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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통문화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경상남도 서원(90)
거 제 시(1)
반곡서원
거제면 동상리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1679년(숙종 5년)거제도로 귀향을 왔을 때 머물렀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서원은 1704년(숙종 30년)에 거제의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송시열을 주벽으로 하고 김진규(金鎭圭)와 김창집(金昌集), 이중협(李重協), 민진원(閔鎭遠), 김주근(金株根)을 배향한다.
서원 앞에는 동록 정혼성(東麓 鄭渾性)을 배향하는 사당인 동록당이 있다.
1868년 대원군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6년 구한말에 다시 복원하였다
김 해 시(4)
미양서원
진영읍 진영로 430-16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강 김계금 선생은 기리고 있다. 미양서원에는 서강김계금일고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2호)를 보관하고 있다.
신산서원
대동면 주동리
1609년(광해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과 신계성(申季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같은 해에 ‘신산(新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616년(광해군 8)에는 신계성(申秀誠)을 추가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였다. 이후 사림의 공의로 조식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山海亭)만 중건하였다.
예암서원
삼방동
<서원 사진 확보 중>
조이추(曺爾樞)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2년 후인 1709년(숙종 35)에 예암사(禮巖祠)를 창건하여 향사를 거행하였다. 1822년(순조 22)에는 예암서원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869년(고종 6)에 서원훼철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8년에 복구하였는데 그 후 1995년에 토지구획사업으로 서원이 다시 철거되었는데, 200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구하였다.
송담서원
진해면 신안리
1784년(정조 8)에 곽원기(郭元基)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송빈(宋賓)·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5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고사(雇舍)·창고 등이 있다.
사우인 송담사(松潭祠)에는 송빈·이대형·김득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밀 양 시(11)
남계서원
명종 7년(1552)에 세워져 명종 21년(1566)에 사액받았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재건하였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현재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세운 백운동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일찍이 사림의 본바닥으로 자리잡은 영남지방의 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우 함양’의 기틀을 이룬 정여창을 모신 서원이어서 오랜 역사와 더불어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
덕남서원
1833년에 김종직의 제자인 박수연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복원하였다.
삼강서원
삼랑진읍 삼랑1길 32-9
1510년(중종 5) 삼랑루(三浪樓) 자리에 정자를 짓고 민구연(閔九淵)·민구령(閔九齡)·민구소(閔九韶)·민구주(閔九疇)·민구서(閔九敍) 등이 같이 수학하였으므로 오우정(五友亭)이라 현판을 달았는데, 1563년(명종 18) 지방유림이 5현의 덕행을 추모하여 오우사(五友祠)와 기사비(記事碑)를 건립하고 향사를 지내왔다.
임진왜란으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04년에 일부 중건하고 1979년 종중(宗中)에서 확장, 개건하여 사림의 공의로 향사(享祀)를 지내왔는데, 지금은 오우정만 남아 있고 이건은 하지 못하였다.
신남서원
고려말에 대마도(對馬島)정벌(征伐)은 물론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공이 컸던 정국군(靖國君) 박위(朴葳)장군과 조선 초 문신(文臣)인 박기(朴耆) 부자를 향사(享祀)하는 서원이다. 1822년(순조 22)에 후손인 박기성(朴基聖)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론을 모아 이 서원을 창건 하였는데, 사당을 상모사(尙慕祠)라 하였고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이라 하였으며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응교(應敎) 강세백(姜世白)이 지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강당은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齋室)로 삼고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서 박위장군을 주향으로 하고 박기를 배향하여 향사가 받들어 졌다.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尙慕祠)를 그전대로 중건하였는데 현재 서원의 배치는 사당인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으며 바깥에는 강당인 경보당(景報堂)이 있다.
예림서원
부북면 예림서원로 128
1567년(명종 2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동면 자씨산(慈氏山) 아래에 덕성서원(德城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하였다. 1634년(인조 12)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고, 서원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으며, 박한주(朴漢柱)와 신계성(申季誠)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이후 1680년(숙종 6) 지금의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다시 이건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예림’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874년에 강당을 복구하고 예림재로 개편하였으며, 1921년 향중(鄕中: 향원들의 동아리)유림이 사우(祠宇) 유지(遺址)에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 제사)를 실시해왔다.
1962년에 서재를 건립하고 1971년 정부 보조로 강당을 중수하였다. 1974년에 육덕사(育德祠)와 정양문을 복원하고, 1975년 복원 고유(告由: 큰 일이 있을 때 사당 또는 종묘에 고하는 일)를 거행하였으며, 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완공하였다.
오봉서원
초동면 오방길 9-12
1790년(정조 15)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조치우(曺致虞)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며, 그 다음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렸다. 1795년(정조 19)에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하여 청효사(淸孝祠)라 현액하고 춘추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처음으로 격을 높여 오봉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의 재숙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이라 칭하였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하여 그 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하였다.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서원을 복원하였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현판하였다.
용산서원
밀양시 가곡동
원래 의성김씨 이계공파가 세운 서당이었는데 1850년에 다시 중건하고 김우홍공을 모시는 제실로 사용하였는데 1997년 서원으로 편액하였다.
용안서원
무안면 내진1길 39-18
문안공 산화 이견간(李堅幹)과 성산군 이식(李軾)을 봉안한 하기 위해 1813년(순조 13)에 별사(別舍)를 창건하고 1818년(순조 18)부터 용안사라고 하여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있기전인 1870년에 헐어서 없애 버렸다가 용안재(龍安齋)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2년부터 여은 이사지(李思之)와 대호군 이중림(李中林)을 추가로 봉안하였다. 1983년 용안사 옛터에 사당을 다시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표충서원
단장면 구천리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설립하고 선조(1567-1608)로 부터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고도 한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칠탄서원
단장면 마촌리
영조 19년(1743)에 진암서당으로 세웠는데, 헌종 10년(1844)에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학자로 임진왜란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며 만년에는 학문에 전념한 손기양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청절사를 세워 칠탄서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14년에 복원하였다.
혜산서원
산외면 자축리
1753년에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창건하고 손조서(孫肇瑞)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에 훼철되었고 이후 철운재(徹雲齋)로 편액되었다.
1971년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개칭하고 중건하여 손공량(孫洪亮)·손처눌(孫處訥)·손린(孫遴)·손우남(孫宇男)의 사위(四位)를 추향(追享)하였다.
사 천 시(1)
구계서원
사천읍 구암리
1611년(광해군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과 이정(李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 2)에 ‘구계’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714년에 김덕함(金德諴)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된 뒤 서당으로 사용해오다가, 광복 후 유림들에 의하여 다시 복원되었다.
양 산 시(1)
남강서원
주남동
1808년(순조 8) 7월 이겸수를 제향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학성(鶴城)에 건립된 사우(祠宇)다. 학성은 경상남도 울산시의 옛 이름이다.
남강서원이 위치한 곳의 주소는 양산시 웅상읍 주남리였으나, 2007년 4월 1일자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양산시 주남동 613번지[주남마을1길 8] 답(畓)으로 바뀌었다.
남강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이때 사원(祠院)에 관련된 문헌들이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1946년 건물마저 망실되었으나 주남동 학성이씨 후손들이 2009년 복원하였다.
진 주 시(8)
광제서원
명석면 명석면 계원리 543
남양 홍씨 홍의(?∼1356)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무신이며 홍관(?∼1126)은 고려 문신이며 서예가로 예부상서 등 여러 벼슬을 거친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세울 당시에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담당하던 홍복사로 세웠다가, 영조 23년(1747) 홍지암으로 이름을 바꿨다.
기록에 따르면 고종 28년(1891) 고쳐 세우면서 모원재로 또 한 번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976년 영남 유림에서 ‘관제서원’으로 격상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악서원
금곡면 죽곡리 817-1
김유신·최치원의 영정과 홍유후·설총·문창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680년경에 지었고 1919년 지방유림들이 다시 지었으며, 경주 서악서원의 이름을 본따 남악서원이라고 이름지었다.
서원의 역사적 의의는 상국통일을 이룬 기념과 김유신의 내력이 전해오고 있다는 점과 한국의 여러 위인들이 사당에 함께 모셔져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유래가 깊은 서원이다.
대각서원
수곡면 사곡리 518
1610년(광해군 2) 지방유림의 공의로 하항(河沆)·손천우(孫天佑)·김대명(金大鳴)·하응도(河應圖)·이정(李瀞)·유종지(柳宗智)·하수일(河受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47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산서원
미천면 어옥리
1715년(숙종 41) 영일정씨 후손들이 시조인 정습명(鄭襲明)과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6명의 선조에게 향사를 올리기 위해 이곳에 세덕사(世德司)를 지었다. 그 후 1830년(순조 30)에 서원으로 바꾸면서 정몽주의 위패만 모시고 봄가을에 향사를 올렸다. 정몽주가 1374년(공민왕 23)에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로 진주에 와서 이곳 비봉루에서 하루를 묵은 인연으로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의 사림들과 그 자손들이 예조에 주청하여, 옥산서원을 진주 비봉산 비봉루에 세웠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 자리에 영당을 지어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서원을 복원하고 사당을 신축하여 문충사(文忠祠)라 이름 짓고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용강서당
지수면 압사리 1266-2
1902년에 지었으며, 1922년에는 '굉정각'이란 서고를 만들어 청주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김우옹(1540∼1603 : 조선 명종과 선조 양대에 이조판서와 대제학, 경영관)의 문집 20권과 속강목 36권의 문집, 판각 600매를 옮겨 왔다.
서당의 전체적인 구조는 배우는 공간인 서당이 앞쪽에 있고 그 뒤로 사당과 판각을 보관하는 전각이 나란히 옆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원사'라는 현판이 있는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임천서원
금산면 가방리 314-2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준민(李俊民)·강응태(姜應台)·성여신(成汝信)·한몽삼(韓夢參)·하증(河憕) 등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후 1928년 지방 유림에 의해 가방리의 산 아래인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다
청강서당
지수면 청원리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온(鄭溫)·강숙경(姜叔卿)·하윤(河潤)·유백온(兪伯溫)·이제신(李濟臣)·이염(李琰)·하천주(河天澍)·진극경(陳克敬)·박민(朴敏)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복원하지 못하였다.
청계서원
남성동 168
1833년(순조 33)에 건립되었으며,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목화)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두 분은 각각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것을 1961년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숭은사와 진사청을 재건,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였다.
창 원 시(6)
도남서원
의창구 동읍 화양리
문중의 주장에 따르면 사우의 창건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래전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강당과 사우가 1976년에 함께 건립되었다.
두곡서원
마산회원구 두곡리
<두곡마을 풍경>
경주김씨 일가에서 1766년(영조 43)에 김충한을 봉안하면서 창건하였다. 김충한은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개경의 만수산 두문동 협곡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찾아와 여러 차례 출사를 요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장인을 따라 남원 두동방으로 이주하여 두곡마을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두곡마을에는 조선시대 남원도호부 48방 중 두동방을 근거지로 두곡서원이 창건되었다.
서원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선비 교육이 이루어지자 1824년에 두곡서원을 중건하였으며, 이때 김인경이 두곡서원에 봉안되었다. 1864년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뒤로는 매년 제사를 드리고 있다.
운암서원
의창구 사화동
우곡(愚谷) 박신윤의 효행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지 4년 후인 1702년 (숙종 28) 향촌 사림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운암사를 창건하였다. 1844년(헌종 10) 운암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8년 후인 1876년에 문중에서 서당을 짓고 유계(儒契)를 이어오다 1949년부터 석채(釋菜)를 봉행하였다. 2004년 서원을 복원하고, 이때 제향 인물도 늘려 4위를 봉안하였으며, 박신윤을 위하여 사우 앞 동편에 따로 별묘를 설치하였다.
저산서원
우곡(愚谷) 박신윤의 효행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지 4년 후인 1702년 (숙종 28) 향촌 사림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운암사를 창건하였다. 1844년(헌종 10) 운암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8년 후인 1876년에 문중에서 서당을 짓고 유계(儒契)를 이어오다 1949년부터 석채(釋菜)를 봉행하였다. 2004년 서원을 복원하고, 이때 제향 인물도 늘려 4위를 봉안하였으며, 박신윤을 위하여 사우 앞 동편에 따로 별묘를 설치하였다.
증산서원
마산회원구 내서읍 원계증산길 57-11
구한말 대지 200평에 건평 60여 평의 서원을 건립했으나 6·25 전쟁 중 완전히 소실되었다. 수제문을 비롯한 서원 건물과 숭절사(崇節祠)는 1953년에 개축한 것이다. 서응시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칠백 의사의 한 사람이다. 전란 후 나라에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의 교지와 충렬(忠烈)의 시호를 내렸고 금산의 칠백의총에 함께 묻혔다. 해마다 음력 2월 8일에 이곳에 모여 서응시에 대한 향사를 봉행한다.
회원서원
마산회원구 회원북23길 22
<회원동 풍경>
조선 시대 선조와 광해군 시기의 학자 한강 정구가 사망하자 문하생들은 그를 추모하여 1634년에 회원 서원을 세웠으며, 1708년에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을 추배하였다. 이후 회원 서원은 1869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까지 학문의 장소로 널리 활용되었고 폐쇄 이후 관해정에서 향사 기능을 담당하였다. 관해정과 취백당은 한동안 관리를 하지 못해 많이 손상되었으나 1885년에 창원 지역의 사림들이 중건했다고 한다.
거 창 군(6)
기동서원
가조면 기리1길 17
<기리의 풍경>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이우당 이경을 주벽으로, 임진공신 지촌공 이현계, 사인 용계공 이정서를 종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2019년 3월 26일에 100주년 행사를 한 것을 보면 1919년에 세워진 서원일 것이다.
덕천서원
거창읍 장팔길 594
고려 말 맑고 검소하며 충성이 곧은 시중정렬공(侍中貞烈公,諱復興)과 그 아드님 순절공(順節公,諱儀) 두 분의 빼어난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자 조선조 중기 영남의 명망 있는 유림(儒林)들이 뜻을 모아 순조 11년 辛未(서기 1811)년에 창건하여 두 어른을 배향하였다.그후 위의 두 어른의 학덕을 추모하여 공부하려는 유학들이 늘어남에 따라 21년이 지난 순조32년 壬辰(서기 1832)년에 강당을 세웠다. 그렇게 30여년이 흐른 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전국의 서원에 철페령을 내리는 바람에 사당이 훼철(毁撤)되고 위패는 매안(埋安)되고 강당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병암서원
가조면 사병리
1707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변중량과 계량 형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그 뒤 변벽을 추가 배향하였다. 뒤에 변벽(卞璧)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9년(고종 6)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 뒤로 복원하지 못하였다.
영빈서원
남하면 무릉2길 30-7
1744년에 창건한 서원으로 동래 정씨 정구(鄭矩), 정종(鄭種), 정표(鄭彪), 정응두(鄭應斗), 정시수(鄭時修), 정영진(鄭營振) 6위를 제향하던 영천사(瀯川祠)에서 출발하였다.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64년에 훼철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절의, 충효, 성경 정신을 일깨우고자 사림과 후손들이 1919년에 다시 세우고 영빈 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강당의 마당에는 1951년에 다시 세운 육현 묘정비(六賢廟庭碑)가 있다.
영승서원
1932년 퇴계 이황, 동춘당 송준길, 사락정 전철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으며 1998년에 중수하였다.
오례서원
신원면 덕산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1399~1456)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다. 오례사는 선생의 후손이 1870년에 세웠으며, 1876년에 강당인 추원재追遠齋를 건립하였다. 1994년에 크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오례사는 매봉산의 동쪽 구릉의 남사면부에 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경사면 높은 곳에 사당 영역과 낮은 곳에 강당 영역을 직렬로 배치하였다. 현재 오례사는 사당뿐만 아니라 강당과 대문채를 갖추어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고 성 군(8)
갈천서원
대가면 갈천로 620
1713년(숙종 3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암(李嵓)·어득강(魚得江)·노필(盧)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덕산서원
마암면 두호2길 76-13
서섭은 달성서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組)로 세종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까지 지낸 인물이더.
서섭의 충절을 알게된 손자들과 유림에서 1926년 3월 그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에 첨모재를 건립하게 되었다.
1994년에 경모사를 존공하고 1954년 8월 중수하였으며 위패를 봉안하고 최근 대대적으로 경역을 확장하고 당우(堂宇)를 신축하여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편액하였다.
도산서원
구만면 화림리
왜적을 물리친 소호 최균(蘇湖 崔均)과 소계 최강(蘇溪 崔堈) 형제를 모시기 위한 서원으로 1623년에 창건되었다.
1713년에 왕으로부터 현판, 노비, 서적 등을 하사 받는 사액 서원이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 1870년에 고쳐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연서원
마암면 도전리
조선 숙종 13년(1687)에 허기·허천수·허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20년에 다시 세웠다.
수림서원
마암면 화산리
조선 철종 7년(1856)에 나라에 공을 세운 무열공 배현경·배정지·배인경·배맹관·배상곤·배경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며,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하였다가 복원되었다.
운곡서원
대가면 척정리
조선 철종 7년(1856)에 창건하였으며 고종 때 철거된 것을 1987년 중건하였다.
어득강, 제철손, 재회, 제홍록을 제향하고 있다.
전학후묘 형식으로 강당을 중심으로 전후에 사당과 대문이 배치되어 있다.
위계서원
마암면 석마2길 186 d
이인형(李仁亨), 이의형(李義亨), 이영(李翎), 이현(李顯), 이응성(李應星)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1844년(헌종 10)에 세운 위계서원은 1869년(고종 6)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며
1963년에는 이제(李濟), 이규(李逵), 이예형(李禮亨), 이지형(李智亨)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1966년에 다시 세웠다.
산 청 군(10)
대포서원
생초면 대포리
1693년(숙종 19)에 민안부(閔安富)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뒤 1874년(고종 11) 유림과 후손들이 숭절사(崇節祠), 숭의재(崇義齋), 동재 · 서재 등을 고쳐 세웠다.
덕천서원
시천면 원리 222-3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도천서원
신안면 신안리
1401년(태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문익점(文益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54년(명종 9)에 ‘도천(道川)’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12(광해군 4)년에 중건하였다.
1787년(정조 11)에 복액하고 그 뒤 권도(權濤)를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목계서원
단성면 석대로525번길 40-13
1778년(정조 2) 창건되었으며 조선 숙종 조에 사림이 김담(金湛)과 이조(李晁)를 두능서원(杜陵書院)에서 봉향하다가 서원이 훼철되어 1778년(정조 2)에 유림들이 목계서원을 지어 다시 봉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철폐된 것을 1883년(고종 20)에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83년에 완전히 복원되었다. 이 서원을 ‘목계정사(牧溪精舍)’로도 부르는 것은 훼철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서계서원
산청읍 지리
조선 선조 39년(1606)에 오건(1521∼1574)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명종 4년(1549)에 예조로부터 포상을 받은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지었으며 숙종 3년(1677)에 ‘서계’라는 현판을 나라에서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다가 1920년대 복원되었다.
우계서원
차황면 부리
1671년(현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복원하였다.
완계서원
신등면 단계리
1614년(광해군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도(權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8년(정조 12)에 ‘완계(浣溪)’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권극량(權克亮)을 추가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묘우(廟宇)·신문(神門)·정당(正堂)·문루(門樓)·고사(庫舍)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74년 중건된 이후 강당은 원래의 구성을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이며 서원은 최근에 다시 중수하였다
청곡서원
신안면 청현로99번길 32-19
1642년(인조 20) 이천경(李天慶)의 학덕을 추모 향사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이다. 1642년(인조 20)에 사액되었으며,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것을 1922년 복원하고 1983년에는 중수하였다. 현재는 정문, 강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경내에 연못이 있다.
평천서원
조선 전기의 박희삼(朴希參)[1486-1570]을 주벽(主壁)으로, 두 아들인 박제현(朴齊賢)[1521-1575], 박제인(朴齊仁)[1536-1618]을 배향한 서원이다. 박희삼의 자는 노경(魯卿)이고, 호는 모암(茅菴)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평광리(平廣里)[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출생하였다. 1547년(명종 2)에 천거되어 덕릉 참봉(德陵參奉)과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는데,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는데, 정구(鄭逑)가 박희삼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향시(鄕試)에 7번, 동광시(東堂試)에 2번 나갔으나, 모두 실패하고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과 가장 친하였는데, 두 아들인 박제현, 박제인을 조식에게 배우게 하였다. 사림의 공의(公議)로 평천 서원에 제향하였다.
효산서원
차황면 철수리
상촌선생(桑村先生) 김상례(金商禮)는 누조(累祖)에 걸쳐, 안동옥계(安東玉溪) 인계타양(仁溪陀陽) 화산서원(花山書院) 영동각계에 충효사(忠孝祠) 초강서원(草江書院) 그리고, 보은병산서원(報恩屛山書院) 등지에서 봉향 하였는데 고종(高宗) 때 철원령(撤院令)에 의해 훼철당하고 지금 충북음성에 지천서원(知川書院) 안동에 타양서원(陀陽書院)과 충북 이류면에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향예하고 있으나 선생의 태생(胎生)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고역(故域)에는 우모지소(寓慕之所)가 없어 본손으로서 고민만 거듭되는 세월을 보내다가 김자수(金自粹), 김영유(金永濡), 김상례(金商禮)를 배향하기 위해 1991년에 창건된 서원이다.
의 령 군(5)
낙산서원
부림면 박진로 62-4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송암(松岩) 이로(李魯, 1544~1598)가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으나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의 저서인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전해져 내려 온다.
독곡서원
의령읍 벽화로 629-12
1656년(효종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의령현감 윤수거(尹舜擧)가 덕곡촌(德谷村) 입구의 경승지를 택하여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사액서원이 되었고,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은 없어졌지만 1902년(고종 39)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고 1992년 사우각(祠宇閣)이 재건되었다.
미연서원
대의면 모의로 323
허목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기 위하여 1825년에 허목의 학통을 이어받은 남인(南人)들과 허목의 후손들이 발의하여 미연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는 본래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에 지어진 것이었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1868년에 훼철되었다. 이후 허목의 영정은 양천 허씨 종손이 살고 있던 경기도 연천(漣川)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901년 후손들과 후학들이 서원 중건에 뜻을 모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에 영당 일부를 복원하고 이의정(二宜亭)이라 이름 붙였다. 1920년에는 정영훈(鄭英壎)과 그의 재종제(再從弟) 정섭기(鄭攝基)가 찬조금을 대고 허목의 후손인 허찬(許巑, 1850~1932)이 주도하여 위패를 봉안할 사당인 숭정사(崇正祠)와 허목의 문집인 《미수기언(眉叟記言)》 책판을 보관할 장판각을 건립하였다. 이 당시 정당(正堂)의 기와는 창녕에서 가지고 왔는데 기와를 옮기는 과정에서 창녕까지는 창녕 군민이, 그리고 의령부터는 의령 군민이 부역으로 날랐다고 전한다. 1975년에는 서원도 복원되었다.
신계서원
부림면 감암리
<1설>
1467년(세조 13)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신인 정준(鄭俊)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61년(철종 12)에 이 지역 향토 사람들이 뜻을 모아 창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1956년에 중수하였지만 그 또한 풍파에 의해 손상되어서 1994년에 본원의 건물을 세우고 2000년 6월에 현재의 상태로 복원하였다.
<2설>
1839년(헌종 5년) 송은(松隱) 박익(朴翊)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신계(新溪)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박익의 아들인 야당공(啞堂公) 박조(朴調), 졸당공(拙堂公) 박총(朴聰)도 함께 배향되어 있다. 애초 밀양에 건립된 덕남서원에 배향될 예정이었으나 그곳에 배향되지 못하자 산청군 신계서원을 건립하여 이곳에 배향하였다고 전한다.
태암서원
용덕면 죽전리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문원공(文元公) 전조생(田祖生)과 그의 손자 전자수(田子壽)를 향사하기 위해 1789년(정조 13)에 유림과 담양전씨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태암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그 뒤 후손들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창 녕 군(1)
물계서원
대지면 모산1길 109-36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성삼문(成三問)·성담수(成聃壽)·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환(成汝完)·성희(成熺)·성수경(成守慶)·성문준(成文濬)·성람(成灠)·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하 동 군(3)
옥산서원
옥종면 옥산서원길 61-7
1830년(순조 30) 정몽주(鄭夢周)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적이 진주 비봉산(飛鳳山) 비봉루에 있음을 알고 나서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다. 1868년(고종5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65년 사림(士林)과 자손들에 의해 다시 이곳에 이전·복원되었다.
인천서원
북천면 중촌길 51-22
1710년(숙종 3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탁(崔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당으로 개편, 운영하여오다가 광복 후 서원으로 복원하였다.
종천서원
옥종면 안계길 67-63
1677년(숙종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하홍도(河弘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에 하진(河溍), 1718년에 하연(河演)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이에 유림들이 하홍도의 강학장소인 모한재(慕寒齋)에다 하홍도의 위패를 옮겨놓고 1920년부터 향사를 지내왔다.
함 안 군(9)
기양서원
칠원읍 무기리
1701년(숙종 27)에 주세곤(周世鵾), 주선원(周善元), 주각(周珏), 주재성(周宰成), 주도복(周道復) 등 다섯 사람을 추향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고종 5년(1868) 훼철되었다가 연못 남쪽에 있는 충효사(忠孝祠)는 광복 후 1971년에 중건되었다. 본래의 자리는 서원 터만 남아있다.
남강서원
군북면 소포리
죽재(竹齋) 이겸수(李謙受)공을 추모하는 관민의 염원으로 정조 7년 계묘년(1783년)에 남강사(南岡祠)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고종 5년 무진년(1868년)에 사림의 공의에 따라 남강서원(南岡書院)으로 승호(陞號)되어 후학양성이 활발하고 사림유생들의 강학논경이 빈번하였다.
신미년(1871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을유년(2005년)에 복원을 발의하고 병술년(2006년)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균관으로부터 남강서원 복원에 대한 승인과 문헌적 고증을 받아 무자년(2008년)에 길지를 잡아 기공하여 기축년(2009년)에 완공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덕연서원
칠원읍 예용3길 12-2
1591년(선조 24)에 동림 서원(桐林書院)으로 창건되었다가 그 직후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660년(현종 원년)에 칠원현(漆原縣) 남고(南皐)에 중건하여 ‘남고 서원(南皐書院)’으로 재건되었다.
재건된 후 1676년(숙종 2)에 ‘덕연(德淵)’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약 190여 년 후인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혁파되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덕연 서당으로 재건하였으며, 광복 후인 1964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중건 복원하였다.
도계서원
함안면 파수리 546
<원촌마을 풍경>
이숙(李潚), 이휴복(李休復), 박진영(朴震英), 조익도(趙益道) 등 네 사람을 향사하기 위하여 1780년(정조 4)에 창건되었다. 그 후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는데 현재 원촌마을에 유허비만 남아있다.
도암서원
군북면 덕대리
<덕대리의 풍경>
1679년(숙종 5)에 배여경, 조영득, 조익성, 황후간 등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훼철되었다. 이후 1940년 겨울에 후손들이 도암 서원 일부를 복원하여 당(堂)을 세우고 도암 서당이라 현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봉서원
칠원읍 유원리
상봉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황협(黃悏, 황열(黃悅) 등 8현을 추향하기 위하여 칠원면 유원리에 설립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자 용산서당을 중건하여 석채례(釋菜禮)를 지내다가 1935년 상봉서당을 용산사(龍山祠)의 옛 터에 중건하여 석채례를 속행하였다.
광복 후 1984년 사림과 후손의 협의 하에 서원으로 중건하고 1985년에 용산사를복원하였다.
서산서원
군북면 사군로 1235
1703년에 조려를 중심으로 좌우에 원호, 김시습, 이맹정, 성담수, 남효온을 추향하기 의해 창건되었고, 1712년(숙종 39)에 ‘서산(西山)’ 이라는 현판이 내려지면서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훼철되었다.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복원되지 못하다가 정부의 보조와 유림의 협력으로 1981년에 복원을 착수하여 1984년에 완공하였다.
신암서원
가야읍 신암로 209
1780년(정조 4)에 안관을 향사하기 위해 영남 사림에 의해 사(祠)와 서원 강당이 건립되었고, 1784년(정조 8)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823년(순조 23)에 강당을 이건하고, 1850년(철종 원년) 중건했지만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한동안 복원하지 못하다가 1990년 신암 서원 복원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어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유림과 후손의 지원으로 1993년 10월에 준공하였다.
홍포서원
칠서면 계내리
1782년(정조 6) 에 칠원 윤씨윤환(尹桓)[?~1387], 윤자당(尹子堂)[?~1422], 윤지(尹志), 윤석보(尹碩輔)[?~1505], 윤탁연(尹卓然)[1538~1594] 등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857년(철종 8)에 개수(改修)되었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훼철되었다.
1873년(고종 10) 옛터에 사림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유허비문은 당시 통정대부(通政大夫) 안동 김연한 공이 지었다. 1974년에 홍포 서원이 복설(復設)되었으며, 1980년 7월에 현재의 위치인 계내리 수곡상포재(上浦齋) 앞에 홍포 서원을 중건하였다.
함 양 군(8)
구천서원
수동면 우명리
1701년(숙종 27)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맹지(朴孟智)·양관(梁灌)·표연말(表沿沫)·강한(姜漢)·양희(梁喜)·하맹보(河孟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 훼철되었다. 그뒤 후손들이 불망계(不忘契)를 조직, 구천재와 유허비를 세워 헌례(獻禮)를 올려오다가, 1983년 복원하고 양홍주(梁弘澍)를 추가배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계서원
수동면 원평리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藍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34년(인조 12)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과 정온(鄭蘊)을 병향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 정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후 1868년 별사는 훼철(毁撤)되었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당주서원지
지곡면 공배리 593-2 3
1581년(선조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노진(盧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0년(현종 1) ‘당주(溏洲)’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별사(別祠)에는 정희보(鄭希輔)를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
도곡서원
지곡면 병곡지곡로 859
1701년(숙종 27)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승숙(趙承肅)·정복주(鄭復周)·노숙동(盧叔仝)·노우명(盧友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노사예(盧士豫)와 정수민(鄭秀民)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가 2001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도곡서원은 구천서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함양의 유력 씨족의 중시조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연향함으로써 문중적 이해와 문중 간의 연합을 도모한 서원이라는 특징이 있다.
송호서원
병곡면 송평리
순조 30년(1830)에 조선 전기 학자 고은 이지활(1434∼?)을 기리기 위해 경상도 유림에서 세운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6년(1869)에 해체되었으나 1947년 다시 복원하였다. 후일 세종대왕의 아들로 이곳 함양에서 돌아가신 이어(李瘀)와 이지활의 손자인 송계 이지번을 추가로 모셔 현재 이곳에는 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산서원
지곡면 정취길 80-21
하양 허씨 소유로 1951년 창건 되었으며 간숙공 허주, 문정공 허목, 돈남공, 허방우, 삼원공 허원식을 병향하고 있다.
청계사원
수동면 원평리
연산군 1년(1495)에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화산서원
수동면 수동내동길 7-12
1860년 유림들이 발론으로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강서사를 건축할려고 발의 하였으나 고종때 서원 훼철령이 있어서 건축하지 못하고, 196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회헌 임대동을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 화산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988년에 다시 화산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9년 봄에 회암 임종인과 남계 임희무의 위패를 모셨다.
합 천 군(8)
덕원서원
청덕면 성태리
세조(재위 1455∼1468) 때 이시애의 난을 맞아 당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강열공 차운력·문절공 차원부·문목공 차포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18년(1692) 세웠는데, 처음에는 호남승평에 세워 오천서원이라 했다. 그 뒤 지방 유림이 순조 6년(1806)에 청덕면 성태리로 옮겨 지어 덕원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자진 철폐하였고, 고종 39년(1902) 지방 유림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호서원
대병면 회양리
원래 1777년(정조 1)에 고려중기의 인물 충숙공 문극겸(忠肅公 文克謙)을 배향하기 위해 삼가현 역평(三嘉縣繹坪)에 세워졌던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고, 이후 사우(祠宇) 등이 1957년에 복원되었다. 그것을 1985년 다시 합천댐 공사로 인한 수몰을 피해 장소를 옮겨 복원한 것이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옥계서원
봉산면 서부로 3078-13
영조 3년(1725)에 율곡 이이의 유물인 『격몽요결 』과 『해동연원록 』등을 소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4㎞ 정도 떨어진 향옥동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고종 6년(1867)에 마을 동쪽 200m 지점에 다시 세웠다.
용암서원
봉산면 죽죽리
1576년(선조 9)에 조선 명종 때의 거유(巨儒)이자 실천 성리학자인 조식(曺植)이 제향하기 위해 노흠(盧欽), 송희창 등 여러 선비가 의논하여 삼가현의 서쪽 20리 근처 회현(晦峴) 아래에 세운 회산서원(晦山書院)이라고 한다. 그 후 1601년(선조 34)에 서원을 재창건 하면서 회산서원지가 협소하므로 여러 선비들이 의논하여 황강 앞으로 옮겨 건립하였다. 황강으로 이건 된 4년 후인 1605년(선조 38) 8월에는 조식의 위판(位板)이 봉안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용암(龍巖)’이라 사액되었다. 용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이후, 1871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합천댐 공사로 인하여 수몰을 피해 봉산면 죽죽리 산 26번지로 이전하였다.
운구서원
가회면 두심1길 51-50
1786년(정조 10)에 주변 유림의 건의에 의하여 운구대 곁에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창건하기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에 홍재(洪載), 이오(李午), 조열(趙悅)을 봉안하였다. 1833년(순조 33)에 한 차례 중수를 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1923년에 홍재(洪載)의 후손인 홍승부(洪承富)등이 중심이 되어 문중의 뜻을 모아 선조가 은거하였던 두심동에 건물을 저어 운구서당이라 현판하였다.
중동서원
합천읍 충효로 46
1691년(숙종 1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알평(李謁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이개(李開)와 이우칭(李禹偁)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그 뒤 복원하였다.
청계서원
율곡면 내천리
명종 19년(1564)에 학자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그 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를 함께 배향하였다.
고종 6년(1869)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그 뒤에 복원하였다.
태동서원
초계면 국사봉로 1017
2012년4월15일 이 서원을 준공하고,추연(秋淵) 권용현(券龍鉉1899-1988) 한학자(漢學者)를 향사(享祀)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명칭은 태암산(泰巖山) 동쪽이라는 뜻을 지닌 태동서사(泰東書舍)가 있었던 곳이기에 태동서원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