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승단(兪升旦)의 생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 김극기와 같이 유승단(兪升旦)도 생소한 분입니다.그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168(의종 22)에 태어나서 1232(고종 19)에 죽었습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초명은 원순(元淳)입니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요속(僚屬)으로 선발되었다가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시학(侍學)이 되었으나,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강종이 강화로 추방되자 그도 또한 배척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습니다.
1232년에 최우(崔瑀)가 재추(宰樞)를 소집하여 강화천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말을 못하였으나 다만 그만이 종사(宗社)를 버리고 섬에 숨어 구차히 사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반대론자의 선봉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겸손하며 박문(博聞)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특히, 고문(古文)에 정교하여 세상에서 ‘원순의 문장’이라고 일컬을 정도였으며, 경사(經史)에도 조예가 깊어 뜻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하여 의심이 없게 하였고, 불전(佛典)에도 능통하였습니다.
일찍이 상서 박인석(朴仁碩)으로부터 ‘신주(神柱)와 같은 존재’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그의 시문은 『동문선』·『청구풍아(靑丘風雅)』등에 전해집니다. 뒤에 인동백(仁同伯)에 봉하여졌으며, 시호는 문안(文安)입니다.
[고려지에 기록된 유승단의 생애]
2) 유승단(兪升旦)의 한시감상
- 해설없이 4편의 한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월계화(月季花)-유승단(兪升旦)
월계화
曾隨姚魏媚和風(증수요위미화풍) :
일찍이 모란꽃 따라 교태로와 져
一例看爲幻色空(일예간위환색공) :
한갓 공허한 환상의 빈 것으로 보았다네
他日雪中開崔好(타일설중개최호) :
다른 날 눈 속에서 꽃 필 때가 가장 좋아서
知渠不是&661;時紅(지거불시삽시홍) :
그것이 잠시 붉었다 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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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죽(和移竹)-유승단(兪升旦)
대나무를 옮김에 화답하여
瞻公有韻畵(첨공유운화)
공에게 운치 있는 그림 있어 구경하니
訝竹不根生(아죽불근생)
대나무에 뿌리가 없어 의아해 하였도다
愛爾情非俗(애이정비속)
너의 정이 속되지 않음을 사랑하여
呼君贊不名(호군찬불명)
군자라 불러 칭찬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도다
嫩凉廻枕簟(눈량회침점)
부드럽고 서늘함이 베개와 잠자리에 감도니
濃暑却簾楹(농서각염영)
찌는 더위도 발이 쳐진 기둥으로 물러나는구나
體道虛心久(체도허심구)
도를 체득하여 마음 비운지 오래되었는데
舊靈謾四營(구령만사영)
부질없이 시초점을 네번이나 쳤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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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풍현 공관-유승단(兪升旦)
頃刻征鞍不暫停(경각정안불잠정)
잠시도 가는 말을 멈추지 못하나니
自緣王命有嚴程(자연왕명유엄정)
왕명의 엄정한 노정이 있기 때문이라네
侵宵燈火扶頭起(침소등화부두기)
밤이 되도록 등잔불로 머리 세워 일으키고
盡日風塵眯眼行(진일풍진미안행)
종일토록 바람과 먼지로 희미한 눈빛으로 가노라
到處民廬皆剝落(도처민려개박락)
도처에 민가의 초가집은 무너져 있고
有時僧院過豊盈(유시승원과풍영)
이따금 사원만이 지나치게 화려하구나
邇來積弊俱爬去(이래적폐구파거)
요즘의 쌓인 폐단 다 없앴다고 하나
一段有餘塔廟營(일단유여탑묘영)
아직도 남은 건 탑과 사당 짓는 일이 많은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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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보령현(宿保寧縣)-유승단(兪升旦)
보령현에 묵으며
晝發海豊郡(주발해풍군)
낮에 해풍군을 떠나
侵宵到保寧(침소도보령)
밤이 늦어서야 보령 땅에 이르렀네
竹鳴風警寢(죽명풍경침)
대숲 울리는 바람에 잠 못 이루고
雲泣雨留行(운읍우유행)
구름끼고 비가 내려 가는 길을 막는구나
暮露頭還重(모로두환중)
저녁 이슬 자욱하여 다시 머리가 무겁더니
朝暾骨乍輕(조돈골사경)
아침 햇살에 뼈골이 잠시 가벼워지네
始知身老病(시지신노병)
비로소 알겠구나, 몸이 늙고 병들면
唯解卜陰晴(유해복음청)
날씨 맑고 흐림을 점칠 수 있다는 것을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