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츠 무네미츠 (1844~ 1897)
일본 굴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알려져있습니다. 1892~1896년까지 외무대신을 역임하고 탁월한 국제적 감각으로 국제외교가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위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건건록>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여 청일전쟁의 개전과 그 전후처리와 관련된 상세한 기록을 남겨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교와 각국의 외교연구에 상당히 중요한 사료를 남겼습니다.
그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한 블로그의 글이 있는데 이를 인용해봅니다.
무츠는 왕정복고(대정봉환) 이후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번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1869년 와카야마현 지사로 임명받은 뒤에 다음 해 런던에 가게 되었다. 1874년 관직을 사임했으나 그 다음해 원로원 의관으로 이명받았다. 하지만 번사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기에 삼년 후 정부전복 음모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기간 중에 저술을 하면서 옥중생활을 보냈는데, 제레미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제원리서설>을 번역했으며 이 번역은 그가 출옥했던 1883년에 <이학전종 利學正宗>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 이듬해 그는 외유를 떠났는데, 런던에 상주하면서 베를린과 빈도 방문하였다. 그 외유의 목적은 헌법에 관한 분야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외유에서 돌아온 후, 무츠는 당시 점차 규모를 확장하고 있던 외무성에 임용되었다. 외무성에서는 일본과 구미제국간의 불평등 조약 개정이라는 개국 때부터의 현안을 두고서 대응책을 입안하기 시작하였고 그는 이노우에 카오루의 주선으로 1886년 외무성 공사 겸임을 명령받게 된다. 이년 후 그는 특명전권대사로서 워싱턴의 주재대사로 부임하면서 연이어 멕시코 공사를 겸임하였다. 이러한 경력은 그의 손에 의해서 조약개정의 돌파구를 열게 된 일미조약의 조인이 가능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1889년 무츠는 이전부터 꾸준히 교섭을 이어오던 일미 평등조약을 체결했다.
귀국 후 1890년 야마가타 내각에 입각하여 농상무대신으로 취임했으나, 고향인 와카야마현으로부터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년 후 외무대신으로 이토 내각에 입각하였다. 그의 주도에 의해서 1894년 7월 불평등조약 개정에 있어 가장 큰 최초의 성공이 이루어져서 새로운 일-영 통상항해조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그는 청일전쟁, 청일전쟁 강화, 그리고 삼국간섭에 이르기까지 외교의 중임을 담당하였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또한 전통시대(도쿠가와 막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년 만에 완전한 근대인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입니다.
젊은 날의 그는 기슈 번의 사무라이로 사카모토 료마 밑에서 해원대(일본 최초의 민간상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젊은 날의 무츠, 전형적인 사무라이였음.
물론 그는 사카모토 료마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은 재목이긴 했습니다. 료마는 그를 두고 "칼 두자를 차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무츠 뿐이다."라고 평했습니다.
그리고 무츠도 나름 의협심이 있던 사람이었는지 료마가 암살된 후, 기슈 번 무사 미우라 야스시를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하여 해원대 동지 15명과 같이 그가 있던 덴마야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그는 막부말기 료마를 비롯한 유신주역들과 함께 하면서 청년기를 보낸 인물이었는데 그 후 유럽에 유학을 갔다오더니 정말 사고체계가 완전한 근대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대 국제관계의 본질, 각국의 이해관계, 영국이 추구하는 국익, 러시아가 추구하는 국익, 청나라가 추구하는 국익이 무엇인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게 되었고...
조선의 국내정치가 누구에 의해, 어떤 논리로 돌아가는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민비의 살해 배후에는 무츠도 깊숙이 개입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는 조선의 동학난이 일본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을 신속하게 내리고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그의 노련한 외교의 결과, 일본은 청국을 상대로 외교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동시에 서양열강들과 평등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명언으로는 "정치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여담이지만 무츠는 그의 아내 덕분에 미국에서도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그의 아내 '료코'가 주미 공사관의 "꽃"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무츠 료코 여사
일본을 보면 막부말기를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와 이들이 모두 퇴장하고 유신 후 태어난 사람들이 주도했을 때를 비교해보면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거 같아요...
메이지 시대 일본 정치인들은 능구렁이처럼 교묘하고 신중하게 거사를 도모했었는데,
메이지 이후의 정치인들은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국가대사를 그르치니...(그리고 덕분에 조선은 독립할 수 있었고... 하여간 고마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