자 수정할 사항의 책이 아니고 전체적인 맥락과 각 단원의 기술등 논술의 주 테마부터 다시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들면 동책 33쪽에 "권두문"의 단원이 있고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48쪽), "평창군 임진왜란 항전사 1"(68쪽)이 있다. 그리고 평창의 독립운동 항쟁사 2"(70쪽)이 있다. 여기서 임진왜란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연결해 보는 견지인데 임진왜란은 독립운동이 아니기에 독립항전사 2와는 별개이며 또한 독립항전사 들어가는 말에는 동학란만 거론된바 독학난은 독립운동이 아니다. 너무나 심한 왜곡이다.
또한 "동학농민군 전적지 고찰3"(75쪽)과 "동비토론(78쪽)'은 평창의 동학운동의하나의 택스트에서 분류됨이다. 물론 저자는 위 1,2,3항목이 평창의 민중 항거내지는 봉기란 점으로 엮으려 했는바 그러면 1,2,3항을 평창의 항쟁의 기상이나 이러한 내용으로 기전체, 기사 본말체 형식으로 분류했어야 합리성을 가진 편찬으로 이해가 빠르다.
그러기에 동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도 상당히 어지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 각 단원의 기술에서 일반적으로 목적하는 주제어가 있고 연구 고찰시에 정확함을 기하기위해 인용부는 각주로 표시함이 통상 관례로 답사나 증언 또한 는 본장의 역사서술에는 부대적 사항으로 각주로 표시하여야 한는데 동 책에서는 이러한 점에서 일관성이 없고 특히 출전이란 항에서는 "길위의 역사"란 책이 17번이나 출전한다. 어느곳에서는 출처라 하고 또한 출전이라 하는데 "이효석의 문학세계 2"에서는 김남극이 출전으로 되어있다.
출처, 출전, 참고자료의 각기 다른 의미는무엇인지 알 수없다.
◆ 또한, 길 위의 역사 증보판에는 분명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표절성 글이 하나있다. 그것은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 출전을 길위의 역사 증보판으로 한 "봉산리 금동"에 관한 글이다.
저자는 언젠가 봉산리 깄다왔다 하며 금동이야기를 하기에 필자는 본인의 책장에서 "평창 50년"이란 책을 꺼내 아주 주었다. 이래서 기억하는 봉산동의 금동이야기는 이후 엄기종님으로부터 본인의 글을 표절햇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바 아마 10여년전 평창군 홈피에 "평창시공 의장 엄기종"으로 올린 글이 기억이 난다.
막동산성 주장과 태종의 강무행사등 아직 엄기종님의 까페에 기록되어 있는것으로 기억하는바 이 점에 상호 주장의 이해가 있어야 좋을듯 하다.
또한 동책의 중리농악 단원에 "평창50년" 책에서 농악을 인용한바 기실 봉산리 농악은 그 구성원이 3~4명이라 정상적인 농악 구성요소를 못갖추고 있어 인용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라 인용은 허상인 느낌이다.
◆ 그리고 동책 평창의 인문지리 책은 균형적 서술이 부족하다.
앞장의 어운해의 제영시에서 물론 조선시대의 기록에 이 시가 제영시는 아니지만 동 시는 그런대로 평창의 이미지를 살릴 수 있지만 주에 어운해에 대한 소개가 이 책의 성격상 보면 불필요할듯 장황하게 길다. 그러면서 뒷장들의 평창역사는 조사까지 빠져서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문제를 가지는바 역사는 시어처럼 쓰면 않 된다. 정확한 문장이 요구된다.
이러한 정확한 문장의 또 하나의 예로서 동 책에 조선시대의 고지도 오면지도를 삽입하였다. 그러면서 평창군 오면지도라 표기하였다. 동 책에서는 오면지도의 일부분만 발췌하였는바 처음 보는 사람은 이 자체가 오면지도로 인식할 수 있기에 (부분도)라는 태그를 달아야 역사를 정확히 서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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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인문지리」 책의 각 단원별 이해
1) 동헌
동 책의 서술에서 동헌의 일반적인 설명보다 제영시가 평창적인 이미지로 주제어로 부각되어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제영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시어로 그 설명에 어운해나 권람의 인용각주 해설은 일반인이 읽기엔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있는바 일반적인 이해의 책으로는 부적절한듯 보인다. 또한 인용부가 본문보다 더 장황하여 배꼽이 더 커지는 현상으로 동 책에 중리농악, 에맥, 유인석, 유행록의 권섭등의 인용부의 긴 설명과 권두문의 짧은 본문등과 베교해보면 문장적 언밸럴스를 가지고 있다.
2) 평창향교 편에서도 용어해설은 각주로 나타내야 하며 소재지와 문화재 지정은 개설의 장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각주란 책의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 주제의 글 이외의 다른 글들은 모조리 각주로 처리해야 보편적이다
3) 송학루
소나무가 많아 울창하고 학이 많이 날아든다라는 송학루 설명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해이다. 이 점에 아주 어려운 해설로 누구도 모르는 알려진바 없는 논리는 송학루에 올라 노산의 시루목쪽을 바라보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다. 가령 명리한 지관이 본다면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우리의 지명등에는 가장 많은 부분이 형상적 특이점이나 풍수상의 형상이기에 얘기가 송학이란 용어는 소나무가 많아 송학이라 하였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 . 풍수상으로 본 용어일 수도 있다.
가령 매화란 지명은 임진란때 매에 교신에 화를 입었다 하지만 다시금 서술되는 지명에서는 매화낙지형에서 매화가 유래되엇다 한다. 이렇게 모든 지명중 가장 많은 이름은 풍수적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본인은 남산의 송학루에 송학이란 어린시절 송정의 푸른 숲에 휜 학이 앉은 모습이 눈에 뛰게 휜 색으로 드러나 보여서 송학루라 이름지었다 하여도 무방하지만 대부분의 지명에 가장 많은 사례로서는 지형적 특이성이나 역사적 사건보다 가장 많은 점은 풍수적 용어라는 점이다. 송학이란 지명은 풍수에 의한다고도 기고한 바가 있다..
4) 평창객사
● 본문 서술에서 증언자만 있고 그 증언 내용은 없는데, 김규남, 김채남의 증언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주소는 목적외의 2차적인 사항이기에 역사적 기록보다는 각주를 통하여 이해의 기록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 또한 중리에 느릅나무집 오동나무가 있었다 하는데 이것은 본 주제인 평창객사와는 상관없는 증언이다. 만약 상관있다면 그 내용을 설명해야 한다. 필자는 이 설명을 이미 구두로 여러번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 중리 정춘택 선생 집쯤에 느릅니무가 있었다는 지형적 설명으로 이 나무는 중리 한복판에 우뚝하지만 객사가 아디인지 아직 정론도 없는데, 평창객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저자는 증언이라면 관련성이 없거나 논리에 맞지 않아 오류임이 드러나도 무조건 기록화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은 다음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정원대. 김진백의 "길위에 역사"란 책을 동 책의 원문란에다 출전이라 하며 무려 17번 정도 수록되었다. 그런데 길 위의 역사란 책은 평창도서관에도 비취되지 않은 일상의 평범한 역사서라고 볼 수도 없다.
동 책은 출전등 각주에 해당되는 여러가지로 본문에 그대로 서술하는 좀 독특한 방식일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출전이란 의미는 인용부를 쓰고 이러한 인용이 어느 책에 있다고 설명하는 내용을 출전이라 한다
그런데 동 책은 본문에다 출전이라는 섹션을 정하고 "길위에 역사"라고만 적고 그 인용내용은 무엇인지 전혀 없어 알 수없으며 이렇게 한권에 17번 되풀이되면 그 책을 선전함에 도가 넘어 독자들은 허황된 서술이라고 느끼지 못할까?? 그러기에 이런 인용은 책의 이미지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분명한 것은 인용내용이 직시되고 각주에서 <출전> "길위의 역사"책 몇 페이지가 작성되어야 한다.
● 해설에 내용에서 김채남 집이 증축했는데 개인집이 증축이 되는 것이 본 책에 왜 실렸는지 알 수 없다. 그 집터가 평창객사로 알려지지만 증축한 집은 객사 건물은 아니다. 자리의 터는 동일하나 옛 객사건물에 김채남이 살았다고 한다면 객사건물이 증축되었다고 역사 기록할 수 있으나 본 건물은 현대적 양철지붕 건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 건물의 개인집 증축이 역사서에 기록되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동 챡 평창의 인문지리는 역사서로 역사의 장을 서술함에 무슨 연고로 김채남 집이 증축했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어야 한다.
5)권두문
● 인물이란 섹션애서 권두문이 개별적으로 인물이란 장을 마련하여 왜 이책에 실었는데 그 이유가 불명확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려면 평창의 인물편이 열거되고면 모를까 또한 뒷 장엔 강소사 편이 수록되었고 그 뒤엔 임진왜란 편이 수록되었다.
또한 강소사는 누구라는 설명도 없이 어디인지도 묘사가 안되는 천길 벼랑끝에 투신했다하는 논술의 부족함 아래에 출전이난 항에서는 때는 비가내리고 응암굴에 무모하게 답사하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하는 마치 무성영화의 대본같은 서술, 역사서술에 주체자는 무얼했다는 6하원칙적인 설명도 없이 본인의 이야기를 접목하는 이를 평창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 평창에 활동편에서는 권두문이 평창군수로서 임진왜란을 맞아 지방의 목민관으로서 군관민을 규합하여 君(임금)의 臣(신하)로서 항전한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군사로 대항하기 어려워 후일을 도모하며 우선 모든 군관민을 데리고 응암굴로 피신하여 군민의 목숨을 보호하고져 하였지만 응암굴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어 원주 감영에 끌려간다
최소한 이러한 권두문의 평창에 대한 개괄적 이야기가 년도와 함께 서술되어야 권두문 장에서는 올바른 서술이 될것인데 동 책에서는 권군수가 포로가 되고 탈출하여 입탄재 하나 넘는 이야기만 그린것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도 모르는 서술이다.
탈출 전과정도 아니고 입탄만 조명하는 간략한 서술로 평창에서의 권두문 군수를 전부 표현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탈출중 입탄에서 개별적으로 연구한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던가 하는 특이 사항을 기술하여야 하는데 아마도 입탄에서 탈출과정에 그런 특이 사항은 없다. 그리고 고종원의 "기천록"에 탈출 시도에 대한 설명은 호구록에서보다도 더 자세한 전사로 권두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들어 기천록에서는 고종원, 종길 두 형재가 잇발로 포승줄을 잡아뜯고 탈출하려 하자 권 군수는 우리도 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로 보면 권 군수는 탈출을 계획했던 바는 아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내용은 웃기지도 않게 싱겁다. 권두문편은 주제가 없고 그 내용이 일목 요연하지 못하고 이 책에 서술의 논술이 모두 목적등이 먼저 부각되지 못하는 등 기승전결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그냥 또 출전이란 인용부 편에서 "길위에 역사"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 길위의 역사책도 이러한 오류가 무수히 많은지 동 책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책이고 증보판이란 책은 50권만 프린트한 책인듯한데 50권 출판이라면 동 책을 여러사람이 인정해 줄 수 있는 분량의 책도 아닌바 이러한 책에 대해서는 옳고 그른지 검증적 입장에서 아직 알지도 못한다.
● 해설란의 설명은 본 역사서에 필요없는 사항이지만 글 자체가 무슨 목적하게 게시되는 글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길게 전개되는 서술 부족현상을 나타낸다.
● 강소사
동 책 모든 부분의 서술이 그러하듯 강소사 단원을 초보자가 읽을 때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뒷장에 강소사 편이 나오는데 동 책은 이렇게 중복되어 앞에서부터 설명방식이 들어가야 이해를 할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보면 강소사의 항목이 나오고는데 중첩되어 있으며 강소사, 임진왜란의 항목이 열거되어 번잡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들은 평창의 임진왜란속의 인물들이기에 이들은 임진왜란의 내용에 항목체로 구성하여 전개하였어야 이해가 빠르다.
6) 국구사우
● 개설
개설내에는 평창의 국구사우는 누구의 사우인지 무슨 뜻을 가지고 잇는 설명은 하나도 없다. 참으로 그리고 일반적인 국구사우의 낱말풀이만 서술하는바 이 책은 낱말 사전이 아니다. 참으로 웃지못할 서술이다. 이러고도 저자는 물론 감수자도 까막눈인가?? 여섯명이 마지막 교정을 보앗다 하는데 그럼 그런 문법적 교정은 프로그램 하나로도 될 수 있는바 우습지 아니한가. 분명 동 책은 평창군 어느 프로그램에 의해 군비로 출간된 책인데 군은 예산만 투여하고 잘, 잘못의 전과정 모더링도 없고 잘못되어도 문책이나 구상 청구권은 없는가 하는 점이 의문이다.
동 단원에 제목부터 국구사우는 일반명사이고 조선시대 국구사우는 왕은 27대이지만 장인(국구)는 5~60명이 있다. 그러기에 평창의 국구사우의 제목은 『평창의 국구사우』나 『추존 목조비 평창의 국구사우』라야 한다, 그래서 개설란에는 간략하게라도 주제어인 추존 목조의 국구 또는 목조비 효공왕후의 (부친 천우위장사 이숙공의) 사우라고 고유명칭을 써야 한다.
● 출전
출전란에 평창군 오면지도와 김진백의 길위의 역사 증보판이라 한다. 그러면 그 책도 이러한가 알 수 없다.
● 해설란에서 만상 2개라 기술한바 이 석물에 문양은 예전 본인의 극구사우 논고에서 안상이라 설명하엿으며하였으며 안상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가도록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에 동 책은 본인의 안상을 인용함에 이를 오자로 만상이라 썼다고 가정해도 오자를 수정해서도 않된다. 이하 이 설명의 오만한 오류를 문제로 지적한다.
●안상이란 동책에서 얘기한 석물의 이름이 아니라 석물에 치석한 문양을 말하는것으로 알지도 못하고 서술하고 있는바 오류를 범하고 있는바 일반적으로 삼산화 안상을 그리지만 동 석부재에는 안상으로 치석하였는데 동 책에서는 안상을 만상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안상은 석물 부재 그 자체의 명칭은 아니다. 이 석물의 명칭은 일반적이 아니기에 알 수 없지만 아마 "느니"란 명칭을 가지는 어쩌다 쓰이는 건물 부자재인듯 하다. 이 부재는 화강암을 다루는 전문 석수쟁이가 아닌 초자가 돌을 정으로 쬐기가 힘들어 미완성이기에 더욱 알 수 없는 부재이다.
● 앞장에서는 이름의 기명에서 "황호현"으로 제대로 쓰고 이 장에서는 "황우현"으로 썼다. 이 점의 정확한 기술은 평창 2대 국회의원의 "황호현"이다. 동생분은 황봉현이고 자녀분은 필자의 4년 선배이다.
● 국구사우 터의 위치를 수정하여 현 극락사 터 전부로 보며 더 이상의 추가 자료가 없으면 현재까지의 자료와 가장 일치하는 곳이다라는 동 책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래의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논리로 김일성식 억지라 보아야 타당하다
●두가지 조건에 첫째로 추가 자료가 없으면 현재의 자료와 가장 일치하는 곳이라고 한다면서 동 책에서 가장 일치하는 곳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극구사우 터를 확장하여 극락사 전체 범위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서술에 의미는 이 자료로 국구사우 터를 자리매김 하겠다는 의미이며 이곳에 국구사우에 맞아떨어지는 문헌등의 사료로서 증명이 없고 이러한 비약적 방법으로 역사를 합리화 시키는 것은 궤변에 가깝기에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이곳이 중리 서낭당 아래라 거리가 가까위 이렇게 신을 모시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신의 대상체인 신목이 혼돈되는 경우가 발생되는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 두번째 조건은 이경식의 국구사우 논문에서는 신목의 개념을 모르고 신령스러우라고 고목나무를 심었다 한다. 이러한 고목나무 자체가 신목으로 사당의 신적 표출로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문이 선행되었기에 극락사 터를 주장하려면 이경식의 논문에 국구사우터의 위치가 적당한가 아닌가 고찰이 있었어야 한다. 물론 그 위치는 필자가 먼저 점지한 곳으로 필자에게도 잘못된 견해라는 점의 논제가 따라야 한다.
이경식의 논문에서 주목할 점은 교회옆의 사사청, 극구사우등의 1912년에 관아건물 3채를 헐고 초등 공민학교를 지었다는 발표문이 있는데 그러면 이 논문에서 자료는 추가자료 이전에 선행자료이기에 이 극락사 터 주장 이전에 이경식의 논문의 자료가 올바른가 아니면 역사적으로 부당성을 가지는 것인가에 논고가 선행되어야 극락사 땅에 국구사우 터를 주장할 수 있다.
동 책의 저자는 과가에 국구사우가 현 극락사터라 주장하다가 고지도에 국구사우가 거래에 써져 잇다고 현 도서관 앞 골목길 최**집 정도라고 누누히 이야기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이 동네 송**의 고증이랍시고 중리 동제의 서낭당 옆이라 계속 본인에게 주장하였지만 필자로서는 한번도 동조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의 고지도가 스케일에 의한 지도가 아닌바 위치 좌표까지의 정확성은 없고 어떤 지도엔 관아 표기가 있지만 국구사우의 표기는 없기때문이며 중리 서낭당 앞 자리가 국구사의 의 터라면 이는 서로 교차하기에 누가 그런곳을 택하였슬까 하며 정조는 국구사우를 관아의 옆 옛 원우터에 지으라 했는데 중리 서낭당은 노산으로 오르는 경사지로 이곳을 옆이라 하지 않고 뒤라 했어야 한다.
● 또한 더 이상의 추가 자료가 없다면 하는 언급은 역사적 규명에 옳은 생각은 아니고 해당 역사가 맞는가 하는 점을 직시해야 되며 본 글에서 안상이나 주춧돌이 국구사우에 사용되었다는 점으로 간주하는바에 대해서 그러면 이러한 부자재들이 국구사우의 것이었다는 정확한 고증의 자료를 우선적으로 제시여야 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점에서도 정확하게 고증도 없이 국구사우라 하는 점은 부당한 것이다.
● 역사의 고증은 어려운 일이다. 수학은 공식만 찾아 문제를 풀어나가면 되지만 역사는 공식도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자료가 역사적으로 규명함에는 그야말로 전천후적인 사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천후적인 사안이라느 뜻은 하나의 예를 들면 김삿갓은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급제 하였다 하는데 그럼 백일장은 향시의 과거제도이며 과거재도는 성종때 법전인 경국대전에 살려있다. 하지만 이조시대에 가장 문제의 하나는 관ㄴ거제의 문란으로 중종때 조광조는 혁신개혁이남 미명하에 과거의 산별이 아닌 천거제의 현량과를 마련하여 과거제도는 더욱 문란해지자 숙종때 속대전에서 과거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엔 순조때 김삿갓은 백일장이란 표현의 과거에 장원급제 했다며 또는 과거를 공부하러 서울로 갔다는등 여러이야기는 과거제도가 폐지되었기에 위배되는 말이다. 이렇듯 하나의 역사적 조명이란 후일 어디서 어떤 제약 조건이 나올지 모르기에 명확히 들어맞는 사료화를 가져야지 더 이상 자료가 없다면 이것이 근접한것으로 인정하겠다하는 우스운 꼴의 글이다. 떡자르는 것이 떡장수 마음대로가 아닌 크기에 대한 기준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볼때 고증이란 전방위적으로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7) 노암석탑
●위치
평창읍 중리 옛 노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이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단순히 이 문장만 기록하는바 이 문장은 옛 노암이 어디를 말하는 위치인지 알 수 없어서 완성된 문장은 아니다.
●출전
『조선고적도보』중에 수록된 「석탑명」에 “평창동북오층석탑”이 기록되어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동북오층 석탑으로 기명하고 있는바 원 작자는 일본인이기에 "동북 오중(五重) 석탑"이란 표기를 하고 있는바 동북오층석탑이란 단어는 오류이다.
● 이 장에서 인문지리책은 평창경찰서 오층탑이 원본 기록에는 동북오중석탑이라 논고하는바 본인은 평창 동북오중석탑을 다다시의 고적도보 책에서 가져와 평창에 처음 게시하였던바 이는 경찰서 탑이 아니기에 필자의 게시글 두편에서 경찰서 탑과 동북오중석탑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다른 점을 서술 하였다.
그러면 내 글에서 동북오중석탑이란 용어를 가져다 평창경찰서 탑이라 왜곡하는 것은 내 글의 사진들을 보고서도 이러한 주장의 왜곡은 본인 글이 잘못되었다는 전제가 되기에 여기에 본인은 충분히 대응하여 정원대의 평창경찰서 탑이 동북오중석탑이라하는 역사글이 심한 왜곡이란 점을 입증하여야 내가 올바른 주장이 되기에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 즉 노암사 탑은 아직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가령 1915년쯤 다다시가 찍은 동북오중석탑의 가능성은 배제하지는 않는다( 동 탑은 사진에는 있지만 현재에 평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또한 현 평창경찰서 오층탑은 이전글의 사진에 보면 4층 탑으로 이는 3개의 작은 3층 석탑재의 잠뽕으로 4개의 옥개석을 조합하여 올려서 부피가 가늘고 왜소하게 보인다.
현재 평창경찰서 신청사에서는 5층의 옥개석을 만들어올려서 3층석탑이 된 것으로 동 탑의 처음 위치는 현 서라벌 사진관 안채이며 그곳은 일제때 평창장 여관 화단이었다.
현재의 집을 짓고자 동 탑을 구 경찰서 파출소 (경찰서는 중리에 있다가 6,25에 화재로 구 일본인 초교자리, 후, 일신공민학교 자리로 옮기고 "56년에 현, 이데아 커피숍 자리에 하리 파출소를 건립하였다)의 옆 화단에 있다가 "64년 구 청사를 짓자 이후 보안과 앞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경찰서가 '97년에 완공되자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 말은 노암석탑은 어떤것인지 알 수 없다. 현 경찰서탑은 동북오중석탑은 아니다.
그러면 노암석탑 단원에 주에 동북오중 석탑의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 연관은 당연 필요없다.
이것은 오류가 아니라 임의적인(능동적인) 왜곡이란 점이다.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의 설명 (본인의 동북오층 석탑의 게시글 주소)
이하 이 글은 별지로 첨부합니다
9) 하리 석실고분
형태에 들어갈 부분이 해설에 들어가 있고 단원 요지등의 문장이 거꾸로 쓴 모습이다.
10)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
내용
*9월 9~11일 까지가 임진왜란 내용만이 아니기에 내용중 일부란 표시가 있어야 한다
*이동경로(9월 2일 탈출 이동경로)
물론 평창의 임진왜란 항전사 1, 2편이 동 책 뒤편에 수록되어있다. 하지만 초보자는 이 장에서 무슨 이야기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앞장의 권두문과 본 장의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 강소사 이야기는 뒷장의 항전사와 하나로 평창의 임란사로 묶어 이하 항목체로 짜임새를 가져야 이해가 빠른 것이다.
* 그리고 이 장의 제목이 권두문 평창군수와 임진왜란사인데 권 군수는 평창의 임진왜란에서 이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제목은 포로에서 탈출하는 권구수로 바꿔야 하며 호구록에 기록된 코스는 주천이 아니라 왜군을 피하여 부론의 치악산을 넘어 입탄까지 오는 것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동 책의 권군수와 장에서 본문인데 이건이 권 수군수와 임진왜란이라 하고 있는데 이런 제목의 이런 모습은 평창의 임진왜란에서 특별히 따로 조명할 필요가 없는데 왜 입탄에서만을 고집하고 기록할 특별한 이유도 없다.
임진왜란시 권두문 군수의 행적이라면 권 군수를 이해하는 자료로 가능하지만동 책에서는 권 군수가 무얼햇는지도 서술되지않고 탈출시의 한 장소만 기록하는것은 어떠한 입장에서 서술하였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탈출 경로도 이해가 되도록 서술 하여야 한다.
11) 백양진 나루
이 장에서 본제가 있고 주를 달아 증언자의 출처를 달아 주는게 일반률이지만 이 장은 6하원칙에 필요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에 본 책애서 가장 이해력있는 문장이며 또한 본인의 시를 수록한 바 시의 내용은 여기서 필자의 주관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본인의 詩이기에 운치를 더 해주는 역사글로 이해합니다
12) 후평 선돌백이
이 장에서는 후평의 선돌백와 이목정의 선돌을 구분없이 서술한바 독자로 하여금 한참 확인하게 만든다. 또한 이 두 개의 선돌은 선돌은 아니다.선돌이라하면 제와 주신등의 여러 이미로 인위적인 힘으로 쌓아 올린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 돌들은 그러한 인공의 선돌이 아니기에 자연적으로 선돌 형상을 취하는 것으로 동네 사람들은 이를 선돌백이라 부른다 하는 이해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
지금 이 문장으로서는 선돌이 아닌 것을 선돌이라하는 왜곡됨을 지적한다.
13)노산 성황사
형태에서 위패에 (노산성황 지신)이라 증언하는데 이는 좀더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며 김택용씨의 증언으로는 다른 표현을 이야기 한다. 노산 성황사는 임금이 국가의안위와 백성의안녕을 위한 국태민안의 제를 지내는곳으로 임금ㅇㄹ 대신하여 각 군, 현의 태수가 실행하는데 군수를 대신하여 둔전을 가진 제사장이 신성한 제를 지내는것으로 이에 본인은 김택용씨가 막역한 친구이기에 제를 지낼당시 호랑이가 뒤에 다녀갔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기에 후일에 다시 제수를 마련하여 재를 지냈다고 하는바 신성함을 표하기위해 비유적으로 쓴 말이다. 이렇듯 목적과 비유가 구분되어야 하고 때로는 촌노들의 맞지 않는 증언도 동 책에 증언이라 기록하며 본인의 글은 왜 그런 기록이 없는가??
대상리 안정사지도 일반적으로 편안할 안자를 쓰고있는데 필자는 이곳에 다녀가며 위냥 샘물이 원래는 안정마을 샘물이라 하는 점에 산사의 스님들은 편안할 안자도 안쓰지만 안정마을이 샘물의 뜻에서 연루되었다면 그 샘물은 언덕아래에 솟아 오르기에 언덕안자를 쓴다고 했는데 이러한 검증도 없이 본인이 밝히는 언덕 안자를 쓰고있다. 이렇듯 동 책에서도 안상이니 동북 오중석탑이니 하는 단어들은 본인이 이야기 한 것들이고 누구도 그런 이야기가 없는데 촌노들 증언보다 못한지 그 출처는 없이 자기것으로 쓰고있다.
본인은 이러한 점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향토사학은 전문성도 가져야 하고 여러 범위이기에 여럿이 손을 잡고 해결해나가도 안될판에 동 책은 원고도 들고다니며 자랑만 하였지 한번도 보여주어 잘못됨의 수정도 없었다. 즉 국가예산으로 오발탄 빈 총알만 날린것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해설
이 부분에서는 노산 성황사는 국사성황사로 전국의 모든 군현에서는 고을 원은 군(君/ 임금)을 대신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정초에 군제를 지내는 것으로 이를 둔전을 두고 제사장이 일임하여 국태민안으로 고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성한 제를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 먼저 선 수록되어야 한다. 호랑이니 머니 하는 나의 말은 그 과정상에 문제이고 국행 성황사로서의 으미의 설명은 부족하다.' 즉 성황사는 고을의 수장인 군수를 태신하여 제사장의 설명에 성황사나 성황단은 전국에 설치하여 군(임금)이 백성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기원제란 사실이 빠지고 있다.
어느 세미나에서 국사 성황사에 중이 농악대가 올라와 접신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이후 농악대의 중리 서냥제때 노산에 올라 경배의식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학수옹은 제사장으로 군수를 대신하여 국가 행사인 국사 성황제를 지냈다는 이러한 해설이 있어야 한다.
발췌내용
* 응암지에서 5월에 권군수는 칠족령을 넘어 동촌으로 피신하였다 하는바 권 군수 자신이 쓴 일기 (호구록)에 의하면 응암굴에 숨었다가 왜군에 잡혀 포로로 가는게 사실이다.
그러면 동촌으로 피난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러기에 다른 응암지에서는 동촌굴을 백룡동굴이 아니라 응암굴로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바른 역사의 논고가 아니란 해설이 있어야 한다
출전이라 하는데 응암지와 호구록 그리고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의 역사 책이라 쓰고 있다.
여기서 호구록과 응암지는 임진란 평창역사의 중요한 연구자료이지만 길위의 역사책이 출전에 들어간다면 그 외 평창군지, 평창읍지. 또한 호구록의 여러 번역본(3개 번역본)의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책들이 모두 수록되지 않고 길 위의 역사란 책만 출전에 낀다면 이는 편향적이고 노골적인 자기 자랑이다.
해설에 보드를 타고 가록을 담다 하는데 이는 시가 아니고 또한 유흥준의 엉터리 기행문도 아니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자랑은 역사서술이 아니기에 본문에서 피해야 상식인이다.
13) 임진란과 평창
임진란에 평창을 쳐들어온 왜구가 2,500명도 아니고 500명은 다이묘 이동우병도 아님.
모리 야스나리는 4번대 총대장이고 그 휘하는 모리 가스노부를 대장으로 하는 모리부대의 병력 2천명과 본국으로부터 전령을 받은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의 부대 천명은 백봉령을 평창을 확실히 들어온다. 그리고 중소 다암묘 부대중 이토 스케타카(伊藤祐兵)의 부대도 합류했다면 4천, 여기에 얼마나 더 합류햇는지는 모르지만 중소 다이묘중엔 700, 또 800명을 데리고 온 부대가 있기에 이 두부대만도 1500명으로 2500명은 사실에 맞지 않고 일본사람 이름은 한문으로 쓰지만 고유명사이기에 일본어로 발음해야지 한국음은 오류이다.
출전
게속 이야기하지만 출전 하고 쓰고 임진왜란과 평창 유재춘 교수 하는 이런 명기는 불확실하고 정확한 논문출처를 밝혀야 한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명, 중소 다이묘인 이토 스케타카(伊藤祐兵)이나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등이 일천명씩 그 외 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 시마즈 다다토요(島津忠豊)등의 다이묘들로 등 천명의 군사를 데리고 아니면 7~8백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 다이묘들 함경도에서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깅원도로 내려올 때에 본국의 토요토미로부터 명령을 받아 모리부대 2천과 추월종장의 일천명 합 3천의 군사로 하여금 강원감영을 치라고 명령을 받는다.
14) 하리 비파형 동검
DNA 분석도 가능하다 하는데 길위에 역사 책엔 이런 기록 없지만 이미 분석조사도 다 나온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는,, 이러한 논고는 이 싯점에서 기록서가 않된다,
15) 대상리 안정사 (岸井寺)
지금까지 사용된 안정사의 한문은 安井사로 쓰고 있었는데 본인은 이곳을 한번 답사하여 안정사는 안정 샘물에 그 뜻이 있다함을 알고 샘물을 가 보니 위낭 소리란 평창군 관광 가이드 안내판이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불교에서는 편안할 安자를 즐겨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 우물을 보니 (언덕) 案자를 사용하여야 적확한 표현이란 점에서 岸井寺라 불렀슬 것이라 기록하였던바 이 용어를 인용부호를 달고 본인의 이름 명시는 필요치 않아도 기존에 사용한 安井寺의 한문용어에서 岸井寺 바꿔 사용할때는 역사의 인식률이 틀렸다고 마음대로 바꿔서는 않되며 그 부대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
정원대는 본인의 기록을 너무나 잘 알고 인용하면서도 평창 경찰서탑은 동북 오중석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윗 예문에 길게 그것이 아니라고 게시하였지만 챗에서도 왜곡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16) 노산성지(城池)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노산성의 연못을 노산성지(城池)라고 쓰고있다.
성지란 성내의 연뭇을 뜻하며 한문 뜻으로는 틀리지 않으나 사전적 낱말은 없기에 단어가 안되는 것이다.
저자는 일전 몇번이나 노산성지(聖地)라고 쓴 기록은 잘못이라고 하건만 본인의 이해로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노산성지에 땅지자가 아니라 연못지자를 씀이 잘못이란 점이다.
노산성지(聖地)란 조선조에 임금의 명에 의해 전국에 성황단(서낭단)을 짓고 임금을 대신하여 각 지방 태수가 국태민안의 민초들의 안녕을 위해 제례를 지내던 곳으로 종교적으로 성스런 성지(聖地)라고 표현함엔 잘못이 없다. 가령 성지순레하면 연못을 순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고 성지에는 연못이 없는곳이 더 많다.
그런데 올해에 언 박사의 말에 의해 인문지리 책의 저자는 노산성지(聖池)가 아니라 노산성지(城池)해야 옳다고 함에는 문제를 아래의 내포한다.
그러면 연못의 성지라함에는 연못응 위한 성이 아니고 연못은 성내의 부수적 장치이기에 하위 문장으로 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내에 필수요건은 샘이다. 또한 샘의 물량이 작을때는 연뭇을 만들어 저장한다. 이때 연못은 인공연뭇도 있지만 이는 인공의 호수로 수조(水`槽)또는 저수조라고 사용한다.
그러므로 노산성내에 식수원의 샘물의 저장연못으 인위적이라 수조지라고 일반적으로 쓰고 있다.
아무리 박사가 강조를 위해서 성지城池)라고 표현하였는지는 몰란도 올바른 일반론의 해석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16) 동비토론 (東匪討論)
동비토론이란 책은 강원도 2차 동학난시 동학 민중들이 평창에 집결하여 강릉을 쳐 들어갈때 강릉의 민보군ㄴ의 역사서술로 선교장의 이화원이쓴 책이라 추정한다. 이 책은 동학군의 상대의 책으로 평창의 동학난에 참고자료는 될 수잇어도 평창의 동학난 전사라고는 할 수없다. 지금까지 동학엔 많은 기록을 가지고잇는바 필자는 평창부분의 역사를 찾아 소명하였다
이첵의 내용은 동학 2차봉기의 평창편을 쓰고 있다 이를 이화원이 쓴 민보군 일지 형식의 책으로 동비토론에서 인용했다고 서술하면 이해도가 빠를 것인데 설명부족으로 일반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7) 하일리 공소(公所)/ 유동리 공소
본 책에 각 항목의 역사에서 매번 그러하듯 이 장에서도 공소(公所)가 어떤뜻인지 주제에에대한 설명이 없어 공소가 교회당인지 아니면 읍면 주재소의 공회당인지 분간카 어렵다.
18) 중리 농악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에 역사책은 매번(약 17번) 출전이라고 중리 농악에도 문헌자료가 있고 출전도 있으며 출처도 잇다. 그럼 출전과 문헌자료와 출처는 각각 무엇이 다른가.. 동 책에서는 그 의미적 구분을 분별력있게 하지 못하고 있다. 즉 책의 내용인 그게 그것이란 점이다.
또한 출처에서는 한상복의 '평창두메산골 50년"책이 제목만 덩그러이 인용되어 있다.
평창의 두메산골 50년이란 책은 한국 최고의 인류학자 한상복박사가 평창 진부의 봉산리는 외지마을로 50년도안 인류학자의 눈으로 지켜본 역사를 소상히 밝힌 책으로 동 책을 한번 읽고서 정원대님이 봉산리 이야기를 하실래 봉산리는 6,25때의 민간인 학살의 재판 기록과 현재도 재판중인 이야기와 봉산리를 알려면 전 평창군수임이 이곳 출신이라 일러주며 동 책도 꺼내 주었다. 그런데 인문지리에 한상복의 평창 두메산골 50년이란 책이 출전에 등재되었길래 동 책에서는 봉산 2리에 놀이문화의 농악을 하는것밖에 업ㅄ을텐데 무엇때문에 출전에 오르는지 다시 교보문고에서 사서 보았다. 동 책을 다시 전부 뒤져 보았으나 봉산 2리에 두어줄정도 농악을 서술하고 있는바 출전에 등재될만한 논리를 갖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동 책을 잘 기억하여 출전에 올린것으로 좋은 예이지만 출전의 내용은 없어 구하기 힘든 책을 뒤져 보아야 하나하는 묹젯점을 내포하고 있다.
19) 성마령
문헌자료 편에 이우(1469-1517)의 "성마령" 시 한편이 소개되는데 여기에 정작 인용부편에서 이우의 출생이라든가 약력을 간단하게 기재하는게 책의 서술에 일반적 상식이건만 여기서는 인용부가 아예 없다.
20) 아라리
아라리 항목에서는 해동죽지에서 아라리의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하는 인용부만 서숳하고 있다 이러한 단원의 항목이 왜 미탄면 기록에 수록되었는지는 이해가 않 되는것은 저자의 일괄성없는 논고때문이다.
미탄은 구한말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아리랑의 보고이고 정선아리랑의 모체이기에 이는 평창아리랑 또는 미탄 아리랑으로 단원제목이 있어야 하고 또한 영서지방의 산간요인 메나리조 아라리의 설명이 잇으면 더욱 좋을 것이나 아라리란 단원은 여기에 서술할 이유가 없는 단원이다.
평창역사는 무엇이고 향토사가로서의 의무나 책임은 무엇인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21) 유영모 (1890~1981)
방림의 인물편으로 유영모가 단원에서 유영모는 방림과 어떠한 관게인지 알 수없다. 그러기에 이 장의 유영모편은 평창역사애서 취급할 이유를 알 수없다.
본 책의 논술에는 이렇게 중대한 미스를 범하는것이 동책에서 거의 대부분에 이른다.
22) 천도교 평창의병
이 장에서도 평창의병이 언제 일어났는지 주제어 설명이 누락되어 웃기는 문장이 되었다.
23) 판관대의 율곡의 고향
이원수 신사임당의 자녀에 여섯명만 기록되고 있는바 몇 남매인지도 모르고 있다. 여기에는 여섯째 3녀가 빠졌으며 과거 여성들에겐 이름이 없었던 듯 여섯째의 자녀은 성명미상으로 일전 판관대의 세미나 발표시 가족사항 설명에서도 문재를 가졌기에 저자가 4남3녀의 칠남매를 모르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24) 팔석정
개설편에서는 흥전천의 기암절벽에 8개이 바위가 절경을 이루고 하는 문장에서 기암절벽에 8개의 바위가 하는 형용은 기암절벽은 높은 산처럼 표현되는 이상한 문장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팔석 아래에는 깊은 헤아릴 수 없는 교룡이 많이 숨어 있는데 하는 서술에서 바위는 봉래, 영주, 방장의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봉래 양사언 강릉부사의 글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장에서 팔석의 글귀를 새겼다는 표현도 없거니와 단 3석만 새겼다는 문장도 아니어서 이 문장대로라면 자칫 3석의 글자만 새겨진듯 혼돈할 수 있는 문장 서술이다.
25) 태기산성
증언편에서 봉평면 향토사학자 하찬수씨는 삼한시대 태기왕의 전설중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봉에서 용전리로 들어온 신라군(또는 예국) 에국을 감시하고 하는 문장에서
신라는 예국과 동일 시간대의 국가는 아니다.
예국이란 강릉을 중심으로한 예족(獩族)의 국가로 이들은 맥족과 함께 스키타이 문화권 의 북방 민족이 남하한 것이다. 태기왕은 춘천의 맥족 국가의 부족아래의 국가같은 인상으로 이들 예맥은 선사시대 이후 역사시대에 한반도에 정착한것으로 보여지며 예와 맥족국가는 고조선시대의 부족단위국가이며 신라는 기원후 바로 시작된 국가이다
동 책의 저자 정원대는 증언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증언이라도 위 태기산성의 예문에서처럼 증언은 촌노들이 그저 향토사학자란 명칭으로 증언하는데 이러한 증언내용은 심사 숙고하여 인용하여야 한다.
향토사학자란 명칭은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촌노들의 대명사라, 만은 오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증언의 혼돈스러움이란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장에서 본인이 지금까지 노력한 이해의 글을 씁니다.
이상.
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 4백 패이지 중 80페이지 평창읍만 분석함
그리고 정원대란 사람은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팔석정 기록에서 분석해줌.
팔석정 하고 검색을 하면 3개만 나오기에 3석정으로 착각할수 잇는 문장이고 팔석정엔 양사언은 없는줄 잘 알면서도 양사언이라 기록하고 있다.이에 서술은 지금 현제 팔석의 내용으로 양사언이 지었다고 하나 봉서유고 기록에는 어떤 팔석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양사언의 기록적 사료는 전무한 상태다.
이제 이러한 초교생보다 못한 논술을 가지고 다시 오류를 잡는다고 만상을 안상으로만 고쳐서도 안된다고 설명하듯이 동 책은 400페이지 전체를 다시 기술해야 하는 형편인데 군 예산은 그런 껌딱지 예산도 아니고 자비라도 해야 될 입장이지만 다시쓴들 논술 솜씨가 모든 구성을 충족시킬수 있슬까도 의문입니다.
지금 본인의 기분을 생각하고 또한 제가 막말 하자는 것도 아니고 보다 솔직하게 하여 이 점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 문제를 직시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당사자는 연일 외치던 지명지를 잘못이라 외치지도 못할 것이지만 이대로 그냥 흘러갈 수는 없습니다. 지난번 까페에서처럼 무엇을 감출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금새 어디가 빵구나고 그 책은 이상한 책이라 소문날 것인데 무엇이 챙피하다고 감추고만 있슬 것인가 합니다.
아마 장 정룡이나 어느 교수 손에 들어가면 목에 칼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평창을 연구하면 당연히 그 사람들도 동 책을 손에 쥐게 됩니다.
이번 세미나의 학자들은 본인의 블로그에 율곡 이외에도 만을 것을 보고간 듯 이야기 합니다
아마 어떤 것은 율곡 논문에서도 데이터 베이스에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들 하는데 평창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학자들은 인문지리란 제목에 그 책을 보게되니 회수하는 편도 좋을 듯 합니다.
이번 연말까지 입장의 답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의형제라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그간의 고마움은 잘 알지만 사사로운 정에 역사에 비굴한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원대님은 본인의 블로그에 본인의 정리한 논리가 엉터리라고 간주하기에 귀동냥의 증언자의 모순도 그것이 맞다고 기술하고 있기에 저의 블로그의 역사 추론은 오류로서 보여질듯한 중대한 도전을 받기에 이 문제에 앞으로 본인의 글과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과 한하나 비교하여 발표할 것이다. 이런한 비교 논점을 써서 본인의 글이 옳음을 증명한다는데 방해할 수 길위에 역사 증보판 하고 수없이 떠들며 언제 복사 한권이라도 던져 주었습니까..나에게 하는 예기외 나가서 히는 것은 이중적인데 의형제라니 그런 말 끈습니다.
본인의 불로그가 평창역사의 논고에 항상 바르게 지적하고 언제나 정의를 위함을 최선으로 여길 것입니다.
◆ 또한 필자와의 인터넷 마지막 댓글에서 지명지의 장교수와 화해를 하겠다는데...웃기지도 않는 장정용이 어디 정원대를 힐난하고 평창의 인문지리 책을 반박하였습니까?
정원대쪽에서 장교수의 평창군 지명지가 잘못되었다고 폐간하던, 아니면 법적으로 그 책임을 묻겠다고까지 한쪽에서만 성토했는데 화해하겠다니.. 그러면 장교수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 아닐까 합니다.
정원대는 지금 까지 오류의 대명사라고 그렇게 탓하던 "평창의 지명지"책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보면 장교수의 평창 지명지는 전체적 맥락속에 각 단위별의 한문에 차이의 실수로 그런것은 오류의 범주에 속하지만, 정원대의 평창인문지리 책은 상기 기술한바처럼 이해 곤란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러기에 동책은 평창 역사를 저해하는 역사 오류뿐 아니라 책의 논술의 비중문제나 증언의 오류등의 문
제는 동 책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논고가 그러하기에 이는 오류라는 범주를 넘어서서 역사를 왜곡을 하고있다.
댓후세백작길 위에 역사책이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 내용을 확인하려하니 책이 없으면 스캔을 하시던가 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김진백이란 사람에게 직접 받을 까요
동 책에 출전이라 하고 그 내용을 보여줄 의무가 수반된점을 이해하여야 좋을듯.
참말로 이상한 것은 본인은 동 책에 대해서 더 이상 논고를 하지 않는데도 댓글을 달았다고 하니..
진짜 한번 댓글 달아볼까요.
책을 한권 저술하면 만인에게 칭송받고 명예로 삼아야 할진데
책을 만들고 필자가 무어라 하는가 신경만 쓴다면,,
그러면 필자가 나쁘던가 아니면 동 책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여러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본인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역사적인 관점을 모른다면 후일 바른 역사가가 나타나서 동 책을 무엇이라 할까?/
그러기에 본인은 평창역사 훼손에 대하여 쓴 것이다.
책을 만들면 올바르게 저술하여 만인에게 칭송받는 책이라야 하지 않을까??
후세백작 2021.05.20 00:53
내가 동 책에 또 댓글을 달았다는등 하는 소리질에...
나만 동 책을 저격한다면 그건 두 가지문제중 하나입니다.
필자의 독선에 의한 잘못이거나 다른 것은 동 책이 본인이야기대로 평창역사를 수없이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본인만 똑해서 동 책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일반의 사람들도 상식이 있기에 역사는 모른다 해도 동 책이 논술이 치졸하고 객관적 역사에 보트를 타고가고 갈비가 뿌러졌다는 개인사 책으로 둔갑되는 것이다.웃기지도 않다고 필자는 이미 정확하게 3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한사람은 평창사학자이기에 참으로 웃긴다 합니다.
그분은 동 책이 없는바 책을 가진사람에게서 동 책이 무슨이야기들이 맞는가 문의가 들어왔다 합니다.
훌륭한 책은 집필하면 만인에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동 책을 내고 매일 본인글만 감시하는듯,,,
그건 본인만이 신경쓰인다면 그건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 탓이라..
언제라도,,, 후일 올바른 역사가가 나타나면 동 책은 분서해야 된다고 할 것이다.
그간 정원대는 평창의 지명지에 오류가 약 20군데라고
첫댓글 아침에 사무실에서 애련의 사랑 이야기 보았습니다.
인류학자 한상복 서울대 명예교수의 평창 50년은 봉산동의 모든 역사를 50년 보아온 것으로
그 책은 제가 주엇는데 일전 김진백과 봉산동을 다녀왔다길래 저의 책을 주고 봉산동에는 6,25의 제판이 걸려있다 했는데,
김진백은 길뤼의 역사 증보판을 2019년에 50권 출간하였다고 하길래 그 책 한권 달라니 정원대는 없다 하며 그럼 복사나 인타넷 메일로 달라하였는데도 아직 무소식입니다.
김진백이 누구인지 통성명은 없었으나 초교 4년때 본인을 기억한다는데 그런것 보다도 그에게 메일이라도 달라고 연락하여 동 책을 완전 해부해야 됩니다.
동 책은 군에 천만원을 지원받아 문화원을 경유하며 출간하였는데 문화원에 120권, 평창 시중ㅇ[ 150권 배포되고 아마도 원주 교회에 절반이 넘거 준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역사 고증에 답레라 하는데 평창군은 돈주고 감사만 하면 끝이아니라 모더링을 하여 잘 서술 되었는가 또는 골고루 배포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모더링해야 옳을 것인데.. 먼 후일 원주 어디서 평창역사라고 들고나와 우긴다면 그도 곤혹일듯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평창군 주관으로 평창의 무형문화 유산 세미나및 500여 페이지의 리포트를 발행했는데 이중 논산성에 임진왜란 전투 재현등의 부분의 오류로 장정룡은 문학전공이지 사학전공도 아닌 사람이 남의 글을 베껴 있지도 않은 허구의 역사를 서술하는데 이는 아마도 이욱환의 "평창지역의 임진왜란 항전사 소고" 노성의 맥 19집. 2004년 평창문화운 발간의 책이나 이육환의 "평창지역의 특성과 의미고찰" 노성의 맥 20집. 2005년 평창문화원 발간의 책이 문제인가 점검해 볼 것입니다.
아마도 대화도서관 서고에 이러한 문화원 책이 비치되지 않았다면 이는 문제일듯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평창읍 40년사나 국구사우 용역의 리포트도 찾을 수 없는데 도서관에 없다면 이러한 문화원으ㅏ 책 배포의 문제도 점검하고 강구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 문화원은 많은 책을 발간하며 시중에 아니면 문회원 회원에게도 제대로 배포하지 않는듯 합니다.
아무튼 길위의 역사책은 정밀 분석해야 된다고 정원대에게 언질한 만큼 동 책을 입수하는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 보탭니다.
평창문화원은 역사서를 발간하면 그래도 지방의 향토사학자 분들에게 연구를 목적으로 예의있게 한권 씩 배포해야 정상일텐데
어디에도 물어보면 잘 모른다하는데 대체 책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읽을 것인가도 의문입니다.
애 그럴까 하는 일부의 비난소리는 여기에 싣지 않습니다.
언제 평일날 평창을 내려가서 읍사무소에서 읍 40년사를 찾아보고 있으면 모두 복사하여 점검할 것입니다.
그간 저의 블로그등 인터넷 게시글이 무척이나 검색된바 어떻게 진행하여 필고하였는지 분석 조사할 것입니다.
앞으로 평창 발전을 위해 책은 읽을수 잇는 분들에게 배포되도록 강경한 조치. 즉 평창군의 에산으로 결산 보고가 끝이나니라 이러한 전 과정의 모더링이 필요하다고 군에 건의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