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복음이 능력이어야만 할까요?
(2) 복음의 일부인 행위 심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9)
여기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누가 진짜로 저주받아 마땅한 이단일까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목사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의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말을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부산의 통합 교단 모 원로목사처럼 오직 믿음 외에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말하는 엉터리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이런 구원파적인 거짓 복으미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해드리겠습니다.
1)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십자가는 단순히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많은 목사들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는 부분만 인용하고 "오직 십자가"라고 떠들어대며 그렇게 말해야만 정통인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한 십자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를 못 박아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못 박히게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단순히 죄 사함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라디아서 6:15)
비단 이 구절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에도 같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읽어도 이해가 안 되실 것이므로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이 설교를 끝까지 들으면 그 구절이 같은 내용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2)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믿음은 단순히 수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증거합니다. 사람들이 "봐요. 오직 믿음이잖아요?"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비결로 제시한 믿음은 루터가 말한 행위와 분리된 '수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6)
이처럼 바울이 전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여기서 "으로써"는 '디아'(δια)라는 단어인데 "~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사랑을 통해서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몇몇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공동번역성경)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현대인의성경)
이처럼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반하여 강조한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그럼 사랑을 통해서 믿음이 표현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은 율법의 강령 즉 골자요 핵심입니다(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면 대신계명인 1-4계명을 지킬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면 대인계명인 5-10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순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롬 1:5, 16:26). 그러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야고보 사도가 말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약 2:14-26)과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루터가 말한 수동적인 믿음(즉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절을 통해 재확인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라디아서 5:5)
나중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지만, '의의 소망'은 심판 날 받는 최종적인 칭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는 믿음 즉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만이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데 효력이 있고 다른 믿음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전혀 효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을 '수동적인 믿음'으로 착각한 루터가 왜 갈라디아서를 자기의 부인처럼 아끼고 사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그가 지푸라기로 여긴 야고보가 주장한 믿음과 똑같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말이죠! 아마 루터가 믿음에 대해서 착각한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의미도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3)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심판은 놀랍게도 행위 심판입니다.
앞에서 '십자가'와 '믿음'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칭의에 대해서 논할 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겠지요. 이제 '심판'에 대해 설명함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심판은 믿기만 하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무조건 천국에 보내는 심파니 아니라,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은 영생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노와 분으로 갚아주는 '행위 심판'입니다. 이것은 다음 구 구절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19-23)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8)
둘 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구절들인데 행위 심판에 대해서 쓰고 있지요! 이 중 뒤 구절에 대해 권연경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바울의 신학적 신념을 집약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므로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신념과 바울의 논증을 이끌어온 '성령/육체의 반제'(3:3, 4:29, 5:16-26)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례와 같은 무익한 조건들을 의지하며 헛된 희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런 '값싼 은총'에 속아 심는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착각'은 교회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 중 하나다.
논증을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다시금 믿음과 은혜의 논리가 '행위 없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 곧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간 삶 그대로 심판하신다는 신념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드러나는 사상으로, 하나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신념 중 하나다. 따라서 이 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그 원칙을 세우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착각한다고 해서 그 원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미래가 위험해질 뿐이다."
그렇습니다. 행위 심판에 대한 무지 또는 의도적인 무시는 커다란 위험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행위 심판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앞부분에 행위 심판의 원칙을 기록해놓았습니다(로마서 2장). 갈라디아서에서는 뒷부분에 행위 심판의 원칙을 기록해놓았습니다(갈라디아서 5-6장). 루터가 가장 좋아했다는 두 서신 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터의 주장과 다른 행위 심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믿기만 하면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요즘 유행하는 복음이 비성경적인 것이며 바울과 무관한 다른 복음임을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상 깔끔하게 증명해드린 대로, 다른 복음은 우리 교회가 아니라 우리를 이단이라고 떠드는 목사들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요 적어도 이단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성경 그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우리에게 율법주의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개의치 말고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시고, 당당하게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참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4.27 2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