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를 접하면서
손 원
요즘 종종 지인의 부고 소식을 접한다. 한 울타리에서 1,200여 명이 근무했던 당시 직장 선배분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내 나이가 일흔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수긍이 간다. 고인의 생전모습이 떠오른다. 직장을 떠난 후 적어도 20년간 대면한 적이 없는 분들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 당장은 실감 나지 않는다. 그분들의 4~50대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활력 넘치던 그때 모습으로 20년 후의 근황은 모르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그분의 전성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퇴직을 앞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직기간 중 최종 직위는 그분들이 대미를 장식한 자랑스러운 보상이다. 하위직으로 수십 년을 근무하고 퇴임을 앞두고 남부럽지 않은 자리까지 올랐으니, 자긍심도 가장 클 때 퇴직한다. 기세등등한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웠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왔다. 갑작스런 별세 소식은 믿어지지 않을 만도 하다. 20년 전에 멈춘 기억을 20년 후의 모습으로 연상하고 나서야 때가 왔음을 실감한다.
아흔에 별세했다면 퇴임 후 30년간 제2의 인생을 산 셈이다. 인생 후반기를 활짝 꽃피운 분도 더러 있다. 다행히 전직 공무원 모임인 행정동우회가 있어 선후배 간 동정을 전해 듣기도 한다. 봉사활동, 복지사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삶, 문예 창작 등 취미생활로 소일하는 삶, 선거직 공무원을 역임하신 분들도 더러 있다. 나름대로 인생 후반기를 알차게 열심히 보낸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떤 삶을 살았던 마지막에는 모두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것을 보고 부질없는 삶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종교관에 의하면 업을 잘 쌓으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도 했다. 적어도 유가족에게는 자랑스러운 조상이 되고, 주변인으로부터도 존경받는 이로 기억되면 잘 살다 갔다고 하겠다. 가끔 고인이 된 지인의 삶을 나름대로 평가 해 보기도 한다.
막상 부고를 접하고 보면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추모하게 된다. 생전의 인품과 덕망을 새겨보고 지난날 나와의 관계도 떠올려 본다. 나를 위해 준 것에 늘 고마워했고 이제는 갚을 길도 없다. 비록 서운한 점이 있어도 잊고 좋은 점만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지인이 많은 것도 삶의 보람이고 큰 자산이다. 그런 지인이 한 명씩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삶이 위축되는 것 같다. 주위의 지인이 점차 줄어들다 보면 언젠가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마침내 종착역에 이를 것이다. 꿈과 희망의 종착역이 아니라 모든 걸 멈추는 종착역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닐까. 오늘이 내 生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을 차근차근 준비해 두면 어떨까? 죽음을 준비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해답이 나올 법하다. 오늘이 순간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자. 오늘 숨을 쉬는 것도 감사히 여겨보자.
국민가수 나훈아는 대중가요 "공"에서 나름대로 인생을 노래해 크게 유행시켰다.
"살다 보면 알게되, 어리석고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단 것을,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하고 보람 있는 삶인지는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와 일맥상통한다.
행복한 삶이 있다면, 행복한 죽음도 있을 법도 하다. 행복한 죽음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마무리는 가능할 것 같다. IT 영웅 스티브 잡스가 별세했을 때, 그의 여동생은 "오빠는 죽음을 성취했다."라며 죽음을 전했다. 그의 업적이 훌륭하기에 죽음마저도 남다를 거란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 죽음을 "성취"로 표현했다.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았다. 큰 성취를 이룬 천재의 죽음은 아쉽기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룬 많은 성취는 죽음마저도 아름답게 한 것 같았다. 훗날 죽었을 때 "성취"란 표현으로 부고를 전할 수 있을까? 지금 열심히 노력하여 조금씩 성취해 나간다면 죽음에 이르러서 큰 성취가 되어 아름다운 죽음 내지 죽음의 성취로 명명되면 좋겠다. (2023. 6. 9.)
첫댓글
'죽음을 준비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해답이 나올 법하다.'에 공감이 갑니다.
그 단어를 거론하는 것이 망측하다 느끼곤 했는데 여생을 보람있게 잘 살아가는 지혜라
여겨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