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물교환에서 금융자본주의 시대까지/수필가 정임표(2026. 5. 14)
아직도 눈을 감으면 어릴 적 5일 장의 북적거림과 흙내음이 아련하게 피어오릅니다. 그 시절 우리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나선 장터에서 우리는 '교환'이라는 이름으로 정겨운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옆집 강아지와 우리 집 병아리를 맞바꾸며 아이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고, 텃밭에서 넘치게 거둔 채소와 이웃집의 잉여 생산물을 맞바꾸며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거기서 혼담도 오갔습니다. 그 시절의 교환은 '욕구의 이중 일치(나의 효용과 너의 효용의 일치)'라는 경제학적 난제를 굳이 따지지 않았으며,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때의 물건들은 저마다 사람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고 돈이라는 숫자로 다시 변환하여 계산하는 머리 굴리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흐르고 산업화의 거센 물결이 들이닥쳤습니다. '돈'이라는 매개체가 우리 삶의 중심부로 성큼 들어왔습니다. 월급날이면 경리직원이 은행에서 찾아온 그 빳빳한 현금 다발을 기억하시나요.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건장한 남자 직원 두서너 명을 대동하고 돈 가방을 경호하며 은행을 다녀오던 풍경은 이제 한 폭의 풍속화처럼 아련합니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면서 몇 시간을 반복해서 세어서 직접 봉투에 담아 건네받던 월급은 묵직한 무게만큼이나 한 달을 버티게 하는 삶의 든든한 버팀목 같은 보람과 성취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교환의 매개 수단(Medium of Exchange)'으로서 돈은 그때부터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며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핏줄이 되었습니다. '가치 척도(Unit of Account)'로서의 돈은 사과와 자동차를 나란히 놓고 숫자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가치 저장 수단(Store of Value)'으로서의 돈은 그 쌓인 숫자의 크기로 오늘 흘린 땀방울을 미래로 이어주는 귀한 희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갱죽처럼 나날이 구매력이 감소되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서늘한 바람이 그 가치를 갉아먹기도 했지만, 우리는 저축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꿈꾸며 자본의 씨앗을 이 땅에 뿌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돈이 전자세계(AI세계)와 결합되어 카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뱃돈이나 아이들과 부모님 용돈 정도에 지폐를 사용할 뿐, 이제 세상의 대부분의 거래는 카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돈은 실체가 없는 숫자로 은행이라는 거대한 저수지 안에서 맴돌게 되었습니다. 지폐를 세던 손길은 사라지고, 우리는 은행(금융기관)이 만든 카드와 전산망(네트워크)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움직입니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이 거대한 숫자의 흐름에서 자기 파이를 키워가야 합니다. 쌓아두기만 하면 사라지는 것이 돈의 숙명임을 알기에, 금융기관은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이 거대한 '계수(計數) 놀이' 속에서 끊임없이 이 계수를 타인 계좌로 내 보내어서 굴리는데 집중 합니다. 그래야 그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멈추지 않는 자본(숫자)의 순환, 그것은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심장 박동과 같은 것입니다.
금융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이제 돈은 단순히 물건과 물건을 이어주는 다리(브릿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돈이 아닌 계수는 그 자체로 거대한 권력이 되었고, 실물 경제를 넘어 '돈 거래 시장(금융시장)'이라는 복잡하고도 거대한 바다를 형성했습니다. 우리 곁에서 숨 쉬던 물물교환의 온기는 사라지고, 화면 속의 숫자로 흐르는 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질서를 그들이 결정짓고 있습니다. 정겨운 장터에서 투박한 손으로 병아리를 건네받던 그 시절이, 그리고 묵직한 월급봉투를 품에 안고 퇴근하던 그 발걸음이 가끔은 그립습니다. 금융자본주의의 파도가 높게 일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쫓고 있는 것은 그저 숫자로 불어나는 돈인가? 아니면 그 옛날 우리가 교환했던 사람과 사람사이의 따스한 온기인가?"
이제 세상은 개인이 돈을 벌기 어렵게 되어 갑니다. 조직을 만들고 조직 속에 속하고 그 조직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어 내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직이 돈을 벌게 됩니다. 조직의 구성원은 그 돈을 숫자로 분배 받아서 은행이란 저수지에 넣어 놓고 필요로 할 때 내게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주는 사람에게 계좌이체를 해 주고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받습니다. 조직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혼자 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나는 자연인이다"는 삶을 영위하면서 이러한 연결고리와는 무심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걸 동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나는 준 자연인이다"는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까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이제 돈은 돈도 아니고 그저 숫자일 뿐입니다. 돈은 숫자로 금융 알고리즘(입력 ⇨ 처리 ⇨ 출력)을 타고 계속 은행 안을 맴돌고 있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갓난 아기 빼고는 누구나 다 가진 통장계좌로 그저 숫자로만 옮겨다닐 뿐입니다. 은행도 자기 계수를 키워야 하니 예금 이자에다 수익을 더 붙여 오는 곳(돈 벌어 오는 계좌)으로 돈(숫자)을 회전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부동산이 돈 된다 싶으면 부동산으로, 주식이 돈 된다 싶으면 주식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오라고 채근할 수 밖에 없는 역할(자기 계좌로 계수 늘이기 추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금융불가사리가 되면 세상이 온통 투기장이 되고, 그게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의 지니가 되면 무한 욕망과 유한 재화 사이에서 늘 결핍을 느끼는 우리 인류가 유한재화로 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과 휴먼 로봇의 세계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몰려드는 계수들의 힘에 의해 무한의 영역으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돈은 인류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위대한 도구입니다. 돈은 때로는 사악하기도 했지만 그건 돈의 참 얼굴이 아니라 그 돈을 움직이는 인간의 마음이 사악하게 나타날때 사악했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권력을 쥐면 이제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이 돈의 움직임을 삼장법사처럼 손 바닥 속에서 들여다 볼수 있게 됩니다. 이 물고를 어디로 돌릴까하는 유혹을 누구나 받게 됩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도구는 그저 도구에 머물러야 하지 그 도구가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과물을 자기가 원하는 선한 곳에 쓰도록하는 것이 켈빈주의 정신입니다. 국가나 어떤 특정 시스템이 '강제된 공평'을 내세울 때, 그 압박 속에서 인간이 저지르게 되는 위선과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나눔은 숫자의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온기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 세끼 양식과 벗은 몸을 가려줄 서너벌의 의복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편안하다'는 시어가 주는 편안함의 느낌도 수필 "무소유"가 주는 안온한 느낌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어느 길이 옳은길인지는 인류가 이 땅에 출현한 이래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논쟁이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논쟁으로 세상은 시끄러울 것입니다. 나는 자유로운 한 생명체로서 켈빈(칼뱅)주의를 믿는 사람입니다. 자유를 사랑하고 근면 성실을 소중히 하며 개인의 성취감을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입니다.
※ 켈빈(칼뱅)주의: "내가 이룬 모든 부는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이를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사상. 근면을 통해 축적한 부를 하나님의 뜻(이웃 사랑, 공동체 헌신)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며, 현대 건전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양을 형성하였다. 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도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켈빈주의 정신에 입각한 자발적인 찬조와 헌금으로 금융기관을 설립하고 거기에 찬조를 희사한 분들을 인류의 사표로 기억하고 그 돈을 움직여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조직 속에 들지 못한 경제적 약자를 지원하는 방법이 인류의 선한 미래를 위해서 옳은 길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