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니 모든것이 은혜였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은혜였다. 절망도 은혜요 고통도 은혜요 외로움도 은혜였다. 그 절망의 골짜기가 아니었으면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겠으며 그 아픔이 아니었으면 주님과의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었겠으며 지독한 외로움이 없이 어찌 내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알기나 했었으랴!
새천년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이 온 우주에 가득찬 듯하던 2000년 1월, 피를 토하며 쓰러진건 바로 그 때였다. 그리고 어둠이었다. 단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같은 흐릿함이 내 영혼을 송두리째 휘감아버렸고 나는 그 속에서 불안과 싸우고 있었다. 또 외로움이었다. 지붕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밤을 새우며(시102:7) 군야전병원 응급실에서의 시간들은 숨막히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시경에 잡힌 건 위궤양이었다.
“출혈만 멈추면 큰 문제없습니다.” 군의관의 말을 철썩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또 다른 불안감으로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그건 단지 몸에 나타난 병리적 현상 때문만은 아니었고 어쩌면 내 존재의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영혼의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살아온 날들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가책의 소리였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의 채찍소리였다.
군종목사로 달려온 9년 여의 세월을 두고 사람앞에서는 그다지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속에는 목사의 신분을 품고 외면적으로 장교의 행세를 하고 살아야 하는 이중성 속에서도 두 가지 모습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가슴 가득 확신을 가지고 즐기면서 살아왔음을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지금 허망함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도대체 그 시간동안의 내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 모든 수고의 결과가 이처럼 참담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마음속에서는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나 자신의 드러나지 않은 죄와 과오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과 아울러 육신의 질병보다도 더한 영혼의 질병으로 고통을 안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시작되고 이제는 누구에게도 떳떳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열흘간의 밤들을 하얗게 지새워가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확신이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맞닥뜨릴 수 있는 마음의 용기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마음의 짐을 벗어야 한다. 틀림없이 나는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게 분명했다. 그게 누구였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아내였다. 10 년 전, 결혼한지 3개월 정도 되던 어느날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목회자한테 시집오면 영적으로 늘 부족함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런다던 그 때, 난 정말 그 때 부끄러움을 알았어야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내는 영적으로 만족하고 있을까? 이 점에서 자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아이들은? 때로 그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빠에게 꾸지람을 듣고 분통해 하던 적은 없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수많은 죄악들이 마음속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에 의해 마음을 다친 수많은 사람들이 또한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찾아가 그 앞에 무릎꿇고 사죄할 수만 있다면․․․․․․․. 사람앞에 지은 죄들이 마음을 괴롭히는 동안에 하나님생각은 엄두도 못했다. 하나님앞에 지은 죄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사람앞에 지은 죄가 바로 하나님앞에 지은 죄와 일반인 것을.
뜨겁게 흐르는 눈물이 베개를 적시고 침상을 적시고 내 영혼을 적시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도 엄청난 죄의 흑암보다는 못했다. 그날 밤새 흘린 눈물을 내 평생에 조금씩 나누어 흘릴 수만 있었다면,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깊이 동정하는 눈물들로 조금씩만이라도 나누어 흘릴 수만 있었다면 이런 고통이 나에게 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밤새 통곡의 눈물로 지새우고 밝아오는 창밖은 온통 눈으로 하얀 세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하얀 세상도 하나님이 내 마음안에 새롭게 창조하신 것에 비하면 오히려 무색한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평화, 그토록 갈구하던 평화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그 때는 몰랐었다. 그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계시였는지를. 하나씩 하나씩 혹독한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입을 열어 말씀을 주심으로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심으로써 나에게 깨닫게 하셨다.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체험케 하셨다.
이 가슴 한아름이나 되는 평안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는 그것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야전병원에 입원한 지 열흘 쯤 되던 어느날, 출혈만 멈추면 될 것 같다던 군의관이 조직검사 결과를 가지고 와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때 알았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군병원 앰뷸런스에 실려 분당에 있는 국군수도병원으로 가는 창가에서 아내는 나와 눈을 맞추려하지 않고 있었다. 애써 내 눈길을 피하며 먼 창문밖에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내 눈길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태도로 애써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아, 나는 다시 이 사람에게 씻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간 나로 인해 당한 상처들을 이제부터 씻어주고 싶었는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내 아내의 슬픔의 눈을 언제나 잊을 수 있을까? 천국에라도 가면 잊을 수 있을는지.
국군수도병원에 도착한 후로 갑자기 찾아든 불안감은 그 이유를 정확히 추적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 내게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단순하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종일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고 매일처럼 계속되는 각종 정밀검사과정은 나를 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10 여일이 지나고 난 어느날 군의관은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고 나는 그의 눈가에서 애써 나를 안심시키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건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던 바였다.
“생각했던 대로 암입니다. 수술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수술만 하면 된다니.
그 때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수술한다는 것, 1년동안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 때는 몰랐었다. 그때는 그래도 수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고 내가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 일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다시 내게 찾아온다면 나는 단연코 거부할 것이다. 수술아닌 다른 길, 항암치료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할 것이다. 비록 고통의 과정에서 주님이 내게 주신 수많은 은혜의 흔적들을 영혼 깊숙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수술을 며칠 앞두고 이발소를 찾았다. 어차피 수술하게 되면 머리도 감지 못할텐데 싶어서 짧게 깎았다. 그 생각으로 인해 아내는 또 얼마나 더 속상해했던가? 안그래도 바짝 여윈 모습에 머리까지 없어져 버렸으니 그 속이야 오죽했을까? 머리를 깎는 동안에 갑자기 피로가 찾아오고 의욕을 상실했다. 그런 내 모습에 이발사는 의아해했다. 그리고는 내 폐부를 찌르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때는 이 말이 얼마나 서운했던가?
“목사님, 왜 이렇게 낙심해 있습니까? 그 동안 목회하신 것도 도 다 헛일이었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가슴에서 뭔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게 있었다. ‘그래 나는 병자야 그것도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자라구.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영혼도 석을 때로 썩어버린 38년된 병자라구.’ 그 때 내 나이 38세를 지나고 있던 터였다. 자책감과 공허감으로 마치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듯이 한동안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병원 교회앞을 지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교회문을 들어서는데 교회명이 내 눈길을 끌었다. 바로 ‘베데스다교회’였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한번 더 도와주세요. 그동안 저에게 수도 없이 많이 속아오셨겠지만 한 번 더 속으시는 셈치시고 이번 한 번 더 도와주세요.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치신 것처럼 이 38세 병자를 도와주세요.’ 목놓아 우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길 말고는 나에게 대안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내 앞에 성경이 놓여 있었고 주님은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 시편118:17-18이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그가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하나님은 일하시기 전에 반드시 말씀을 주신다. 말씀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 말씀을 믿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신 응답이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고치시는도다.’(시107:20) 감사의 마음으로 일어섰다. 입원하던 첫 날부터 계속 머리속을 맴돌던 말씀을 떠올렸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그 때 비로소 깨달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모든 것이 한 단위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이었다. 그리고 거룩함을 요구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거룩한 것으로 구별된 사람이나 물건은 하나님이 쓰시는 자가 되고 물건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쓰임새가 남은 사람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상이 갑자가 환해졌다. 내가 서야 할 곳이 환히 보였다. 그것이 비록 나의 소망에 기인한 착각이었다 해도 나는 그 소망이 나를 살리리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수술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수술계획이 정해지고 입원한 다음에 비로소 부모님께 연락했다. 급하게 올라오신 아버지는 한 달 새에 10kg이나 빠진 자식을 보시고 말문을 닫으셨다. 그저 속으로만 우셨다. 밤새 간호하실 때도 한 잠도 안 주무시고 꼬박 밤을 새셨다. 마치 경계근무하는 병사와도 같이 꼼짝도 않으시고 내 안색을 살피시더라고 병실 환자들이 전언했다. 아버지, 당신은 내게 그리도 깊은 속쓰림으로 사랑을 전하셨던 것이다. 그 깊은 속을 다 헤아리지 못해도 이제사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일까? 병원에 오시자마자 머리숙여 기도부터 하시던 어머니는 자식이 먼저 죽게 할 수는 없으시다며 암에 좋다는 것들은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갖다 바치실 기세이셨다. 그 분들의 심정을 만 분지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다면 그렇게 내 몸을 망가뜨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2000년 3월 1일, 그 날은 결혼 10 주년 기념일이었다. 우리는 그날을 수술을 하루 앞두고 병실에서 보냈다. 그 날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모든 수술이 다 그렇지만 이번 수술은 위험한 고비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출혈이 너무 심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다. 혈액 속 헤모글로빈 수치가 13 이상이 정상인데 나는 7과 8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수술 중에도 출혈이 계속될 것인데 갑자기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면 의료진도 손을 쓸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무엇보다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어쩌면 영영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그야말로 짧은 시간, 0.1초도 안되게 느껴지는 순간에 불과했다. 마취가 되고 바로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깨어나세요.” 순간적으로 나는 깊은 착각에 빠졌다. 나는 그것이 천국에서 깨어난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통증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눈 앞에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 비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술대 위에는 무영등(無影燈)이 있고 난 전신 마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천국을 살고 있었다. 너무나 황홀해서 주변을 둘러 보는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아주 다정스레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내겐 천사들로 보인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아내니 자식이니 가정이니 하는 것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저 이 황홀함만을 계속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행복감을 깨는 답답함이 이내 엄습해왔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어딘가에서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때 내게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 나는 천국에서 순간적으로 밀려나고 만 것이다. 천국에서 다시 이 고통 많은 세상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의 절망감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이 땅에서 고통과 싸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에게 위로를 주는 깨달음이 왔다. 이 땅에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죽지 않고, 죽어서도 안되고, 더 나아가서 죽을 자격도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나는 죽을 자격도 없는 천국 낙방생이었던 것이다.
다시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내가 부딪혀야 할 현실은 너무도 냉엄했다. 우선 수술 후의 상태에서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 다음에는 위가 없어진 상태에 적응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고통스럽고 지루한 항암제와의 싸움이었다. 항암주사를 맞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서 어느날 운전하고 가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주님은 내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위해 고통을 겪었는데 너는 너를 위한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냐?” 그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눈앞이 가려 도무지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도로 옆에 차를 세워 두고 얼마나 회개하며 울었는지.
고통스럽긴 했어도 이 모든 시간들은 내게 은혜요 자비의 시간이었음을 감히 고백할 수 있다. 평생 받아온 하나님의 은혜를 다 합해도 지난 2년간 누려온 축복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 주님은 고통의 가장 밑바닥에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 바로 거기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기에 나는 어떠한 고통가운데서도 천국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작은 경험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한 발 다가갔다는 것만 해도 내게는 큰 축복이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한 번 더 뜨겁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남다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배려라고 생각되어 감히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질병과 싸워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하루하루가 내겐 기대감과 흥분의 날들임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배척하시는 분이 아니라 끌어안으시는 분이심을, 가장 깊은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사랑을 나타내실 수 있으심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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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수술하고 투병하던중 월간고신에 투고한 친구의 신앙간증문입니다. 그때 대상을 받아서 월간고신에 발표된 간증입니다. 친구를 먼저 천국에 보내고 다시 이 글을 보니 친구 생각이 더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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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글중에 "가장 깊은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사랑을 나타내실 수 있으심을 알았다"를 -->"가장 깊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분이심을 알았다"로 읽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웠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승하니이다.......여호와여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119:67,71,76)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38:17) 그 누구든지 고통과 시련이 없이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도 맛 볼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아우도 같은 병으로 투병하다 나이 54세에 결국은 주님께로 갔는데,일년이 넘는 기간동안에 말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기간이 있었습니다.처음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의심과,원망과 여러가지 상념으로 갈등을 겪으며 씨름을 하였습니다.교회의 다른 형제들은 주님의 은혜안에서 건강의 복을 누리며 잘들 살며,심지어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믿지 않는 직장 동료들도 별 어려움 없이 건강한 몸으로 활발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허락하신 고통을 받아 들이기 어려워 했습니다.그러나 시편 73편을 보면서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모든 원망과 의심이 사라졌다
고 하였습니다.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불같은 믿음의 시련이 뒤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십자가는 우리의 삶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찾아 옵니다.그리고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는 버림 받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동산에서 그 잔을 피하고 싶어 하셨던 것은,그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 보다도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는 그것을 더욱 더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죄없는 자가 죄인을 위해 당하는 희생과 고통이 너무나 큰 것이지만,그래도 하나님의 임재와 위로가 있다면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주님은 하늘 아래 땅위에서 오직 홀로 그러한 고통을 겼으셨습니다.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고,심지어 제자들에게 조차 버림을 받은 것이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그 고난의 십자가로 인하여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게 되었고 그 풍성한 사랑과 축복 가운데서 살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사와 찬송 뿐입니다.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은혜 받고 갑니다. 살롬
크리스챤님의 간증 더불어 좋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너무나 귀한 형제들이 아주 짧은 일생을 살다 주님께로 간 것을 보게 됩니다.이 척박한 한국땅에 복음을 전하려 했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26세로 일생을 마쳤고,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다 29세에 죽음을 맞았고,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던 로버트 머리 멕세인도 29세로,헨리 마틴은 31세로,오스왈드 체임버스는 40세로,그외에 일찍 구원을 받고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던 형제들이 의외로 너무나 일찍 그 삶을 끝내고 주님께로 간것을 보게 됩니다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그 길이에 있지 않고 그 삶의 질에 달려 있고,
또한 우리의 수명은 정해져 있다고 봅니다.우리가 생각할 때에 저런 사람은 좀 일찍 죽어도 상관이 없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의외로 오래 사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중요한 것은 모세가 시편90편에서 말한 것 처럼 우리의 날들이 주님앞에 얼마나 계수가 되느냐 하는것만이 중요한 것이라 봅니다.이 땅에서 백년을 살아도 하나님앞에서 단 하루도 계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의 나날들은 하나님이 계수를 하신다는 것입니다.우리의 칠,팔십 평생에 구원받은 이후,주님께 드려져 쓰임을 받은 날이 몇일이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주님께 드려진 시간만이 가치가 있고 그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하나님의 자녀들도 불신자들 처럼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 도있습니다.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자가 지혜롭고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하지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5~18) 세월을 아끼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그리고 오늘이라는 이 날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그래야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 지식을 귀하게 생각하여 창세기 부터 계시록까지 다 알려고 연구하고 분석하지만,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 지식이 교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지식으로 충만하기 보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복이 있는 자입니다.지식이 부족한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믿음이 없고 성령이 충만치 못하면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성령이 충만한 자가 되게 하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날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아멘.
지식으로 충만하기 보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복이 있는 자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