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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현과 함께하는 대한사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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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희망 문국현 스크랩 2002년 10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생애설계와 성인발달’ 특강에서
아침이슬 추천 0 조회 101 07.12.02 12: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2년 10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생애설계와 성인발달’ 특강에서 2007.11.29
옮긴이     240 3

개인적으로 문국현님을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글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학생들이 직접 인터뷰를 하고 작성한 듯 합니다.

참 고로 문함대의 '문국현은 누구인가'와 '문국현 보도자료'에 올라온 글들이 거의 200개와 500개가 넘더군요. 그 곳에 비하면 이 곳의 '문국현 소개'는 자료가 좀 빈약한 것 같습니다.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문함대를 방문하시면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운영자님께서도 그 쪽의 자료를 이쪽에 보완해 주시면 문국현님을 알리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문함대: http://cafe.daum.net/kookh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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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생애설계와 성인발달’ 특강에서>

“유한의 풍토와 내 삶의 방식이 똑같아요.
그리고 저는 남보다 많이 버니까 나누며 살아야지요”

1970 년대 졸업을 앞둔 혈기왕성한 대학생이었던 문국현사장은 당시 부친이 운영하던 대형운수회사 요직과 삼성그룹 공채 합격증을 버리고 25세에 유한킴벌리를 택했다. 어려서부터 사회를 바꾸는 영웅을 꿈꾸던 그는 창업주(고 유일한)가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한 회사라면 자신의 인생을 맡길 만하다고 판단하였다. 사회전체의 개혁이라는 대의(大義)를 자신이 속한 곳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조직을 동일시한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선택한 그 길에서 29년동안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조직 내에서 걸어온 길은 참으로 전형적(典型的)이고, 또 참으로 이상적(理想的)이다. 냉정한 비즈니스계에서 윤리와 원칙만으로도 기업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고, 또 어떻게 사회와 상생(相生)할 수 있는지를 실제로 보여주었다. 또 그는 ‘완벽한 것은 하늘의 것이기에,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이다(誠之者 人之道也)’라는 믿음을 한번도 놓지 않았다. 그래서 54세의 문국현사장은 한 기업의 대표라기보다 오히려 사회개혁가이자 환경운동가, 그리고 시민운동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그와 삶의 ‘올곧음’은 그래서 유한의 푸르고 맑음과 참 닮았다.

탐색기: 사회개혁을 꿈꾸는 공자

문 국현사장은 어려서부터 나무와 꽃을 좋아했다. 그가 산촌이나 지방도시에서 자랐거나 해서가 아니다.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는 넒은 마당과 함께 숲으로 가득찬 언덕이 있었다. 그는 지금도 그곳을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여기며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장소라고 한다. 운수업을 하시는 아버지의 덕택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함께 뛰놀지 못했던 손아래 여동생과 백내장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은 어머니는 그에게는 소리없는 슬픔이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 협력하여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깨닫는다.

집 안 가까이 돌보아야 할 약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크게 장애받고 살았던 바로 손아래 여동생은 눈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의 눈이 되어드리고, 어머니는 대신 딸의 다리가 되었지요. 서로 의지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즐겁게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나누고 협력하면 뭐든지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소리없는 슬픔’이 어려서부터 여동생의 몫이 된 게 오늘까지도 제겐 슬픔이자 아쉬움이었지요. 그래서 인생은 전체가 ‘투병시대’라는 인생관을 더욱 절실히 가지게 되었고, 불완전을 받아들이면서 완전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가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 그는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영웅을 좋아했다. 플타크의 영웅전을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꼽고, 이순신을 제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한사람의 힘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을 어릴 때부터 꿈꾸었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은 아직 보통의 아이들답게 미분화된 환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남들에게 그는 돈키호테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대학시절에는 사회개혁을 즐겨 얘기하고 ‘옳고 그름’ 따지기를 좋아했던 터라 ‘공자님’이라고 불렸다.

원 래 고등학교때부터 경영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인문학교에서는 드물게 부기, 요즘 말하는 회계학을 별도로 공부했을 정도니까요. 문제는 서울대 상대에 낙방했지요. 그래서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영어와 영문학을 연구하기로 했죠. 좋은 건 외국어대학교가 원래 복수전공제 대학교라서.. 대학 4년 내내 영문학과 경영학을 둘 다 공부할 수 있었어요.

대형운수회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는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셨고, 그런 아버지의 소망은 자연스럽게 그로 하여금 회사 운영에 필요한 경영학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대학진학을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내내 별도의 시간을 낼 정도였다. 어린시절 ‘영웅’의 꿈은 한 조직의 리더인 사업가로서, 그리고 사회의 지식인인 교수로서의 꿈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영자로서의 꿈은 서울대 상대 진학이 좌절되면서 시험에 빠졌다. 그러자 그는 재수를 택하기 보다는 교수의 꿈을 실현하는 쪽으로 과감히 후기대학인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복수전공제 대학교에서 그는 당연히 경영학을 택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그는 많은 사회개혁이나 변혁에 관한 책을 탐독했고, 들로 산으로 여행을 다니며 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에게 대학은 자기를 만들고 찾는 공간이었다.

대 학 생활하는 동안에 자기 몸에 좋은 습관을 길들이고, 학문에 남과 다른 지식을 쌓는 열쇠를 갖는 것이죠. 아직 그 안에 곡간에 들어가서 무얼 꺼내는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일단은 공부를 평생하는 그런 자세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하는 조직을 찾아가야 되고, 내 몸에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평생 공부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다음은.. 뭐... 대학은 학문만 닦는 곳이 아니라 심신을 단련하는 곳이니까요.

그런 그는 졸업을 앞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사회개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지, 삼성대기업에 입사할 지, 아니면 새로운 어느 조직에 들어갈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뒷받침해줄 조직이 필요했다. 자신과 인생을 던질만한 조직을 찾아야 했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거나 당시 유행하던 삼성입사는 아니었다. 그때 유한킴벌리는 새로운 기회이자 신세계였다. 그가 유한을 선택한 이유는 몇가지 있다. 무엇보다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증했던 유일한 회장에 대한 감동과 존경이었다. 그리고 전문경영인으로 클 수 있는 문화와 제도가 있었다. 또 당시로는 아주 희귀한 합작회사였기 때문에 새로운 경영기법을 제일 먼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영대학원을 가도록 지원하겠다는 회사의 보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1974년 25살에 그는 자신의 뜻과 조직의 이념이 맞는 곳에 자신을 기꺼이 맡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유한킴벌리의 선택’을 주저없이 꼽았다.

확립기: 꿈꾸던 사회개혁의 실현

1974년에 그는 유한킴벌리의 기획조정실에 입사했다. 전략적으로 경영하고 기획하는 곳, 그의 꿈을 실현하는 첫 장소였다. 그리고 그는 약속받은 대로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1977년에 마쳤다. 그는 30살에 기획조정실장이 되었고, 1982년까지 4년동안 열심히 일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던 그가 잠시 멈춰서 주변을 돌아보았더니, 외국에서 귀국한 대학원 동기들이 교수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잊었던 교수의 꿈이 되살아나면서, 그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는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 주변에서 보면 그는 후퇴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일보 후퇴, 이보 전진’이었다.

그 때 대학원 동기들이 교수를 하는 것이 부러웠지요. 어릴 적 제 꿈이기도 했으니까요. 저도 공부도 더하고 무언가 경영혁신을 위한 벤치마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3-5년간 전직을 할 생각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회사와의 타협의 산물로 단기 안식년을 택했어요. 주위에서는 왜 저러나 했을 겁니다. 저 자신도 제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생각없이, 변화와 배움을 위해 해외로 나가려 했죠. 뭐.. 1년도 안되어 귀국했지만... 하지만, 그게 전혀 새로운 자리와 역할을 맡게 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어요.

안 식년을 얻어 1983년에 미국과 호주를 돌아보면서 그는 너무도 깨끗하고 어디나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보았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환경보전에 앞장서고, 사회적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특히 호주에서의 야생동물보호를 위한 기업과 시민연대프로그램은 당시 그에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 시간동안에 그는 좋아하는 산책을 맘껏 즐겼고 사색할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경영혁신 못지 않게 환경 복원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다. 1년 만에 돌아온 그는 유한만의 독특한 사회적 참여운동을 벌이고 싶었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은 교육사업 그리고 여성복지나 아동복지와 같은 복지사업에 천편일률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환경운동을 선택했다. 그러나 회사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83 년에 제가 안식년을 갔다와서 크게 회사에 분란을 일으킨 것 중 하나는 환경운동을 하자고 해서 회사에서 ㅤㅉㅗㅈ아낼라고 한거였죠. 그리고 회사에서 중요시하는 광고비가 쓸데없는데 쓰이고 과장하는데 쓰이느니, 그 광고비를 줄여서 도시 속에 숲을 늘리고, 죽어가는 산을 살리자고 얘기했죠. 그러니까 유한은 이미 재단을 통해서 교육도 많이 하고 여성, 고아, 노인을 위해 다 쓰고 있는데 왜 환경에 끼어드니냐, 그리고 물이 얼마나 오염되고 공기도 오염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고치겠다고 그러느냐, 만일 유한이 그랬다가 사회적으로 지탄받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식으로 말이 많았죠. 전 ‘나쁘니까 해야 한다’고, 다른 쪽은 ‘나쁘니까 하면 안된다. 가능성 있는 걸 해야지.’라는 식으로 논란을 벌이다가, 일단 광고부에 제가 접수를 비슷하게 하고 기획실장직을 포기하고 그쪽에 가서 마케팅 본부장이 돼서 어떻게 줄였으면 하는지를 알려주고, 난 후에 남은 예산을 전부 다 이쪽에 쏟아붓기 시작했죠.. 이사회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이 돈을 네가 어디서 조달하려고 그러느냐, 그래서 유한이나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주면 어떻게 하느냐’, ‘절대 피해를 안 주겠다. 그리고 광고예산 내에서 쓰겠다’. 그래서 광고비를 줄인 만큼 하고, 목표이익을 더 내면 이리로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시작을 한 거죠. 근데 ‘4대 강산을 살리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했는데, 도저히 물은 못 살리겠더라고요. 하도 힘들어서... 그래서 강은 좀 나누고 산을 살리다보면 되지 않겠느냐 해서 슬로건을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로 바꾸었죠.

정부입장에서는 손해보지 않을 일인데도 불구하고 회사를 설득하는 과정 못지 않게 대외적으로 힘들었다.

그 런데 정부가 그것을 비용으로 인정을 안 해주고 벌금을 매기는 거예요. ‘내가 광고하는 건 너희 인정해 준다. 그런데 나무 심는 건 왜 국가 땅에다 심느냐 너희 땅에다 심으면 너희 사업이 되지만, 국가 땅에 심으면 기증행위다’는 식이죠. 그렇게 해서 그것으로 많이 싸우다가 1994년 1월 1일부터 십년 걸려서 허가를 받았어요. 처음 10년은 정말 외로왔지만, 면세가 된 이후 지난 9년은 참으로 보람있는 나날이었습니다.

이렇게 개혁의 꿈은 한편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개혁이 내부에서 더 험하고 거칠게 일어났다. 비록 과거에는 인정되었을 지라도, 비자금이나 판공비를 없애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주장으로 빚어진 갈등은 1986년 37세 때부터 시작되어 1994년 45세까지 9년 동안 계속된 긴 사내 경영혁신과정에서 ㅤㅉㅗㅈ겨날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면서 또 주위의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 시련은 그에게 심리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신체적 위기를 겪게 만들었다. 아무리 회사 내에서 지나친 개혁자로 평판이 자자했던 그조차도 이 시련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곧 무너져 버릴 것 같던 그 즈음에 그는 신앙을 통해 마음과 몸의 여유를 가까스로 되찾았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하고 난 다음에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을 배운 일이 가장 잘 한 일인 것 같다고 지금도 되뇌인다.

비 자금이나 판공비를 없애자고 했다가 회사에서 여러번 ㅤㅉㅗㅈ겨날 뻔 했죠. ‘저는 자신없는 사람 나가라, 자신있는 사람끼리 경영하고 왜 판공서에 돈을 가져다 주어야 하고, 왜 정부에다 돈을 갖다줘야 하느냐, 그걸 왜 해야 하느냐. 더구나 유한의 이름을 가지고 그러면 안된다’. 그러면 다른쪽의 사람들은 ‘안된다. 폐관에선 양념이고, 이건 사회적 관행일 뿐이다.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안산다’는 식으로 논박하죠. 이런 갈등이 86-87년까지 있다가 88년에 이렇게 매니지먼트끼리 싸우지 말고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는가를 논하면서 시간을 길게 잡고 2000년까지 우리가 어떻게 바뀔까를 합의하자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그때 ‘비전 2000’이라고 88년에 합의했습니다. 이 서류를 작성해 놓고 회사의 일차분규가 가라앉으면서 저도 ㅤㅉㅗㅈ겨날 위기를 넘기게 되었죠. 하지만 이렇게 싸우는 중에 10명의 부장이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홧병으로 죽기도 했죠. 이런 시련 끝에 유한킴벌리는 다시 태어났죠. 정실에 의존하지 않고, 저희 회사는 학연, 지연, 혈연은 철저히 배제하구요. 정치자금 한 푼도 주지 않고, 기밀비도 없고 판공비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회사일겁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꿈과 뜻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걸었던 때이다. 환상 속의 영웅은 이제 전문적인 경영인으로써 한 조직을 개혁시켰다. 그렇게 그는 세상 속에 자기만의 자리를 확립했던 것이다.

유지기: 진정한 생성감의 발현

1995년 46세에 입사한 지 21년에 이르러서 그는 유한킴벌리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러나 사장이 되는 그를 모두가 환영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 실 제가 사장이 됐을 때, 사장 취임식을 무서워서 잘 못했습니다. 전임사장은 한 4천명을 모시고 했었는데, 저는 한 20-30명의 주주들을 모시고 20-30분간 간단히 치뤘죠. 그 당시 일부 노조가 제가 너무 과격해서 사장이 되는게 회사발전에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었나봐요. 맨날 민중운동이나 시민운동하는 사람이 사장이 되면 어떻게 하냐. 그런가 하면 저 사람은 정실을 무조건 배제하니까, 친척을 통해서 들어오신 분들은 전부 회사에서 내ㅤㅉㅗㅈ을 거다. 그래서 친척으로 들어오신 분들이 상당히 어려워했죠. 암튼, 취임도 제대로 못하고, 그 다음 첫해 3월까지 제가 공장도 제대로 못 들어갔어요. 근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되었지요.

노조와의 열린 교류는 정보공유와 경영에의 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놓게 만들었다. 그의 꿈은 2조 4교대 근무와 자율출퇴근제 실시, 그리고 재택근무 등 개혁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직원들이 돈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지식을 저축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리하여 0.001%의 결함률과 사고율은 결국 무결함과 무사고인 셈이다. 이처럼 문국현사장의 취임이래로 유한킴벌리는 위생, 가정, 유아, 여성, 병원 등 8개 사업분야를 모두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환경경영 1위, 직장인들이 꼽는 10대 좋은 회사, 기업이미지 파워 10개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저 희는 차입금이 거의 없고 오히려 은행에 예금이 되어 있죠. 그리고 우리는 다른 부채는 없지만, 종업원의 퇴직금은 부채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 퇴직금 500억만 있는 셈이죠. 음 주요 성공원인이 무엇이냐면 차별화 정책때문이죠. 월드 베스트가 되어야 해요. 퍼포먼스에서 베스트나 퀄러티에서 베스트가 되든가, 아니면 코스트에서 베스트가 되어 월드 로우코스트가 되는 거죠. 아니면 아예 남들은 만들 수 없는 김치처럼 차별적인 상품을 파는 거죠. 이런 것이 가치창조 능력이라고 봐요. 저희는 바로 서비스와 제품을 차별화한게 가장 큰 겁니다.

문국현사장은 언제나 배우고자 하고, 이해하기에 정진한다. 그래서 언제나 벤치마킹하는 자세를 가지고 초일류나 차별화가 몸에 배어있다. 그가 그렇게 남들과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세 명만 있더라도 그 속에는 나의 스승이 있다(三仁行 必有我師)’는 열린 자세로 끊임없이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자신만을 위해서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반드시 낸다. 점심때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그는 혼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그것은 남들에게는 최고경영자의 외로움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불필요함을 솎아내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

저 는 술은 거의 안마시고, 담배도 안피우죠. 골프도 안하구요. 골프를 한번 치면 6-8시간 걸리는데, 그 시간이면 책 반 권을 읽을 수 있거든요. 매일 퇴근한 후에 처랑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책하는 게 전부예요. 게다가 쉽게 잠드는 편이라, 한 6시간 정도 자면 모든 피로가 풀려요. 어떤 면에서 참으로 경제적으로 태어난 사람인 거죠.

그리고 이런 그를 옆에서 항상 지켜주고 돌보아준 아내를 그는 자기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기꺼이 꼽는다. 초기에 주위에서 오는 많은 비난과 역경을 인내와 소신으로 견디어주었고,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로 하여금 올곧음이 꺽이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준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인 것이다.

제 처는 다리가 아픈 여동생의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소개로 만났죠. 사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아픈 여동생도 있고 해서 별로 일찍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만나서 불같이 연애를 하게 되었죠. ...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다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정리가 되요. 제 처는 아직도 차가 없어요. 제가 아무리 갖은 수단으로 다 꾀어도 안사고 대중교통만 이용하는 사람이죠.. 당신은 환경운동하는 사람이 왜 그러냐며... 저를 놀리죠. 게다가 전 스트레스 받으면 산책을 해야하는데, 처가 함께 나가줘야 하는데 안 가주면 전 골방 목욕탕에 들어가 막 손빨래 해요. 아마 어렸을 때 물장난하던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 물 많이 쓴다고 뭐라고 하고, 당신이 무슨 환경운동가냐고 뭐라고 해요. 게다가 전용면적 24평 짜리에서 20년을 살았었죠. 작년까지 살았는데 유한킴벌리 사장이 천억씩 내는 회사의 사장이 왜 그렇게 작은데서 살아가지고 우리 종업원들을 전부 괴롭히느냐, 종업원들이 제발 이사가라 그러는 거예요. 내가 돈을 못써서 이사 안 가는게 아니고 그게 편해서 여기 산는데 왜 그러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업원들이 여기 많이 와보고 싶다. 뭐 손님을 접대해야 하지 않느냐 어머님이 86세이신데 모셔야 하지 않느냐.. 이런 것 때문에 큰 집으로 이사갔죠. 그럼 불 좀 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작년까지 20여년 동안 살아왔던 것처럼 불을 못키게 해가지고 말이죠. 아주 불편해요.

그는 성공한 인생을 ‘자기의 역할을 대소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찾아내고, 그 속에서 신명을 다하고 보람을 찾고 감사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 실수를 하면 받아들인다. 그리고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 그래서 이룬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어 쩌다가 실수를 하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여요. 그래서 종업원이나 동료들도 실수하는 것을 하나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죠. 완벽한 것은 하늘에서 나는 성인의 것이지요. 사람은 완벽하려구 노력하는 것이구요. 여동생이 다리가 아프고 완벽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불구라고 생각해요. 완벽한 사람은 한명도 없어요. 그래서 인생은 불완전한 불구의 시대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죠. 그게 제 인생관이구요. 한참 사내개혁을 추진할 때 많은 사람들이 ㅤㅉㅗㅈ겨나고 죽기도했을 때, 제가 많이 아팠어요. 젊을 때는 교회를 헐렁하게 다녔었는데, 아프면서 종교에 깊게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최선을 다하고 안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그랬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죠.

이제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깨닫고 얻은 바를 진정으로 사회에 돌려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배려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가 천리포수목원을 가꾸는 것은 기업경영인으로서 상징적 차원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실질적 차원의 의미이다. 54세의 그는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로서, 한국환경경제학회 부회장으로서, 동북아산림포럼 공동위원장으로서, 내셔널트러스트 국민운동운영위원장으로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 세상을 가꾸어 다음세대로 넘겨주려고 한다. 그가 끊임없이 혁신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인간과 환경을 존중하며 사회에 공헌하기를 여기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는 은퇴한 후에도 여행하면서 좋은 숲도 보고 벤치마킹해서 환경관련된 시민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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