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저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아버지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막장스러운 부자관계는 잘 알려져있는 이야기이다. 부국강병을 중시한 아버지는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유약해보이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기서 촉발된 심각한 갈등은 결국 아들의 탈주 시도와 체포로 이어졌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물론 그 뒤에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는 자기가 유약한 왕이 아니라는걸 증명해보였다는 결론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런 해피엔딩이라기에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이다. 사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결함이 넘치는 자녀 양육법은 아들의 치세 내내 두고두고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학문과 예술을 싫어한 왕
주지하다시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군사강국화에 사활을 건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이 정확히 자신의 '미니어처'이기를 원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학문과 예술을 사랑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인데, 며칠 전 한 회원님이 제기한 것과 같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남자가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유약하다는 법은 없을텐데?'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상식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다루는 방식이 우리가 보기에 너무 비상식적이라 이런저런 분석이 나오게 되는데, 은연중에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깐 분석이 많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라는 한 인간을 먼저 분석해야 한다.
첫번째, 호헨촐레른 왕가가 하노버 왕가로부터 유전적인 문제점을 물려받았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가장 최신 전기를 쓴 Tim Blanning 선생이 이 부분을 잘 정의한 바 있다. 당시 영국의 하노버 왕가는 조지 1세부터 시작하여 아들과 사이가 좋았던 왕이 없다시피 했는데 이러한 정신적 불안정성은 결국 조지 3세때에 터저나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를 물려받은 호헨촐레른 왕가에서도 한동안 잠복해있다가 하필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때에 터져나왔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포르피린 증으로 보고 있는데, 신체적으로도 빌헬름은 4차례나 죽을만큼 중병을 앓았다. 이는 빌헬름에게 불면증과 악몽, 편집증을 선사했고, 대단한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이것이 그의 성격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두번째로는 가부장제 시대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심했던 그의 권위주의를 들 수 있다. 다시 한번 Blanning 선생을 인용하면, 이는 그의 칼뱅파 신앙과 맞물려서 더욱 독특한 양상을 띄었다. 그는 심할정도로 독실한 신자였으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번째로는 물론 이미 언급한 군국주의적 성향이다. 이 세가지 중 어떤게 '학문과 예술'에 대한 그의 비정상적인 혐오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셋이 다 결합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성향이 얼마나 심했던지, 당시 프로이센 왕국에 외교관으로 와있던 오스트리아 대사 제켄도르프 백작은 빌헬름의 신하도 아니면서 자기가 볼 책을 들여오는것도 몰래 해야 했다. 쉽게 말해서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생각은 이러했다. "남자가 시간을 사냥과 기도에 써야지 책 따위 읽으면서 낭비할 시간이 어디있냐?"
이러한 빌헬름과 아들 프리드리히 간의 불길한 조짐은 아주 일찍부터 나타났다. 프리드리히가 6세 되던 해,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 군인 풀세트를 선물했다. 군기에 군복은 물론이고, 발사 가능한 대포까지 포함된 대단히 정교한 장난감이었다. 그러나 어린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선물을 한번 쓱 보더니, 바로 악보와 악기쪽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프리드리히는 여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에서 성장할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이 시작된 뒤였다.
막장 아버지
그래도 아주 당장은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는데, 프리드리히가 어린 나이에도 자기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훈련, 사냥, 사격, 군 지휘)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사실 6살짜리 애한테 130명으로 구성된 중대를 하나 만들어주면서 지휘하라고 시켰으니 아무리 조기교육이라지만 누가 봐도 심한 것이었다.
어쨌든 프리드리히는 비교적 잘 숨겼지만, 열두살 무렵쯤 되면 빌헬름도 대략 눈치를 채기 시작한다. 이 무렵 빌헬름은 "아무리 봐도 저놈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게 있는데, 물증이 없단 말이야..."라는 투로 말하기도 하였다. 사춘기라고 할 수 있는 14-15세 무렵이면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금욕적이고 음울한 종교에도 등을 돌렸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프리드리히가 10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즉, 더욱 반항적인 나이가 되면서) 갈등은 누가 봐도 명백해졌다. 이때의 갈등 양상은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의 한 왕가와 닮은 점이 분명 없지는 않다.
영조: 나라를 이어받을 놈이 공부는 게을리하고 무예 따위나 좋아하니...
빌헬름: 나라를 이어받을 놈이 무예는 게을리하고 공부 따위나 좋아하니...
이 시점부터 프리드리히가 받기 시작한 학대는 참으로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신체적 폭력은 예사였고, 나중엔 빌헬름은 아들 보는 것도 싫어했다. 심지어 같은 식탁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프리드리히는 왕자의 신분으로 저녁 식탁 맨 끄트머리에 앉아야 했다.
빌헬름은 이런 고통을 통해서 아들의 반항의지를 꺾어보려 한것 같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루는 빌헬름이 영국을 지지하는 '사악한 파벌'에 대한 비난을 퍼붓고 있을때, 프리드리히가 정면에서 이렇게 대들었다고 한다.
"저는 영국이 좋습니다. 최소한 영국 사람들은 저를 좋아하거든요."
물론 돌아온건 매타작이었다.
정신적 학대도 그에 못지 않았다. 국왕이 왕자를 교육함에 있어서 최악의 형태가 바로 아랫사람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는 행위이다. 사실 영조도 사도세자를 갈굴때 많이 보인 행동이긴 하다. 빌헬름도 그랬다. 사실 어떻게 보면 더 심했다. 식사자리에서 장남을 제일 아랫자리로 쫓아낸 것도 그렇지만, 한번은 얼굴을 두들겨패고 머리털을 잡아뜯어놓고서 그 모습 그대로 열병식장을 걸어가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당연히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폭행의 흔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러니 프리드리히가 탈출을 시도했던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프리드리히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영국으로 탈출하려다 잡혔을때 빌헬름은 분노로 미칠 지경이었다. 프리드리히와 매우 친밀했던 누나 빌헬미네 공주의 증언을 들어보자: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격노에 사로잡혔다. 얼굴은 시커매지고, 눈은 불이 난듯 했으며, 입에는 거품을 물고 외쳤다. "이 더러운 악당 같으니라고! 어디서 감히 내 앞에 나타나느냐? 얘 당장 여기서 쫓아내! 네 망할 동생놈한데나 가든지 해!" 이 말을 하면서, 아버지는 내 팔을 잡고 얼굴을 수차례 때렸다.
빌헬미네 공주는 이날 거의 정신을 잃을정도로 얻어맞았다. 궁정에 와있던 프랑스와 영국 대사들은 모두 그날 왕의 고함소리와 얻어맞는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빌헬름은 아들도 죽여버리겠다고 펄펄 뛰었다. 아무려면 자기 아들을 진짜 죽일 생각이었을까 싶긴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화가 났을때 그렇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왕비는 오스트리아 대사 제켄도르프를 붙잡고 "제 아들 살려주실 분은 황제폐하 뿐입니다" 라면서 사정사정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도 제켄도르프는, 앞서 말했듯 책도 몰래몰래 들여올만큼 평소에 눈치를 봐서인지, 빌헬름과 사이가 좋았고, 결국 신성로마제국이 중재에 나섰다. 정말 그의 중재가 결정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얼마 뒤 빌헬름은 "내가 저 자식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카를 6세 폐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는고로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한다"라고 공식 발표한다.
그 뒤로 프리드리히는 다시 제켄도르프의 중재로 별로 원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하게 되고, 그 덕분에 최소한의 독립과 자유를 얻게 된다.
트라우마의 그림자
그러나 이 정도로 심한 학대를 당한게 영향이 전혀 없었을리가 없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프리드리히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슐레지엔을 목표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한다. 흔히 이 일은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문약한 사람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가 진면목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냉정한 유럽 국제질서의 현실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프리드리히는 흩어진 영토를 가진 프로이센의 취약성을 알고 있었고, 기회만 오면 이 영토들을 통합할수 있도록 정복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냉정한 전략적 계산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프리드리히에게도 한가지 비합리적인 면이 있었는데, 바로 오스트리아를 향한 거의 맹목적인 증오였다.
이 점은 사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목숨을 빚졌다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뒤로도 제켄도르프는 끊임없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중재하면서 프리드리히의 편의를 봐주고, 심지어 빚도 갚아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lanning 선생이 지적하듯,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를 증오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유인즉...
1. 오스트리아 대사 제켄도르프가 우리 아버지랑 너무 친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만 생각하면 우리 아버지가 떠오른다.
2. 원하지도 않는 내 결혼을 주도한게 제켄도르프 그놈이다.
물론 이 두가지 덕분에 목숨도 건지고, 최소한의 자유와 독립을 누리게 된건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_-) 제3자가 보면 황당한 이유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그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심리상태는 현대 학자들의 억측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 대사 라 셰타르디는 본국에 매우 자신있게 보고했다.
"설령 프리드리히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아주 약간이라도 있었다 하더라도, 저 결혼 중재건 때문에 전부 다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국제정치가 아무리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룰은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슐레지엔 침공은 거의 명분이 없었다. 프리드리히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명분은 필요하니 프로이센 외교부는 머리를 짜내서 슐레지엔 침공의 역사적 정당성을 만들어왔다. 자기가 시켜놓고서, 결과물을 본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브라보! 사기 아주 잘 쳤구나."
어쨌든 슐레지엔 획득은 성공했지만, 이는 프로이센을 계속해서 전쟁으로 몰았다. 프리드리히는 슐리지엔 획득을 자기 최고의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해서든 이걸 지켜내야지만 자신의 치세가 성공으로 마무리된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가 그냥 있을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불안해했고, 이게 결국 7년전쟁의 근원이 되었다.
Szabo 선생이 지적하듯, 7년전쟁은 프리드리히 입장에서는 예방전쟁이었다. 프로이센이 강대한 유럽 국가들의 동맹에 포위당하고 있다는 생각과, 조만간 오스트리아가 공격을 가해 슐레지엔을 되찾아갈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인 프리드리히는 기회를 잡아 선제타격을 가해야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물론 오스트리아는 슐리지엔을 포기하지 않고 군제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얘가 곧 쳐들어올게 뻔하니까 내가 (또) 먼저 쳐들어간다"는 논리는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앞서 말했듯 18세기 유럽 국제정치가 아무리 혼잡해보여도 최소한의 룰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체제의 핵심인 '세력 균형'이 가장 중요한 룰이었다. 프리드리히의 침공은 여러 다른 나라들의 눈에 점점 더 이 룰은 심하게 위반하는 행위로 보였다. 이는 심지어 그동안 유럽 개신교 국가들의 챔피언을 자처하며 합스부르크와 맞서온 전력이 있던 스웨덴마저도 합스부르크의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스웨덴은 개신교의 챔피언 못지 않게 베스트팔렌 체제의 챔피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체제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프리드리히의 깽판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오스트리아가 스웨덴을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달랬다지만 합스부르크와 동맹이 공감대를 얻은 것에는 이러한 인식이 깔려있었다. 결국 프리드리히의 대외정책은 개신교 스웨덴과 가톨릭 오스트리아의 동맹이라는 기현상까지 초래했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유럽 강국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졌고, 프로이센은 거의 망할 뻔 했다. 결국 슐리지엔은 지켜냈지만, 프리드리히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Szabo 선생은 '7년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덕분에 살아남은게 아니라, 프리드리히라는 존재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이라는 평까지 남겼다.
이러한 위험한 대외정책을 불러온 슐레지엔에 대한 집착, 그것을 애초에 시작하게 한 전쟁에 있어서 프리드리히가 부왕으로부터 받은 트라우마의 영향력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오며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일국의 왕(그것도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의 대외정책을 지나치게 개인사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프리드리히가 끝내 부왕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했다는 증거는 곳곳에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7년전쟁 중의 두 에피소드는 그의 치세 내내 부자갈등이 남겨놓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프리드리히가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쿠너스도르프에서 최악의 패배를 겪은지 다섯달쯤 되는 1760년 1월의 일이었다. 지치고 절망감에 빠져있던 그는 어느날 악몽을 꾸고 이를 비서에게 구술하였다. 꿈에서 그는 왕자 시절로 되돌아가있었는데, 부왕의 명령으로 체포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누나에게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느냐?"라고 물었고, 누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죄"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는 아니라고 외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니까 나이 50을 바라보는데다 이미 대내외적으로 대왕 칭호를 듣고 있던 군주가 아버지한테 잡혀가는 꿈을 꾸었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전선이 마침내 어느정도 안정되었다. 어느날 프리드리히는 다시 꿈에서 부왕을 만나고 비서에게 이를 구술하였다. 꿈속에서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 한 것입니까?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그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꿈속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됬습니다. 제가 바란 것은 오직 아버지께 인정받는것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참고
Tim Blanning, Frederick the Great: King of Prussia (Allan Lane, 2015).
Franz A. J. Szabo, The Seven Years War in Europe, 1756-1763 (London, 2008).
첫댓글 마지막 꿈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마음속 대화를 떠올리게 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 눈물 ㅜㅜ
ㅠㅠ
스노우님의 글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ㅎㅎ 영조와 프리드리히의 비교는 정말 재미있네요~~~~~
감사합니다
와 씨발...ㅠㅠ 남자들은 저런거 보고 울져 ㅠㅠ
그러나 애꿎은 피해자가 된 오스트리아는...
잘 보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막줄은 정말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