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두 정변공신의 서로 다른 운명
함풍11년(1861) 십일월 이일, 예허나라(葉赫那拉)씨는 북경에서 신유정변(기상정변, 북경정변이라고도 부른다)을 일으킬 때, 대단한 인물 하나가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모든 전략을 꾸몄고, 그녀의 정변성공과 수렴청정에 불세출의 공로를 세운다.
1년전인 함풍10년(1860) 구월,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으로 다가왔다. 함풍황제는 그녀의 총비 예허나라씨(나중의 서태후)와 일부 측근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망친다. 함풍11년 칠월 십육일, 함풍제의 병이 위급할 때 특별히 유(諭)를 내린다: 황장자 재순(載淳)을 황태자로 세우고, 재원(載垣), 단화(端華), 경수(景壽), 숙순(肅順), 목음(穆蔭), 광원(匡源), 두한(杜翰), 초우영(焦祐瀛)에게 황태자를 전력을 다하여 보필하고 일체의 정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권력욕이 강했던 혜허나라씨는 대권을 놓치는게 달갑지 않았다. 그리하여 암중으로 어사(御史) 동원순(董元醇)으로 하여금 <<황태후가 조정을 처리하고 간친왕이 보정하는 것을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한다. 이 상소문은 예허나라씨의 뜻에 따라, 함풍제의 유명을 바꾸어, 팔대신의 보정(輔政)에서 태후의 수렴청정으로 바꾸고, 1,2명의 친왕을 뽑아서 보정을 맡기자는 것이었다. 양궁태후가 팔대신을 불러서 이를 논의하며, 동원순의 상소내용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재원을 우두머리로 하는 팔대신은 '본조에 황태후의 수렴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한다. 두 젊은 과부는 기세가 흉맹한 여덟명의 보정대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동원순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팔대신과 타협을 하고 만다. 예허나라씨의 권력탈취음모는 실패하고 만다.
이번 권력투쟁과정에 한 사람이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허경신(許庚身)이다. 그의 관직은 군기장경(軍機章京)이었다. 그는 함풍10년 함풍제를 따라 영국프랑스연합군을 피해서 함께 열하로 왔었다.
<<청사고. 허경신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자는 성숙(星叔), 절강 인화 사람이다. 그는 함풍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가 군기장경으로 있을 때 직무에 충실하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함풍10년, 당시 호부상서인 숙순의 권세가 아주 강했는데, 자주 군기처의 내부사무에 간섭했다. 숙순은 그에게 문건을 기초하게 했는데, 그는 숙순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조정의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거절한다. 이때부터 숙순은 그를 미워하고, 기회를 보아 보복하려 하며, 온갖 수단으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함풍제가 보호해주는 바람에 숙순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예허나라씨와 팔대신이 권력을 다툴 때, 허경신은 팔대신과는 세불양립이고, 공친왕과 관계가 좋았고, 공친왕도 예허나라씨와 관계가 좋았으므로 그는 예허나라씨의 편에 선다.
예허나라씨가 고명팔대신과의 권력다툼에서 실패했을 때,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승보(勝保)는 함풍제를 조문한다는 명의로 열하로 간다. 이 승보는 이전에 상소를 올려 자신은 양궁 황태후의 수렴청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고, "청군측(淸君側, 황제의 곁에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보통 쿠데타시에 내걸던 구호임)"을 하겠다고 떠들기도 했다. 예허나라씨는 팔대신의 엄밀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그녀는 승보를 불러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허경신으로 하여금 그의 밀사가 되어 승보와 만나게 한다. 승보는 양궁황태후가 팔대신의 통제를 받는 지경에 처한 것을 보고는, 허경신에게 병간(兵諫)을 할 의사를 밝힌다.
허경신은 승보가 병간을 할 의도를 가진 것을 보자, 즉시 그를 제지한다. "호랑이와 표범은 산에 남겨두라. 그것을 놀라게 만들지 말라" 허경신은 승보에게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러지 않으면 타초경사하여, 그의 병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며, 병권을 빼앗기면 이후의 일처리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허경신은 또한 승보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양궁황태후는 이미 이십삼일에 선황제의 관을 북경으로 가지고 가기로 내정했다. 만일 이 기간에 돌연 변고가 발생하면, 오히려 양궁황태후의 계획을 교란시키게 된다고 말해준다.
승보는 즉시 허경신이 말을 듣겠다고 한다. 승보는 경성의 방어부대의 상황을 더욱 잘 파악하고 있고, 시간, 장소, 역량은 모두 적당하다. 북경에 돌아와서 손을 쓴다면 승산이 더욱 많다고 말한다.
허경신과 승보의 비밀접촉에서 허경신이 말한 "양궁황태후는 이미 이십삼일에 선황제의 관을 북경으로 가지고 가기로 내정했다"는 것은 그들의 비밀회동 4일후에 비로소 대외에 공포한다. 이는 허경신이 예허나라씨와 공친왕의 핵심밀모에 참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허경신은 예허나라씨의 마음 곳에 승보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변에 성공한 후의 두 사람의 처지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양궁황태후는 북경에 돌아온 다음날 아침일찍 정변을 일으킨다. 팔대신의 주요죄상으로 "힘을 다하여 화의를 하지 않아서...각국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있다. 이렇게 하여 팔대신의 직무를 박탈하고, 그 자리에서 재원, 단화를 체포하고; 사람을 보내어 오는 도중이던 숙순을 체포한다. 팔일, 서태후는 상유(上諭)를 내려, 숙순을 참수하도록 명하고, 재원, 단화는 자신하도록 명한다. 그 외의 5대신은 삭탈관직 혹은 충군(充軍)되었다. 십일일, 팔대신이 원래 정했던 기상(祺祥)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다음해를 "동치(同治)"원년이 되도록 한다. 서태후의 자희(慈禧)라는 호도 이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
정변에 성공한 후, 예허나라씨는 중요한 순간에 공을 세운 승보, 허경신등에게 상을 내린다. 승보는 상홍기 만주도통, 병부좌시랑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부상서의 직위에 오른다. 종2품에서 종1품으로 승진한 것이다. 이리하여 경직과 외직을 겸직한 중요한 관리가 된다. 그러나, 서태후는 승보를 조정의 중추에 올려놓지는 않았다. 그는 서태후의 핵심정치권에 들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 산동, 안휘, 하남의 염군을 소탕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계속하여 농민반란군들을 진압하는데 투입된 것이다.
허경신은 군기처에 들어간다. 그후 계속 승진, 중용된다. 동치원년(1852년) 허경신은 재임관원의 신분으로 진사에 합격한다. 그리고 내각시독이 된다. 그는 군기처에서 청나라조정의 태평군과 염군의 군사행동을 기획하는데 참여한다. 나중에 <<흠정소평월비방략>>이라는 책을 편찬하는데도 참가하여, 청나라정부의 농민반란진압경험을 종합하였다. 광서5년(1879), 예부시랑으로 승진한다. 그후에 호부시랑과 형부시랑도 각각 맡는다. 중국-프랑스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형부시랑의 신분으로 군기대신이 된다. 동시에 총리아문대신을 겸임한다. 허경신은 일처리가 민첩하며 노련하여 서태후로부터 중용되었다. 프랑스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는 "외적을 다스리는데 상책은 없다. 제압할 수는 있지만, 말을 들어주어서는 안된다." 십사년, 그는 병부상서에 오른다. 허경신은 중서에서 상서까지 수직상승했고, 군기처에서 근 30년을 일했고, 조정의 여러 군사행동기획에 참여한다. 사람들은 "경국고심, 유식공감(經國苦心, 有識共鑒)"이라고 평했다. 광서19년, 허경신이 사망한다. 청나라조정은 그에게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고, 시호를 공신(恭愼)이라 한다.
허경신과 승보는 모두 신유정변때 서태후를 도와서 최고권력을 차지하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마찬가지로 큰 공을 세웠지만, 서태후의 두 사람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다. 승보는 서태후가 정변에 성공한 후 2년도 되지 않아 자진을 명받는다. 허경신은 계속 승진하고 선종한다. 일처리와 사람됨을 차이가 너무나 크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