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아니예요. 그냥... 빨리 가주세요]
내가 왜 몰랐을까. 내가 왜 여태껏....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채영은
몸을 던지듯이 집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서는데 준기가 마침 마
루에서 부엌으로 가려고 하는 참이다. 갑자기 벌컥 열리는 현관 문소리에
깜짝 놀라 발을 멈추고 채영을 보았다. 채영은 허억 허억 숨을 고르며 그 자
리에 그냥 서있다.
[그게....정말이야? 아까... 헬렌이랑 둘이서... 배스킨로빈슨에서...]
[어? 어... ]
채영은 훌쩍 훌쩍 울고 있었다. 준기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채영이가 우는데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채영이에게 살짝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제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울고 있는 채영의 어깨를 살짝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톡톡 어깨를 도독거려 주었다. 채영이에게 이런 면이 있다
니... 왠지 미안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그런 기분이었다.
헬렌이랑은, 과대표와 부과대표로서 할 얘기가 있어서 잠시 배스킨 로빈슨
에 갔던 것 뿐이다. 그런데 그걸 우연히 승경이가 가게에 들어왔다가 보게됐
고, 그걸 채영이한테 얘기했나보다. 채영이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질투하는
게 너무 놀랍기도 하고 또, 이제야 조금씩 두사람의 관계가 제자리를 찾아가
는건가 싶어 약간 안도도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왠지 보호해주고 싶은... 그
런 애틋함을 준기는 느꼈다. 그래서 채영을 잡아당겨 넓은 가슴에 꼬옥 안으
면서 사과했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해.]
그러나 준기 품에서 채영은 갑자기 얼굴을 휙 들더니 외쳤다.
[뭐 먹었어!]
[???]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망고? 바닐라? 솔직히 말해봐, 응? 민트 쵸코칩만
아니면 용서해줄 수도 있어. 엉? ]
[어....망...고]
[정말? 설마... 설마..... 혹시라도 사오진 않았겠지?]
[어... 냉장고에 넣어놨어]
쌩~~~
채영은 냉장고로 당장 달려가더니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꺼내서는 바로 식탁
에 앉아 큰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한다. 미처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벌써
웃고 있다.
[우헤헤. 와..진짜 맛있다. 이 놈아, 어떻게 너네끼리 갈 수 있냐? 이건 배신이
야 배신. 하지만 뭐, 사왔다니까 오늘만은 봐줄게. 우히히. 우적 우적...]
[.......]
이런 사람이랑 아직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준
기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참 나.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근데. 지금 그런게 문제가 아니야]
준기는 그런 채영을 보며 한장의 종이를 쓰윽 내민다.
[우적우적, 이게 뭐야?]
준기가 내민 A4용지 뭉텡이의 맨 위엔 '위장 결혼 계약서' 라고 씌여있다.
[아까 장모님이 냉장고에 반찬 채워 넣어주러 오셨다가 누나 방에서 이거 보셨
나봐]
띵~~ 채영은 숟가락을 스르륵 놓았다.
[허걱..... 그래…서?]
채영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뭘 그래서야. 이실직고했지.]
하지만 오히려 준기는 팔짱 딱 끼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언젠가 이런 날
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그래도...
[그랬....더니?]
채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 주말까지 말미를 줄테니 혼인신고해라. 안 그러면 할아버지, 아버지한테
다 일러바친다. 혼인 신고 하기 전엔 전화도 말아라, 이러고 가시던데?]
헉.... 채영인 식탁에서 시체처럼 천천히 일어나 터벅 터벅 자기 방으로 들어갔
다. 준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또 금방 똑같은 자세로 채영이
다시 나오더니 먹던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들고는 다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멍한 표정으로 터벅 터벅 다리를 질질 끌듯이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다음날, 채영은 정훈이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하.... 정훈아, 이 누나의 청춘도 이젠 정말 끝이 나려나 보다]
채영은 아침부터 한숨을 팍팍 쉰다.
[응? 무슨 뜻이야?]
[이 누님이 이젠 진짜 진짜 시집가게 생겼다]
[뭐?]
정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상대는... 영훈이 형일까? 그런걸까?
[엄마가, 우리 혼인신고 안 한 거 알아버리셨어]
[그래서?]
[신고 해야지 뭐. 안하면 다신 얼굴도 안 보실거 같은 기센데...]
[하지만 너!]
[됐어. 나중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서류상으론 깨끗하니까...하는게 지금까진
유일한 위로였는데, 이젠 그 희망마저 버려야 될 거 같다. 이젠 나도 이혼녀
가 되는거구나. 흑.]
[그렇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면되잖아]
정훈은 오랜만에 바른소리 한다.
[다 귀찮다...헉.... 나중에 진짜 누구랑 결혼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숨기든지,
아님... 첨부터 까발리든지... 해야겠지? 하아....내 말을 믿어줄 사람이 이 세
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내 나이 스물여섯에 벌써부터 이혼 걱정을 해야하다
니.... 내 인생도 어지간히 꼬였구나 정말... 아침부터 열라 우울하다.. 후우..]
채영은 커피를 원샷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제대로 누군가랑 사랑하고, 사귀고, 결혼하면 되잖아.]
정훈은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 더듬 말을 했다. 채영은 그 말을 듣더니 정
훈을 똑바로 쳐다본다. 정훈은 떨려서 채영의 눈을 마주 바라보지도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렵게 어렵게 자신의 진심을 이제야 말했다. 애초에 이렇게 벌벌떨면서 돌려
서 돌려서 고백하는 건 정훈답지도않다. 지금까지 거쳐간 많은 미녀들의 존재
들이 무색해 질 만큼, 마치 태어나서 여자한테 처음 고백하는 것처럼 정훈은
내심 벌벌 떨고 있었다.
채영은 뭐라고 할까. 지금까지 친구였는데, 서로 여자친구 남자친구 그런 고민
도 상담할만큼의 사이었는데, 게다가 얼마전엔 친구라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
지 않은 비밀이라면서 채영이가 위장결혼 얘기도 해줬는데, 오히려 그걸 이용
해서 이렇게 고백해버리고, 또 이제는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둘의 관계마저 갈
아 치워 버리려고 하는 이 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친구라기 보단, 지금까지 자긴 일방적으로 채영이를 이용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 여자 저 여자한테 껍쭉거릴 때, 그리고 그 이외의 시간에도 채
영은 항상 같이 있어줬다. 사귄다고 하는 그 여자애들보다, 사실 채영이랑 만
나서 이런 저런 고민 얘기하고, 신세타령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채영은 한순간에 스쳐가는 정훈의 이 많은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가늘
게 뜨고 좀 더 정훈을 지긋이 바라 보더니 한마디 한다.
[너, 자신있어?]
[어?]
정훈은 긴장했다.
[나한테 평생 형수라고 할 자신있냐구]
[뭐?]
[하아.. 너가 그래도 니 핏줄이라고 영훈 교수님 편 드는 건 이해하는데, 아무
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거 같다. 안 그래도 조만간 만나뵙고 지난번에 받은
목걸이 돌려 드리려고 해. 너한테 이런 얘기하는거, 별로 좋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가 교수님한테 아무말도 안 할거라 믿는다.]
후우.... 깜짝 놀랐지만 정훈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형은 아
니구나. 어렵게 꺼낸 말이지만, 채영은 자기 생각에만 골몰히 빠져서 더 이상
여유가 없어보인다. 오늘은 더이상 어렵겠다고 판단한 정훈은 그만 한숨을
쉬면서 커피를 원샷해 버렸다.
***
채영이 집에 돌아오니, 준기가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단다. 혼인신고
서를 한 부 떼어 가지고 와서 눈앞에 쓰윽 내민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채
영은 오히려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이젠.... 끝났다....이젠 진짜, 사정이야 어찌
됐든, 짤없이 유부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이젠 진짜 내 남편이 돼 버리다니.... 괜히 착잡한 기분이 들어 고개
를 설레 설레 흔들며 자기 방으로 쓰윽 들어가 침대에 푹 엎어져 버렸다.
뒤에 남은 준기. 준기도 약간은 착잡한 마음으로 혼인신고서를 내려다 보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억지로 한 것같은 혼인신고. 채영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좋다. 채영이에게로 한 걸음 더 내딛은 것
같아 준기는 착잡한 가운데서도 약간 안심이 됐다. 이젠..... 다른 자식들은 문
제없어. 괜찮아. 다 잘 될거야.
***
주말에 채영은 준기와 함께 맛있는 걸 사가지고 친정에 갔다. 오늘은 할아버지
생신이었다. 가자마자 채영은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있는 엄마 옆에 가서 손가
락으로 대충 호박전을 집어 먹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엄마한테 말을 건다.
[와~~ 역시 엄마가 만든 호박전은 맛이 기똥차. 이거 다 엄마가 만들었어?]
일부러 밝은 소리로 이것저것 말 걸어보지만, 엄마는 아무말없이 전을 부칠
뿐이다. 엄마 안색을 살짝 살핀 채영은 다시 한 개를 집어 먹으면서 손가락을
쪽쪽 빨더니 또 말한다.
[와.. 진짜 짱이다.엄마 나 빨리 이거 어떻게 만드는지 전수해 줘야지, 응? 딸
이 시집가면 친정에서 그런것도 다 가르쳐주고 그래야 하는거 아냐?]
그제서야 엄마는 입을 연다.
[전수랄게 뭐 있냐? 그냥 옆에서 도우면서 대충 보고 배우는거지]
[그래? 그럼, 나도 좀 도울까?]
채영은 팔 걷어부치고 손을 씻으려 하나 엄마는 말린다.
[됐어. 가서 할아버지 말동무좀 해드려라. 며칠동안 너 보고싶다 보고싶다
아주 노~래를 부르시더라]
[아... 그럴까? 어....근데.... 엄마.. 화 안났지?]
[....]
[아니... 그게 있잖아요, 원래 신고를 안 할려구 그런게 아니구. 워낙 서로 바
쁘다 보니까....알지? 우리도 조만간 할려구 그랬어요]
[하여튼 앞으론 제대로 처신해. 무슨 쓸데없는 계약서 따위나 만들지말고.]
[.....네...]
채영은 찔끔했다.
[하여튼, 앞으로 지켜 볼테니까 그런줄 알아. 할아버지하고 아빠한테는 니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돼.]
[.....네...]
거실로 나온 채영은 십년 감수했다. 하지만 그렇게 협박을 받고는 마음이 편
할리가 없다. 할아버지 생신 상 앞에서도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할아
버지는 그런 채영에게 식사를 하며 말을 건다.
첫댓글 아, 혼인신고를 했다니, 저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ㅎㅎㅎ
저는 좀 아쉬운데요 사실..ㅋㅋㅋ
준기가 맘 아프겟네요. 채영이가 넘 아쉬워해서....
그다지 안그런거 같아요. 안심되지 않을까요. 보험 든 것처럼.. ㅋㅋㅋ
빨리 관계(..그런거아니거든뇨~ㅋㅋ<-혼자난리....꺅꺅꺅꺅꺅꺅꺅꺅꺅꺅!!!!!!!!!!)가 진전되었으면...
ㅋㅋㅋ 상상력 넘 풍부하셔라..ㅋㅋㅋ 건강에 해롭습니다 ㅋㅋㅋ 머리칼 빨리 자라도 책임 안짐 ㅋㅋㅋ
ㅋㅋㅋㅋ 아이스크림 사건..
ㅋㅋㅋ
와 드뎌 혼인신고를ㅋㅋㅋ빨리 므흣씬이보고싶어염...ㅠㅠㅠ
ㅋㅋㅋ 제가 므흣씬은 좀.... 덜떨어져서리...
잘읽어네요...그렇게 바라던 혼인신고했는데 채영이는 그런가 보네요.....아직도 들이 맘 한구석에 차지하고 있는걸 모르고 있는것같은데.... 이시점에서 뭐하나 텨져야하는것인데.....뭐냐면 러브장면이쥐요..ㅋㅋㅋㅋ...다음편도기대...
러브장면. 좋죠. 고고씽~
빨랑 러브모드 만들어주세요!!! ㅎㅎㅎ
넵네넵
ㅋㅋㅋ 재밌어요...
감삽니다~
재밋게잘읽었습니다. 담편도 빨리~~
네~~
담편 원츄요!!!
기대해주세요~
다음편 너무 기대대네요 ,, , , 제미있어요 ㅎ, , ,
감사합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