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서원(9)
강릉시(3)
송담서원
강동면 연빌리

1630년(인조 8)에 강원감사 윤안성(尹安性)과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를 중심으로 한 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학산리에 석천서원(石川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2년(효종 3)에 강원감사 김익희(金益熙)와 본부사 이만영(李晩榮) 등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660년(현종 1)에 ‘송담(松潭)’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756년 (영조 32)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워 서원 사적과 이이의 업적을 기각(記刻)하였으며, 1804년(순조 4) 산불로 인하여 건물과 신사임당의 수화(手畫) 등이 소실되었다.
1815년에 다소 복원하였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뒷산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뒤 1904년에 유림의 모금으로 복원하고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봉서원
성산면 오봉리

1561년(명종 16)에 함헌(咸軒)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공자의 영정을 모셨다.
1782년(정조 6)에 주자(朱子), 1806년(순조 6)에 송시열(宋時烈)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영정과 위패를 다른 곳으로 이안하였다. 1903년강릉지방의 유림이 사우를 건립하여 집성사(集成祠)라 하고 3인의 위패를 모셨으며, 사우 옆에 별묘를 세우고 칠봉사(七峯祠)라 하였다
화동서원
구정면 제비리
![[평택의 인물]조선 전기 화가 최수성(崔壽城, 1487∼1521) | 블로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earch.pstatic.net%2Fcommon%2F%3Fsrc%3Dhttp%253A%252F%252Fblogfiles.naver.net%252F20120703_258%252Fseo8587_1341291798332pR4aK_JPEG%252F%2525C6%2525F2%2525C5%2525C3%2525C0%2525C7_%2525C0%2525CE%2525B9%2525B03.jpg%26type%3Db400)
정몽주(鄭夢周)와 최수성(崔壽峸)을 배향하고 있다. 1930년에 정몽주의 영당(影堂)으로 왕산(旺山)에 건립하였다가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 최수성을 함께 배향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와 문정공(文正公) 최수성의 시호 중 한 글자씩 따서 일명 충정사(忠正祠)라고도 한다.
동해시(1)
용산서원
쇄운동
1705년(숙종 31)에 최찬규(崔燦圭)·최찬기(崔燦基) 등이 지방유림과 협력하여 이세필(李世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과 흥학비각(興學碑閣)을 세우고 용산사(龍山祠)라 하였다.
이세필이 죽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에 위패를 모시고 용산서원으로 개편하였다. 1784년(정조 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89년에 박문수(朴文秀)·이태좌(李台佐)·이형좌(李衡佐) 등이 중건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56년에 최만희(崔晩熙)·홍질현(洪櫍鉉) 등이 중심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1984년에 다시 이이와 송시열의 위패는 훼철하고 이세필만 단독 배향하고 있다.
삼척시(1)
산양서원
원덕읍 산양리

황희(黃喜)[1363~1452]가 왕래하며 쉬어 가던 와현(瓦峴)[현재 임원항이 내려다보이는 옛 고갯길]에 돌을 모아 대를 만들어서 소공대(召公臺)라 하였고, 1515년(중종 10)에 무너진 소공대 자리에 소공대비를 세웠다. 이후 삼척 사람들이 1824년(순조 24) 소동사(召東祠)를 창건하여 1857년(철종 8)에 서원으로 개칭하고 아동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다.
1861년(철종 12)에 산양서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으며 산양서원은 삼척군 남쪽의 유일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으며, 학위전(學位田)은 삼척 향교에 귀속되었지만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1913년 일본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는 유림에 대한 보복으로 서원 건물에 방화를 하여 소실되었다. 1971년 묘정비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에 복원시킨 묘정비각과 2001년에 전청을 복원하였으며 2003년에는 동재와 서재를 준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양군(1)
동명서원
양양읍 조산리

1628년(인조 6) 본부사(本府使) 조위한(趙緯韓)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인벽(趙仁璧)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충현사(忠賢祠)를 설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동명서원이라 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전란으로 전소되어 1787년(정조 11)경상북도 봉화(奉化)로 옮겨서 복원하였다. 그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며, 1898년 강원도관찰사 조종필(趙鍾弼)이 양양 조산리의 서원유지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74년부터 서원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지금의 자리에 복원을 추진하여 1982년에 완공하였다.
영월군(1)
창절서원
영월읍 영흥리

1685년(숙종 11) 장릉(莊陵: 단종의 능)을 개수하면서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군수 조이한(趙爾翰)이 도내에 통문을 돌려 기금을 모아,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 25) ‘창절(彰節)’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낸 호장 엄흥도(嚴興道)와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추가 배향하고, 그 뒤 화의군(和義君)을 추가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권절(權節) 등의 생육신 위패를 아울러 모시고 있었다. 1741년(영조 17) 왕명으로 서원을 훼철하고, 위패는 매립한 뒤 유적지만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 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철원군(1)
충렬서원
김화읍 읍내리

충렬사(忠烈祠) 또는 의열사(義烈祠)라고도 하며 1650년(효종 1) 지방유림의 공의로 충렬공홍명구(洪命耉)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병자호란 때 당시 평안도관찰사였던 홍명구는 평양을 거쳐 서울로 침입한 적병을 추격하던 중, 금화에 이르러 지방의 의병들과 힘을 합하여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숭덕비를 세워 그의 충절을 기리고 명복을 빌어 왔으며, 1652년 ‘의열(義烈)’이라 사액되었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충렬서원으로 개칭되었고,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존속되어 왔다. 6·25사변 때 이 지역이 격전장으로 되면서 소실, 현재는 충렬사에 세 개의 비석만 남아 있다.
홍천군(1)
노동서원
서면 어유포리
![[국내 여행지 추천 / 홍천 가볼만한곳]문화와 지식이 만나는 곳 노동서원 | 블로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earch.pstatic.net%2Fcommon%2F%3Fsrc%3Dhttp%253A%252F%252Fblogfiles.naver.net%252F20160323_70%252Fhcgnews_1458698411987ztcmd_JPEG%252FIMG_0373.JPG%26type%3Db400)
최충(崔冲)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동재와 서재는 유인(儒人)들이 체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는 곳이다. 또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 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본 서원은 원래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수호(守護)의 어려움으로 인 하여 1932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6.25동란에 소실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일부를 개축(改築)하고 수차에 걸쳐 중수(重修)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