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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모두 함께 사랑의 춤을
김광한
서울역 광장의 밤 1시. 통금이 있던 시절 같으면 썰렁했을 이 광장에, 간혹 호객 행위를 하기 위해 어슬렁대는 늙은 포주의 발걸 음이 방범대원의 눈을 피해 간혹 눈에 띄었을 이 광장에, 언제부턴 가 광장 사람들이 문패 없는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내의 뒤를 따라나선 그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그 동안 소외되고 버림받은 지역을 섭렵해 놔선지 서울역의 생리를 누구보 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물론 서울역뿐만 아니라, 이 시각에는 대 도시의 역마다 나름대로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청량리역을 비롯해 용산역도 그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은 사정이 엇비슷한 것이다. 이 시간에는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정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거나, 내일을 위해 꿈꾸는 설계를 하고 있겠지만, 아직도 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대열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었다.
서울역 광장을 배회하거나, 양동이나 도동, 봉래동 근처의 무허가 하숙집을 어슬렁거리며 지친 몸의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그 들은 규격 미달의 주거 부정인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인파들 가운데 걸러진 사람들, 거기에 서울역 을 중심으로 기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찌다 서울에 올라와 영 악한 사기꾼에게 가진 것 모두 털리고 돌아갈 고향을 잃은 사람들, 고향에 찾아가도 반겨 줄 이가 없는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서울역 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파출소 직원들의 푸대접을 받으며 노숙 하는 사람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치매병 환자들, 불구자, 이따금 나병 환자 수용소에서 탈출한 문둥병자, 뇌성 마비가 돼 가정에서 쫓겨난 자 등등, 이 사회에서 제대로 자기 문패 달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잡초처럼 뿌리박고 모여 살고 있는 곳, 그곳이 서울역의 밤 1시부터 새벽 5시까지의 광경이었다. 사내가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처음엔 난 짐작이 가질 않 았다. 그러나 점차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속깊은 내용을 알 수가 있었다. 사내는 여전히 군복 물들인 상의 차림에 검은 고무신을 신 고 있었다. 사내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 옷이 무척 낡아 있었다.
"이곳에 우리와 형제가 될 사람들이 많이 있소. 나는 그 사람들 에게 평화를 주고 싶은 것이오. 그 사람들은 돌아갈래야 어디 돌 아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오. 도시가 만들어 낸 부산물이오. 도시 는 능력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을 편을 갈라놓았소. 가난한 자와 부자, 권세 있는 자와 권세 없는 자, 그리고 소외되지 않은 자와 소외된 자로서,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자는 가난한 자의 몫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오. 그들에게 물건을 던져 주는 것보다 사랑과 평화 를 주어야 하오." 사내가 앞장섰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서울역 바로 앞의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몇 사람들 틈에 끼었다. 얼굴이 까져 아직도 생채기가 아물지 않은 사람, 알 코올에 젖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절름발이, 애꾸,뇌성 마비 등 온갖 종류의 불구자들과 온갖 종류의 범죄, 온갖 종류의 고통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정은 이미 까마득한 과 거의 일이 었다. 그들은 서로 술잔을 기올이고 있었다. 사내가 끼어들자, 그들 중 의 대표인 듯한 사람이 우리들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통 명스럽게 말했다. "어디서 놀았소 ? " 사뭇 텃세가 밴 말이었다. "오늘 우연히 왔소. 형제가 되려고‥‥‥‥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이 사십대 중반의 생채기 있는 사내는 형제란 말을 난생 처음 듣는 듯했다. 그는 형제란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다. "형제가 뭐요 ? " 그가 재차 물었다. 그리고 사내의 절름거리는 발목을 보자, "노형도 신세가 따분하군." 하며 그들 틈에 끼워 주었다.
"형제들에게 기쁨을 나눠 주려고 왔소." "형제 ? " 다른 사람이 의문 부호를 붙였다. 그 사람은 생김새와 말투로 보 아서 이런 곳에서 배회하긴 좀 아까운 사람이었다. "형제 ? 당신이 우리 형제라고? 혹시 당신 전도사나 목사 아니 오? 전도사나 목사들이 가끔 와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가는 데‥‥‥‥ 내가 끼어들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내에게 닥칠 봉변을 막아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분은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럼 ? " "여리분에게 기쁨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우리에게 기쁨이란 술 마시는 것밖에 더 있나? 당신 소주 값 좀 내놔," 내가 주머니에서 천 원을 꺼내 주었다. 그러자 사내가 공손해졌 다. 그 사내가 서울역 안에 있는 구내 매점으로 가고 나서 사내가 내게 말했다. "형제여,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김수환 추기경이나 한경직 목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소. 그러니까 신부나 목사가 뭣하 는 사람인지 모르지요. 종교 자체를 모르니까. 교회나 성당에 가족 끼리 손잡고 나가는 사람들을, 이 사람들은 모두 배운 사람이고 가 진 사람인 줄 알고 적개심을 품고 있소, 종교는 바로 이런 사람들 에게 필요한데, 이들이 들어갈 문은 너무 좁소, 좀은 문으로 들어 가려 해도 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들을 막고 있소. 이들이 내는 헌금 의 보잘것없음과, 생김새가 보통 사람과 선별된다는 것과, 옷차림 등에서 더욱 좁은 문을 만들고 있는 것이오. 이 형제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오,
그들은 이 사람들을 이용하여 큰 자선이나 베푸는 듯이 선전을 하오. 일종의 샘플이오. 그러나 결국 이들은 거기서도 버림을 받게 되오. 병자로서의 일생을 마치고 마는 것이오, 이들을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종교의 직 무유기요, 직무유기를 하는 성직자들은 이미 성직자가 아니오." 그의 다소 긴 이야기가 끝났다. 구내 매점에서 소주를 사갖고 온 사내가 소주를 한 컵 따라 사내에게 권했다. "전도사 양반 한 잔 하시오." 그는 사내를 전도사라 블렀다. "고맙소." 사내가 그 술을 마셨다. 술이 들어가선지 사내가 일어섰다. 그리 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처용무 같기도 하고 무당 춤 같기도 했다. "형제들이여. 나를 따라 춤을 춥시다. " 그러자 조금 전의 사내가 경멸하듯 말했다. "전도산 줄 알았더니 미친 놈이었군." 사내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그들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사내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 동작을 놀렸다. "사랑하시오! 사랑하시오! 서로 사랑하시오! "
사내는 계속 뛰어다니면서 춤을 추었다. "나를 따라서 춤을 추시오." 그가 미친 듯 춤을 계속하자, 아까부터 그의 행동을 지켜 보던 체격이 우람한 중년 사내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사내의 멱살을 잡 았다. "야 임마 ! 여기서 뭣하는 거야! " "춤을 추는 것이오. 사랑의 춤을, 형제들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오." 사내는 그의 목을 점점 죄었다. "이 새끼, 미쳤거나 예수쟁이 아닌가, 예수쟁이라면 어디 맛 좀 봐."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야, 새끼야 ! 성경에 보니까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 놓으라고 했지, 어디 한 번 맞아 봐! " 중년은 사내의 따귀를 훔쳐 갈겼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에서 바 람이 일었다. 사내가 따귀를 맞자 조금 비틀거렸다. "이번엔 오른쪽이다 ! "
중년이 사내의 오른쪽 뺨을 세차게 때렸다. 내가 말렸다.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소?" 그러자 중년은 내게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새낀 또 누구야! " 하며 내게 발길질을 하려 했다. 나는 그 기세에 잠시 몸을 피했다. "이 미친놈과 한 패거리지 ? 맞아 봐야 알겠니 ! " 하며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 엉겁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 사람을 모르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오." "그럼 빨리 꺼져 ! " 나는 자리를 피했다. 서울역 쪽으로 걸어가다가, 나는 문득 사내 에게 죄스러움을 느꼈다.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랬을까? 사내의 폭력이 두려워서였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새벽녂까지 세 번 부 인했듯이‥‥‥‥ 그러나 사내는 나의 이 어줍지 않은 행동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중년은 따귀를 때려도 아무런 저항이 없자, 약이 오르는지 그의 빈약한 다리를 걷어찼다. 사내가 고꾸라졌다. 사내는 고꾸라지면서 도 중년에게, "나를 한 대 때리면 하느님의 복을 한 번 받고, 두 번 때리면 두 번 받소. 때리시오! " 하며 외쳤다.
"아니, 이 병신이‥‥‥‥ 중년이 이번에는 구두발로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역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는 사람들이, 무슨 큰 일이 났는 줄 알고 주위에 모여들었다. 중년은 무리들에게 영웅이나 된 듯이 외쳤다. "이 새끼가 주정을 했잖소.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 주었소. 보아 하니 전도사 같은데, 전도사라면 아주 질색이야. 내 마누라도 전도 사가 꾀어 집을 나갔소. 이런 놈들은 진작에 꺼졌어야 하오! " 사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측은한 듯이 바라보았다. "여러 형제들, 서로 사랑하시오. 그분이 말했소 ! " 나는 그제서야 그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조금 전 그를 때린 중 년이,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의 행동이 범인과 다르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가책을 느꼈는지, 그의 몸을 부축해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사과를 했다. "뉘신지 모르지만 조금 전의 결례를 용서하시오. 전도사 같기도 하고 목사 같기도 한데, 이런 험한 곳은 왜 왔소?" 중년의 말투가 순해졌다. "형제들과 사랑하고 싶어서요. 형제는 내게 많은 사랑을 해 주었 소. 고맙소." 중년은 사내의 말 뜻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어찌 보면 도사 같기도 하고 달관자 같기도 했다. 그러자 이 사내는 또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년이 사내에게 말했다. "사실 나는 전과 5범이오. 물론 전과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오. 전과도 죄종에 따라 다르니까. 그러나 절도나 강도, 강간 같은 파 렴치범은 아니오.그래서 나는 이 5범이란 걸 결코 부끄럽게 생각지 않소. 나는 한 마디로 양심수였소. 아까 선생한테 난폭한 짓을 했 다고 해서 폭력 전과가 있는 것은 아니오. 감옥이 나를 그렇게 만 들었을 뿐이오 양심수란 말 아시오? 양심으로써 죄를 범치 않았 는데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옭아넣는 것이 바로 양심수들이오. 권 력자가 양심수를 많이 만들어 내고 있소. 반공법이라든가 보안법이 라든가, 아무튼 나는 권력자가 그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몇 번의 감옥살이를 했소. 감방 생활이 란 대략 이렇소.자유를 구속해 놓소.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_자유요. 이 자유 시간이 종교 시간과 일치가 되곤 하오.물론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교도소 측의 선전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감방 안에서도 일요일이면 종교 시간이란 것이 있소.
아침을 먹고 식기 청소를 마치는 열시쯤이면 간수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오. 물론 대 부분 나이롱이지만, 간혹 종교에 깊숙이 빠진 죄수들도 많이 있소. 그들은 그 시간을 일주일 내배 기다리고.있소. '불교 신자 나와! ' '기독교 신자 나와! '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감방마다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소란해지고 떠들씩하오. 감방의 철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들은 지옥문을 나서는 것처럼 환호성을 지르오. '야 이 새끼들 아! 조용히 해 ! 그런다고 천당 갈 줄 알아! ' 교도관의 험한 욕 설에 자칭 신자들은 그들의 호명대로 바닥에 꿇어앉아 점호를 받소. 불교 신자 사십 명, 기독교 신자 오십 명, 일일이 점호를 받고 나서 그들의 뒤에 꼬리표가 달린 죄수들, 네다바이꾼, 사기꾼, 강간범, 횡령범 등등 온갖 종류의 죄수들이 예수님, 성모님, 마리아님의 은 덕을 보러 줄레줄레 나가오, 그들은 신부와 목사가 허락받은 시간을 그들이 갖는 유일한 자유라고 생각하곤, 모처럼만에 사람 대접을 받소. 목사나 신부들은 그들에게 형제 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호칭하오. 유일한 자유 시간이 왜 그리도 짧은지, 마침내 신부나 목사가 돌아가면 또다시 처참한 현실로 돌아와야 하오.
그러나 성 직자들이 돌아가는 곳이 어딘가, 그들은 의무적으로 성당 사제관이 나 교회로 돌아가오. 거기 가서 신자들에게 교도소에 갔다는 이야 기를 하오. 마치 가장 큰 자비나 베풀고 온 것처럼 죄수들을 양념 삼아서‥‥‥‥ 그들은 죄수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신의 영웅적인 행위를 더 사랑하오. 때로는 그들의 가족을 유학보내 공부 잘하고 있는 아들을 더 사랑하오, 과연 그들이 예수와 석가의 자비 를 빌러 오는 것이 종교의 몫인가. 신도의 헌금과 연보와 공양으로 땀흘리지 않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성직자들, 그들의 얼 굴은 영양가 높은 단백질 때문에 혈색이 돌고 있소. 그들에게 죄수 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작은 도구일 뿐이오. 그들이 상대 하는 사람들은 가진 사람, 벼슬 있는 사람들이오, 그래서 나는 성 직자들을 경멸하고 있소. 잘 지어진 절이나, 성당, 교회 같은 곳에 나자로 같은 거지가 찾아간다면 십중팔구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 것이오, 그들은 봉투나 수표를 가져오는 사람을 환영하오. 나는 그 들의 위선을 싫어하오 그런데 전도사넘은 왜 후줄구레한 옷을 입고 여기 나왔소. 전도사님도 집에 가면 여우 같은 부인에 토끼 같은 자식이 있을 것 아니겠소? 여기서 일부러 미친 척하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시오."
내가 중년의 말을 제지했다. 내가 그의 말을 제지하지 않았으면 그는 더 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이분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진정으로 형제가 되기 위 해서 찾아온 가장 가난한 사람이오." "가난한 사람이라고 ? " "그렇소." 중년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경멸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아마도 사내가 일부러 헌옷을 입고 찾아와 그들의 동태를 파악해, 교회나 그가 소속한 단체에 자신이 겪었던 봉사 활동 같은 것을 보고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기 와서 설교하는 목사나 전도사들, 모두 위선자들이오. 그들 은 여기 왔다 간 것을 교회의 설교에 이용하지." 이때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쓰고 입가를 마스크로 가린 채, 한쪽 다리를 절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중년이 그를 가까이 오게 했 다. "오씨, 이리 좀 오시오." 아마 그의 성이 오씨였던 것 같았다. "전도사 양반, 이 사람은 나병 환자요. 수용소에서 탈출해 여기 온 지 며칠 됐소. 이 사람은 아무 곳에서도 받아 주질 않았소. 그 _러나 여기서는 이 사람을 받아 줄 수가 있었소,
왜냐고? 모두가 형제이니까." 중년이 그의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겼다. 그의 얼굴이 전등불에 드 러났다. 생각한 대로 흉측한 얼굴이었다. 인중 가운데가 뻥 뚫려 마치 해골을 연상케 했다. 한쪽 눈은 실명해 있었고, 또 다른 눈도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 중년은 사내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었다. 어느 흠집은 고름이 흐르다 멎어서 딱지가 검게 붙어 있었고, 어느 흠집은 아직도 활화산처럼 벌겋게 벌어져 그 사이로 노란 고름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마치 .분화구처럼‥‥‥‥ 분화구에선 피고름이 엉켜서 흐르고 있었다. 중년이 사내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성은 오씨요. 그러나 성 따위가 뭐가 필요하겠소, 이 사람을 전도사께서는 사람으로 취급하겠소?" 사내가 대꾸했다. "같은 형제요." "형제 라고요 ? " 그가 비웃듯 말했다. "그럼 좋소. 다시 한 번 묻겠소. 이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겠소?"
사내가 대꾸했다. "그렇소, 형제요," 사내가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좋소.당신네 같은 전도사나 완장 찬 교회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형제라는 용어를 행동으로 보여 주시오. 바로 이 자리에서," "행동으로 ? " "그렇소." 내가 중년에게 항의했다. _ "선생은 이 사람을 우롱하려고 합니까?" "우롱이 아니오, 진실이오." 중년이 이번에는 심각하게 사내에게 말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이 사람, 오씨의 곪은 곳을 전도사의 입으로 빨아 내십시오. 예 수가 그랬듯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란 말이오. 그것을 당신이 입 으로 이야기한 형제들에게 보여 주란 말이오." 사내가 중년을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중년은 예수가 문둥병자 의 고름까지 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내가 슬픈 어조로 답변했다. "나는 형제의 강요에 의해서 행동을 하긴 싫소. 그것은 그분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오. 사랑이란 강요가 아니오. 헌신이오. 나는 헌 신을 하고 싶은 것이오." "그게 그것이 아니잖소. 사랑이나 헌신이나 모두 예수쟁이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용어가 아니오." 중년이 비웃듯이 말했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호기심을 갖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 보고 있었다.
사내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이 사람과 진정으로 형제가 되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면 나는 하겠소." "그렇소. 불행한 일이오." 중년은 계속 재촉을 했다. 중년은 사내가 앞으로 할 행동을 은근 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형제가 갖는 확신이라면 서슴지 않고 하겠소." 사내는 중년에게 원망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무릎을 꿇 었다. 그리고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중년이 말했다. "이제 보니 천주교 쪽 사람이로군," 사내는 잠시 기도를 했다. 중년의 만용을 용서해 달라고, 그의 _강퍅한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마음 속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고, 빈약한 마음과 내재된 증오심을 용서해 달라고 기원했 다. 그러자 그의 마음 속에 어떤 말씀이 와 닿았다. 그것은 가슴을 울리고, 마치 전기가 통하는 범접치 못할 말씀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아훼니라. 사랑하라. 더욱 열심히 사랑하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준 말씀이다. " 사내는 일어나 문둥병자 오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무 릎을 다시 꿇었다. 마치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줄 때처럼,그의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생각난 듯이 그의 무릎에 난 상처를 입을 대 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상처가 모두 빨려 나갈 때까지 그는 계속 빨아댔다. 마침내 피와 고름이 모두 빨렸는지, 그 자리엔 아물지 않은 벌건 살이 내 보였다. 사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휴지를 준비했다. 아마도 그의 행위를 불쌍하게 여겼던 탓이다. "휴지에 침을 뱉으시오." 그러나 사내는 휴지 같은 곳에 침을 뱉지 않았다. 그대로 삼켜 버렸다. 병자의 상처를 성한 사람이 빨아서 삼킨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걸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병 환자 오씨가 사내의 목을 껴안았다. "이제 됐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오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번지고, 이내 그 눈물은 사내의 손 등에 전해졌다.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혹은 잔인한 즐거움으로 빙글빙글 댔으나 사내가 고름을 계속 빨아 삼키자 사내에게 어떤 존경심 같은 것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 세 상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자, 사내 에게 갖는 경외감이 커졌던 것이다. 그것은 성서나 동화책 같은 곳에서 간혹 있을 법한 일이었기 때 문이다. 그는 상처를 모두 빨고 난 다음 나직이 이야기했다. "또 계십니까? 병들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형제들은 모두 내 게 오시오. 내가 형제들의 상처를 받아 주겠소. 형제들의 아픔을 내. 입으로 빨아내 주는 걸 그분은 모두 알고 있소. 나오시오:"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순간, 사내의 눈에서 섬광이 흘러나왔다. 성스러운 광채였다. 사 내의 못생긴 얼굴에서 빛이 나왔다. 대낮같이 밝은 빛이었다. "아, 저 빛 ! " 사람들은 감탄했다. 사내가 다시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누구든지 오십시오. 마음이 병들어 있는 사람이라도 좋소. 이 시간에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들은 모두 나오십시오. 서슴지 마시고 나오십시오. 상처의 치료는 의사가 하는 것이오 나는 여러분들의 병들고 모자라는 영혼, 잃어버린 영혼을 되돌려 주고 싶은 것이오." 그러자 그들 중의 몇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고 있 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키가 큰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사내를 좋은 놀림감으로 알았던 것이다. 중년은 사내의 발 밑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저의 모자란 행동을 용서하십시오. 교만과 방종을 질책해 주십시오." 사내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형제의 순수한 마음과, 영혼을 어지 럽힌 그들과 우리들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 그는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한 차례 바람이 불더니 낙엽이 날려와 그들 앞에 떨어졌다. "이 형제들의 헐벗은 영혼을 위해,이'영혼에게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소서. 증오와 갈등으로 일그러진, 용서할 줄 모르는 이들의 마음을 녹여 주소서. 이 형제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될 고통을 어루만져 주소서," 그러자 또 다른 말씀이 .들려 왔다. .그 말씀은 사내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조용하게 이어졌다. , 사랑하는 아들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네 안에 살아 있는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너의 외면과 내면을 모두 알고 있다. 너를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비방과 칭찬 그 모든 것을 나와 함께 사는 너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타인이 ‥‥‥ 세상이 모두 너를 욕하더라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내민 손은 병자를 고쳐 주고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를 풀어 주며 나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 주고 죽은 이를 살려 주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 따뜻한 내 손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병 환자 오씨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오씨의 손은 불에 데인 것처럼 오그라들어 있었고, 한쪽 눈은 실명해 보기에 무섭기조차 했다.
오씨가 더듬더 듬 말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난 것이 큰 영광입 니다. 그 동안 한 번도 저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 외로운 손을 잡아 준 분은 오직 선생님뿐입니다. 가족에게 쫓겨나고, 호적 에서는 이미 사망이란 두 글자로 나를 처리해 버리고, 오갈데 없는 저를 받아들인 것은 이 광장이지만, 저의 손을 잡아 주고 상처 속에 든 고름을 빨아 준 것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예수입니다. 오늘 살아 있는 예수입니다. 예수님 ! "
그러자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예수가 아니오. 그저 여러분들의 친구일 뿐이오. 가장 가 난한 자일 뿐이오. 가난한 자에게 나눠 줄 사랑만이 있을 뿐이오. 형제의 오그라진 손과 발, 그리고 성치 못한 눈은 이제 빛을 보게 될 것이오. 그분이 말씀하셨소. 형제의 고통을 위로하라고, 형제의 괴로움과 함께하라고‥‥‥‥ 문둥병자 오씨의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 속에는 나 병균이 들어 있지 않았다. 사내가 오씨에게 말했다. "형제의 오므라들었던 손은 펴질 것이오." 그러자 오씨가 오른손을 펴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을 펴보 였다. "형제의 눈이 광명을 찾을 것이오. 빛이 형제의 눈 속에 들어갈 것이오." 오씨가 멀었던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그리고 감격에 차 소리질 렀다. "보입니다 ! 보입니다 ! "
사람들이 이 신기한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긴장감이 감들았 다. 오씨의 정강이에 묻은 흉측한 고름딱지가 모두 떨어져 버린 건 그 순간이었다. 오씨는 낡은 중절모를 벗어 던지고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살았소 ! 나는 살았소 ! " 사내도 그와 함께 춤을 추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외쳤다. "모두 모이시오 ! 함께 노래부르고 춤을 춥시다! 자, 형제들이 여,내 춤을 구경하시오. 미친 자의 춤을 구경하시오.나는 그분에게 미친 미치광이요 ! " 그러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절름발이, 애꾸, 난쟁이, 뇌성 마비, 외팔이, 곰배팔이, 그 시간에 호객 나왔던 창녀, 문패 달지 못하고 바람부는 광장을 배회하던 사내의 잊혀졌던 형제들이 모두 모여들 었다. 누군가 꽹과리를 가져왔다. "갱1갱1갱! "
사람들은 그들의 주위로 더 많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영문 모르고 사내의 이상한 춤에 휩싸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왜 그들이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 그 시각,호남선 새벽 열차가 도착하자 많은 손님들이 몰려 들고, 그들은 못생기고 찢겨지고 늙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어 댔다. "하늘엔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축복을, 오늘은 좋은 날,문둥병자의 손이 펴지고 병어리가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 어둠이여, 물러가라! 광명이 찾아왔네. 이 시각,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함께 춤을 추어 경배드리세."
서울역의 밤은 점점 깊어가 새벽이 다가왔으나 이들의 춤은 그칠 줄 몰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춤을 그들은 추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춤이 멎고, 다시 사람들이 신비한 사내의 주위에 몰려들 었다. 그를 골탕먹였던 중년도 그 중에 끼여 있었다. "선생은 누구입니까? 신비한 힘과 영혼의 능력을 갖고 계신 착 한 어르신, 우리와 함께 춤추고 노래한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소." 그러자 그 가운데 한 사람, 전에 집사 직분을 맡았던 한 사람이 사내의 얼굴을 가까이서 빤히 들여다보더니 외쳤다. ·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다! 가난한 우리들의 형제 프란치스 코다! 프란치스코 만세 ! 프란치스코 만세 ! " 프란치스코가 뭣했던 사람인 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러나 덩달아, "프란치스코 만세 ! " 하며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그의 손과 발을 만져 보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그의 낡은 겉옷은 뜯어져 이번엔 맨살이 보였다. 사내는 윗도리를 벗어서 오씨의 등에 얹어 주었다. 오씨는 겸손히 그의 낡은 옷을 받아 들었다. 찬미와 영광의 밤은 계속되었다. 사 내는 춤추는 사람들의 얼굴,그 입과 귀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들의 얼굴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싸구려 음식에서 나는 역한 냄새도 나지 않았고, 공해에 찌든 문명의 추악한 냄새도 나지 않았 다.
사내에겐 그들이 가난한 형제들의 예수였고 그리스도였기 때문 이다. 그들은 이 땅의 질서와 계율을 만든, 선택(?)된 자들에 의해 버림받은 에수, 작은 예수, 소외되고 헐벗고, 고통받는 예수였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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