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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은혜
창 32: 9
형 에서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야곱은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으로서 언약의 정당한 계승자이며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지키고 있음을 말하며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정을 떠나보지 않으면 가정의 가치를, 돈을 벌어보지 않으면 돈의 가치를 알 수가 없다. 여성클럽에 가봐야만 당신 아내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며 타향에 가봐야만 고향의 진가를 알수 있다” 는 말들을 합니다
카나리아의 고향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부호가 카나리아를 한 마리 사서는 금반지도 끼워 주고 꽃관도 씌워 주기도 하면서 18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화재가 생겨 새장의 끈이 끊어져 문이 열리는 바람에 새는 자유를 얻어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부호는 매우 슬퍼하며 카나리아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카나리아를 아프리카 키네아 지방에서 발견하여 다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카나리아는 4천 8백km를 날아갔습니다. 그 새는 무려 18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고향을 찾아갔을까? 부호는 카나리아의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인해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그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카나리아를 다시 고향으로 보내 완전히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또 다시 추석을 맞으며 고향을 찾는 이들을 보면서 고향과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합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은혜
나오미가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누는 은혜를 상각해 봅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룻 1:19)
사사 시대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사 시대에 흉년이 들자 베들레헴에 살던 유다 지파 소속의 엘리멜렉은 이스라엘에 임한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압으로 피신한지 얼마 안되어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룻기 1:3) 이방나라에서 두 자녀를 거느린 나오미는 살기가 힘이 든 가운데도 두 아들이 있어서 소망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을 장가보내고 손자가 태어나기를 바랐으나 두 아들 다 손자를 생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두 아들마저도 십 년도 채 되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룻기 1:5) 모압 땅에는 나오미와 두 자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백성을 권고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성읍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2절) 엘리멜렉 가족이 먼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사실도 분명 한때의 큰 화제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어언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나오미의 등장은 분명 조그마한 성읍 베들레헴을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동케 하기에 충분히 재미난 화제 거리 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연민의 정을 함께 나눕니다
이가 나오미냐 하는 말은 단순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며느리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처량하게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민망해 하며 불쌍히 대하며 연민의 정으로 맞아 주고 있습니다.
기쁨도 함께 나눕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룻 4:14)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룻 4:15)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 4:16)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 4:17)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마 20:34)
측은해 하고 민망해 하며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으로 긍휼을 베풀어 사랑이 넘치는 고향 인심은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한 은혜를 체험 하게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기까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피터 밀러 목사는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 펜실베니아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자함과 신실함은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모두가 그를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밀러 목사를 시기하여 온갖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닙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은 반역자임이 밝혀졌고, 모반죄로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밀러 목사는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재판이 열리는 필라델비아로 가서 워싱턴 장군을 만났습니다."장군님, 그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모르겠지만 형량을 가볍게 하여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당신의 친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소.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구료" 단호한 장군의 말이었습니다."아닙니다. 그는 제 친구가 아니라, 원수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60마일이나 걸어서 이곳까지 왔단 말이오?" 워싱턴 장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렇다면 고려해 볼 일이군요.우선 사형 선고를 취소하고 봅시다." 워싱턴 장군으로부터 사형 선고 취소 증을 받아든 밀러 목사는 그 길로 15마일이나 떨어진 사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그 남자가 사형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밀러 목사 아냐? 내가 죽어가는 모습이 그토록 보고 싶었나 보지. 하기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을 갚고 싶었던게지." 하지만 잠시 후 밀러 목사가 내미는 사형 선고 취소 증을 보고,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Bible School Journal)
함께 울고 기뻐하는 환경을 만들어 가되 신앙의 고향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용서와 회복의 은혜
탕자 인생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누리는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8)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9)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유럽의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잘못한 것을 보고 심하게 꾸중했더니 아들이 가출했습니다. 아버지는 후회하면서 그 아들을 사방팔방으로 찾았으니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찾다가 못 찾은 아버지는 시내 어느 가게 앞에다가 광고를 써 부치기를 '파코야,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돌아오거라. 내일 아침 이 곳에서 기다리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가게 앞에 갔더니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청소년들이 7명이나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용서 받고 함께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합니다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으로 용서합니다.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봅니다.
매일 같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펴보았을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한 마음을 느낍니다.
'측은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들의 참회 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선행합니다.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달려갑니다. (Jeremias)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감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함을 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입맞추니'(카테필레센)는 많은 입맞춤 즉 여러 번 거듭한 입맞춤입니다. 단 한번의 의례적 인사와는 달리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러한 입맞춤은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합니다.(삼하 14:33)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으려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거듭한 입맞춤은 끝없는 용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제 아무리 탕자라도 용서하고픈 심령뿐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생활은 열심히 했을수록 방탕과 범죄뿐이었습니다.
방탕(아소토스)은 절제 없는 생활 무질서한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재산"이라고 하는 뜻은 "생존"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생존의 재료를 무질서하게 쓰게 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0)라는 맏아들의 불평에 나타난 대로입니다
탕자 인생은 시간을, 건강을, 재능을, 물질을, 두뇌를, 생명을 무질서하게 써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묻지 아니하고 따지지 아니하고 떠날 때와 똑 같이 사랑하며 용서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6)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라 함같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킵니다.
'연약할 때에'(아스데논)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정말로 인간을 만들어야 할지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합니다. 공의의 천사가 먼저 의견을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만드는 것을 반대합니다. 인간을 만드시면 온갖 불의와 죄악을 저지를 것입니다. 진리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저도 반대입니다. 그들은 서로 속이면 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속일 것입니다.” 거룩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만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다고 해도 인간은 죄로 인해 더러워질 것입니다.” 이 때 사랑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만드십시오. 아무리 불의와 죄악과 거짓을 일삼는다고 해도 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해 오겠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하겠습니다.” 이 천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사랑을 베풀어 죄인들을 돌아 오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고 합니다.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J. Calvin).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0)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베푸시는 하나님의 화목과 구원 은총을 말씀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심령에 은총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아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2)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3)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니라 귀빈처럼 대우하였는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가 하사한 물품과 같은 것들이 지급되었습니다(창 41:42).
제일 좋은 옷이란 문자적으로 그 집에 있는 첫 번 째의 옷입니다. 제일 좋은 옷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큰 영예를 의미합니다. 그 당시에는 훈장이 없던 때으므로 왕이 공로가 많은 신하를 포상할 때 귀중한 옷을 하사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의의 옷을 입혀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 하나님은 의의 옷을 입혀 주어서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회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케 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계19:7)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고 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음녀의 복장 즉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과 대조를 이룹니다(17:4;18:16).
'빛나고'(람프론)는 영광과 광채를 묘사하며(마 13:43) '깨끗한'(카다론)은 정결과 충성 그리고 신실함을 나타냅니다(21:18, 21).
어린양의 아내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는 세마포는 오직 남편되신 어린양의 피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옳은 행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의 반응으로서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해 인내로써 충성과 신실함을 지킴입니다. 남편 되신 어린양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유지한 사실을 말합니다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습니다.
가락지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함을 나타냅니다.
바닷가에서의 카뉴트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영국은 카뉴트라는 왕이 지배했습니다. 많은 지도자와 권력자들처럼, 그는 아첨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가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첨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왕들 중에서 당신이 가장 위대하십니다." "오, 왕이시여, 당신만큼 강한 왕은 없사옵니다." "당신의 고귀함으로 못 하실게 없으십니다." "대왕 카뉴트여, 모든 것의 제왕이십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당신에게 불복종할 수 없습니다. "왕은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그런 어리석은 말들에는 싫증이 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고 관료들과 조신들이 여느 때처럼 그를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카뉴트는 그들에게 교훈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가?"
카뉴트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왕이시여, 당신만큼 강한 분은 없습니다. 또한 당신처럼 위대한 분도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복종한다는 말인가?" 카뉴트가 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세상은 당신 앞에서 절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알겠소.” 왕이 대답했습니다."그러면, 나에게 의자를 주시오. 그리고 바다로 갑시다.”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폐하" 그들은 왕좌를 모래 위에 운반했습니다."바닷가에 가까이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쪽에 놓으시오, 바닷가 쪽에." 그는 앉아서 앞에 있는 바다를 보았습니다."파도가 밀려드는구나. 자네들은 내가 명령하면 저 파도가 멈출거라고 생각하는가?" 신하들은 당황했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왕이시여, 명령만 내리십시오. 복종할 것입니다." 그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좋아! 바다야!" 카뉴트가 외쳤습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 것을 명령한다.
파도여! 멈추어라! 물결이여! 솟아오르지 말아라! 내 발을 건드리지 말아라!" 그는 잠시 조용히 기다렸으나, 거대한 파도가 그의 발을 덮쳤습니다. "무례하구나." 왕은 다시 소리쳤습니다. "바다여! 물러나라! 난 너에게 물러서라고 명령했고, 복종해야 한다! 물러서라!" 그리고 대답으로 다른 파도가 밀려와서는 발 주변을 휘감았습니다. 물결은 늘 그랬듯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바닷물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왕의 의자 근처까지 왔고, 발뿐만 아니라 옷도 적셨습니다. 신하들은 그 옆에 서서 놀라면서, 그가 미치지 않았나 의아해 했습니다. "자, 여보게들." 카뉴트가 말했습니다. "난 자네들이 믿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큰 힘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네. 아마 오늘 뭔가 배운 게 있을 걸세. 이제 자네들은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유일한 한 명의 왕이 있고 바다를 다스리는 자는 바로 그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네. 그에 대한 자네들의 칭찬을 아껴두길 제안하네." 궁정의 관료들과 조신들은 고개를 떨구었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 제임스 볼드윈
세상 왕은 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 (마 28:18)다고 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19)고 하십니다.
신을 신겨 줍니다. 당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오자 신을 신겨 줍니다.
신을 신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1982년 10월 뉴욕 데일리 뉴스에 실렸던 이야기라 합니다. 어머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심한 알콜중독자인 17세의 소년 마이크 뷰캐넌이 지붕 위에 올라가 투신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구속하고 압박하는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이때 한 신사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내게로 오너라, 네 아버지가 되겠다." 이 친절한 사람은 윌리엄 폭스 씨였습니다. 그는 결국 소년의 투신을 막고 그의 말대로 그 소년을 양자로 입양하였습니다. 소년의 선택이 진정한 자유에로의 첫걸음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선택도 매번 하나님 아버지일 때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최효섭-
용서와 회복이 은총이 넘치는 교회로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은혜
나사로가 더 나은 본향에 돌아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모습을 봅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3)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 16:24)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 곧 천국이며 그곳은 안식의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 4:9)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10)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1)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남태평양에서 3년 간의 복무를 마친 어느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앉아있었습니다. 기차는 시카고를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기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 거죠?" 병사가 들뜬 목소리로 차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곡은 선로가 양호한 구간으로, 시속 150마일 정도 됩니다." "시카고까지는 얼마나 남았지요?" 병사가 재차 물었습니다. "백 마일 조금 더 될 겁니다, 손님." "더 빠르게 갈 수는 없겠군." 병사는 머리 위에서 배낭과 짐꾸러미들을 꺼내 들고는 말했습니다. "이 기차에서 제일 먼저 내려야지." 그렇게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고대함은 그의 부모, 형제, 누이, 친구들 그리고 연인이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고 고향에서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여행의 끝, 그 다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하신 주님께서 평안 주시되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사 57:2)하신 안식으로 함께 할 줄 믿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평강과 안식을 누리는 처소인 줄 믿습니다
실패하고 돌아온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과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포근한 정과 은혜를 맞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품꾼의 하나로 쓰임 다기를 원하며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헌데를 앓으며 고생하던 나사로는 더 나은 본향 아브라함의 품 천국에서 평강과 안식의 은혜를 누립니다.
추석을 맞으며 고향을 찾아 심령에 필요한 육적인 은혜를 누리며 신령한 본향 천국에서 누릴 소망 안에서 천국의 지점인 교회 에서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