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 ㅡ 365일
넷플릭스 영화 '365일'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앞서 "사는 게 배우는 거다."라는 내 생각에 생각을 덧붙이려는 것.
오늘 정경심 교수 재판이 있었다. 방청객 중 한 분이 "참 잔인한 재판"이라고 말했다는 데에 생각이 또 이어진다.
살면서 배운다는 건, 살면서 실수를 많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배운다는 건 잘못을 옳게 고친다는 의미가 되니까.
난 홍준표 시장에 대해 '홍발정'이란 말을 쓴 적이 없다.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해서도 '성상납'에 대해 쓰지 않았다.
사람은 한 때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 같은 실수가 거듭되거나 불가역적 실수만 아니라면. 그리고 그런 실수에서 배움이 있어 고쳤다면 야박하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건 잔인하다 싶으니까.
단지 고루한 생각을 가진 '라떼'로서 볼 뿐이다. 걸핏하면 빨갱이를 소급하는 홍준표나, 싸가지 없어 보이는 이준석이 그래 보인다.
"마음씨"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할 때의 "씨"는 '씨앗'이다. 맹자의 성설설의 근거인 네 가지 씨앗(4단)인 측은심, 수오심, 사양심, 시비심. 이것을 또한 '싸가지'(네 가지 씨앗)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측은심이 최우선이고, 시비심은 맨 아래라고 보며, 잔인함은 곧 측은심을 잃은 것이다.
일년 365일을 살면서 어찌 다 기억하며 살겠는가. 그것도 심지어는 일일 단위로 시간 단위로 분초 단위로까지.
그리고 그 가운데 뼈아픈 실수나 후회하지 않는 날들이나 순간들이 왜 없을까. 그걸 기초로 배워나가면 되는 것이다. 굳이 모조리 뒤져서 살펴 따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모든 것엔 정도라는 게 있다. 넘지 말아야 할 금도가 있다. 그래서 '인권침해'란 단어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정경심 교수의 딸 중학교 때 일기장까지 들여다보려는 검찰의 잔인한 행태는 그런 금도를 충분히 넘어섰다고 보인다. 그래서 "잔인한 재판"으로 전국민에게 각인되는 것이다.
검찰의 그런 잔인한 행태는 어제도 오늘도 이어지고 내일도 또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와는 다른 365일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살면서도 배우지는 않을 것이기에. 마음의 씨앗이 사라져 아예 존재하지 않겠기에.
그래서 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틀린 게 없으니 배울 필요가 없는, 무오류의 '수능만점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2019년 6월 14일 이휘호 여사의 영면 앞에서 욕설을 뱉은 수능만점자 청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또한 수많은 수능만점자들 중에서, 우리 사회의 '지성인'으로 자란 걸 본 적이 없으니까.
"사는 게 배우는 것이다."의 올바른 역(대우)은, "배우는 것이 없으면 사는 게 아니다."가 된다. 앞의 것이 옳다면 논리적 필연으로서 뒤의 것도 옳은 명제니까.
kjm _ 2022.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