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위백규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위인환)는 제8회 존재의 날을 맞아 5월 15일 장흥 충효회관 회의실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존재 선생의 실학자적 면모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본 기념사업회는 존재(存齋) 위백규 선생의 철학과 학문을 연구하고 실천하려고 2016년에 결성된 비영리 법인으로 500여 명 전국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년 5월 15일(존재 탄신일)에 장흥에서 학술 발표,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학 호남 진흥원」에서는 금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월 “호남 학문학 열린 강좌”를 개설 하여 존재 선생의 학문적 성과를 심도 있게 살피고 관련 강좌의 성과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 실학사에 「존재학」 영역을 개척하여 존재 위백규의 학문적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추진한다.
위인환 회장은 “존재 위백규 선생은 18세기 재야 학자로서 향촌과 성리학 기호학계를 두루 섭렵하면서 조선 후기의 사회적·제도적 모순과 병폐를 깊이 통찰하고 그 구제방안을 제시하려고 시대적 사명감으로 많은 저술을 남겨 호남의 3대 실학자라 불리신 분이다.”며 “존재 위백규 선생의 유물 1천여 점이 한국학 호남진흥원에 기탁되어 존재 선생의 실학을 연구하고 있다” 라고 주창했다.
본 사업회 1대 회장을 역임한 김두석은 “존재 선생의 활동 반경이 전남 장흥의 향촌이라는 지리적 편향 때문에 그의 학문적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존재집》의 완역 및 〈정현신보〉발간, 〈환영지〉 관련 논문 등이 발표되어 전국 유림과 학자들이 참여한‘존재 위백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존재 선생의 실학적 면모를 재조명할 필요성을 제기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존재 위백규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는“지역의 학자라는 오랜 범주를 떨쳐내고 조선 후기 성리학의 말류를 극복한 선각자였음을 전국에 알려야 한다.”여 “존재 위백규 선생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 선생의 삶과 학문을 심층적 으로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 한다.
존재 선생이 세상에 알려진 때는 1796년, 그의 나이 고희(70세)였다. 1794년 태풍으로 호남 바닷가 마을이 큰 피해를 당해 임금의 명령으로 파견된 위유사(慰諭使)라는 직책을 가진 서영보 관리의 천거였다.
정조 임금은 1795년 11월, 전라도 감사에게 존재 선생이 지은 ‘환영지’를 궤짝에 담아 자물쇠를 채워 올려 보내라는 명을 내렸고 그 책을 읽은 정조는 이듬해 2월에 존재 선생을 급히 상경하도록 했다.
존재는 정조 임금의 부름을 거듭 받고 3월에 상경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관리의 발탁과 폐단 개혁, 학문증진 등 6개 조목을 비판하는 상소문이었다.
일찍이 정치를 악기로 보고 새 줄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 ‘정현신보’(政絃新譜)를 30세에 썼고, 장흥부사 황간의 요청으로 29개 적폐를 지적한‘봉사(封事)“를 52세 나이에 쓴 바 있었다.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열 이지만 향촌 생활을 통해 현실 비판적인 인식을 형성했다. 존재 선생의 ‘만언봉사’는 성균관 유생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조 임금은 “보필할 사람을 고르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라는 대목은 내가 가상히 여긴다. 인재 등용을 통해 임금을 섬기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니 덮인 풀을 베어내듯 가려졌던 인재를 등용하는 일은 오늘의 암랑(巖廊·의정부)에서 바라는 바이다”면서 존재 선생을 옥과 현감으로 제수했다.
존재 선생은 옥과 고을에서 자신이 품어온 목민(牧民)의 뜻을 백성에게 펼쳤으며 현재 관산 죽천사, 옥과 영귀사, 합천 옥계사에 배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