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858기 실종사건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행태 분석을 위한 시론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 겸 시민의신문 편집부국장)
1. 프롤로그: 신화와 현실 속의 ‘모이라이 여신들’ 2. 사건 개요와 전개 과정: 억누르고 억눌러도 잠들 수 없었던 진상규명의 외침 3. 수지김 사건과 김현희 사건 비교분석: 가해자는 영웅 대접, 피해자는 천민 취급? 4. 기사모음: 한국언론 보도백태와 KAL기 가족회의 언론관 5. 상식적인, 근본적인 물음(1): 당사자인 북한의 입장은 무조건 무시돼야 하는가? 6. 상식적인, 근본적인 물음(2): 과연 북한은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비행기 폭파시켰나? 7. 에필로그: 공포와 걱정인가? 조화와 사랑인가?
1. 프롤로그: 신화와 현실 속의 ‘모이라이 여신들’
“우리는 KAL858기 사건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을 잃은 가족들입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도와주십시오. KAL858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주십시오. 당시 정부의 수사발표는 의혹 투성이였고, 재판과 특별사면도 정치적인 쇼에 불과했습니다. 세계 항공기 사고 중에서 단 하나의 시신, 유품 한 조각 발견되지 못한 사건이 바로 KAL858기 사건입니다. 참으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정부는 김현희 자백만으로 모든 조사를 마무리했고, 졸속 수사로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습니다. 수지김 사건을 보십시오. 이 사건이 당시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간첩사건임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국민여러분! 도와주십시오.”(KAL858기 가족회 대국민 호소문 중에서)
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 실종사건’ 14주기가 되는 날이다. 매년 그 날이 올 때마다, KAL 858기 실종사건 가족들이 반드시 악몽처럼 떠올리는 여인이 있다. ‘마유미’라는 일본 이름으로도 불리는 김현희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김현희는 ‘두 얼굴을 가진 묘한 여인’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실종사건 가족들처럼 그녀를 ‘희대의 악녀(惡女)’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녀를 단정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고대의 미녀(美女)’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 조갑제 월간조선 사장이 후자의 대표적 인물인데, 실제로 그는 월간조선 2000년 10월호 권두언에서 ‘미녀 공작원’ 김현희와 직접 만났던 ‘묘한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저는 1989년 봄 김현희를 서울 시내 모처에서 5일간 연속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사진보다 실물이 못하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저는 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김현희의 얼굴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45도 각도로 바라본 김현희의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앗시리아의 부조 같은 단정하고 신비한 분위기….”
필자는 조갑제 사장의 증언을 들으면서, 특히 “45도 각도로 바라본 아름다운 김현희의 얼굴” “앗시리아의 부조 같은 단정하고 신비한 분위기” 등의 진술에서 문득 그리스 신화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미(美)의 여신(女神)’ 아프로디테가 신들의 향연이 열리고 있던 올림포스로 안내됐을 때의 바로 그 장면이다. 신화연구가인 유재원(한국외대 언어학과) 교수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현대문학) 1권에서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계절을 주관하는 호라이 여신들이 새 여신을 맞아 보석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곧바로 신들의 향연이 있는 올림포스로 안내했다. 제우스를 비롯한 모든 신들이 아프로디테의 요염한 자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금발에 갈색 눈을 가진 여신의 피부는 상아빛으로 빛났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육체는 아름다움의 표본이었다.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숨을 죽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막연한 그리움과 노곤한 기대감과 욕망이 온몸에 스며든다.” 그리스 신화의 그 장면에서 1988년 1월 15일 안기부가 주관한 기자회견장에 안내된 ‘미모의 테러리스트’ 김현희의 얼굴에 넋을 잃은 대한민국 대다수의 성인 남성들을 연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그러나 오죽하면 ‘반공투사’ 조갑제 사장마저 ‘북한 공산집단의 항공기 폭탄 테러’를 규탄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터뷰를 하는 와중임에도 그 본연의 임무를 잠시 잊고 (그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바) 폭파의 원흉인 테러리스트의 얼굴에서 ‘앗시리아의 미녀’를 떠올렸겠는가.
때로는 ‘신화’가 ‘현실’이 된다. 안기부의 발표대로라면 항공기 폭탄 테러로 무고한 115명의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마’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전격적인 특별사면을 받고 ‘여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사건의 진위를 둘러싸고 각종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김현희 신화’는 정녕 ‘거품’이었던 말인가.
이와 관련,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둘러싼 사연은 매우 시사적인 동시에 섬뜩하기조차 하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흘린 피가 망망한 바다 위에 떨어져 거품이 되었고, 그 거품 속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신이 태어났으니, 그녀가 바로 아프로디테였다. 그리고 안기부의 발표와 김현희의 자백에 따르면,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는 ‘하늘’에서 폭파되었고, 115명의 무고한 생명은 ‘핏물’이 되어 ‘바다’로 떨어졌다.
앞에서 잠시 소개했듯이, 도리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우선 신화의 세계를 보자. ‘계절을 주관하는 호라이 여신들’은 아프로디테에게 보석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신들의 향연이 있는 올림포스로 안내했다. 이번에는 ‘운명을 관장하는 모이라이 여신들’이 아프로디테에게 ‘아름다움과 사랑의 직분’과 ‘항해하는 배와 선원들을 수호하는 직분’을 맡겼다.
이번에는 현실의 세계를 보자. ‘시국의 계절을 주관하는 안기부’는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장으로 김현희를 안내했다. 그리고 ‘정국의 운명을 관장하는 언론’은 살인마 김현희를 앗시리아 부조를 닮은 ‘미와 사랑의 여인’으로 묘사함으로써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군사정권을 수호하는 반공 수호신의 직분’까지 부여했다. 모름지기 언론의 사명은 사건의 의혹을 파헤치는 데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KAL858기 사건 당시에는 도리어 언론이 의혹을 숨기거나, 나아가 부추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신화가 아닌 현실의 모이라이 여신들’의 부끄러운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갖는
2. 사건 개요와 전개 과정: 억누르고 억눌러도 잠들 수 없었던 진상규명의 외침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 전에 우선 ‘KAL858기 실종사건’(일명 김현희 사건)의 개요부터 간단하게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1987년 11월 29일. 김대중 평민당 대통령 후보가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유세를 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 한국인 승무원과 승객 1백15명을 태운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858기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와 방콕 사이에 있는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바레인을 탈출하려던 폭파범 용의자 중 한 명인 김현희가 생포되었으며, 대선 하루 전인 12월 15일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됐다. 너무나 절묘한(?) 시점에 이뤄진 압송작전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다음날 모든 신문은 큼지막한 활자로 ‘노태우 후보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한반도에 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은 일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건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대한민국 당국은 가족의 시신만이라도 찾아달라는 유가족들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비행기 잔해와 블랙박스 추적을 열흘만에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수사를 주도한 안기부는 이듬해인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김정일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게 친필지령을 내려 KAL858기를 폭파시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사건 발생 2년 4개월 만인 1990년 3월 대법원이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살인 등 6개 항의 무시무시한 죄목을 적용해 사형선고를 확정했지만, 그것은 곧바로 의례적인 절차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희가 사형선고 한 달만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은 것이다.
KAL858기 실종사건의 악몽은 그렇게 우리의 기억에 저장돼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 왔고, 믿어야 했던 ‘상식’이자 ‘정설’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상식과 정설의 근거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김현희의 자필진술서(1987년 12월 28일 작성)와 그에 바탕해 작성된 ‘안기부 수사보고서’(1988년 1월 15일 발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주인공인 김현희는 어떤 인물인가.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김현희(일본명 하치야 마유미)는 1962년 1월 27일 평양에서 북한 외교관 김원석의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안기부가 밝힌 김원석의 직책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 김현희의 당시 직책은 북한 노동당 조사부 직원으로, 김옥화(북한), 마유미(일본), 백취혜(중국) 등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발표됐다. 한편 김현희는 인민학교 시절 ‘딸의 심정’ 등 두 편의 영화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으며, 평양 중신중 1학년 때인 1972년 11월 2일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 남한 대표 장기영에게 화환을 증정한 화동(花童)이었다고 발표됐다 그러나 안기부 발표 당시 김현희의 인적사항은 곧바로 진위 논란에 빠지고 말았다. 우선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주재 외교관이라고 했지만,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이 곧바로 확인한 결과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도 앙골라에는 북한 무역대표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산대표라는 직책도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의혹이 제기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잇따라 나온 이러한 의혹 제기는 정부 당국과 국내 언론에 의해 철저히 묵살 당했다.
그렇다면 KAL858기 실종사건 희생자 가족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가족들은 현재까지도 ‘유족’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실종된 가족들의 시신 하나, 유품 하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파’의 물증이 없으니 ‘실종’된 것이고, 가족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족’이라는 말은 쓸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한 맺힌 주장이다.
수지김 사건에서도 그 가족들이 힘없는 서민이었기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했듯이, 이 사건의 희생자들도 공교롭게(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승무원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중동에서 근무하다 귀국하던 노동자들이었다. 그 동안 이들 희생자 가족들의 억장은 무너졌지만, 국가안보와 반공이념이라는 절대적 명제가 지배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침묵을 강요당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억눌려 있던 희생자 가족들의 단말마적 목소리가 그나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였다. 그해 11월 23일 천주교인권위원회(위원장 김형태 변호사)를 통해 기자회견을 갖고, ‘KAL858기 실종사건에 대한 7대 의혹’을 제기하면서 정부와 국회 차원의 재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14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이유는 무엇인가. 희생자 가족들은 안기부와 그 후신인 국정원의 방해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에 앞장서기는커녕 안기부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던 한국언론의 책임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가족들은 2003년 검찰의 조사로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 수지김 사건을 보면서 더욱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해 가을 김현희이라는 인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내외저널과 월간조선 사이에서 행해진 지상공방을 지켜보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3. 수지김 사건과 김현희 사건 비교분석: 가해자는 영웅 대접, 피해자는 천민 취급?
필자는 ‘김현희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서, 뒤늦게 진상이 밝혀짐으로써 우리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수지김 사건’과 이 사건이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편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여인을 국가기관이 살인자와 공모해서 여간첩으로 몰아갔던 수지김 사건의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에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다. 사상 초유의 42억원 배상판결, 국정원의 유가족과 국민에 대한 사과, 장세동?이해구?이학봉 씨 등 전직 안기부 간부에 대한 부동산 가압류와 구상권 행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두 사건의 닮은 점은 다음과 같이 6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같은 해에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은 6월 민주대항쟁과 13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격동과 파란의 시기이자 전두환 정권의 집권 마지막 해인 1987년에 일어났다. 수지김 사건은 상반기인 1월에, 김현희 사건은 후반기인 11월에 발생했다.
둘째, 사건의 주인공이 여자였다. 언론은 이 사건들을 보도하면서 두 사람을 ‘미모의 여인’으로 불렀다. 특히 수지김은 ‘미모의 여간첩’, 김현희는 ‘미모의 테러리스트’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점이 여론의 주목을 더욱 끌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사건 결과가 정국의 흐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지김 사건은 전두환 정권을 코너로 몰아넣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김현희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넷째, 각종 조작과 의혹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수지김 사건이 최근 조작의 진상이 드러난 ‘과거완료형’이라면, 김현희 사건은 아직도 논란이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섯째, 희생자 유가족의 인권이 무참하게 짓밟혔다. 공교롭게도 두 사건의 유가족이 상류층이 아니라 서민층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국가안보의 미명하에 ‘가해자’는 화려한 인생을 살았고, 그것을 지켜보며 ‘희생자’의 유가족은 가슴을 쳐야 했다.
여섯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일부 인사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수지김 사건에 대해서는 이정훈 신동아 기자와 남상문 SBS PD 등이 7년 동안 추적해 숨겨진 진상을 밝혀냈고, 김현희 사건에 대해서는 전직 감사원 직원 현준희 씨□신성국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인권위원회 관계자□<배후> 작가 서현우 씨와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KBS 류지열 PD 등 소수의 언론인들이 18년 동안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왔다.
4. 기사모음: 한국언론 보도백태와 KAL기 가족회의 언론관
월간 말 1990년 8월호(최진섭 기자)
◇ “KAL 폭파사건에 대한 수십 가지의 근거 있는 의문점에 대해 당시 국내 언론은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수사 당국의 언론조작에 놀아난 감이 짙다. 일례로 처음에는 수사 당국이 흘린 정보를 쫓아 ‘마유미의 몸에 칼자국이 있다’ ‘종아리의 근육이 단단하고 이상적으로 발달되어 있다’는 등의 북한 공작원 설을 뒷받침하는 보도를 했는데, 안기부의 공식 수사발표는 이를 부인했다.”
◇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지그시 내리 감고 곧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흐느끼는 김현희. 한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그의 화려한 배우 같은 외모에 초점을 맞춰 천인공노할 ‘살인마’를 ‘매혹적인 테러리스트’로 분장시켰다. 일본 등에서 수백 통의 구애 편지가 왔다며 동정론을 유포했다. 그는 수줍음 잘 타는 다소곳한 평양 여자로 윤색되고 있다. 최근에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며 면죄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선보였다.”
한겨레21 2003년 12월 11일자(현준희 씨 기고문)
◇ “입에 자해방지용 테이프를 물고 손목 붕대에 묶여 김포공항에 압송된 김현희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잔혹한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고, 그런 ‘퍼포먼스’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에 일등공신이 됐다. 안기부로 끌려간 그 날부터 수사발표 때까지 한 달간 김현희의 근황에 관한 공식 발표는 일절 없었음에도 ‘온몸에 문신’ ‘단련된 허벅지 근육’ ‘어깨에 칼자국’ ‘주먹에 굳은 살’ 등의 언론 보도가 난무했다.” ◇ “눈물의 인터뷰 이후 ‘김현희 스타 만들기’는 전국적 열풍이 됐다. 전국 52개 방송사와 30여 개 일간지와 잡지들이 김현희 체포 이후 두 달 동안 10만 건의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 내용도 코미디 수준이다. ‘코를 높였다’에서 ‘유방이 크고 검은 편이다’ ‘히프가 펑퍼짐하다’ ‘온몸에 잔털이 많다’ 등. 여기에 ‘처녀다’ ‘아니다’까지 가세해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이런 선정적 기사에 빠질수록 의혹규명은 멀어졌다.”
통일뉴스 2003년 10월 31일자(김치관 기자)
◇ “김호순 씨는 2년 반 후 기체와 유품이 나왔다고 방콕으로 갔으나 ‘KAL 마크가 찍힌 쪼가리와 옷가지를 늘어놨는데 하나도 확인할 수 없는 쭈글쭈글한 옷들 뿐’이었는데 가족 중의 한 명이 통곡한 것을 한국일보가 유품을 인정하고 울었다고 왜곡 보도했다. 그래서 한국일보 사무실로 쫓아가 (사무실 집기를) 때려부수며 정정 보도를 요구했으나 결국 기자들이 ‘우리는 힘이 없다. 편집에서 잘리고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 “차옥정 회장은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남북대화가 열릴 때 기자들 수십 명이 있는 곳에서 유인물을 뿌리자 ‘플래시가 눈을 못 뜰 지경’이었으나 안기부 직원들의 ‘내 놔’ 한 마디에 기자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한 장도 남김없이 유인물을 넘겨줬고, 잠바 밑에 유인물을 숨겼던 할머니는 너무 놀라 바지가 다 젖었다고 회고하고 ‘안기부의 힘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힘이었다’고 증언했다.” ◇ “가족 증언자들은 또한 하나 같이 언론에 대해서도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고 차 회장은 ‘언론이 보도하는 것이 막강한 힘인데 그 당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16년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다.”
오마이뉴스 2003년 11월 3일자(장윤선 기자)
◇ “김병상 신부는 ‘나도 1987년 당시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KAL858기 가족들은 한많은 16년을 보냈다’며 ‘참으로 끔찍하게 조작된 이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담당자는 관련 사실에 대해 명백히 밝혀 달라’고 당부했다.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회장은 당시 정황을 설명하면서 ‘사고난 비행기를 수색한다고 방콕에 갔지만 초동 수색이 전혀 안 돼 있었다’며 ‘가족들이 블랙박스와 기체를 찾으라고 절규했지만 정부는 전혀 응답하지 않았고, 가족들의 주장은 언론에 한 마디도 공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임옥순(53) 씨의 남편 김덕봉(63) 씨는 87년 당시 현대건설 해외플랜트수출사업본부장이었다. 중언석에 앉자마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던 그녀는 증언에 앞서 ‘이 사건은 애초부터 전문지식 없이도 누구나 정부 발표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잘못된 여론몰이로 국민들은 허점 투성이인 이 사건을 한 점 의혹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분개했다. 특히 그녀는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그냥 보도한 언론에 분노한다’며 증언을 시작했다.” ◇ “차옥정 회장의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심지어 저희 집에 일본이나 독일 기자들이 찾아와서 이 사건을 취재하기에 제가 물어봤지요. 당신네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이 제게 말하기를 비행기 실종 2시간만에 테러라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그렇게 되묻더라고요. 그게 우리나라 언론과 정부의 태도입니다. 자국민을 보호할 정부와 바른 말을 전달해야 할 언론이 그 지경인 것이지요.’”
5. 상식적인, 근본적인 물음(1): 당사자인 북한의 입장은 무조건 무시돼야 하는가?
크로스 체킹(Cross Checking)은 취재의 기본이다. 그러나 냉전 상황이라는 미명 하에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북한의 입장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따라서 냉전의 편견을 걷어내고 18년 전 당시 북한이 어떤 입장을 밝혔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때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한항공 858기 가족회는 지난 10월 17일 ‘대한항공 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북한 현지조사를 실시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다음은 그 성명서 내용 중의 일부이다.
“1988년 1월 15일 안기부는 북한 대남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하여 대한항공 858기가 테러 폭파되었다는 수사 발표를 하였지만, KAL858기 가족회와 대책위의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북한 당국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먼저 북한 로동신문은 북한 외교부 대변인의 성명을 통하여 안기부 수사에 대한 반박문을 게재하였습니다. 로동신문 1987년 12월 6일자, 1987년 12월 16일자, 1988년 1월 16일자, 1988년 1월 25일자를 통하여 북한 외교부 대변인 성명 전문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안기부는 김현희의 진술에 의거하여 사건 조사를 마무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현희 진술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음이 밝혀졌습니다. 김현희의 가족사항, 화동 사진, 항공기 출발과 도착 시간, 해외 공작 과정에서의 숱한 거짓들이 확인되었습니다. 김현희의 거짓 진술에 근거한 안기부 수사도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기부의 수사 발표를 믿을 수 없어 우리 가족회는 진상규명을 위하여 북한 현지 조사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성명서까지 나오게 된 데는 진상규명 요구를 철저히 외면해 온 한국언론의 부끄러운 업보가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북한의 당시 입장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분석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과연 북한이 사전의 시나리오에 따라 천인공노할 민족상잔의 테러를 저지르고도 거짓 연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접하고 즉자적 반응을 한 것인지 판달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당시 북한이 제기했던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신문 1987년 12월 6일자
◇ “이번 남조선 려객기의 실종사건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 “이번에 사고가 난 려객기로 말하면 괴뢰들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한때 기관 고장으로 불시 착륙한 일도 있고 바퀴 고장으로 두 번씩이나 기체 착륙한 사실도 있는 폐물 비행기이다. 이번 사고가 발생하자 승객들의 유가족들이 괴뢰 당국에 국제항로에 띄울 수 없는 비행기를 취항시켰다고 일제히 항의한 것도 우연하다고 볼 수 없다.” ◇ “원래 남조선 괴뢰들은 그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공화국을 걸고 반공 대결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고질적인 악습으로 하고 있다. 남조선의 거짓말 능수들은 저들이 일본 도꾜에서 감행한 김대중 납치사건도 우리의 소행으로 광고하였고 재일동포 문세광을 시켜 자작 연출한 이전 독재자에 대한 8.15 저격사건도 우리와 결부시켰다. 그들은 지어 남조선 내부에서 일어난 김포비행장 폭발사건도 우리와 귀결시켰으며 얼마 전에 돌아온 레바논 주재 남조선대사관 도 서기관의 실종사건도 우리의 납치행위로 조작 공포하였다.” ◇ “남조선 괴뢰들은 이번에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려객기 사건을 적들의 대통령 당선 음모에 정치적으로 리용하는 놀음부터 벌리기 시작하였다.” ◇ “군정의 종말을 앞에 두고 운명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군부독재자들에게는 그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세를 역전시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황의 조성이 필요한 것이다.” ◇ “남조선 괴뢰들이 이미 모략극의 막을 올린 이상 그들의 모략은 계속될 것이며 사태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에도 번져갈 수 있다.” ◇ “우리에게서 려객기에 타고 있었다는 남조선의 로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노동신문 1987년 12월 16일자
◇ “알려진 바와 같이 남조선 려객기가 실종된 때로부터 15일 이상이 경과하였으나 아직 사고 원인도 밝혀진 것이 없으며 잔해 하나도 확정적으로 찾아낸 것이 없다.” ◇ “남조선 괴뢰들은 선거 전야에 마유미를 서울에 끌어옴으로써 유리한 선거 표밭을 극적으로 조성마며 선거 후에 폭발할 수 있는 대중적인 항쟁의 불길을 끌 소방차를 미리 마련해 보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저들의 파멸을 촉진하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노동신문 1988년 1월 16일자
◇ “괴뢰들은 마유미라는 여자를 어떻게 하나 우리와 관련시키기 위하여 학력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나 그가 다녔다는 평양의 인민학교나 중학교, 대학에는 그런 학적을 가진 녀학생이 없으며 그가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그런 이름을 가진 대학이나 양성소도 없다. 더우기 괴뢰들은 그의 나이를 26살이라고 하면서도 그가 대학예비과 1년을 거쳐 2학년 재학중인 1980년 2월에 선발되어 7년 8개월 동안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공화국의 학령 기준으로 볼 때 그의 나이는 28살로 되어야 하는데 도대체 26살이라고 한 것은 어떻게 계산된 것이며 대학을 다니고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것은 어느 때로 보아야 하는지 누구도 리해할 수 없는 모순 투성이들이다.” ◇ “남조선 괴뢰들이 마유미라는 여자를 우리와 연관시키려고 그를 려객기 공중폭파범으로 공개하면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물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수사결과라는 것이 날조라는 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원래 물적 증거가 없이 혐의자의 진술만으로 그 어떤 사건도 수사학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으로 되고 있다.” ◇ “북 출신이라고 하는 여자가 괴뢰수사관들이 써준 원고를 억지로 읽으면서 우리 북반부 사람들은 쓰지도 않고 남조선 사람들만이 쓰는 ‘티비’니 ‘속죄’니 ‘약주병’이니 하는 말을 몇마디 외웠는가 하면 입에 자갈까지 물리고 끌어온 그를 마치 관광객처럼 승용차에 태워 서울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보게 하고 보지도 못한 대통령 선거 소감까지 말하게 한 것은 조작극의 진상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놓게 하였다.”
노동신문 1988년 1월 25일자
◇ “우리가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남조선 려객기 사건은 우리 공화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조선 괴뢰들의 자작자연극이며 그들의 ‘수사결과’라는 것은 거짓과 기만과 모순으로 엮어진 날조품이다.” ◇ “력사적으로 미국은 남조선에서 식민지통치 위기가 조성될 때마다 각종 모략사건들을 꾸며내여 우리를 공격하는 반공화국 도발 소동을 일으켜 왔다…1980년 5월 광주인민봉기로 전례 없는 식민지 통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그것을 ‘북의 간첩’의 조종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허위선전을 퍼뜨렸으며 심지어 1986년 11월에 남조선 인민들의 반미반파쑈투쟁이 앙양되자 ‘공화국 이상사태’라는 황당무계한 거짓말까지 날조하여 위기수습에 리용하였다는 것도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6. 상식적인, 근본적인 물음(2): 과연 북한은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비행기 폭파시켰나?
“북한의 김정일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게 친필지령을 내려 KAL858기를 폭파시킨 사건이다.” 1988년 1월 15일 발표된 ‘안기부 수사보고서’의 최종 분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사건 당시부터 여러 가지 반론에 부닥쳐야 했다. 우선 범행의 시점과 동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다음은 월간 말 1990년 8월호와 1998년 11월호 기사가 당시까지 나왔던 의혹들을 정리한 것이다.
“설령 마유미가 체포되지 않고 완전범죄로 KAL기를 공중 폭파시켰다 해도, 북한이 얻을 것은 무엇이었나. 김현희는 ‘88서울올림픽 참가신청을 방해하기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결과는 북한 자기 무덤을 파헤친 꼴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 중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노동자들이 탑승한 비행기를 폭파시킨 점에 의아해 했다. 이 점에 대해 김현희는 ‘북한은 실제로는 노동자 천국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장 천시 받는 곳’이라고 강변했다.”
“의문의 핵심은 왜 하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정말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 의문에 대해 답을 주는 일은 이 사건의 실체와 직결되어 있다. 당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노태우 후보는 KAL기 사건이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국민들이 이러한 위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야당 후보를 선택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강조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범죄 수사의 기본은 그 사건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은 무엇을 얻기 위해 그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김현희가 안기부 수사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 개 조선 책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목적을 공식적으로 달성했음에도 올림픽 개최를 막지도 못했고, 여당에 타격을 입히기는커녕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잔혹한 테러 국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한편 통일부 남북회담 사무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책동했다는 주장과 달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주재 하에 남북한이 체육회담을 열어 진지한 대화를 계속해 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실제로 회담자료를 검토한 결과, 당시 북한은 체육회담에서 크게 손해볼 것이 없는 입장에 서서 공동주최 원칙을 주장하면서 IOC와 KOC의 양보를 받아내는 등의 실리를 취하고 있었다. 아울러 소련과 중국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의사를 북한에 분명히 밝힘으로써 당시 국제 정세도 북한이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테러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매우 컸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우선 남북체육회담 부분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OC 주재 하의 제4차 남북체육회담이 1987년 7월 14?15일 양일간에 걸쳐 ‘로잔느’의 IOC 본부에서 열렸다. 이보다 앞서 IOC 측은 1986년 6월 12일 북한을 서울올림픽에 참가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결승전을 포함한 탁구와 양궁 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개최하고, 남북연결 도로 사이클 및 축구 1개 조 예선경기를 북한 지역에 배정하며, 올림픽 관련 문화행사를 남북한 양 지역에서 개최한다는 이른바 중재안을 제시한 바 있다. 더욱이 IOC 측은 중재안에 대한 북한의 진의를 타진하기 위해 4차례에 걸친 서신교환과 1차례의 접촉(1987년 2월, 로잔느)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7월 15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제4차 남북체육회담 공동성명 내용을 발표했다.
○. IOC는 올림픽헌장에 따라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한 사실을 재확인함.
○.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성공과 모든 NOC의 참가를 보장하기 위한 IOC의 꾸준한 노력에 대해 모든 관련자들은 주목하기 바람.
○. IOC는 4차에 걸친 회담, IOC 대표단의 평양방문 결과, 최근 국제경기연맹(IF)과 각국 NOC들과의 협의에 근거, 기존 중재안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은 경기 종목의 조직을 북한 NOC에 부여함.
-탁구, 양궁(남여), 여자배구 -축구 예선 1개조 -사이클 남자 개인 도로경기
○. IOC 제안에 대해 양 당사자는 제24회 올림픽대회 초청장이 1987년 9월 17일까지 IOC가 각 NOC에게 발송해야 하는 사실을 고려해서 가능한한 빨리 로잔느 IOC 본부에 발송해야 함.
○. IOC는 IOC의 제안이 올림픽 운동 역사상 예외적이고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함.
이와 같은 IOC 측의 수정 중재안에 대해 KOC 측은 1987년 8월 17일 회신을 보내, 북한 측이 그들의 공동주최 주장을 철회하고 자유왕래를 보장하며 서울 개회식과 폐회식에 무조건 참가할 것을 약속한다면 IOC 측 수정안을 수락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북한 측도 그해 8월 11일 진충국 북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그들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북한 측은 △올림픽 경기종목 중 5개의 완전경기종목과 1개의 불완전경기를 북한 지역에서 개최할 것 △제5차 회담에서는 북한 지역에 배정할 종목 문제뿐만 아니라 경기대회의 명칭 문제, 조직위원회 구성 문제, 개막식과 폐회식 문제, TV 방영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토론할 것 △8월중에 제5차 회담을 개최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당시 국제 정세도 북한이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테러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매우 컸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무엇보다 먼저 중국마저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의사를 북한에 분명히 밝힌 것이다. 다음은 중앙일보 1987년 12월 4일자에 실린 기사이다.
[북경AP=연합] 조자양 중공산당 총서기는 지난달 중공을 방문한 북한 수상 이근모에게 중공이 내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북경의 동구 소식통들이 3일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소식통들은 조가 이에게 올림픽은 국제스포츠행사이며, 체육강국인 중공은 이 대회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중공은 그간 북한의 올림픽 일부종목 개최요구를 지지해 왔다. 지난 84년 소련 및 동구 국가들의 보이코트에도 불구, LA올림픽에 참가했던 중공은 서울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소식통들은 또 이근모가 중공의 서울올림픽 참가결정을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이보다 앞선 10월 하순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슐츠-셰바르드나제 미소 외무장관 회담에서도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문제가 거론됐다고 중앙일보 1987년 12월 4일자는 전하고 있다. KAL858기 실종사건으로 시끄럽던 1987년 12월 9일 열린 레이건-고르바초프 미소 정상회담 실무회담에서도 올림픽 문제는 중요한 안건으로 다루어졌다. 다음은 한국일보 1987년 12월 12일자 기사의 한 대목이다. “미국은 또한 이 회담에서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소련 등 모든 국가의 차가를 촉구했으며 소련은 이에 대해 북한이 일부 종목을 개최할 수 있도록 한국을 설득토록 미국에 요청했고 소련 자신은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리라는 인상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7. 에필로그: 공포와 걱정인가? 조화와 사랑인가?
다시 그리스 신화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겐 수많은 연인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전쟁과 폭력의 신’ 아레스이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 불륜을 저질러 네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포보스(공포), 데이모스(걱정), 하르모니아(조화), 에로스(사랑)가 바로 그들이다. 그렇다면 김현희 사건, 즉 KAL858기 실종사건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공포와 걱정인가? 조화와 사랑인가? 그것을 결정할 권한만은 온전히 7000만 겨레의 성원인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KAL858기 실종사건의 진상규명은 올바른 선택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이 자료는 2005년 11월 9일 국회도서관에서 'KAL858기 진상규명 촉구와 언론의 보도행태에 관한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나선 여의도통신(시민의신문) 정지환 기자가 발표한 글이다.
▶이날 토론회에는 KAL858가족회 회원 등 50여명이 참가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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