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學以終身(학이종신)
전국 극장에서는 ‘딸랑 딸랑’ 워낭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소를 위해 코뚜레를 빼주는 할아버지. 소를 떠나보내고 우두커니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뒷모습…. 무엇일까. 할아버지의 손에 쥐여 처량하게 울리는 워낭 소리. 우리는 지금 허공에 흩어지는 그런 어떤 ‘意味’라도 붙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졸업식, 입학식을 마치고, 개학은 했지만, 그리고 봄은 왔지만…. 그래서? 소가 죽어 떠나듯 파탄난 자본주의의 좀비가 활보하고 다니는 대학과 사회엔 휴학과 실업이란 상처만 만개하고 있다. 손에 쥔 대학의 졸업장이 워낭 같고, 함께 부르던 교가나 애국가가 마치 워낭소리 같았고, 총장의 축사가 공허하기만 했던 식장 풍경. 나만의 망상이었을까.
세계의 경제가 動力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던 즈음 김수환 추기경의 善終을 지켜보았다. ‘한 사람의 인생의 스승이 수천 명의 학문의 스승보다 낫다’는 엑크하르트의 말처럼, 삶의 스승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화면을 통해 얼핏얼핏 목도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지성적으로 참담함을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 지 ‘갈곳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의 저 ‘善終’이란 말을 나는 솔직히 화두처럼 다시 붙들고 싶어 했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善終이란 ‘임종 때에 성사를 받아 큰 죄 없이 임종한다’는 뜻의 용어이지만 일찍이 중국의 고전『莊子』 「大宗師」에 보이는 말이다. 즉 ‘聖人은 어느 것도 잃지 않는 경지에서 노닐며 만물을 그대로 놓아둔다. 그에겐 요절도 좋고 천수를 다해도 좋고, 태어남도 좋고 죽음도 좋다[善夭善老, 善始善終].
세상 사람들은 이를 본받으려 한다. 하물며 만물이 의지하고 온갖 변화가 나오는 것(大道)에 있어서랴!’라고. 추기경의 묘비명이 된 시편 23편 1절의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 라는 문구처럼,『장자』에서도 大道 안에서 노닌다면 아무런 아쉬울 게 없고 행복하다 했다.
주님의 뜻에 맡기니 이래도 저래도 아쉬울 것 없다는 시편의 내용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천주교나 『장자』의 善終을 아무데서나 쓸 바가 아니지만, 한번 쯤 우리들 생애의 최종적 목표로 삼을만하지 않은가. 경제가 파탄난 지금 그 현장을 두려워 말고, 차라리 ‘돈으로부터의, 돈을 향한’ 자유를 생각하고, 돈의 빛에 가려서 잃어버리고 묻혀버린 ‘길’들을 찾아보자. 하여, 가슴을 쫙 펴고, 자본의 족쇄를 걷어치울 호연지기를 기를 법하다. 어깨가 쳐진 학생·젊은이들에게 ‘그래도 다시 무언가라도 시작해야지!’ 말을 걸어볼 때, 고난이 그들에게 모두 하나의 큰 배움터로 보일 것이다.
봄. 다시 시작이다. 善始 없이 善終도 없다. 아니, 생명 있는 것은 모두 始와 終이 있고, 왔다가 간다. 퇴계의 『일기』가 문득 뇌리를 친다. 54세 되던 갑인년(1554년, 명종 9년) 2월 17일. 일기 가운데 그는 이렇게 적었다. ‘學以終身’. ‘배우면서 삶을 마친다.’ 아! 얼마나 멋진 결심인가. 배움에 삶을 바치겠다, 목숨을 걸겠다, 배움으로 평생을 견디겠다는 진정성이 들어있다. 양력으로 보면 3월의 봄날 아닌가. 따스해지는 저녁, 하루 일들을 정리하면서 퇴계는 왜 하필 이 말을 적었을까.
자신의 일기장에 조용히 붓을 대던 그의 머리에 맴돌던 생각. 동력이 빠진 경제의 파국, 활력을 상실한 이 봄에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學以終身’을. 그리고 善終이라는 화두를. 엉망진창이 된 정치판을 뒤로 하고, 대학은 이제 ‘學問’ 그 본래로 돌아와, 밑져도 본전보다 나은 결심으로 다시 출발할 때다. 대학은 그래야 한다.
출처:교수신문 글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영남대·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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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학이종신 참 좋은 말이네요. 최상의 심신을 목표로 오늘도 열심히 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