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법안 58%, 비용추계서 안 내… 유사법안 ‘복붙’ 수준 제출도
[의원발의 법안 비용 분석]〈下〉 비용산출도 없는 부실한 법안들
막대한 재정 투입되는 법안인데도…‘예측불가’ 등 이유로 사유서만 첨부
양곡법도 비용추계서 제출 안해…“국회 입법, 엄밀성 떨어진다는 방증”
A 의원이 대표 발의한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특화 농산물의 가격이 최저 가격 미만으로 하락하는 경우 그 차액을 생산자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법안에 첨부하도록 돼 있는 비용추계서가 없었다.
최저가격보상제를 실제 시행할 경우 들어갈 비용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해당 의원실은 그 사유로 “지역특화 농산물의 종류 및 지원 규모 등에 대한 합리적인 추계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경제 관련 법안에 큰 규모의 재정 비용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비용 추산이 아예 안 돼 있거나 부실하게 이뤄지는 등 허점이 드러났다.
● ‘얼마 드는지 모르는’ 법안이 10개 중 6개
19일 동아일보가 한국경제연구원에 의뢰해 21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경제 관련 계류 법안 1983건을 분석한 결과 비용추계서가 첨부된 법안은 836건(42.2%)으로 절반이 되지 않았다.
법안 비용추계는 국가 재정의 안정적 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국회법과 국회 규칙을 통해 마련하고 있는 제도다. 취지에 따라 재정 비용이 드는 모든 법안은 가급적 그 비용을 추산해 제출해야 하지만 ‘의안의 내용이 선언적·권고적인 형식으로 규정되는 등 기술적으로 추계가 어려운 경우’에는 미첨부 사유서로 갈음할 수 있다.
분석 대상 계류법안 중 1136건(57.3%)은 비용추계서 대신 이를 내지 못하는 이유를 사유서로 첨부했다. 비용추계서를 첨부했다고 밝혔으나 실제 의안정보시스템에 누락돼 있는 경우도 11건 있었다. 본보 분석(4월 18일 자 A1면 참조)에서 여야 재정지출 법안 중 비용추계서가 첨부된 497건이 모두 통과될 경우 총 418조 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처럼 비용추계서를 첨부하지 않은 법안들까지 감안하면 소요 비용은 규모가 더 커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 ‘1호 거부권’ 행사 대상이 됐던 양곡관리법 개정안도 마찬가지 사례다. 지난달 23일 통과됐다가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개정안을 포함해 21대 국회에 상정됐던 양곡관리법 개정안 모두 비용추계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미첨부 사유로는 “쌀 생산량은 기상 여건에 크게 영향을 받으므로 향후 생산량을 예측하기 어렵다” “미래 수요를 예측하기 어렵다” 등이 언급됐다.
이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쌀 매입 의무화로 초과생산량은 계속 증가해 2030년에는 63만 t에 이르고, 이를 매입하는 데 약 1조4000억 원 수준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대목을 포함시켰다. 1조4000억 원은 2023년도 농업 분야의 전체 연구개발 예산을 초과하는 규모라는 점도 함께 지적됐다. 이 외에도 비용추계서를 내지 않은 다수의 법안은 ‘기술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구체적인 계획과 규모 등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기에’, ‘현시점에서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없어’ 등을 사유로 밝혔다.
전문가들은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면서도 비용 계산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국회 입법 과정 자체가 엄밀성이 떨어지는 방증이라고 지적한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자체 기준에 따라 주요 법안은 ‘페이고(Pay as you go) 방식’을 통해 재원 확보 방안을 함께 제출하도록 돼 있다”면서 “재정이 대거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대략적인 비용 산출 검토는 입법 과정에서 최대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 중복·계산 오류 법안도 다수 발견
비용추계서를 제출한 법안들 중에서도 유사 법안들의 비용추계서를 그대로 따온 것으로 추정되거나 계산이 틀린 채 제출된 경우도 다수 발견됐다.
B 의원이 발의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 첨부된 비용추계서는 불과 2개월 전 다른 당 C 의원의 동명 발의안 비용추계서 형식과 시나리오, 추계 내역 등이 복제 수준으로 동일했다. 소속 정당이 같은 D 의원과 E 의원이 발의한 ‘대중교통의 육성 및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또한 비용 추계 기간에만 한 달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수치와 각주 등이 동일했다. 단순 실수나 오기도 걸러지지 않았다. F 의원의 ‘도시철도법 일부개정법률안’의 경우 전체 추계금액을 4조5229억 원으로 계산해놓고 4조5559억 원으로 오기했다. G 의원의 ‘소득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연도별 추계액의 총합이 193억4300만 원인데, 166억3400만 원으로 잘못 계산하기도 했다.
유정주 한경연 기업조사팀장은 “유사한 법안의 경우 산정 비용이 비슷할 수 있지만, 토씨까지 일치하는 비용추계서나 계산이 틀린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것은 그만큼 치밀한 비용 산정 없이 단순 ‘실적 쌓기용’ 법안 제출이 많다는 의미”라며 “입법 단계에서부터 재정 비용을 엄밀히 따져보고 현실성을 고려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곽도영 기자
정부도 선심 정책, 기업 고통분담 내몰려… 한전 적자 2조여원 민간 발전사가 떠안아
[의원발의 법안 비용 분석]
“물가상승 우려” 통신료 인하 압박도국회뿐 아니라 정부도 선심성 정책을 펴면서 그 비용을 기업에 전가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19일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적용된 전력도매가격(SMP) 상한제의 영향으로 민간 발전사들이 받지 못한 정산금은 2조1000억 원에 달한다. SMP 상한제는 한전이 민간 발전사에서 매입하는 전력 도매가에 상한선을 두는 정책이다. 3개월을 초과해 연속 적용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지난달 운영을 멈췄다가 4월 들어 다시 적용됐다.
민간 발전사들의 불만에도 SMP 상한제가 이어지는 이유는 한국전력공사 적자와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공기업인 한전이 작년에만 32조6000억 원대의 적자를 내자 민간 기업들에 ‘고통 분담’을 강제한 것이다. 이에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들의 경우 원가 이하 가격에 전력을 공급하는 일도 생기고 있다. 규모가 작은 민간 발전사들은 올해 원리금 상환 계획에 차질을 빚거나 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간 발전업계 관계자는 “한전의 대규모 적자를 해결하려면 발전 시장의 구조적 문제 개선이 필요한데, 기업에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정부로서도 전기요금을 올리자니 국민 불만이 우려돼 결국 기업들에 짐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했던 통신요금 인하도 마찬가지다. 민간기업의 가격에 정부가 직접 개입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통신 3사의 과점 체제에서 제대로 된 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과 함께 정부의 요금 인하 압박은 계속돼 왔다. 노무현 정부는 통신 기본료와 문자메시지 요금 인하를, 이명박 정부는 기본료 인하와 발신자 번호 표시 무료화,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선택약정 요금 할인율 확대 등 요금 직접 개입을 이어왔다. 윤석열 대통령도 물가 상승에 대한 국민적 부담이 커지자 통신사, 금융사 등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어느 정부 가릴 것 없이 공무원들도 선거용 정책을 내놓는 것은 정치인들과 다를 게 없다”며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번 돈을 갖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데 정책 때문에 투자여력이 줄어드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석호 기자
전경련 “세법 개정해 기업투자 환경 조성해야”
[의원발의 법안 비용 분석]
막대한 재정 지출이 동반되는 법안들을 쏟아내는 국회가 국내외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환경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24%에서 22%로 낮추고 과세표준 구간을 4단계에서 2단계로 단순화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2023년 세법개정 의견서’를 기획재정부에 제출했다. 지난해 세법 개정으로 최고세율이 25%에서 1%포인트 인하됐지만 여전히 해외 주요국 대비 높은 수준이라는 근거에서다. 전경련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지방세를 포함하면 26.4%로 미국(25.8%), 프랑스(25.8%), 중국(25.0%), 대만(20.0%)보다 높다. 국내 기업의 투자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해외 기업이 한국에 투자할 때도 높은 세율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개발(R&D) 세액공제 상향과 관련한 법안들도 국회 논의 테이블에 올라오기 힘들다. 재계는 대기업 R&D 세액공제율을 6%로 상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일반 산업 기준 대기업은 0∼2%, 중견기업 8%, 중소기업 25%로 차등 적용된다. 대기업의 경우 프랑스(30%), 영국(13%), 미국(최대 10%) 등보다 낮아 미래 경쟁력을 준비하기 위한 투자가 위축된다는 게 재계 주장이다.
구특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