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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노래(계 5장 9-10)
성경본문: 요한계시록 5: 9-10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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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고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 계시록>하면 일곱 교회에 이어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으로 빨리 가고 싶은 마음들이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제게는 있습니다.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는 찬송
남아공화국 유학 시절 느낀 것 때문입니다. 그 곳에 있는 개혁 교회는 화란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앙의 사람들이 지은 찬송가를 노래하는 대신에 주로 시편에 곡을 붙여서 노래합니다. 경쾌한 리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엄한 선율의 노래입니다.
지금부터 약 40년 전 남아공화국에 도착해서 예배드린 첫 주일, 그 장엄한 시편찬양을 처음 대하면서 “우리 하나님은 참 다양한 멜로디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위대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앉아 예배했지만 그 나라 말을 모르니 찬송이든 설교든 그 내용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날 불렀던 시편 찬송을 기억하며 몇 편을 노래했는지 그 시편에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고 그들의 말을 알아듣게 되면서 그들이 부르고 있는 찬송이 무슨 의미인지를 따라잡게 되었을 때에 그 은혜로운 가사에 매혹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의 의미라도 바로 알고 찬송한다면 아무도 영원한 파멸로 치닫지는 않을 텐데’ 라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그 놀라운 사실을 노래하면서도 무슨 노래를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무척 답답했습니다.
처음 그 내용을 접하면서는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지만 그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 삶 속에 정말 있어야 할 생명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 입술의 찬양이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당시 남아공화국 국영 텔레비전 방송은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밤 11시까지 시간제로 방영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6시간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 누군가가 성경을 읽고 시작하고, 하루의 프로그램이 마칠 때는 목사가 나와서 설교를 하고 하루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마감되었습니다.
동전 하나에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굉장한 신앙의 전통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거기에 부응하는 실제적인 삶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들이 노래하는 시편 가사를 외웠기 때문에 그 내용에는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주일날 교회당에 가면서 요절지를 들고 외웠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리 외워두지 못하고, 주일날 아지랑이가 피는 논둑길을 가면서 예배당에 도착하기 전에 요절을 외우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했습니다.
논둑길을 걸으랴 요절을 외우랴 쉽지 않은 시골길을 걸었기에 한 번 그 길을 걷고 싶어 했는데 지난 주간에도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거기 남아공화국에서는 어린이들은, 우리가 외운 성경구절 대신에 시편 가사를, 그러니까 시편 구절을 음률에 맞게 개작한 가사를 외우도록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이 시편의 가사에 대해서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찬양은 외워서도 하지만, 그 찬양이 무슨 노래인지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이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려면 가족이나 동네에서 직장에서 상당한 사회적인 결단을 해야 하는데 거기는 당시에 교회에 다니지 않으려면 특별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라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고 그처럼 엄청난 내용의 찬양을 하면서도 전혀 감동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 때문에 때로는 괴로워했습니다.
‘한 구절의 내용만 그 뜻을 생각하고 노래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텐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사의 내용을 생각지 않고 찬송하는 문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독교도 3-4대 이상의 전통을 갖게 되었으니 지금쯤 우리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시작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기우가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으로 나온 찬송가에나 개역개정성경출간에 맞추어 나온 찬송가에는 그런 염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전 찬송가에서 5절로 되어있던 찬송 가사가, 새로 나온 찬송가들에는 4절로 줄어든 것이 더러 있습니다.
단순히 양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혹시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 속에서 샘솟는 찬양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5절까지 부른다는 것은 지루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내용을 음미하며 찬양하면 우리의 신앙은 봄날 초목처럼 새로워집니다.
이 계시록에서 하늘의 장면을 볼 때마다 찬양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하늘의 장면은 찬양하는 일로 특징 지워져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성숙한 성도는 혼자서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찬양이 그 삶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며 노래할 때 결코 우리는 한 번만 부르고 끝날 수 없습니다.
집중하지 못한 구절들을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 가사의 내용에 심취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구절들을 되풀이해서 노래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서도 찬송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그 찬양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안겨주고,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실제 삶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길 바랍니다.
하늘 장면이 계시될 때 찬송하는 무리들을 만나보십시오.
4, 5장에서 다섯 번의 찬양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곳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는 곳을 일컬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찬송할 때 그 가사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생각하며 부르고 있습니까?
혹시 선율의 아름다움에만 매혹되고 있습니까?
단지 울적한 기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그 내용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되풀이해서 거듭거듭 부를 수 있는 찬송이 많아질수록 봄날 지면이 새로워지듯이 여러분 안에서 새 생명이 약동할 것입니다.
세 번째 찬양의 내용
다섯 번의 찬양 가운데 특히 이 세 번째의 찬양은 그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창 속에 기독교의 구원 진리가 밝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합창하는 이 새 노래를 음미해 보지 않고,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호기심 때문에 진리를 희생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새 노래를 들어봅시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부분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은 보석과 같이 빛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다 같은 창조의 세계라도 어떤 곳은 그 빼어난 풍광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여기 9절과 10절은 그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이 찬양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뜻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방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구원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실 때 터져 나온 합창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거문고를 가지고 새 노래를 노래합니다.
새 노래
그러면 왜 새 노래라고 말할까요?
구약적인 배경을 다시 한 번 살피게 하는 말입니다.
구약 예배 의식 속에 불렀던 찬양을 회상시키는 말입니다.
시편에는 자주 새 노래를 노래하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 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 지어다.”(시편 33:1-3).
뿐만 아니라 96장 1절에도 시편 기자가 그렇게 성도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 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 할 지어다.”(시96:1)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이 구원은 자기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 나가실 것입니다.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 사”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 하리이다.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 이다.”(시 144:9-10).
사람들은 보통 구원은 힘 있는 권력자들의 손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왕들이 우리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정치적 상황은 결코 쾌청하지 못하고 먹구름이 덮고있지만 인간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의 자리, 기도와 찬양의 자리를 지킬 때 우리 민족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 하리이다.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오,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은 열방의 왕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전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시 149:1).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한 절기 때마다 모이면 자기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 때문에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온갖 재난에서부터, 또한 전쟁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축제를 통해 언약의 하나님을 새롭게 찬양 드렸습니다.
그래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라는 구절은 시편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가 시작됩니다.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여러분들이 새 일을, 새로운 역사를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보다 더 큰 해방을 예언하면서 새 노래로 노래하도록 이사야는 그 백성을 재촉했습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9)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19)
성경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왕들을 보호하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통령을 세우기도 하시고 내려앉히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여러분이 읽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사 40:23,24)
세상의 실권자들은 아직 땅 냄새를 맡기 전의 묘목과 같다고 합니다.
옮겨 심은 묘목은 뿌리가 흙 속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에 그건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언제. 어떻게 새 노래를 불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어린 양이 책을 취하는 순간 천상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책을 취하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 도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께서 전능하신 이의 손에서 책을 취하셨습니다. 어린 양께서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오래 전에 약속된 구원이 성취된 것을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지금 찬양합니다.
아니, 이 책을 받으심으로써 이 책의 인봉이 떼어짐으로써 구속 사역의 마지막 결정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 사역의 대단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위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그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찾아올 것을 지금 감사드립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 질서가 막 도래하려고 하는 시점이기에 새 노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의 축복과 함께,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것을 내다보면서 새 노래로 찬양을 드립니다.
새로움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새 노래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새로움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은 자기를 새로움의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언약을 성취하실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새로운 찬양이 터져 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언약과 그 기업 -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이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사 43: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神)을 주며”(겔 11:19).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 1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특징지어서 말씀할 때에 “새로운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언약의 피로서 새롭고 산길을 여신 하나님이십니다.
의가 그 보금자리를 트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재확인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계시록 역시 새 일로서 특징 지워지고 있습니다.
구속받은 자를 향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이름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자가 없느니라.”(계 2:17).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하나님의 새 이름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언약에는 두 돌비에다가 십계명을 새겨서 주었지만 그 계명은 지키는 사람 바깥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지키는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인데 내가 새 신을 그들의 심령에 부어주고 내가 새 언약을 그들의 마음에다가 기록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들이 그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기록되는 이런 역사를 하실 것을 일찍 이사야는 말씀했습니다.
이제 그 본래적인 약속이 계시록에 와서 다시 확인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약속은 3장 12절뿐 아니라 21장 2절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러분은 결혼식이 있는 토요일마다 신부가 어떻게 신랑을 위해서 단장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단장한 신부처럼 아름답게 우리에게 도래할 약속을 주셨습니다.
구속받을 자의 기업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 실현이 예언되어지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그때에는 하늘도 새로워지고 땅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히 새로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말은 참되고 신실하니 기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선언하셨기에 우리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찬양이 그날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본문 5장에 나오는 새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4장에 나온 노래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진 4장의 노래와 대조해서 5장에는 그 창조를 새롭게 하시는 새 창조의 하나님, 구속주 어린 양을 노래하는 찬양이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처음 창조를 회복시킨 새 창조의 사역 - 구속 사역의 주인공, 어린 양을 향해서 드리는 찬양이기에 새 노래라고 합니다.
인을 떼고 그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어린 양을 향한 찬송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구속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새 왕국이 도래하는 것을 노래하는 찬양이 여기 5장에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는 날 동안 새 노래를 주님께 드리는 일에 동참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구속받은 성도들의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속에 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