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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통문화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경기도 서원(30)
고양시(3)
덕양서원
덕양구 성사동
<성사동 풍경 (서원사진자료미확보)>
2002년 7월 12일 개원하였으며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 정렬공(貞烈公) 기찬(奇襸),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 문간공(文簡公) 기정진(奇正鎭)을 배향하였다.
이후 2005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선생과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선생을 함께 배향하였다.
용강서원
일산동구 성석동
조선 개국 초기 충신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의 충의(忠義) 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순절한 함경도 함흥 용흥강변에 세워져 순조년간에 사액되었다. 그 후 국토가 분단되어 경향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충민공 부인 열녀 정경부인 장흥 임씨(長興 任氏)의 묘역인 고양시 학령산(鶴翎山) 아래 세칭 부사문동(府事門洞)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 1980년 5월에 중건되었다.
이 때 충민공의 고조 충정공(忠靖公) 박서(朴犀)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충정공이 서상위(西上位), 충민공이 중앙위(中央位)에 봉안되었다.
충정공 박서는 몽고군의 침략을 격퇴하여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전공을 세운 고려 명장으로 1704년(조선 숙종 30년) 평안도 구성에 정공사(旌功祠)를 건립하고 이듬해에 사액(賜額)하였다. 또한 함흥 용강서원에 원래 추배하였던 경헌공(景獻公) 조상경(趙尙絅)을 동하위(東下位)에 배향하였다
행주서원지
덕양구 행주외동
권율(1537∼1599) 장군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장이다.특히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전투에서는 1만명 미만의 군사로 3만의 왜군을 무찔렀다. 이 서원은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건물이 없자 헌종 8년(1842)에 왕의 명령으로 세웠다.
서원에는 현재 강당만 남아 있는데, 앞면 5칸·옆면 1칸 반 규모이다.
서원 안에 있던 행주대첩비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1970년 행주산성 내에 새로 지은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옆으로 옮겨 놓았다
광명시(1)
충현서원
소하동
1658년(효종 9) 지방 유림의 공의로 강감찬(姜邯贊)·서견(徐甄)·이원익(李元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 2)에 ‘충현(忠賢)’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김포시(2)
대포서원
양촌읍 대포리
1973년 경향(京鄕) 사림(士林)들이 선생의 유덕(遺德)과 명망(名望)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건국 제1호(建國 第1號)로 액호(額號)를 대포서원(大浦書院)으로 인가(認可)를 받아 선생이 만년(晩年)을 보낸 곳인 김포시(구통진) 양촌면 대포리 산 32번지 선생의 묘하(墓下)에서 사우(祠宇)를 창건했다.
우저서원
감정동
1648년(인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선조 초기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있으면서 유생을 훈도한 조헌(趙憲)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9년경 김포유생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려 사액을 청하였지만 한창 첩설(疊設)에 따른 폐단이 논의되던 때라 실현을 보지 못하였으며, 1675년(숙종 1) 남인정권하에서 충절장려책의 일환으로 현판을 하게 되어 ‘우저(牛渚)’라고 사액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으며, 1868년(고종 5)경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1973년에 보수하고 단장 및 신축하였다.
안성시(1)
덕봉서원
양성면 덕봉리
1695년(숙종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오두인(吳斗寅)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에 ‘德峰(덕봉)’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794년(정조 18) 강당을 중수하였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뒤 1979년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1984년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주시(1)
사천서원
은현면 은현로382번길 52
1712년(숙종 38)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조 정조 8년(1784)에 고려 충신 남을진(諡 文安 南乙珍) 공과 조견(諡 平簡 松山 趙狷) 공을 모신 사천서원에 왕이 친히 쓰신 정절사라는 사액을 내리시니 그 때에 대소인하마비가 세워졌다. 이 하마비는 이곳은 높은 사람의 묘와 사당이 있는 곳이니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말에서 내려가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여주시(4)
기천서원지
금사면 이포리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580년(선조 13) 김안국(金安國)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마암(馬巖)에 마암서원(馬巖書院)으로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8년(선조 41) 현재 위치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이후 조선 중종대부터 효종대까지 이름난 현인인 이언적(李彦迪)·홍인우(洪仁祐)·이원익(李元翼)·정엽(鄭曄)·이식(李植)·홍명구(洪命耉)·홍명하(洪命夏)까지 함께 배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기천서원으로 승격하였고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1937년 모현사(慕賢祠)를 다시 짓고 1979년 서예가 김충현(金忠顯)이 기금을 부담하여 사당을 복원하였다. 1987년과 1994년에 나머지 부속 건물들도 중수하였다.
강당은 없이 사당과 동재·서재만 있는 특이한 배치구조이고, 서원 동쪽 언덕에 모현사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익공계 맞배지붕집이고 동재·서재는 각각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이다.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
대로서원
하동
1785년(정조 9), 왕명에 의해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여주의 남한강변에 세운 사우(祀宇)이다. 그 해에 사액되었는데 이때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라고 하였다.
1871년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이 내려질때에 대원군이 서원이 아닌 강한사라고 이름을 고치고 그대로 두었다,
매산서원
능서면 변도리
세조 때에 경상남도 거창과 산청지방 유림의 공의로 문익점(文益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뒤 이색(李穡)을 추가 배향하고 ‘매산(梅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병자호란 때 후손인 문겸(文謙)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이후 후손인 문광규(文光圭)가 복원하였으며 1978년에 보수하였고 1987년 사당을 다시 지었다.
여백서원
강천면 걸은리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맑은 뜻 위에 자비(自費)와 주변의 도움을 받아 2015년 10월에 개원하였다.다.
오산시(1)
문헌서원
능서면 변도리
고려조를 크게 빛낸 공신(功臣)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세워 나라의 인재를 길러냄으로써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推仰)을 받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장자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維善), 차자 문장공(文莊公) 최유길(崔維吉)의 영정을 봉안하고 세 분의 덕행과 훈업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원래 문헌서원은 1550년(명종 5) 황해도 해주에 세워졌으나 해주가 북한 영토인 관계로 1991년 이 곳 오산에 다시 문헌서원을 세운 것이다.
용인시(2)
심곡서원
수지구 상현동
1650년(효종 1) 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론에 의거,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현면(慕賢面)의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한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하였다가 이 서원이 설립되면서 위패를 옮겨왔으며 양팽손(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 같은해 ‘심곡’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충렬서원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576년(선조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에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그 뒤 정보(鄭保)와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11년 유림에서 사우(祠宇)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고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정부시(1)
노강서원
장암동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숙종 15년의 민비(閔妃) 폐출 때 죽음으로써 이를 충간(忠諫)하였던 박태보(朴泰輔)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에 조윤벽(趙潤璧)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 사액되었으며 1754년에 중건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6·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동재(東齋)·서재(西齋)·삼문(三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박태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천시(1)
설봉서원
1564년(명종 19)에 이천부사 정현(鄭賢)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희(徐熙)·이관의(李寬義)·김안국(金安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3년(선조 26)에 이천읍 관고리로 이건하였으며, 최숙정(崔淑精)을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단(壇)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 왔다.
그 뒤 1977년 9월에 현충탑을 건립하여 네 명 선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는 글을 새겼으며, 그 옆에 설봉서원유허비(雪峯書院遺墟碑)를 세웠다.
파주시(3)
용주서원
월롱면 용주서원길 46
1598년(선조 3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인걸(白仁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유생 정재심(鄭在心)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다.
1924년에 유생 50여 명이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김행(金行)·조감(趙堪)·신제현(愼齊賢)·백유함(白惟咸)을 추가배향하였다.
자운서원
법원읍 동문리
1615년(광해군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0년 (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고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보수하였다.
파산서원
파평면 늘노리
조선시대 학자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 아우 성수종(成守琮) 및 백인걸(白仁傑)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568년(선조 1)에 조선시대 학자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 아우 성수종(成守琮) 및 백인걸(白仁傑)의 위패를 봉안을 위해 이이(李珥),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 1)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그 후에 복구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하였다.
포천시(3)
옥병서원
창수면 주은리
1658년(효종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8년(숙종 24)에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26년에 김성대(金聲大)·이화보(李和甫)·윤봉양(尹鳳陽)을 추가 배향하였고,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하고 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여 1980년에 복원하였다.
용연서원
신북면 신평리
조선 1691년(숙종 17)에 건립된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선생과 용주 조경(趙絅, 1586~1669)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1692년(숙종 18) 서원 부근의 연못 이름을 따서 ‘용연(龍淵)’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경내에는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사당만 남아 있던 것을 1986년 강당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산서원
가산면 방축리
1631년(인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항복(李恒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20년(숙종 46) ‘화산(花山)’이라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가 1971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하였다.
하남시(1)
사충서원
상상곡동
1725년(영조 1)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제향하기 위하여 노론계 관료와 유생이 추진하고 국가의 보조에 의하여 경기도 과천에 건립되었다. 이들 4대신은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 후일의 英祖)를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 문제로 소론의 미움을 사서 1722년(경종 2) 노론계의 역모사건(신임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는데, 왕세제가 영조로 즉위한 뒤 노론정권이 수립되면서 신원(伸寃)되고 서원이 건립된 것이다. 건립과 동시에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1727년의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서 신임옥사를 역(逆)으로 번복하고 4대신을 다시 죄인으로 만들자 이 서원도 따라서 철폐되었다. 그 뒤 1740년의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4대신이 다시 충신으로 판정되었으나, 한동안 재건되지 않다가 소론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1756년에야 서원을 복설하고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 단행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그 후 1927년 봄에 이 곳이 철도용지(鐵道用地)로 편입됨에 따라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의 서울특별시 보광동)으로 이건하였다가 6·25때 파괴되었다.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화성시(1)
안곡서원
서신면 상안리
1668년(현종 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박세희(朴世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0년에 박세훈(朴世勳), 1700년(숙종 26)에 홍섬(洪暹)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21년(경종 1)에 ‘안곡(安谷)’이라고 사액되어 1729년(영조 5) 사액이 취소되었다가 1740년(영조 16) 회복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부근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뒤 지방 유림과 문중의 협력으로 1976년 복원하였다.
가평군(2)
미원서원
설악면 선촌리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8년김육(金堉), 1694년(숙종 20)남언경(南彦經), 1734년(영조 10)이제신(李濟臣), 1792년(정조 16)김창흡(金昌翕)을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터에 묻었다.
잠곡서원지
청평면 청평리
1705년(숙종 3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07년에 ‘잠곡(潛谷)’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壇)을 설치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폐허화되었으며, 1981년에 다시 설단(設壇)하고 위패석(位牌石)을 세웠다.
양평군(2)
수곡서원
지평면 수곡리
1874년(고종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경우(權景祐)와 권경유(權景谷)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친필로 현판을 써 주었으며, 1926년에 중수하고 1976년에 신문(神門)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신문·동서협문·강당 등이 있다. 6칸으로 된 사우는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며, 권경우와 권경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운계서원
용문면 덕촌리
1594년(선조 2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욱(趙昱)과 조성(趙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숙종 39)에 ‘운계(雲谿)’라고 사액되었다.
1714년에 신변(申抃)·조형생(趙亨生)·조문형(趙門衡)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어 위패를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향사만 지내오다가 1932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천군(1)
임장서원
연천읍 동막리
1700년(숙종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주자(朱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주자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에 ‘임장(臨漳)’이라 사액되었다. 1801년(순조 1)에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 등이 있었으며, 원내에는 정조가 편찬한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의 각판을 소장하고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뒤에 복원하였다.
1950년 6·25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건물은 복원하지 못하고 서원터에 단(壇)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다가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