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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청주] 교회의 두 기둥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사도 12,1-11
† 제2독서 2티모 4,6-8.17-18
† 복음 마태 16,13-19
(교황 주일)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반석으로서 교회를
굳건히 지킨 베드로 사도와 선교의 열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방에 전한
바오로 사도를 기리는 날입니다. 두 사도는 우리 교회의 든든한
기둥이었습니다. 우리도 두 사도를 본받아 복음화의 사명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이 미사에 기쁘게 참여합시다.
★ 헤로데가 교회를 박해하면서 야고보를 죽인 뒤 베드로도 감옥에 가둔다.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있던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풀려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자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근래에 극장에서 본 영화들 가운데 무척 좋았던 영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몇 편이 떠올랐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래비티’라는 영화입니다.
‘중력’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은 이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고 주제이기도
합니다.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서 속절없이 우주 미아가 될 위기에 빠진 한
여성 우주 비행사가 천신만고 끝에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로 귀환하는
내용입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줄거리이고 또한 등장인물도 단 두 명, 그것도 대부분은
여자 주인공 한 명이 우주에 있는 이야기이니,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매우 흥미진진하였습니다. 영상이나 음향 등 기술적으로 탁월하기도
했지만 삶의 모든 부분이 얼마나 소중하며 작은 인간적 끈들마저 얼마나 큰
축복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제법 철학적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우리는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깊은
차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를 본 뒤 그 제목을 곱씹으면서
여러 성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력은 무거운 짐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자신에게 지워진 짐을 내려놓으려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짐을 찾아 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살아 있게 하는 비밀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자유 역시 그 짐이 있는 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역설을 엿보게도 합니다.
신앙의 관점으로는 중력이라는 상징에서 우리는 사랑의 짐과 무게와
책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록』에서 밝힌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라는 고백을 감탄하며 떠올립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위대한 두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의 짐을 열정과
자유로써 기꺼이 짊어졌습니다. 두 사도가 두려움 없이 선택한 ‘사랑의
중력’은 순교에 이를 때까지 숱한 고난과 역경이 따랐지만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또한 그것을 많은
이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두 사도를 본받아 주님과 이웃과 교회를 위한 사랑의 짐을 기쁘게
지기로 다짐합시다. 이를 통하여 참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교회의 두 기둥|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29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마태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교회의 두 기둥
본명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 서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베드로,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
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라고 말 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제자로써의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
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복음적 삶을 사는
가운데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우리에게 생명의 빵으로 오셔서 밥이 되시고, 영양이 되신 성체를
모시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어 주는 성체의 삶을 살 때 천상은
우리의 것입니다. 하늘을 갈망하는 만큼 우리 손에 쥐어진 열쇠관리를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천상상급을 확신 하였듯이 우리도 상급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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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제수품을 받으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성경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혼자
힘으로 신부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 또한 홀로 서 있기를
바람이 아니니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 많았고 세상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도구로 삼고 계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주님 부족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당신을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끝까지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 세상은 기쁘고 좋은 일만을 내게 주지 않습니다.
2014년 가해 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제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인데, 이분에게는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분 곁에만 있어도 힘든 일도 어렵지 않은 느낌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분의 매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지요.
하느님을 느꼈을 때의 편안함을 떠올려보세요. 기도 중에 위로를 받았을
때의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저는 이러한 감정을 그분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늘 기도하십니다. 기도의 삶을 살고
계시기 때문에 이분을 통해 편안함과 위로, 즉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아퀴나스 성인께서는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마라.” 하셨지요. 소홀히
하면 하느님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낯선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는 자기 자신을 훈련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으며, 감사와 기쁨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이라는
참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십니다.
자신의 어렵고 힘든 일만 말씀드리는 것인지,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염경기도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인지를 물어보시지요. 이런 궁금증을 안고 있었던 이가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를 만나 물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 무엇을 말씀드립니까?”
이 질문에 잠시도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하십니다.
“저는 그분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 과연 어떤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사랑합니다.’라는 고백뿐이지요. 그리고 내 말을 하는
것 대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의 삶을 묵상하면
분명히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무식하고 성격 급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하느님, 또한 박해를 하던 바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만방에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저절로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었지만,
우직하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이 세상은 기쁘고 좋은 일만을 내게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도 분명히 내게 주어집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직하게
주님 뜻을 따르고, 또한 그러한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한 내 자신도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만일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다지 즐겁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때때로 역경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성공은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앤 브래드스트리트).
보왕삼매론
중국 명나라 때 묘협이라는 스님이 불자들에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할지에 대해 ‘보왕삼매론’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한 대로 설정해놓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인생은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책을 보니 이러한 글이 있네요.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지요.’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멋진 과정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14년 가해 6월29일 (교황주일)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참된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은 완벽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꽃피울 냉철한 이성은 부족했습니다. 말은 하였지만 그것을 실천할
추진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죽을 때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박한 지식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냈고, 그의 편지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강한 추진력 때문에 때로 다른
사도들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오로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초대교회를 이끌어 갈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잘 알던 학생의 이야길 하나 하겠습니다. 그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도 충실히 하고 성적이 뒤진 친구들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친구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그 학생의 하숙집엘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 하숙집에서 조금은
이상한 사진틀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틀에는 사진 대신 ‘나는 셋째’라는
글귀가 담겨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고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나의 어머니께서 대학 입학 기념으로 저 사진틀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첫째는 하느님이다. 둘째는 네 이웃이다. 세 번째는
바로 너다.” 그 이후부터는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이 사진틀을 가지고
다닌다고 말을 합니다.
‘나는 셋째’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집 떠나는 그 학생의 길잡이가 되었듯이
복음 전파를 위해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길잡이가 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길잡이
말씀은 ‘하느님 첫째 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 어디에나 있고 또 언제나 찾아오는 십자가, 즉 고통과 슬픔,
패배와 절망, 사고와 질병 등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나야 하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하고 분노합니다. 분노 할수록
고통과 슬픔은 무겁게 느껴집니다. 분노는 이웃에 조소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더 심해지면 타인을 증오하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위로의 말도 더 비참한 사람도 있다는 일깨움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남편을 하느님 품으로 떠나보내는 장례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장례미사 끝에 고인의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어드리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아빠 그곳은 참 좋은 곳인가요?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신 거죠. 이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아빠 계실 때 효도하고
착하게 지낼 것을 아빠! 이제는 누나들과 싸우지 않고 아빠대신 엄마를
위로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비록 아빠를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지만
하느님의 커다란 뜻을 따르고, 남아 있는 가족들끼리 열심히 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딸을 교통사고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 앞에는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없습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완벽한 것도, 똑똑한
것도, 재능이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흘렸던 참회의 눈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으로의 회개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성소국장 신부 -
◈ [수도회] 삶은 무엇인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29일 교황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도12,1-11 2티모4,6-8.17-18 마태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삶은 무엇인가?
오늘은 초록빛 하느님 사랑 날로 짙어져 가는 6월 예수성심성월의 대미
(大尾)를 장식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날로 잉여의 사람들 곳곳에서 넘쳐나는 잉여의 시대, 잉여의 사회요
품위있게 살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어제 끝기도 저녁성무일도 시, 성모찬송가를 바치는 중 난데 없이 떠오른
미켈란제로가 29세에 완성했다는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피에타 상'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아드님을 품에 안으신 슬픔 가득한
성모님의 피에타상이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어이 없이 목숨을 잃은 300명 이상의 꽃다운 아이들, 얼마
전 지오피 총기 참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5명의 젊은 이들이 오버랩
되면서, 아, 오늘도 여전히 불쌍하게 죽은 당신 아들들을 품에 안고 슬픔에
잠기신 성모님이, 이 땅의 어머니들이 생각났습니다.
하여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성모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살육의 잔인한 한반도 역사입니다. 조선 500년의
역사가 그랬고, 특히 천주교 박해가 전성기를 이뤘던 19세기 한반도가
그랬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은 6,25사변 등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야만의 살육의 역사입니다. 또 여기에다 날로 존엄한 품위를 잃어가게
만드는 신자본주의, 잉여의 세상에 날로 늘어나는 잉여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화급한 시대의 화두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삶은 무엇인가'가 되겠습니다.
첫째, 삶은 은총입니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은총입니다.
이렇게 살아있음이 하느님의 기적이자 은총입니다. 공동체의 역사든 개인
삶의 역사든 잘 들여다보면 굽이굽이 하느님 은총으로 점철된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바오로처럼 우리도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오늘 말씀 곳곳에서 감지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철통같은
감시하의 감옥에서 탈출한 베드로의 사건이 그대로 생생한 은총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빨리 일어나라." "허리띠를
메고 신을 신어라"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라“
베드로를 감옥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주님 천사의 모습이
흡사 절망의 자기 감옥에 갇힌 우리들을 구출해 내는 모습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어둠'으로부터 '주님의 빛'에로의 엑스도스, 탈출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오로의 우레와 같은 고백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비단 바오로의 고백일뿐 아니라 주님을 철석같이 믿는 우리 모두의 복된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 역시 순전히 은총의 산물임은 주님의
다음 말씀으로 분명해졌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시몬 바르요나뿐 아니라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은총에 힘입어 주님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고백하는 우리 역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새삼 삶은
은총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사의 은혜입니다.
둘째,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전사'에 전우들입니다. '누구'와 '무엇'과의 싸움입니까?
언젠가 어느 지인에 대한 저의 통쾌한 답변을 잊지 못합니다.
"여기 수도자들은 싸우지 않습니까?"
"싸우지 않긴요. 매일 싸웁니다."
지인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 봤고, 저는 "매일 나와 싸웁니다."
대답했습니다. 대부분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는 나와의 싸움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디 따로 있는게 아니라 내 자신이 세상의 축소판이요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이기적 소아(小我)의 나입니다.
바오로의 장엄한 고백이 자기와의 영적전쟁에 항구했음을 보여줍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함으로 무너지지 않고 존엄한 인간 품위를
유지한 바오로요 순교성인들입니다. 매일 하루의 끝날, 또 인생 마지막 날,
이런 고백으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이겠는지요.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승리의 비법이나 요령은,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넘어지면 곧장 다시 일어나' 시작하는 길 하나뿐입니다. 이래야 영적감각도
영적탄력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삶은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전투에 항구할 수 있는 힘과 은총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셋째, 삶은 일입니다.
세상에 일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업의 일은 하느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일 아닌 다른 일들은 모두 부업일 뿐입니다.
요즘 절실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이래야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잡힙니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읽으며 처절한 박해 속에 살아간 순교성인들을 보면서
깨달은 진리입니다. 이분들에게서 주님을 믿는 일을 빼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말도 있듯이 저는 먹기
위해서라도 꼭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인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바오로에게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일을 빼놓으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평생 좌우명은
다음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시몬아, 네가 나를 참으로 사랑하느냐?“(공동번역:요한21,16).
아마 베드로는 이 말씀을 평생 좌우명 삼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도 교회의 끊임없는 기도
덕분이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참 소중한 대목입니다. 새삼 신자는 물론 수도자에게 끊임없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삶은 무엇입니까? 삶은 은총입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삶은 일입니다.
이런 철저한 자각에 따른 실천이 존엄한 인간 품위를 지켜줍니다.
이번 서울 주보에 나온 저의 글을 인용함으로 저의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저는 어느 묘지를 방문하든 먼저 살펴보는 게 묘비명입니다.
피정 지도를 할 때에도 묘비명을 써보도록 권고합니다. 좌우명과 직결되는
묘비명이요, 이를 통해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주님과 함께 충실히 살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참으로 사랑하느냐?“(공동번역:요한21,16)
아마 베드로의 평생 좌우명이자 묘비명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티모4,7). 아마 바오로의 평생 좌우명이자 묘비명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제 좌우명이자 묘비명을 소개합니다. 올해 '사제 서품 25주년 은경축'
을 맞이하여 확정한 자작 고백시 중 일부입니다.
좀 길다 싶지만, 제 묘비명에는 다음 고백을 써 달라 부탁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
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永遠)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 이 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강론]
2014년 가해 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제1독서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헤로데의 손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 사도 12,1-11
제2독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 티모테오 2서 4,6-8.17-18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14년 6월 29일)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 이 두 사도는 교회라는 영적인 건물을 떠 받히고
있는 두 기둥입니다. 다른 날 순교하셨지만 오늘 교회는 이 두 분을 함께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은 이 두 분은 같은 분을 위해서 온 삶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 하면 바위가 연상됩니다. 단단함, 강함, 견고함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히브리어로 ‘게파’(바위, 반석)라고 예수님이 친히 지어
주셨습니다(돌쇠). 특히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도들의 으뜸으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사도 바오로하면 무엇보다도 불이 생각납니다. 뜨거움,
열정, 이글거림이 특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쓴 서간들을 보면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뜨거운 열정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성령의 열정으로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했습니다.
다른 한편 이 두 사도는 약점을 지닌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바위처럼 단단했지만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최후만찬 때 호언장담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스승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이 열정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열정은 거의
광적인 폭력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며 말씀하십니다.
“복되도다, 요나의 아들 시몬, 사람이 아니라 하늘예 계신 내 아버지께서
계시해 주셨으니!” 베드로가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 힘과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지혜였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인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피를 쏟을 제물이 되어 있고
갈 때가 다가왔습니다. 주님은 내 곁에 계셨고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의 강함과 바오로의 뜨거움이 서로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었습니다.
두 사도의 인간적인 약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영적인 장점으로
변모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바위었던 베드로는 교회를 떠받히는 영적인
바위로 변했고 폭력적인 열정에 사로잡혔던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하고 영적인 열정으로 변했습니다. 인간은 약하지만 하느님을
강하십니다. 인간이라는 약함 안에서 주님은 당신의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이 두 사도는 인간적 약점 안에 갇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주님의 기쁜
소식을 당당히 두려움 없이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한 달 반만 있으면 사도들의 후계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에
오십니다. 그러나 교황님의 방한은 어떤 이벤트성 행사나 축제가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마리오 토소 사무총장 주교님이
대구에서 강연과 간담회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리오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양, 용산, 제주 강정, 진도 등 수 많은 곳에서 교황님이
방문해주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 오신 여러분이 교황님이 모시고 오시는
예수님을 그곳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작년 연말에 ‘복음의 기쁨’이라는 교황 권고를 내셨습니다. 이
권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갇우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이제 (교회) 밖으로 나갑시다,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고 촉구하십니다. 이 문헌을
보면 이태리어 “uscire, uscita” 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시작, 출발하다”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원뜻은 “밖으로 나가다”는 뜻입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가서 다치고 상처 받고 더렵혀진 교회를 저는 좋아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가 전한 기쁜 소식은 교회 구성원인 우리 내면에
그리고 교회 밖에서 기쁜 소식을 갈망하는 굶주린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강함과 열정으로 복음 전파자가 됩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인의 역할을 맡아라
2014년 가해 6월29일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축일
<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복음: 마태오 16,13-19
< 죄인의 역할을 맡아라 >
유투브로 고 김성수 목사의 강의를 듣다보니 그가 대학 다닐 때 심리치료를
위한 역할극 할 때의 이야기가 의미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역할극이란 심리치료를 위해 사용되는데 심리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어 치유에 이르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역할극에는 대본이 없고, 보통은 환자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정상적인 엑스트라들이 주위 사람들 역할을 맡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이해 못하고 반항하는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을 시켜 부모의 고충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녀가 부담을 느낄 때
부모에게 자녀의 역할을 하게 하여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게 합니다.
한번은 마약에 손을 댄 아들을 이해하지 못해 분노로 가득 찬 아버지를
역할극을 통해 치유해 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들의
역할을 하는 것을 끝끝내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처럼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은 절대 마약 중독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아 결국 역할극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증오도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인의 역할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진정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은총은 내릴 수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하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베드로에게는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신하는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던 인물입니다. 즉, 누군가가 자신에게 하는 잘못 때문에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는 계획이 베드로에게 발각되었었더라면 그는 베드로에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써 그는 깨닫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인간이었구나. 나 또한 유다와 다를 바가 없구나.’
그리고는 닭이 울 때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준비시킨 마지막 교육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가장 비판하는 인물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는 또 어떻습니까? 바오로는 자신이 가장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료인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것도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도 모자라 멀리 다마스커스까지
가겠다고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이 장님이었음을 말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살인자였음을 말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곧 메시아를 박해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하느님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음을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모두 살인자요 가장 큰 죄인임을 가슴깊이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로는 가슴까지 뜨겁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유다가 아니고 바로 ‘나’라면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될까요? 바로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그리스도를 목숨을 다해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감사입니다. 삶이 힘든 것은 감사가 부족해서이고, 감사가 부족한
것은 그만큼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죄로써 매번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임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면 더욱 큰 감사가 솟아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힘으로 그분의 소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어떤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교육 맨 마지막에는 교육 받은 모든
이들이 각자 전례를 위해 준비한 것들로 꾸며지는 미사가 있었습니다. 저희
조는 화답송을 맡았습니다. 저만 사제이고 나머지 분들은 평신도였기
때문에 제가 어떤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교육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교육을 준비한
사람들에 대해 이것저것 불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팀이 되어 함께
준비해야 하는 것조차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내 노력을 보태 더 완전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충
시간만 때우려다가 결국 준비를 잘 못해서 교육을 준비한 분들이 직접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을 짜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조들이 하는 것들을 보니 너무들 준비를 잘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도 웃고 있었고 교육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참여하게 하는 에너지는 ‘감사’에서 나오는구나. 누군가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고마워하게 하면 되겠구나.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우선시 요구하신 것은 당신께 대한 고마움이었구나.’
하느님은 우리를 창녀요 세리의 상태까지 낮추시기를 바라시는 이유는, 그
처지임에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더 큰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구원받기 합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구원해 줘봐야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지옥에 갈 처지였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한 역할은 절대 맡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동경비구역’이란 영화에서는 이병헌이 북한 초소에 끌려갔다가 그들을
죽이고 탈출한 영웅이 되지만 그는 결국 진실을 알고는 죄책감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맙니다.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지만 친구들을 죽인
것이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죄를
무마하고 잊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인자요 간음하는
자요 세리요 창녀임을 고백하고 그 역할을 맡을 때야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버스’란 중국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중국 시골길에 버스가 달려옵니다. 한 허약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다가 그 버스에 올라탑니다.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운전사는
여자입니다.
조금 더 가서 건장한 두 남자가 버스에 올라탑니다. 그들은 타자마자 갑자기
돌변합니다. 강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버스 안에는 장정만도 수십 명은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행패에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그들이 돈을 다 뜯고 내리려고 하는데 운전사 여자를 보더니 그녀를 강제로
끌고 내립니다. 그리고는 밖에서 못 된 짓을 합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마지막으로 탄 허약해 보이는 남자는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깡패들의 칼에 다리를 찔리고 맙니다. 이것을 본 버스의 사람들은 더 겁이
나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옷이 다 찢어진 채 여자 운전사가 다시 버스에 탑니다. 핸들에 머리를 박고
웁니다. 그때 다리를 절뚝이며 그녀를 구하려고 했던 남자가 타려고 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내리기 전까지는 출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남자는
구해주려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따지지만 사람들이 이 남자를 밀쳐내고
짐도 창문으로 내던집니다.
한참을 길에 남겨져 있던 남자는 누군가가 차를 태워줘서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가다보니 다리 밑에 많은 경찰들이 있고 자신이 탔던 버스가 다리
밑에 추락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찰이 이렇게 무전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버스에 탔던 사람 중에 그 여자가 당하는 것에 유일하게 책임감을
느꼈던 그 사람만이 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죄가 없는 사람들을
밖으로 밀쳐냅니다. 자신들의 정의롭지 못함을 밝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두 번 살인을 저지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를 밀쳐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음탕한 눈으로 간음하고, 화를 내며 살인하고, 내 안에서
그분을 수천 번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가난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의 책임을 우리가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호 사건을 볼 때도 우리 자신들도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있으면서
어떻게 유병헌이나 선장, 혹은 정치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가 될 때, 비로소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그런 사람들을 당신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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