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63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대림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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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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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9bT5hrNRaz4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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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오랜만에 가까운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수도생활한답시고 바쁜 척하며 미루다 미루다 보니, 거의 40여 년 만에 만나 뵌 것입니다. 사람 도리도 못하며 살았구나 하는 회한도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저희 이태석 신부님을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종교를 가지고 싶은데, 이태석 신부님 때문이라도 선택하라고 한다면 성당에 나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동료 수도자인 저보다 더 이태석 신부님의 생애며 신부님과 관련된 최근 돌아가는 동향을 더 잘 꽤뚫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남기신 삶의 흔적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과 영향을 끼쳤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비록 짧은 삶을 살다 가셨지만 참으로 우리 교회와 사회를 위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을 하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생전 이태석 신부님께서 월간 생활성서에 기고하신 글을 묶은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생활성서) 이후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괄목할만한 필독서가 최근에 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신부 이태석’(김영사)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전기 문학의 대가이신 이충렬 작가께서 오랜 시간 공과 정성을 들여 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작가께서는 집필 과정에서 저희 살레시오회의 충실한 자문을 구하셨고, 여러 관련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분석하셨을 뿐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요, 이태석 신부에 대한 공식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감에 찬 이태석 신부는 제임스 신부를 따라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을 방문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빈 들판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리고 톤즈의 너른 벌판에서 의술만 믿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와 선교 사제가 되겠다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먼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러나왔다. ‘인간 이태석’이 무너지고 ‘사랑의 선교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 동방의 위대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을 그들과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의 누추한 잠자리 바로 그 옆에 머리를 눕혔습니다. 그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 특히 한센씨 병 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자신의 장상인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님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드리거나 식사하거나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선교활동에 미온적인 오늘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는 시절, 그는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한 평생에 걸친 목숨 건 봉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그분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세상의 끝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정성어린 기도로써, 성의 있는 나눔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업에 함께 참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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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근동지방의 거지들은 끈질기고 집요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짓궂기도 했지만 엄청 성가시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행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심각한 것이었고, 귀찮기에 어쩔 수 없이 빨리 돈 좀 집어주고 그 자리를 벗어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소경 역시 구걸로 연명했던 거지였는데, 줄곧 예수님 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구걸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청하는 구걸은 다른 거지들의 구걸과는 질적으로 달랐는데, ‘구원’을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티나 속담에 ‘소경처럼 외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아주 크게 외친다’ ‘창피하게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는 것입니다.
두 소경은 줄기차게 따라다니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더욱 괴로웠던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고된 여정에 지친 예수님께서 좀 쉬시려고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이 두 소경은 그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이 두 소경에게 예수님의 측근들은 화도 엄청 냈을 것입니다. 그러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훨씬 완강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다가온 일생일대의 기회, 마지막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녕 한 번 새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한번 눈을 떠서 광명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 두 소경의 간절한 염원을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무엇보다도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목숨 걸고 달려드는 두 소경의 단순하지만 확고한 신앙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마침내 그들의 오랜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새 삶을 선물로 주십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는 이 두 소경 말고도 수많은 다른 소경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께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던 소경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저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 버린 소경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소경은 간절히 원했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진실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믿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새 삶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오늘 두 소경이 치유되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당신 백성들을 향해 베푸시는 자비와 은총의 표현은 너무나 각별하고, 은혜로운 것이라는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 사람을 살려놓고 보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건져내주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병고에 허덕이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병고에서 해방시켜주려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만나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서 생명의 길로 되돌리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분은 정녕 생명의 하느님이셨습니다.
더욱 은혜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총, 자비, 구원은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내 눈앞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구원체험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다른 예언자나 지도자들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좀 기다려보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예약부터 하십시다. 일주일 후에 만납시다, 라고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바로 내 안에서 나를 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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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13f6BpUy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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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가 세상에 나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곧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 알아서 다 해 주셔야지 굳이 당신의 능력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주실까요? 이는 능력 있는 분의 특징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되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을 내어주시되 선악과는 바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어. 그래서 다 해주냐? 물론. 그러나 내가 하느님임을 잊지 마. 네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에게 선악과 하나는 좀 바쳐줄래?”입니다.
만약 부모가 다 내어주기만 하되 부모로서의 권위와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경계 없이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렇게 침범당해도 되는 줄 압니다.
『벼랑 끝, 상담』에 ‘시누이로 인한 피해망상’이란 사례가 있습니다. 남편의 위로 누나가 5명, 아래로는 여동생이 1명 있는데 아내는 시누이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깁니다. 특별히 큰 시누이는 돈이 많아서 결혼할 때 도움도 받았기에 거의 엄마뻘 되는 큰 시누이에게는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시누이들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닌 동생의 아내를 무시하고 깔보고 핍박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이 몇 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도 못하고 꾹 참다가 결국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시누이들도 물론 문제지만 피해자인 아내도 문제입니다. 큰 시누이가 들어와서 자신의 낡은 옷들을 시누이 맘대로 꺼내 버리고 자기가 좋은 옷 사준다고 나가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들만 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시누이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묵인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사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딸들에게 무언가 항상 못 해 준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선을 설정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미안한 마음이 자신과 자녀와의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은 자녀에게 집착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역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불완전한 부모는 있어도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어쨌든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 가르쳤다고, 딸만 많이 낳았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미안해하는 마음이 자녀들을 망칩니다.
부모는 에덴동산의 주인과 같습니다. 이미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만약 선을 넘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 할까요? 능력 있는 부모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겸손하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을 꼭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녀를 돕지 않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부모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어떨까요? ‘EBS 육아교육’에서 ‘의존형 아이를 만드는 엄마들의 심리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단어들로 문장 만들기를 하는 것인데,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일이니 아이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한국 엄마들은 자주 간섭을 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엄마들이 관여합니다. 어떤 아이들이 자존감이 큰아이로 성장할까요? 당연히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어준 미국 어머니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교육해 주어 세상에 내보내면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녀들이 ‘혜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해야지, 해주면 해 줄수록 더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교만해져서 아무리 많이 해줘도 부모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불만을 품으면 그것은 부모 탓입니다. 자녀의 교만을 너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부모의 능력을 믿고 부모에게 겸손하게 청할 때만 들어주어야 합니다. 남들은 눈이 다 보이는데 나만 안 보여서 하느님께 불만을 품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마십시오.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아무리 많이 해줘도 결국 그 자녀는 부모까지 잡아먹게 됩니다. 휘둘리지 않는 힘도 자존감입니다. 그런 자존감 있는 부모에게 자존감 있는 자녀가 태어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미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사람과 하느님, 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질서와 경계가 존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의 경계를 존중하시며 사셨습니다. 부모에게서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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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이 소경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심을 믿으면 오류라는 눈멀음이 사라지고 곧 참된 빛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눈먼 이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얼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창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멀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루카 8,39)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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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1927년 비오 11세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 성인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삼십 일 피정을 한 뒤, 1534년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에 있는 성당에서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 회원으로 첫 서원을 합니다. 15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고, 1540년 예수회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쳐 인도 고아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545년부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뉴기니와 필리핀 인접 지역에서도 선교 활동을 하였고, 1549년부터 1551년까지 일본을 왕래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중국을 회두시켰더라면 일본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이르러 중국으로 향할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중국 본토가 보이는 광둥성 앞 상촨섬(上川島)에서 명나라 황제의 입국 허가를 기다리던 가운데 풍토병에 걸려, 결국 중국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언제나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회 회원들이 날마다 두 차례씩 하는 ‘의식 성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의식 성찰’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회원들이 많이 바쁠 때는 기도를 관면해 주기도 하였지만, ‘의식 성찰’만큼은 절대 관면이 없었습니다. 의식 성찰은 내 삶 전체, 내 존재 전체를 살펴보는 기도입니다. 눈을 떠서 점심시간까지 그리고 잠자기 전까지 나의 행동, 선택, 그리고 감정의 변화를 살피면서,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행동하였는지, 아니면 노예로 살았는지 살펴봅니다. 그렇게 살펴본 뒤,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끝에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답을 찾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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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빛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27-31)
이 이야기의 처음 시작 부분인 27절과 28절의 표현만 보면, 눈먼 사람 둘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치면서 따라오는데도 예수님께서 못 들은 척 하시면서 어떤 집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고, 또 그들의 간청을 바로 들어 주셨기 때문에, 27절과 28절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어떤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눈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만일에 눈먼 사람들의 말에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말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평범하고 단순한 ‘치유 이야기’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때문에, 이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빛’을(‘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 말은 ‘새로운 삶’을(‘구원’을) 달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눈을 고쳐 달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은(‘구원’은) 메시아이신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눈먼 상태’는, 구원받을 길을 알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는 ‘빛이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도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빛’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수님의 빛 속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묵시 21,23-24ㄱ) 신앙생활은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인 ‘구원’은 그 빛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런 막막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은, 몸의 눈이 멀어서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희망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희망을) 얻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희망과 평화를 얻게 되고, 그 희망과 평화는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힘을 얻는 것은, 앞을 못 보고 있다가 다시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로마 8,24) 희망은 어둠 속에서 만나는 빛입니다.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그 일이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 빛의 인도를 받아서 절망을 뚫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눈먼 사람 둘’은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함께 다녔을 텐데, ‘눈먼 사람 둘’이라는 말에서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세상에는 사람들을 속여서 허무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가짜 빛, 가짜 희망, 가짜 평화, 가짜 구원이 많습니다. 자칭 재림 예수, 가짜 메시아, 사이비 종교, 미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상한 사상들과 이론들이 그것입니다. 가짜 희망이 일시적으로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경우가 있지만, 그 위안은 치료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해로운 마약 같은 것이고, 더 큰 절망에 빠뜨리는 함정입니다. (세속의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고을에는 전부터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부려 사마리아의 백성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아이에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 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그가 오랫동안 마술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기 때문이다."(사도 8,9-11) 속이는 자나 속는 사람들이나 모두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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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일을 보여주는 프로였습니다.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프로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찡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지극한 정성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의 이야기도 있었고, 몸이 아픈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었고, 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욥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성실했고, 하느님을 섬겼던 욥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재물도 잃어버리고, 자식들도 행방불명이 되고, 몸은 병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욥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모든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에게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남자를 모르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10월입니다. 한 달 사이에 구급차를 2번 탔고, 응급실에도 2번 다녀왔습니다. 동창 신부가 시카고에서 잠시 놀러왔습니다. 뉴욕 구경을 시켜 주려고 자전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다니려고 했습니다.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탔는데 15분 만에 자전거가 벽에 부딪치는 사고가 났습니다. 동창신부는 부상을 당했고, 구급차를 불러서 응급실로 갔습니다. 뉴욕 구경 대신 엘머스트 병원에서 2일을 머물다가 동창신부는 시카고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보호자로 구급차를 탔고, 응급실에서 동창신부와 함께 있었습니다. 다행히 동창신부는 보험을 들었기에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없었습니다.
이정도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2주 후에 이번에는 제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갔습니다. 파란불이라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좌회전 하는 차가 저를 미처 못보고 운전하였고, 저도 피하지 못하고 차와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운전하던 사람이 경찰과 구급차를 불러서 저는 빨리 응급실로 가서 사진도 찍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어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는데 플러싱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보험이 없다고 합니다. 난감해진 저는 방법을 찾으니 저의 자동차 보험에서 병원비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보험에 연락을 하니 저의 자동차는 회사 명의로 되어 있기에 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가 난 경우는 보험 혜택을 받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뉴욕 시에 치료비를 청구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변호사에게 의뢰를 해서 뉴욕 시에 병원비 청구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일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할 일입니다. 몸에는 큰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오면 생길 놀라운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비록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멸시 받고, 무시당하지만 언제고 주님의 날이 오면 여명의 눈동자처럼 햇빛이 환하게 드러나듯이 기쁨과 행복이 찾아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이가 걸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병고에 신음하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오늘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시련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게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기다림은 나와 만나는 모든 것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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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이지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건한 믿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회개이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내가 추구하던 삶의 자세를 180도 돌리는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단순하게 나의 생활 습관을 바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회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님의 표양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믿음과 회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워지면 반드시 회개하는 사람이 되게 마련이며, 또한 어떤 사람이 회개하면 반드시 믿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며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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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외방전교회 하유설 요셉 신부님]
<서로 다가가는 용기를>
예수께서 눈먼 이에게 손을 대시는 대목을 보며 느끼는 것은, 그분은 다른 사람에게 손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 또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했다. 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서로 사랑하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부탁하신 최후만찬이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제자들이 사명을 잘 수행하고 왔을 때 크게 기뻐하셨다.
온유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다. 게쎄마니 동산에서는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찬 여린 마음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이렇듯 당신의 감정을 드러내시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기 힘든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셨지만 안아준다거나, 당신들의 여린 마음이나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으셨다. 가부장적인 사회 문화권에서 특히 남자들은 어루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가거나 친밀감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남자들은 강하고 올바른 결정을 잘하고 잘 다스려야 한다고 배웠다.
많은 남자들이 술을 마셔야 벽을 허물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술을 마시다 보면 실수도 하게 되고 때로는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오늘 예수님은 남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신다. 여러 모습으로 당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최후만찬에서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권위주의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지배·통제·복종)에서 봉사적인 리더십(친밀성·협동·창의성·상호 존중)으로 가는 새로운 리더십의 형태를 보여주신다.
나는 남자나 여자 모두, 또 우리 가정, 공동체 안에 서로 다가가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서적이고 영적인 친밀함을 배우자나 자녀에게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또 가족이나 공동체를 넘어 장애우와 병든 이,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는 올해 89세이시다. 노인시설에 계시는데, 같이 계시는 눈먼 할머니를 위하여 주간지나 책을 읽어주신다. 그 할머니께서 어머니와 접촉하면서 고독과 소외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즐거움을 통해 치유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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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매일 아침의 기적>
마태오는 복음서에서 3번에 걸쳐 예수님의 소경치유기적을 보도한다.
첫째는 오늘 복음으로서(9,27-31), 이는 마태오가 10가지 기적사화를 한데 모아 기록한 기적사화집성문(8-9장)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예리고에서 두 명의 소경을 치유하신 기적이다.(20,29-34) 셋째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께서 성전 뜰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신 기적이다.(21,14)
이에 비하여 마르코복음은 2번의 소경치유기적을 보도하고 있다.
첫째는 베싸이다의 소경치유사건이며(8,22-26), 둘째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 예리고에서 있었던 바르티매오 소경의 치유사건이다.(10,46-52)
두 번째의 경우, 마르코는 예수와 소경 바르티매오와 군중의 삼각관계를 통해 장황함과 흥미를 곁들여 이 치유사화를 보도하고 있다.
마르코의 소경치유사화를 마태오가 복음편집에 사용한 원전(原典)이라고 본다면, 오늘 복음의 치유사화(9,27-31)는 예리고의 치유사화(20,29-34)와 중복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파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하시며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11,4-5)고 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소경치유사건이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목을 자연스럽게 기적사화집성문에 넣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수많은 기적사화를 대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하늘로부터 이스라엘백성에게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기적을 베푸셨고, 제자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초기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기적은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적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기적을 대할 때, 더러는 신나기도 하고, 더러는 빈번한 보도에 식상하기도 하며, 더러는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심을 품기도 하고, 이왕이면 나에게도 그런 기적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적이 기적 자체를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그러하셨다.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30절) 물론 함구령이 실패한 경우도 있다.(31절)
중요한 것은 기적을 만드는 조건이다. 조건의 제1단계는 기적을 베풀어주실 예수께 자비를 청하는 일이다. 자비를 청하는 일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다. 제2단계는 자비를 청한 분께 한눈팔지 않고 투철한 신뢰를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집안에 들어가시자 거기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신뢰는 곧 믿음이다. 믿음은 때때로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느냐?”(28절)는 방식의 도전과 시험이 있을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욱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것이 조건의 제3단계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기적의 주체는 아니다. 단지 원인이 될 뿐이다. 기적의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청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신다.
기적을 입은 자가 예수께서 내리신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기적의 사실을 사방에 알리든 말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속한다. 예수께서도 이 점만은 어쩔 수 없으시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도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기적인가? 아닌가? 아니라면 오늘도 그저 어제와 같은 하루이겠지만, 기적이라 여긴다면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르다.
그래서 사방에 나가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릴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자유이다. 기적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였다만 매일 우리는 기적 속에 산다.
감았던 눈을 아침에 다시 뜨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중요한 것을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기쁨과 감사의 근거로 다양하게 선포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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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이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 오늘 화답송 후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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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그 믿음에 저의 믿음이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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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
오늘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분들과 성인의 모범을 따라 선교지에서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는 모든 선교사를 기억하면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스페인의 변방 지역이라고 불리는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나셔서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으시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일본과 중국의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일본에서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시던 중에 1552년 12월 중국 본포가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46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만약 신부님께서 그때 선종하시지 않았다면 아시아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페인을 떠나 복음 전파를 위해 이역만리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그 힘은 '믿음의 힘'이지 않았을까??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었던 '믿음의 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고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었던 '믿음의 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는 말씀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한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믿음의 힘!'
그렇다면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겸손한 마음 안에서 나의 믿음을 조금씩 조금씩 키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믿고 있고, 누구를 믿고 있고, 정말로 믿고 있고, 제대로 믿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늘 오늘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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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식스토 로드리게스는 2집 앨범까지 내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그의 열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팬 2명이 수소문하여 그를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가수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단 6장만 팔릴 정도였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못지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정치적 부패에 맞서던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사는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인기를 전혀 몰랐습니다. 저조한 음반 판매로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되었고 가수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가 라이브 무대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신비적인 가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음반을 발매한 미국에서는 그 어떤 인기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는 엄청난 인기와 모든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이 세상 안에서는 꼴찌의 삶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이나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실 것입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자비의 청을 목청 높이 외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커다란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소경을 눈뜨게 해 주셨는데 그 조건으로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묻습니다. 믿음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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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의식>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했던 병원이지만, 입소문이 나서 계속 확장해서 꽤 큰 규모의 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몇 명의 의사를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다행히 새로 뽑은 의사들은 모두 성실했고, 환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며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당연히 병원은 더 유명해졌고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몇몇 환자들이 원장님께 의사를 정말로 잘 뽑았다면서 새로 뽑은 의사들이 잘하고 있는 점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장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의사들을 하나둘씩 해고했습니다. 환자들의 사랑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만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동료 의사들에게 나눠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병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의사는 사라지고 원장에게만 아부하는 불친절한 의사만 남았습니다. 병원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원장의 라이벌 의식 때문입니다. 굳이 갖지 않아도 될 라이벌 의식으로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경쟁의식을 피해야 합니다. 그보다 나와 함께 할 협조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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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렸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있던 행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이었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며,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음료도 마셔야 하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세상 것을 즐기고 찾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무늬만 신앙인입니다. 육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눈을 어루만져 참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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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기도와 회개, 믿음-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대림시기 제1주간 독서와 복음의 배치가 참 적절합니다. 이사야의 하늘 나라의 꿈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꿈을 꾸고 희망을 갖습니다. 꿈이, 희망이 없으면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삭막하고 궁핍한 시절일수록 하느님 꿈은, 하늘 나라 꿈은 필수입니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는 참꿈입니다. 이런면에서 예수님을 비롯한 이사야 등 헤아릴 수 없는 예언자들, 교회의 성인들은 꿈꾸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꿈의 사람들은 땅의 현실에 아주 깊이 뿌리내린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꿈의 실현은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인지요! 말씀의 주제도 ‘대역전大逆轉’입니다. 바야흐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이사야입니다.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언젠가의 그날의 꿈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대림시기 오늘 실현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내적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의 꿈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을 열렬히 찾는 우리를 찾아 만나 주십니다.
복음의 눈먼 사람이 상징하는바 바로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입니다. 주목할 바 이들의 눈뜨고자하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개안에 앞서 전제되는 바 간절한 믿음의 표현이 이런 갈망이요 열망입니다. 무지에 눈먼 사람들,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참고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동방영성에서 말하는 마음의 병에 대해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참으로 인간에게 근원적 뿌리 깊은 질병이 마음의 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는 마음의 병, 바로 무지의 병입니다. 만병의 근원은 '무지'이고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ignorance’의 병에 이어 줄줄이 이어지는 마음의 병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forgetfullness’,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짐hardness’, 마음의 ‘눈멈blindness’과 ‘오염contamination’, 그리고 ‘무분별imprudence’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의 만남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근원적 마음의 병들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불행과 비극은 이런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하여 평생 하느님을 모름으로 자기도 모르는 채 평생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눈뜬 맹인으로 살다가 참으로 허망하게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불가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이나 교만, 허영, 위선, 질투 등 모든 부정적 영적 현실은 거의 모두가 인간 무지의 눈멈에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무지를 깨우치시고자 부단히 “들어라!”, 귀를 열어 경청할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요, 부단히 “보라!”, 눈을 열어 제대로 실재를 직시할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불치의 근원적 마음의 질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에 눈멀면, 하느님과의 만남 빼놓고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가 절대적입니다. 바로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믿음도 증대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놀라운 것은 두 맹인의 갈망이자 열망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바로 성소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이런 영적 갈망과 열망은 늘 생생해야 합니다. 갈망의 영적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 욕망만 남은 동물로의 전락이 그를 기다립니다.
이런 갈망의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바로 이런 맹인의 심정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두 맹인의 간절한 자비송이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바칠 겸손한 갈망의 기도도 이 기도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집요하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두 맹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절히 찾고 청할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주님을 찾고 만나고 싶은 열망이 없으면 주님을 만날 길은 요원합니다. 마음의 소원이 간절할수록 청원도 단순명료합니다. 눈이 열려 제대로 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무지에 눈먼 우리가 청할 유일한 소원입니다.
“내가 그런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그대로 맹인의 믿음이 집약된 “예, 주님!”이란 말마디요, 이에 감격,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주님을 감동케하는 우리의 믿음이요, 바로 이런 믿음이 눈뜸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두 맹인은 눈이 열렸고 주님은 헛된 인기와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함구할 것을 명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퍼뜨리니 말그대로 복음 선포자들이 됩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역시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활짝 열린 성인은 복음 선포의 사도가 됩니다. 만 46세 중국 선교를 꿈꾸며 병사하기 까지 참으로 치열한, 가열찬 삶을 살았던, 이냐시오 로욜라와 예수회를 창립했던 성인입니다.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 성인은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개종시킨 교우들 수만해도 1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하여 성인은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로 불립니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같은 예수회의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되었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개안의 여정에 항구했던 성인이요 무지의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자 마지막까지 참으로 치열하게 선교활동을 했던 열정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입니다.
개안의 여정입니다. 한 번 눈이 열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의 병이 깊기에 평생 개안의 여정에 항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계속 눈이 열려야 합니다. 육안은 날로 어두워져가도 영안은, 심안은, 혜안은 날로 밝아질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참된 내적자유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을,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렸을 때 다음과 같은 감격의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눈을 열어 주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 천국을 살게 하시며 개안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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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JkKKaFu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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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 29)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떠나는 것이
다시 만나는
참기쁨이다.
새로운 만남을
복음으로
만들어내시는
기쁨의
하느님이시다.
만남과 떠남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고
간절하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붙들어
가두어놓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떠남이 있다.
복음을 위해
떠나는 이들이
있기에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이어주는 기쁜
소식이 된다.
하비에르
선교사의
발자국이
우리를
위로한다.
생명과 바꿀
선교의 길에서
생명의 길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삶을 내어드리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한다.
선교는
가장 간절한
기도이다.
간절한 기도는
이국땅에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기도가 있기에
목숨을 걸
하느님이 계시고
선교가 있기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게 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이들에게
기다림의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다.
기다림이
선교이고
기다림이
사랑이다.
이 위대한
선교사의
발자국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다시 배우는
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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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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