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전통문화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경상북도 서원(230)
경 산 시(9)
관란서원
용성면 미산리
1660년(현종 1)에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도덕과 학문을 추앙하여 창건하였다. 그 뒤 1715년(숙종 41)과 1743년(영조 19)에 사당을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0년 맹구대와 삼화당이 있던 자리에 건물을 복원하여 서당으로 활용하였다. 언제부터 서원으로 승격되었는지도 잘 모르나 유림에서 단비(檀碑)를 세우고 해마다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의 향사를 받들고 있다.
금호서원
하양읍 금락리
<화양 향교>
1684년(숙종 10)에 태종 세종조의 유교정치를 대표하는 명신인 경암 허조(敬庵 許稠 : 1369~1439)를 배향하고 추모하는 서원이었으며 1790년(정조 14년)에 사액(賜額)을 받았으나 1724년(경종 4년)에 사이동(四而洞, 현 西沙洞)으로 이건되었으나 1871년(고종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금호서원
하양읍 부호리
하양읍 금락리에 있던 사원이었지만 서사동을 거이건하였다가 경덕사(景德祠)와 강당인 수교당(修敎堂)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도동서원
남산면 하대리
1894년 도동단을 세워 설총을 기리다가 1923년 도동재를 세웠으며, 2010년 도동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도천서원
진량읍 당곡리
표암(瓢岩) 이알평(李謁平)을 주벽(主壁)으로 국당(菊堂) 이천(李?),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가은(佳隱) 이지회(李之會)를 배향하기 위해 1946년에 이장희(李章熙)가 건립한 서원이다.
용계서원
자인면 원당리
1700년(숙종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문병(崔文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의사(倡議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2년에 용계서원으로 변경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 사림의 공의로 복원하였다.
용산서원
용성면 곡란리
1705년(숙종 31)에 최찬규(崔燦圭)·최찬기(崔燦基) 등이 지방유림과 협력하여 이세필(李世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과 흥학비각(興學碑閣)을 세우고 용산사(龍山祠)라 하였다.
이세필이 죽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에 위패를 모시고 용산서원으로 개편하였다. 1784년(정조 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89년에 박문수(朴文秀)·이태좌(李台佐)·이형좌(李衡佐) 등이 중건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56년에 최만희(崔晩熙)·홍질현(洪櫍鉉) 등이 중심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가 1984년에 다시 이이와 송시열의 위패는 훼철하고 이세필만 단독 배향하고 있다.
임호서원
하양읍 은호리
1823년(조선 순조23년)에 하주사림의 공의로 임호사(臨湖祠)를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19년에 사림과 성손들이 서파 류필영 선생에게 임호사 유허비명을 청하여 임호사가 있던 자리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을 건립하였다. 1934년에 현 위치인 은호리 마을 안으로 이건하였으며 1977년에는 서당을 복원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조곡서원
남산면 조곡리
자인의 유림과 탐진 안씨 후손이 그 선조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와 그 4세손인 문정공(文靖公) 안지 (安止)를 배향하기 위해 정조 18년(1794년)에 건립한 서원으로,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분도등에 위치하고 있다.
경 주 시(15)
경산서원
강동면 양동리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에 경주부윤(慶州府尹) 이형상(李衡祥)이 지방유림과 함께 건립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숭렬사(崇烈祠)’로 사액되었는데, 이 때 유림이 모여 용산서원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훼철(毁撤)령으로 훼철되었고 1924년에 중건(重建) · 복향(復享)되었다.
구강서원
안강읍 양월리 679-1
1692년(숙종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제현(李齊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17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구산서원
현곡면 하구리
고려 말과 조선 전기의 문신 양경공(良景公) 서유(徐愈)를 배향하기 위하여 1786년(정조 10)에 건립되었다. 1839년(헌종 5) 사액서원으로 승격되고 1848년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5년 서필(徐弼), 서사적(徐思迪)을 추향하여 서원을 중건하였다.
단구서원
강동면 단구리
이세기(李世基)를 주벽으로 하고 이천(李蒨, 이종윤(李從允)을 배향하는 곳이다. 원래는 이종윤을 제향하는 모현서당(慕賢書堂)이 1862년(철종 13)에 건립되었는데,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1983년에 중창하였다.
덕산서원지
감포읍 팔조리
<팔조리 풍경>
조선 후기 덕암(德庵) 김자은(金自隱)을 배향한 덕산사(德山祠)가 있던 곳으로, 1828년(순조 28)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동강서원
강동면 유금강정길 40-25
1695년(숙종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손중돈(孫仲暾)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훼철 직후인 1870년에 설단(設壇)하여 단향(壇享)으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1925년에 활원재(活源齋), 1960년에 묘우(廟宇)·강당 등을 복원하였으며 1980년에 경상북도에서 수복(修復)하였다.
서악서원
서악2길 23
명종 18년 (1563), 경주부윤이라는 벼슬의 이정(1512∼1571)이 지방 유림과 뜻을 같이하여 김유신 장군과 신라 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퇴계가 선도산 아래에‘서악정사'로 이름 짓고 세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2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다.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신지서원
천북면 강정2길 10-3
옥산서원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1572년(선조 5)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다음 해에 서악(西岳)의 향현사(響絃詞)에 있던 위패를 모셔왔으며, 1574년 ‘옥산(玉山)’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용산서원
내남면 이조리 산22-1
정무공 최진립(崔震立)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25) 경주부윤이형상(李衡詳)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하였으며, 이듬해묘1701년(숙종 27) 강당 및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敏古堂), 양 협실(夾室)을 흥인재(興仁齋)·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好德齋), 북재를 유예재(遊藝齋), 문을 식강문(植綱門)이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 권대규(權大規) 등의 진정소(陳情疎)에 의해 숭렬사우라는 묘액을 내렸는데, 이때 경주의 유림들이 원호를 용산서원이라고 하였다. 묘액의 글씨는 이익(李瀷)의 형인 이서가 썼다. 1870년(고종5년)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복원하였다.
운곡서원
강동면 사라길 79-13
조선 정조 8년(1784년) 안동권씨의 시조인 권행선의 공적을 추모하는 서원을 건립했지만 고종 5년(1868년)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였다.
이천서원
안강읍 대동리
<대동리의 풍경: 시진자료 미확보>
이천 서씨인 서중린이 병자호랑 때 적과 싸우다 숨진 충신이기에 서원에 모셨지만 고종 5년(1868년)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서사만 남아있다.
장산서원
안강읍 옥산리
1780년(정조 4)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전인(李全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도 영천군 임고면 수성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장산서원 사우는 후손들에 의해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로 옮겨 2006년 11월 복원하였다.
직천서원
안강읍 대동길 176-15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운 정사진(鄭四震)을 추모하여,후손들이 1702년(숙종 28)에 영천 우항(愚港)에 입암서원(立巖書院)으로 세웠다가, 1711년(숙종 37) 직천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헐린 것을, 경주에 사는 후손들이 1979년 안강읍 대동리에 다시 세웠다.
구미시(8)
금오서원
선산읍 원리
길재(1353∼1419)는 정몽주·이색과 함께 고려 후기에 절의를 지킨 ‘고려삼은’으로 불리는 학자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금오서원은 선조 3년(1570)에 금오산 자락에 세웠으며 선조 8년(1575)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고,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사액되었다.
남강서원
고아읍 원호리
죽재(竹齋) 이겸수(李謙受)공을 추모하는 관민의 염원으로 정조 7년 계묘년(1783년)에 남강사(南岡祠)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고종 5년 무진년(1868년)에 사림의 공의에 따라 남강서원(南岡書院)으로 승호(陞號)되어 후학양성이 활발하고 사림유생들의 강학논경이 빈번하였다.
신미년(1871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을유년(2005년)에 복원을 발의하고 병술년(2006년)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균관으로부터 남강서원 복원에 대한 승인과 문헌적 고증을 받아 무자년(2008년)에 길지를 잡아 기공하여 기축년(2009년)에 완공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동락서원
임수동
1655년(효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 2)에 ‘동락’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으나 그 뒤 1932년 중건하고 1971년에 전체를 보수하였다.
문산서원
선산읍 유학길 334-32
1792년(정조 16)에 노수함(盧守諴)·노경필(盧景佖)[1554~1595]·노경륜(盧景倫)[1566~1595]을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 5)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86년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송산서원
해평면 창림리
1647년(인조 25)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응룡(崔應龍)과 최현(崔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6년(효종 7)에 창림리로 이건하고 사액을 받았으며, 김응기(金應箕)·김진종(金振宗)·강유선(康惟善)·노경임(盧景任)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고 송산서당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암서원
지주중류2길 19
1 730년 운암서원(雲巖書院)을 지어 최항경의 제사를 지냈으나 1741년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고, 1781년 다시 오암서원을 지어 배향했으나 이 또한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숭덕재사(崇德齋舍)만 남고 철거되었다. 1985년 후손들이 대강당과 광영루(光影樓)를 지었고, 2007년 효덕사(孝德祠)를 신축하고 대강당과 숭덕재사를 개축하여 오암서원을 복원했다.
옥계서원
인의동
1774년 (영조 50)에 창건하였으며, 1819년(순조 19)에 중수하였다.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893년 사당이 있던 자리에 신당과 단비(壇碑)를 세우고 장안세만을 독향으로 하여 향사를 이어왔으며, 1984년 묘우과 강당을 중건하고 비각과 동재와 서재를 증축하여 1987년 완공하였다.
월암서원
도개면 월림리
1630년(인조 8)에 이 지역 출신으로 절의를 지킨 하위지(河緯地), 이맹전(李孟專) 및 고려말의 충신 김주(金澍), 명종 때의 학자 박운(朴雲) 등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2010년 복원되었다.
김 천 시(9)
경양서원
구성면 광명리 708-1
도동서원
구성면 상좌원리 481-2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94년 『금릉군지』에는 숙종 대[1675~1720]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응구는 15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지냈으며 여대로는 15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
송오(松烏) 여응구(呂應龜)와 그의 아들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부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서원 건물 오른쪽에 사당이 있는데 철폐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옛날과 같이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여응구는 15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지냈으며 여대로는 15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창의지사(倡義志士)였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94년 『금릉군지』에는 숙종 대[1675~1720]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68년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사당 건물은 철거하고 강당은 그대로 둔 채 현판을 ‘경양서원(鏡陽書院)’에서 ‘경양서당(鏡陽書堂)’으로 바꾸었다. 이는 서원 철폐령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덕림서원
아포면 대신리 (처음 : 아포면 초곡리)
<대신리의 풍경>
1669년(현종 10)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정경세(鄭經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 2) ‘德林(덕림)’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남아 있던 강당도 1940년에 붕괴되어 현재는 김천시 남면 초곡리에 터만 남아 있으며, 대신리에는 3칸 규모의 강당만 남아 있다.
도동서원
구성면 상좌원리
1771년(영조47년) 불천위 충간공 이숭원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후 1788년(정조 12)에 이숙기(李淑琦), 이호민(李好閔)을 배향하고 다시 1794년(정조 18)에 이숙감(李淑瑊>), 이후백(李後白)을 추향했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는데 1918년에 그 자리에 강당을 건립하고 명례당(明禮堂)이라 현액했다. 지금은 춘추로 향내 선비들이 모여서 이 어른들의 유덕을 기리며 향사를 모시고 있으며 이 서원에 모셔져 있는 오현(五賢)은 모두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섬계서원
대덕면 조룡리 445-1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순조正寢)인 세워진 서원으로, 세충사(世忠祠)에는 백촌 김문기 선생과 그의 맏아들 영월군수 여병재(如甁齋) 현석공(玄錫公)을 제사하고, 동별묘(東別廟)에는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남계(南溪) 서질(徐騭)을 배향한다.
1959년 향유 이만영(李晩永)·박원동(朴元東)·이현돈(李鉉墩) 등이 전국 각지의 유림에 복원을 호소하고 본손인 김연직(金淵直)·김철규(金哲圭)가 세충사를 세웠지만 동별묘를 세우지 못하자 세충사를 가로막아 위패를 봉안하였다. 1995년 도비를 지원받아 1996년 11월에 동별묘를 세우고 예전과 같이 3현을 봉안하였다.
원계서원
음지마길 40-5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양오당(養吾堂) 송응현(宋應賢)과 그의 아들인 양곡(陽谷) 송걸(宋傑)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졌다. 1927년 사림에 의해 원계서원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지금의 건물은 1972년에 세워진 것이다.
일신서원
아포읍 예2리
<예2리의 풍경 : 사진자료 확보 중>
고려 말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배향 인물은 송월당(送月堂) 이사경(李思敬)과 목은(牧隱) 이색(李穡)모신 사당인데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어 지금은 그 터만 보전되어 있다.
자동서원
조마면 강곡4길 132
강설(姜渫), 강여호(姜汝호) 두 선생을 추모하여 도남서원 원장 김기찬, 사양서원 원장 이동필, 병산서원 원장 도유사 이제, 매림서원 원장 박민국, 낙봉서원 원장 김태온, 동갈서원 원장 장수훈등 555명의 영남내의 서원과 유림의 제현이 1804년(순조 4) 12월 6일부터 1806년(순조 6) 9월 3일에 걸쳐 발의하여 공사를 시작한지 5년 뒤인 1811년(순조 11)에 준공하여 강당을 자양강당(紫陽講堂)이라하고 사우를 상의사라고 하였다. 1840년(헌종 6)에는 사당인 ‘연봉사(蓮峰祠)’를 건축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이 내리자 ‘문명재(文明齋)’라 개칭하였으며 1927년 중수 복원하고 강석구(姜碩耉), 강이화(姜履和)를 추향하였다.
춘천서원
부항면 부항로 1453-12
노론파의 영수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증손자의 아들인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을 제사하기 위해 이의조(李宜朝) 등이 1756년 (영조 32년)에 건립한 서원으로, 지역 내 노론파 유림들이 여기에 모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1868년 철폐되어 현재는 강당만 남아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하로서원
하리안길 19-6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을 모시는 경상북도 김천시의 서원이다. 그러나 원래 서원이 아니라 김천시 노촌당(老村堂)에 1984년에 하로서원(賀老書院)이라는 간판을 건 것이다.
문 경 시(5)
근암서원
산북면 금천로 351-5
1544년(중종 39)에 근암서당으로 창건되었으며 1669년(현종 10)에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의 위패를 모시고 근암서원으로 개칭됐다. 1693년에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이후 1729년(영조 5)에 명륜당이 중수되고 1786년에 이구(李梏) · 이만부(李萬敷) · 권상일(權相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71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훼철된 후 방치돼왔다. 근암서원은 지난 1970년대 후학들에 의해 사당과 강당이 일부 복원됐지만 과거의 모습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매우 축소되는 등으로 서원 기능을 잃었지만 문경시는 2010년에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4천766㎡에 총사업비 30억원을 들여 사당과 전사청, 강당, 내삼문,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모두 9동으로 구성된 근암서원 복원하였다.
소양서원
가은읍 소양서원길
1712년(숙종 38) 창건하였으나 1745년(영조 21) 훼철되었다가 다시 1801년(순조1)에 복설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다시 훼철되었으나 1990년 다시 복원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암 정언신(懶菴 鄭彦信), 인백당 김낙춘(忍百堂 金樂春), 고산 남영(孤山 南嶸), 가은 심대부(嘉隱 沈大孚) 및 가은 이심(稼隱 李襑) 5인을 배향하고 있다.
웅연서원
산북면 서중리
정종 을묘(1795)에 인천채씨 4현을 모신 웅연세덕사로 창건되어 다의당 채귀하, 나재 채수, 출재 채소권, 우담 채득소의 4현을 봉안하고 4년후인 무오(1798)에 서원으로 선액되었다가 고종 무진(1868)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는 유허비만 있다.
의산서원
산양면 위만리 109
엄흥도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1750년 건립하였으나 흥선대원군 때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1900년에 의산서원(義山書院)자리에 상의재(尙義齋)가 복설되고 위패를 별묘에 봉안하고 충절사(忠節祠)라 하였다
한천서원
농암면 농암리
<농암리의 풍경 ; 사진자료 확보 중>
1697년(숙종 23)에 명현을 제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과 처사(處士) 신숙빈(申叔彬)을 제향하였으며 1787년(정조 11)에 추담 성만징(秋潭 成晩徵)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후에 다시 짓고 매년 3월 중정(中丁, 음력으로 그달의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에 있다.
상 주 시(11)
낙암서원
중동면 죽암리
김담수(金聃壽)와 두 아들 김정용(金廷龍), 김정견(金廷堅)을 배향한 곳이다. 1745년(영조 21)에 설립되어 향사되어 오다가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단소만 남아있었던 것을 1988년 다시 복원하였다.
도남서원
도남2길 91
1605년(선조 38) 전 주부 등 8인이 묘우를 세워 유현을 모시기로 발의하고 통문을 내었으며 5월에 옥성서당에 모여 서원건립을 의결하였는데 회원은 60인이었다.
1606년(선조 39) 6월, 연악서당 회의에서 낙동강 무임포에 서원 자리를 정한 후 동년 12월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오선생 위판을 봉안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1635년(인조 13)에는 정경세(鄭經世)를 추가배향하였다.
1676년(숙종 2)에 사액(賜額)된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동학이 일어나고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자 그에 극도로 반대한 세력이 바로 유생들이었고 그들은 조직적인 배척운동을 벌였는데 그 시발이 바로 상주지역이었다.
상주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산서원(愚山書院)에서 1863년 9월 13일자로 동학 배척통문(排斥通文)을 만들어 이웃 서원인 도남서원(道南書院)으로 보냈는데 도남서원은 경상도 일대의 서원에 통문을 보내 일제히 들고 일어나라고 호소하였다.
1992년 유림에서 4년간 강당 등을 복원하고, 상주시가 지난2002년부터 유교문화관광개발사업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2005년에는 이준(李埈)을 추가 배향하여 아홉 선생을 모시고 있다.
봉강서원
신봉동
1817년(순조 17) 강세백(姜世白)이 고려절신인 강회중(姜淮仲)과 갑자사화 피화인강형(姜詗을 배향한 경덕사(敬德祠)를 봉대(鳳臺)에 창건하였으며, 이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훼철하였으나, 1976년 옥동서원의 발의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중건하였으며, 1998년 경덕사(景德祠)를 중건하였다.
봉산서원
화서면 금산리
1708년(숙종 3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노수신(盧守愼)·심희수(沈喜壽)·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김홍미(金弘微)·조우인(曺友仁)·정호선(丁好善)·황익재(黃翼再)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1771년과 1841년에 중수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 1868(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3년 4월에 복원하였다.
옥동서원
모동면 수봉리
1518년(중종 13) 황맹헌(黃孟獻), 황희(黃喜), 황효헌(黃孝獻)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580년(선조 13) 백화서원으로 이름짓고 영당(影堂)을 지어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다가 1714년(숙종 40) 추가로 전식(全湜)을 배향하고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 1783년(정조 7) 황뉴(黃紐)가 배향되었으며 1789년 ‘옥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옥동서원으로 개칭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르지 않고 존속하였으며, 1991년 경덕사(景德祠)와 온휘당(蘊輝堂)을 보수하였다.
연악서원
지천동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언성(朴彦誠)·김언건(金彦健)·강응철(康應哲)·조광벽(趙光璧)·강용량(康用良)의 덕행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3년 3월에 단소(壇所)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성서원
외남면 신상리에
1631년(인조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득배(金得培)·신잠(申潛)·김범(金範)·이전(李)·이준(李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단소(壇所)를 설치, 계속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7년에 복원되었다.
임호서원
공검면 역공리
<역공리 풍경 : 사진 자료 확보 중>
1693년(숙종 1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채수(蔡壽)·권달수(權達手)·채무일(蔡無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9년에 복원하였다.
청암서원
공검면 예주리
<예주리의 풍경 사진 자료 확보 중>
1752년(영조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포(柳砲)·유달존(柳達尊)·박눌(朴訥)·이겸(李謙)·유종인(柳宗仁)·홍약창(洪約昌)·남영(南嶸)·정윤해(鄭允諧)·박성민(朴成敏)·이영갑(李英甲)·남근명(南近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1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효곡서원
공성면 용신리
1685년(숙종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량(宋亮)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김충(金沖)·고인계(高仁繼)·김광두(金光斗)를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7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흥암서원
연원1길 34
송준길(宋浚吉)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덕을 기리며 후학(後學)들을 교학(敎學)하던 사학기관(私學機關)이다. 1702년(숙종 28)에 창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 흥암서원(興巖書院)으로 어필사액이 내려지고 좌부승지 유숭(兪崇)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이 때 어필비각(御筆碑閣)및 하마비를 건립하였고, 1809년(순조 9)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서원훼철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안 동 시(28)
경광서원
서후면 금계3길 131-24
1686년(숙종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배상지(裵尙志)·이종준(李宗準)·장흥효(張興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1873년에 단소(壇所)를 설립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72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산서원
남후면 암산1길 53-1
유학자 이상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 사림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이후에는 향사만 지내 왔다.
1977년 고산정사(高山精舍)와 백승각(百承閣)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好仁堂), 묘우인 경행사(景行祠), 동재(東齋)를 중수하였다.
근성서원
일직면 긴대골길 10
1812년(순조12) 의성군 안평면 하평리에 조선 개국공신인 김인찬(金仁贊)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이곡서원을 창건하였고, 의성군 비안면으로 이건했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26년에 안동시의 현 위치에 복설, 근성(芹誠)으로 서원명을 고쳤다
기양서원
임동면 수곡용계로 1698
1615년(중종 11) 류복기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질 당시에는 후손들을 교육하기 위한 서당이었다.
그러나 후손들에 의해 추원사(追遠祠)가 세워지고, 1780년에 류복기의 위패가 봉안되고, 1806년에는 류의손의 위패가 추가로 봉안됨으로써 서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경상북도 안동군 무실 남쪽 산록에 있었으나 임하댐 수몰로 1988년 현재 위치인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로 이건하였다.
노림서원
일직면 송리리
<송리리 풍경 : 사진 자료 확보 중>
1649년(인조 27) 지방유림의 공의로 남치리(南致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도계서원
북후면 도촌리
1709년(숙종 35)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위(權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3년 지방유림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산서원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퇴계는 1556년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짓고 자리잡아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5년간의 공사 끝인에 퇴계의 61세 되던 1561년에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뒤 1570년에 퇴계가 돌아가자 서당의 뒤쪽에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발전시켰다.
1575년에 선조로부터 사액받았으며 서원을 꾸미면서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서원의 형식을 정립하였다. 건물뿐 아니라 서원을 지탱하는 내부규칙인 서원안도 마련되어 후에 다른 서원들의 모본이 되었다.
동산서원
성곡동 698
1961년 3월에 유림의 발의로 사암 천만리 선생의 제향을 위해 안동시 용상동에 건립하였으나 2002년에 지금의 위치인 고가옥 박물관 경내로 이전하였다.
명호서원
정상동
1790년(정조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원(李源)과 이주(李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명계서원(明溪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37년(헌종 3)에 남선면 정상동으로 이전, 명호서원이라 개칭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경의사(敬義祠)를 비롯하여 명륜당·동재·서재·신문(神門)·전사청(尊祀廳)·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완전히 복원하지는 못하였다.
묵계서원
길안면 국만리길 72
1706년(숙종 3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계행(金係行)과 옥고(玉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건물로는 묘우(廟宇)인 청덕사(淸德祠),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을 비롯하여 극기재(克己齋)·읍청루(挹淸樓)·진덕문(進德門)·신문(神門)·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그 뒤 1925년 도내 유림이 협력하여 강당 등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벽계서원
북후면 벽절길 21-3
1860년(철종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강봉문(姜鳳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복원되었다.
봉암서원
풍산읍 매곡리
1825년(순조 2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남응원(南應元)·남융달(南隆達)·남급(南礏)·남천한(南天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복원하였다.
분강서원
도산면 가송리
1613년(광해군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현보(李賢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700년(숙종 26)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67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빈서원
임하면 천전광산길 53
1681년(숙종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진(金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1년에 김극일(金克一)·김수일(金守一)·김명일(金明一)·김성일(金誠一)·김복일(金復一)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08년에 복원하였다.
서산서원
일직면 원리
1771년(영조 4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색(李穡)과 이홍조(李弘祚)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복원하였다.
안동병산서원
풍천면 병산길 386
풍악서당(豊岳書堂)은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역동서원
송천동 388-2
1570년(선조 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禹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4년(숙종 10)에 ‘역동(易東)’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복원하였다.
용강서원
용상동 산63-1
1671년(현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0년에 복원하였다.
용계서원
와룡면 산야리 187
<자료 미확보>
우계서원
도산면 가송리
<가송리 풍경>
유암서원
와룡면 주하리 267-1
1761년(영조 37)에 사림의 공의로 이정백(李庭栢)을 제향하기 위해 북후면 도진리와 와룡면 주하리의 경계인 ‘유암(流巖)’ 위에 세워졌다. 그 후 1786년(정조 10)에 주촌의 합계가로 이전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3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임천서원
호암2길 27
1607년(선조 4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성일(金誠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18년(광해군 10)에 ’臨川‘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러나 1602년(광해군 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이황(李滉)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김성일의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복구하지 못하다가 1847년(헌종 14)에 중건하고 다시 위패를 모셨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8년에 복원하였다.
임호서원
임하면 임하리
1823년(조선 순조23년)에 괴암 이간을 향사하기 위해 하주사림의 공의로 임호사(臨湖祠)를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19년에 사림과 성손들이 서파 류필영 선생에게 임호사 유허비명을 청하여 임호사가 있던 자리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을 건립하였다. 1934년에 현 위치인 은호리 마을 안으로 이건하였으며 1977년에는 서당을 복원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창렬서원
서후면 교리새마을길 73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 성생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는 서원이다.
청성서원
풍산읍 웃막실길 8
1608년(선조41)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鳶魚軒址)에 창건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에 권호문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다가 1767년(영조 43)에 막곡리로 옮겼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없어 졌다가 1909년에 중건하였다.
타향서원
<자료미확보>
호계서원
도산면 서부리 산32
1573년(선조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월곡면 도곡동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이 때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고 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김성일(金誠一)과 유성룡(柳成龍)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676년(숙종 2)에 ’호계(虎溪)‘라 사액되었다. 그 뒤 이황은 도산서원, 김성일은 임천서원, 유성룡은 병산서원에서 주향(主享)함에 따라 호계서원은 강당만 남게 되었다.
그 뒤 1973년안동댐건설로 수몰하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화천서원
풍천면 광덕솔밭길 72
1786년(정조 1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유운룡(柳雲龍), 유원지(柳元之), 김윤안(金允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의 건물로는 경덕사(景德祠), 강당, 신문(神門), 전사청(奠祀廳), 장판각(藏板閣), 전학재(典學齋), 심원재(尋遠齋), 지산루(志山樓)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강당과 주사만 남았ㄷ던 것을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1996년 복원하였다.
영 주 시(22)
구고서원
단산면 사천리
1780년(정조 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한정(徐翰廷)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의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어 1974년 현 위치에 상절사(象節祠)와 서원을 복설하였다.
구호서원
영주4동
<영주4동 풍경>
1780년(정조 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정(權定)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12년에 권두문(權斗文)·김대현(金大賢)·김영조(金榮祖)·권창진(權昌震) 등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맡아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귀강서원
휴천2동
<휴천2동의 풍경>
1967년에 기존의 구산정사(龜山精舍)를 승격하여 서원이 되었으며, 김남 박승임 김륵 김영조가 배양인물이며 흥성대원군(1868년)의 서원훼철로 없어졌다.
노계서원
봉현면 노좌리
정조 10년(1786) 노계서당(魯溪書堂)에서 향회를 열어 노계서당 강당에 진중길 한산두의 위패를 봉안하고 1787년 노계서당 뒤편에 서원의 건축시작 1788년 완공되어 묘호를 노계사(魯溪祠)라 하였다. 헌종 14년(1848) 노계서원 승격되고 사당 강당 신문 주사 등을 중수하였다.
대원군때 훼철되었다 2001년 가을에 진씨(秦氏) 종중에서 다시 복원키로 결의하고 진씨종중부지에 종중들의 성금을 모아 2005년에 현재 규모의 서원을 신축 복원하였다.
덕산서원
부석면 감산길46번길 13-5
1894년 금릉, 선산, 유림의 동의를 얻어 덕산서원을 창건키로 결의를 하여 창건 중에 동학란으로 인하여 피란해 현재위치로 이전하여 을묘년(1975년 3월) 영주 봉화 유림의 동의를 얻어 창건하였다.
도고서원
<자료 수집중>
방산서원
이산면 영봉로329번길 143-9
1633년(인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전희철(全希哲)·전익희(全益禧)·전명룡(全命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8년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산서원
단산면 사천리
일제에 항거하여 분기한 죽림 서재승의 충절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경내에는 전사청, 명사루, 창의정, 동재, 월영당, 학구재, 서장각 등이 있고, 옆으로 99간 고택도 있다. 백산서원은 지방 유림과 달성서씨 문중의 발의로 1951년에 창의사(彰義祠)로 건립되었으며, 1973년에 백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이 서원에는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순절한 충의공(忠義公) 죽림(竹林) 서재승(徐在承;1876∼1915)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계서원
안정면 용산리
<용산리 풍경>
1720년(숙종 46)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황효공(黃孝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경현사(景賢祠)·흥경당(興敬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산천서원
가흥동
1779년(정조 3)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석충(宋碩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6년장수희(張壽禧)·오운(吳澐)·박회무(朴檜茂)·박종무(朴樅茂)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현재 8칸의 산천서당(山川書堂)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삼봉서원
<삼봉 기념관>
1654년(효종 5)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이음(金爾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4년(숙종 40) 김개국(金盖國)·김륭(金隆) 등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강당만 남아 있다.
영주소수서원
순흥면 소백로 2740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3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오계서원
평은면 천본리
1665년(현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덕홍(李德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24년(경종 4)에 이시(李蒔)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서원
가흥동
<가흥동 풍경 : 사진자료 확보 중>
1834년(순조 3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난상(金鸞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경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용연서원
안정면 용산리
<용산리 풍경 사진자료 확보 중>
욱양서원
풍기읍 욱금리
1662년(현종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과 황준량(黃俊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운곡서원
평은면 금광리
<금광리 풍경 사진자료 확보 중>
1667년(현종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여화(張汝華)와 장신(張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의산서원
장수면 갈산리
1664년(현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개립(李介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99년(정조 23)에 김응조(金應祖)를 추가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경내건물로는 절효사(節孝祠)·동재(東齋)·서재(西齋)·주소(厨所)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의산당만 남아 있다.
이산서원
이산면 내림리
1573년(선조 6)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4년에 ‘이산(伊山)’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8칸의 이산서당만 남아 있다가 1996년 복원되었다.
이산서원
이산면 석포리 768-2
<자료수집 중>
장암서원
상망동
<상망동의 풍경>
1683년(숙종 9)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익한(洪翼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오달제(吳達濟)와 윤집(尹集)을 추가배향하였으며,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묘우(廟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주소(厨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한천서원
가흥 1동
<가흥1리 풍경>
정조 10년(1786)년 고장사림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모여 장수희 오운 박회무 박종무의 위패가 한고을에 산천서원이 있는데 서원을 더 설치할 수 없다고 하여 산천서원(山泉書院)에 같이 봉안하였다. 뜻이 맞지 않아 뒤에 나누어 옛 산천서당(山泉書堂)자리에 서원을 설립하여 봉안하고 한천서원(寒泉書院)이라 하였다. 봉안문(奉安文)은 이급(李級)이 짓고 상향문(常享文)은 이수정(李守貞)이 짓고 한천서원(寒泉書院) 분봉시(分奉時) 고유문(告由文)은 유규(柳 )가 지었다. 지금은 한천서원 사선생 유허비(寒泉書院四先生遺墟碑)만 세워져 있다.
영 천 시(16)
고천서원
임고면 고천길 64-4
1705년(숙종 31) 영천군 유림의 공의로, 임진왜란 당시 경주 선천진(宣川陣)에서 순절한 10의사 김대해(金大海)·김연(金演)·최인제(崔仁濟)·정석남(鄭碩男)·이영근(李榮根)·이지함(李之菡)·이일장(李日將)·이득룡(李得龍)·이득린(李得麟)·손응현(孫應晛)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중추적 구실을 담당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893년 강당을 중건하였고, 1935년 충현각(忠賢閣)을 건립하고 기적비(紀績碑)를 세웠다.
1940년에는 유림의 공의로 묘우(廟宇)를 건립하고 순국사(殉國祠)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949년 위패를 봉안하였다.
귀(구)천서원
신녕면 치산리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영남 지역에서 큰 공을 세운 백운재(白雲齋) 권응수(權應銖)[1546~1608년] 장군과 임계(林溪) 조경온(曺景溫)을 배향한 서원으로 조선 1676년(숙종 2)에 창건되었으며 1685년(숙종 11)에 사액되었다. 1832년(순조 32) 문무를 함께 배향해서는 안 된다는 향중(鄕中) 공론에 따라 별도로 회계 서원을 만들어 조경온의 위폐를 옮겼다. 이후 의병장인 권응심[권응수 장군의 사촌동생], 김응택 장군을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3년 복설하였다.
대천서원
화남면 대천리
<자료 수집 중>
덕강서원
화산면 화촌길 2-37
1621년(광해군 13)에 영천의 청주 양씨 입향조인 양효지(楊孝智)를 배향하기 위해 사림의 공의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2년 후학과 사림에서 사당인 경절사를 창건하고 덕강 서원을 복설하였다.
1998년 후손들이 중수하였다.
도계서원
북안면 도천리 383
조선 중기 대표적 문인인 노계 박 인로(1561~1642)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가사문학의 선구자 이며 임진왜란때 수군으로 종군. 해안지방의 만호(萬戶)까지 역임한 노계 박인로(朴仁老)를 향사 하기위해 1707년(숙종33)에 서원을 창건하였다.
도잠서원
대창면 영지길 399
1612년(광해군 4)에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모사리에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지봉 서원이라고 하였다. 1678년(숙종 4) 용호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4년 복원하였고, 1981년 보수하였다.
무원서원
신녕면 치산효령로 152-26
1630년(인조 8)에 하연(河演)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 이씨의 부부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 유림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대략 70년 쯤 전에 복원하였다.
백학서원
화산면 가상리
화남면 삼청리
명종 10년(1555) 당시 신녕 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 유림들과 더불어 화남면 백학산 아래양강위에 건립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고 광해군 4년(1612)에 중건하였다.
효종 9년(1658)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하였. 그러다가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서당으로 복건하였다. 이후 1921년 이곳에 창녕조씨 문중이 중심이 되고 지역의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 하였다. 백학학원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로는 민족적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하여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등이있다
성남서원
쌍계동
<쌍계동 풍경사진자료 확보 중>
1735년(영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영천에 성남정사(城南精舍)를 세워 후학양성에 힘쓴 이형상(李衡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이형상과 동시에 중국 5성(聖)인 주공(周公)·기자(箕子)·공자(孔子)·안자(顔子)·주자(朱子)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하였다.
송곡서원
청통면 애련길 174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방선(柳方善)과 곽순(郭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묘우(廟宇) 경현원(景賢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원호를 ‘송곡’으로 고치고 1712년(숙종 38)이현보(李賢輔)·심지원(沈之源)을 모시고, 그 뒤 이보흠(李甫欽)과 윤봉오(尹鳳五)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65년 유림의 공의로 복원하여 유방선과 이보흠만 배향하였다.
연계서원
용계서원
자양면 용산리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1392~1480)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 건물은 이맹전선생이 죽은 후인 정조 6년(1782) 왕명으로 토곡동(土谷洞)에 건립되어 이맹전을 비롯한 생육신을 배향하였다. 고종 5년(1868)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항동(魯巷洞)으로 옮겼다가 1976년 영천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임고서원
임고면 양항리 462
1553년(명종 8) 정몽주(鄭夢周)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하여 이듬 해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선조 36)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장현광(張顯光), 1787년(정조 11)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하였다.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서원을 건립하여 구 서원과 신 서원의 2개 구조로 되어 있다.
창대서원
창대서원1길 9-18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신령, 하양, 추평 전투를 비롯하여 영천 복성에 큰 공적을 세운 정대임 장군의 충절을 기려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후손과 향내 유림들이 1697년(숙종 23) 영천시 녹전동에 창대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하고 1955년에 다시 현 위치에 복원하였으나 20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회계서원
화남면 삼창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임계 조경온을 배향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녕면 치산리의 구천서원에 충의공 권응수와 함께 제향하였으나 문무가 다르다 하여 1832년(순조 32) 사림들의 공의로 화남면 귀호리에 회계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옮겨 봉안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설단(設壇)하여 유지해 오다가 1994년 현 장소로 이건(移建), 사당인 효절사와 강당인 돈륜당, 동재인 무본재, 서재인 추원재를 중건하였다.
횡계서원
화북면 횡계리
1737년(영조 13)에 도내 사림들이 통문을 하여 봉향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남설하는 서원의 설립을 막는 나라의 제도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60년(영조 36) 사교당(四敎堂)에서 춘추로 양 선생의 향사를 올렸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23년 횡계서당으로 복원하여 복향하였다..
포 항 시(18)
광남서원
남구 구룡포읍 정동길77번길 11-2
1453년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살해당한 황보석(皇甫錫), 황보흠을 배양하기 위해 1791년(정조 15)에 지방유림과 그 후손들이 세웠다. 세덕사라 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광남서원’이라고 사액(賜額)되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가 1900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산서원
남구 장기면 신창길191번길 25-12
1707년(숙종 3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허진수(許進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가 1897년 강당을 건립하였고 1906년 동재 및 문을 건립하였으며 1926년에 사우를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나곡서원
남구 구룡포읍 병포리
안유가 장기현 오야리에서 은둔하다 세상을 떠나자, 후손들이 구룡포읍 병포리 정자산에 단소(壇所)를 정하여 음력 10월 10일에 시제를 지내오다 1936년 제당을 착공하여 1938년 6월 하순에 완공하였으며, 1977년 나곡서원으로 성균관 인가를 얻었다. 라곡서원은 나곡서원과 동일한 서원이다.
덕령서원
<자료 수집 중>
덕림서원
남구 장기면 읍내길13번길 47
1740년(영조 16)에 고려말의 문신인 오방우(吳邦祐)를 기리고자 영묘제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경덕제라 개칭하였다가 덕림서원을 세워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라곡서원
남구 구룡포읍 호미로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안당의 후손 안유가 장기현 오야리에서 은둔하다 세상을 떠나자, 후손들이 구룡포읍 병포리에 1936년 제당을 착공하여 1938년 6월 하순에 완공하였으며, 1977년 나곡서원으로 성균관 인가를 얻었다.
봉덕서원
남구 장기면 방산로407번길 44
조선시대의 문신 밀양(密陽) 박두극(朴斗極)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에서 운영 및 관리를 맡고 있다.
삼명서원
남구 장기면 마현리 58
1553년(명종 8)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술(李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54년에 중수하였으며,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47개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이 훼철될 때 수 백 명의 사림이 강력히 항의하여 훼철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되었다.
서산서원
남구 장기면 산서리
1760년(영조 36)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중한(金中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07년 복원하여 김헌장(金憲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서씨서원
남구 동해면 중산리
<자료 수집 중>
수성서원
남구 동해면 정동길417번길 105
농암(聾庵) 김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727년(丁未)에 사당(祠堂)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제례(祭禮)를 올렸다. 1964년(甲辰)에는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수성재(首城齋)라하고 1979년(己未)에 유림(儒林)이 추모(追慕)하여 향사를 하였으며, 1990년(庚午) 봄에 유림이 논의하여 서원으로 승격, 명칭을 수성서원(首城書院) 개칭하였다.
안산서원
남구 장기면 방산로 409-26
<방산로의 풍경 : 사진자료 수집 중>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장기 지역으로 귀향 온 약선 김숙과 통덕랑 김창의 위패를 봉안하고읬으며
건립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939년으로 추론하고 있지만 고건축학적 전문가에 의해 정확한 건립연도가 파악되어야 할 것 같다.
오천서원
남구 오천읍 서원재로
1588년(선조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습명(鄭襲明)과 정몽주(鄭夢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13년(광해군 5) ‘오천(烏川)’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정사도(鄭思道)와 정철(鄭澈)을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입암서원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1
입암서원은 1657년(효종 8)에 창건하였으며, 여헌장현광(張顯光)을 주향(主享)하고, 권극립(權克立)·손우남(孫宇男)·정사상(鄭四象)·정사진(鄭四震) 등을 배향하고 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손되었고, 1907년 일인(日人)에 의해 묘우(廟宇)가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1909년 도내 유림(道內 儒林)들이 강당을 재건하였으며 묘우(廟宇)는 1972년에 재건되었다.
죽림서원
남부 장기읍 읍내리
<읍내리 풍경>
1707년(숙종 33년)에 세웠으며 우암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19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으며 서원의 터는 밭으로 변해 주춧돌만 몇개 보일 뿐이다.
중앙서원
<자료 확보 중>
학산서원
송라면 중산리
<중산리 풍경>
1692년(숙종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복원하였다.
학삼서원
남구 장기면 학삼길 51-3
1592년(선조 2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대임(李大任)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뒤 1907년 복원하였다.
고 령 군(9)
노강서원
다산면 송곡리
1712년(숙종 3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송환기(宋煥箕)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46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서원
쌍림면 송림리
<자료 수집 중>
도암서원
쌍림면 칠등길 138
1666년(현종 7)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면(金沔)과 이기춘(李起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월등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0년에 칠등리로 이건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975년 도암재(道巖齋)를 건립하여 문중의 재실로 사용하다가 2002년 3월 27일 고령 내 유림들이 발의하여 이 건물을 도암서원으로 복원하였다.
도장서원
쌍림면 고곡리
<자료 수집 중>
매림서원
쌍림면 송림리
1707년(숙종 3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곽수강(郭壽岡)과 오선기(吳善基)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뒤 1981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암서원
덕곡면 반성리 740-1
1777년 정충사(靖忠祠)에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함께 모셔져 있었으나 1794년 정충사에서 다른 분을 추향하게 되어 그 해 9월에 이곳으로 이봉(移封)하면서 반암서원이라 현판(懸板)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撤廢)되었으며, 이 후 반암서당으로 현판하였다가 건물이 노후하여 1994년에 확대 개축하였다.
봉양서원
우곡면 봉산리
<봉산리 들판 ; 사진자료 수집 중>
1789년(정조 13) 기산면 죽전리[강정]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석적읍 중리로 이건하여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건했으나 택지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현재는 터조차 알 길이 없다.
영연서원
우곡면 사촌리
<사촌리 풍경: 사진자료 수집 중>
1711년(숙종 3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덕린(申德隣)·박은(朴誾)·정사현(鄭師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91년(정조 15)에는 운수면 운산리에 있던 운천서원(雲川書院)의 재정난으로 홍익한(洪翼漢)의 위패를 이 서원으로 이봉(移奉)하였으며, 이와 함께 김수옹(金守雍)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서원터에는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
율리서원
덕곡면 가륜리
<자료 수집 중>
군 위 군(8)
남계서원
군위읍 대북길 9
유성룡이 1583년(선조 16)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남계서당을 건립하였는데, 1621년(광해군 13) 후학들이 중수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셨으며, 남계서원으로 승격시켰다. 1787년(정조 11)에 이호민(李好閔)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전국의 서원을 일제히 정리하고 철폐함에 위패는 하회로 옮겨 모시고 서당으로 격하되었으며 6.25 사변으로 소실되었다. 1990년에 유림의 의해 복원하기로 결의하여 1991년에 복원되었다.
남곡서원
우보면 미성리
고려 보문각 대제학과 판도판서의 관직에 오른 영천이씨 영양군 6세 남곡공 휘 석지와 그의 자제인 집현전 제학과 한성부윤이셨던 장자 휘 안우, 직제학 겸 병조판서이신 차자 휘 안직, 이조 정랑이 신 삼자 휘 안유, 군기사부정 휘 현실, 휘 안실 등 6위를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첫 일요일 영천이씨 남곡공파 후손들이 참 석하여 제사를 올린다.대강당은 남곡공과 다섯아드님을 경모하고 학업을 연수하던 곳이다.
문영서원(문양서원)
부계면 창평리
1793년(정조 17) 이언을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되었다.
송호서원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1725년(영조 1)에 창건하여 1753년(영조 29) 서당으로 발족하였다. 1798년(정조22) 사당을 건립하여 송호사(松湖祠)로 개창하였다가 1815년(순조 15) 송호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3년에 복원되었다.
봉강서원
우보면 달산리
양산서원
부계면 남산리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세거지로 1710년(숙종 36) 고려말의 충신 홍노(洪魯)와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朝鮮朝 左參贊 兼 兩館 大提學) 홍귀달(洪貴達), 이좌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한 대학자 홍언충(洪彦忠)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위해 세분 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하였다.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흥교당(興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立懦齋), 구인재(求仁齋), 읍청루(挹淸樓), 반무당(半畝塘) 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1989년에 중수하였다.
양천서원
군위읍 내량리
1798년(정조 22) 서원으로 승격하여 홍관(洪寬),홍언박, 홍위를 함께 배향하던 곳으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88년에 중건하였다.
제동서원
효령면 장군리
고려 말에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장군당을 건립하고 단오날마다 제사를 올렸는데, 1850년 무렵 화재가 일어나 모두 소실되었다. 그뒤 김해 김씨 후손들이 다시 사당을 지어 보존해 왔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946년 옛 사당터에 새로운 서원을 창건하였다.
봉 화 군(10)
구만서원
봉화읍 화천리 436
1596년(선조 2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금인(琴軔)·남몽오(南夢鰲)·박장생(朴長生)·권호신(權虎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뒤 1965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구양서원
봉화읍 거촌리
1823년(순조 2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변안열(邊安烈)과 변서회(邊書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그들의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4년에 도내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단계서원
문단리
<문단리 풍경>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 1416~1464)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1618년(광해군 2) 건립하였다. 그 후 제사를 지내오다가 1712년(숙종 32) 단계서원으로 승격하였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
도계서원
봉화읍 사제길 12
1610년(광해군 2)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수형(李秀亨)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이유(李瑜)·이보흠(李甫欽)·이여빈(李汝馪)을 추가배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강당인 10칸의 공극루만 남아 있다.
봉산서원
봉화읍 해저리
<자료 미확보>
봉산서원
봉화읍 거촌리
1793년(정조 1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종걸(金宗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2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계서원
봉화읍 삼계리 산17
1588년(선조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벌(權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0년(현종 1) ‘三溪(삼계)’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록서원
봉화읍 해저리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방선(柳方善)과 곽순(郭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묘우(廟宇) 경현원(景賢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원호를 ‘송곡’으로 고치고 1712년(숙종 38) 이현보(李賢輔)·심지원(沈之源)을 모시고, 그 뒤 이보흠(李甫欽)과 윤봉오(尹鳳五)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65년 유림의 공의로 복원하여 유방선과 이보흠만 배향하였다.
청계서원
물야면 상황산길 28
<수식리의 경치>
<자료 미확보>
행계서원
물야면 수식리
1804년(순조 4)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강(金鋼)과 김홍제(金弘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그 뒤 1925년에 복원하였다.
성 주 군(11)
노암서원
수륜면 남은리
<자료 확보 중>
덕암서원
월항면 유월3길 29-72
경산이씨(京山李氏)의 3현(賢)인 이천배(李天培), 이천봉(李天封), 이주(李糹宙)를 존모(尊慕)하여 1672년(현종 13)에 사림에서 덕암사(德巖祠)「성주읍지 星州邑誌」인물조(人物條)에 향덕암사(享德巖祠)라는 기록을 찾아 건립한 것에서 연유한다. 또한 「경산지 京山誌」와 「경상도읍지 慶尙道邑誌」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나 「교남지 嶠南誌」에 의하면 덕암사(德岩祠)는 덕령산(德領山)아래에 있으며 효종조에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830년대 을 수 있어 1830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76년(고종13) 덕암서당(德巖書堂)으로 중건하였다. 지금의 서원 명칭은 1998년 정부와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묘우(廟宇), 내삼문, 동 · 서재 등을 건립하여 이듬해에 개칭한 것 이다.
덕천서원
수륜면 수륜리
1794년(정조 18)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관석(金關石)·김천택(金天澤)·김주(金輳)·김즙(金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김관석을 주벽으로 4인의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 및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신문(神門)·중정당(中正堂)·양진헌(養眞軒)·험효료(驗效寮)·전사청(典祀廳)·고사(庫舍) 등이 있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으나 근래에 수리하였다.
문곡서원
벽진면 운정리 517
1750년(영조 26)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이견간(李堅幹)을 향사하여 오다가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문곡서당으로 보존하여 오던중 1989년에 복원하였으며, 1996년 봄에 유림의 정론으로 고려 충혜왕때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낸 이대(李玳)와 형조참판을 지낸 이군상(李君常)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유림에서 매년 춘추에 향사하고 있다.
암포서원
월항면 안포길 89
선조를 제사하기 위한 사당과 교육을 겸한 서당으로 출발하였으나, 1569년 (선조 2) 국학의 제도에 따라 선현을 제사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건물의 중건과 함께 그 명칭을 서원으로 변경하였다. 1871년(고종 8) 음력 3월 20일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전국에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통폐합할 때 훼철되었다. 1960년5월29일 정면4칸 측면2칸의 한옥으로 복원하였다.
오암서원
수륜면 남은리
1730년 운암서원(雲巖書院)을 지어 최항경의 제사를 지냈으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숭덕제사(崇德齋舍)만 남고 철거되었다. 1985년 후손들이 대강당과 광영루(光影樓)를 지었고, 2007년 효덕사(孝德祠)를 신축하고 대강당과 숭덕제사를 개축하여 오암서원을 복원했다.
옥천서원
용암면 대봉리
초전면 고산리
<고산리의 풍경 : 사진자료 확보 중>
1701년(숙종 27) 향현사(鄕賢祠)의 서원으로 창건되어 관곡 최서림(崔瑞琳 1632∼1698)을 향사하였다. 최서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인으로 166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94년 공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진 교육에 힘쓴 선비이다.
1750년(영조 26) 최서림의 문인인 동곡 김정호(金挺昊 1673∼1742)와 백계 은정화(殷鼎和 1650∼1724)를 모셨으며, 1757년 오천 한백유(韓佰愈 1675∼1742)와 안식와 김습(金習 ?~1638), 월곡 유종흥(柳宗興)을 추배하였다.
용계서원에 향사되어 있는 인물들은 거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였던 이들이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10년 다시 세워졌다.
벽진면 운정리 517
<운정리 풍경 : 사진자료 확보 중>
여희림(呂希臨)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써 그가 1553년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천곡서원 향현사(鄕賢祠)에 위패를 모시고 추앙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훼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1874년에 서원이 다시 세워지면서 운양서원이라 하였다.
청천서원
대가면 칠봉2길 36-16
1729년(영조 5) 사림에 의해 김우옹(金宇顒을 봉향(奉享)하기위해 청천서원(晴川書院)을 창건하였다. 고종 때 대원권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金頀林)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하였다.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에 주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교육구국운동으로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校舍)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992년에는 대가면 칠봉리 산중턱에 유림과 후손들의 힘으로 위치를 옮겨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다.
회연서원
수륜면 동강한강로 9
1583년(선조16)에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檜淵草堂)이 1627년(인조5) 지방사림의 여론에 따라 서원이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 사액을 받았다.
경내에는 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사당과 동·서무를 고쳐 세우고 담장을 쌓아 복원하였다.
영 덕 군(3)
구봉서원
영해면 원구리 577
<원구리의 경치 : 사진 자료 확보 중>
1665년(현종 6)에 백동현(白東賢)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의장(朴毅長)과 박홍장(朴弘長)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운계서원
병곡면 거무역2길 22
1824년(순조 24년) 창건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거 1868년(고종 5년) 철폐하였고, 1887년에 후손 박내덕 박동진 재실로 건립하여 추원재라 칭하였다. 1987년 거무역리에 중건하며 봉송정을 같이 중건하였다.
운산서원
병곡면 원황길 110-14
1812년(순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문보(白文寶)와 백현룡(白見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경덕사(景德祠)·운산당(雲山堂)·신문(神門)·직방재(直方齋)·박약재(博約齋)·입도문(入道門)·전사청(典祀廳)·주소(厨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은 운산서당(雲山書堂)으로 개편되었다. 운산서원의 강당이 2005년 6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5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인산서원
창수면 인양리
<인양리의 풍경사진자료 확보 중>
1696년(숙종 2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휘일(李徽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 이현일(李玄逸)을 추가배향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항리로 이건하였으며,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묘우인 존경사(存敬祠)를 비롯하여 인산당(仁山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주소(厨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영 양 군(4)
봉림서원
<자료 수집 중>
여남서원
영양읍 동부리
향현사를 지어 남민을 배향했는데 1830년(순조 30) 영양지방의 향인과 영양남씨 후손들이 모여 서원으로 승격하기로 논의하고, 묘우 앞에 강당과 동재 ·서재 및 문루 등 3동의 건물을 세워 여남서원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는 경향각지에 서원이 설립되어 선현을 제향하고 강학의 장소 및 선비들의 모임터가 되던 당시의 현실에 자극된 것이었다.
여남서원은 강당을 중간에 배치하고 사당은 뒤에 두었으며, 전면에는 2층의 문루를 두었다. 사당은 영의공사라, 강당은 동재 또는 체인재라, 서재는 경의재라, 문루는 낙영루라 하였다. 강학과 선비들의 모임터로 널리 이용되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 건물은 철거되고, 남민의 후손들은 1920년 시조를 기리기 위해 여남강당을 세웠다.
영산서원
영양읍 현리
1655년(효종 6)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셨다. 1694년 (숙종 20)에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성일(金誠一)을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강당·신문(神門)·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주소(厨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운곡서원
영양읍 감천리
<감천리 풍경사진자료 확보 중>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甘泉里)에 있던 서원으로 1780년(정조 4) 마을 사람들이 선비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회암(晦庵) 주문공(朱文公)과 우암(尤庵)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사향(祠享)하였다. 사우(祠宇)는 12칸으로 중당(中堂)이 묘우(廟宇)이며 좌우로 서실을 두고 수업처로 사용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예 천 군(12)
금곡서원
1568년(선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충좌(朴忠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눌(朴訥)과 박손경(朴孫慶)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천서원
용궁면 나산길 35-9
1665년(현종 6)에 고려조의 인물인 안준(安俊)을 비롯하여 이문흥(李文興), 문근(文瑾), 문관(文瓘), 이구(李構) 등 5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당초 기천정사(箕川精舍)를 세웠다. 1692년(숙종 18)에는 용궁 월오리로 1차 이건하였으며, 1703년 (숙종 29)에는 향내 유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2년(숙종 38)현 위치인 용궁면 월오리 오룡곡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훼철되었으며, 1928년 설단하고 제향하였다. 1928년 상절사(尙節祠)를 복원하였고 2066년 다시 중수하였다.
노봉서원
호명면 내신2길 301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다 순절(殉節)한 죽림 권산해(竹林 權山海) 선생의 절의를 본받고 후진을 양성키 위해 세운 건물이다. 1794년(정조 18)에 창건된 이 서원은 1866년(고종 3)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도산(陶山), 임천(臨川)서원의 건의와 도내(道內) 유림들의 지원으로 1921년에 복설되었다. 1990년부터 음력 3월 상정(上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1999년 권종락(權宗洛)을 추배하였다.
도정서원
호명면 강변로 417
1640년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 정탁(鄭琢, 1526~1605)과 그의 셋째아들 정윤목(鄭允穆, 1571~1629)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97년(숙종 23)에 지역 사림과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강당채를 건립하여 도정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일부분이 훼철되었으나 1997년 동재, 서재, 전사청, 누각을 새로 지어 복원하였다.
물계서원
감천면 관현리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방경(金方慶)·김구용(金九容)·김양진(金揚震)·김응조(金應祖)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묘우(廟宇)·강당·동재·서재·전사청(奠祀廳)·신문(神門)·정문·주사(廚舍) 등이 있었으며,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왔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1692년(숙종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전원발(全元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정사(精舍)를 설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중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8년 지방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천서원
예천읍 왕신1리길 151
조선 초기의 공신 맹암 김영열(金英烈)의 뜻을 받들고 후손을 교육하기 위한 학원으로 1945년에 설립하였다.
옥천서원
감천면 덕율1길 15-21
예천군에 자리한 옥천서원은 1667년 현종 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을 쓴 것으로 전해지는 임춘 선생을 기리고자 설립되었다.
고종 5년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손된 것을 1920년에 상현사와 명교당을 중수했다. 본래 보문면에 있다가 1989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완담서원
지보면 마산길 313
1568년(선조 1)에 정구령(鄭龜齡)과 그의 두 아들 정옹(鄭雍), 정사(鄭賜)를 기리기 위하여 풍양면 삼수정(三樹亭)곁에 사당인 삼수리사(三樹里社)를 건립하여 향사를올렸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당이 소실되어 버렸다. 임란이 끝난 후 1606년(선조 39)에 삼수의 묘소가 있는 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완담(浣潭)에서 유림과 자손들이 완담향사(浣潭鄕社)로 재건하고 상덕사(尙德祠) 사당을 세워, 정환(鄭渙)과 정광필(鄭光弼)을 추향하여 오위를 제향하였다. 그러다가 97년간의 세월이 흐른 1764년(영조 40)에 정영후(鄭榮後)와 정영방(鄭榮邦) 두 분을 더 추향(追享) 하게 되었다.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8년에 유림과 자손들이 힘을 규합하여 완담향사를 다시 복원해 완담서원(浣潭書院)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인산서원
용문면 성현리
1727년(영조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맹손(權孟孫)·이문좌(李文佐)·권오기(權五紀)·이광윤(李光胤)·김경언(金慶言)·권용(權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다가 1946년 사당만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 97 예천권씨 병암정 옆으로 옮겨졌다.
정산서원
예천읍 생천리
<생천리의 풍경>
1612년(광해군 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615년(광해군 7) 조목(趙穆)을 추가배향하였다.
1677년(숙종 3)에 ‘정산(鼎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다.
죽고서원
지보면 지풍로 744-10
만둔암 윤사석과 국호 윤섭의 학덕을 기리고 후진 양성을 위해 1771년(영조47)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5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1년 죽고서당으로 축소 중건하였고 2008년에 문중의 힘으로 재건축하였다.
의 성 군(10)
금산서원
봉양면 규산리
옛 자료는 없지만 근래 편찬된 자료를 보면, 금산 서원의 창건 연대에 차이를 보이는데 1997년 금산 서원 앞에 세워진 「금산서원기(錦山書院記)」에 1776년에 금연 정사가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1912년 금연 정사가 무너지고 현판만이 남았는데, 신종기(申宗基)가 정사 중건을 유언으로 남겼고, 그 후손 협성 교육 재단 이사장 신진욱(申鎭旭)이 유지를 이어 1977년 강당을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81년 후손들의 발의로 정사를 서원으로 승격시켜 신지제(申之悌)를 주벽으로 하고 신체인을 함께 봉안하였다.
단구서원
봉양면 분토리
1856년(철종 7) 봄 사림(士林)의 주도로 신적도, 신달도, 신열도 삼형제와 신채를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3년 만에 철폐되었다. 1873년(고종 10) 흔적만 남은 곳에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향사를 지내다가, 1989년에 신기훈(申基勳)의 주도로 묘우를 복원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덕양서원
춘산면 옥매길 101
1625년(인조 3)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문기(金文起)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48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매강서원
사곡면 매곡리
1859년(철종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원복(申元福)·신홍도(申弘道)·신류(申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10년에 복원하였다.
명곡서원
가음면 양지리
순조 연간(1818) 사림에서 박성양의 유촉지에 사당을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지명에 따라 명곡 서원이라 하고 숭모하는 장소로 활용하다가 청액하여 승호(陞號)하였다.
1868년(고종 9)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으나 1905년에 서원의 유지에 단을 세우고, 1926년 묘우(廟宇)를 중건하였다. 이때 명곡 서당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제향과 사숙(私塾)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며, 한때 가음 초등학교 임시 교실로도 2년간 사용되었다. 1975년 후손들이 중건하고 동원에 신도비를 세웠다. 1979년 경덕사(景德祠), 명교당(明敎堂), 유정문(由正門) 등을 세우고 서원으로 복원하였다.
빙계서원
춘산면 빙계계곡길 80
1556년(명종 11)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장천(長川) 위에 세웠다. 1576년(선조 9) ‘장천(長川)’이라고 사액(賜額)을 받아 지방 인재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600년(선조 33)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춘산면 빙계리(氷溪里 ) 빙산 사구터에 이건(移建)하면서 빙계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89년(숙종 15) 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을 추향(追享)하여 오현(五賢)으로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 서원에는 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충효사(忠孝祠)·명교당(明敎堂)·전사청(奠祀廳)·주소(廚所) 따위의 건물이 있었다.
그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1868년(고종 5)에 철거되었다. 그 후 2002년 부터 의성지역유지들의 노력으로 2006년에 복원되었다.
속수서원
단밀면 속암리
1509년(중종 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우(申祐)·손중돈(孫仲暾)·김우굉(金宇宏)·조정(趙靖)·조익(趙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으나 1972년 복원하였다.
우곡서원
의성읍 북부길 355-20
1818년(순조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오국화(吳國華)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주로 선현배향과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헐었다가 1980년에 복원하였다.
장대서원
봉양면 장대리
1610년 신지제가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곳으로 당시 의성 현령이던 장현광이 ‘장대’라고 명명하였다. 1671년(현종 12) 강당 옆에 사당인 경현사(景賢祠)를 세우고 신지제와 함께 이민성(李民宬)[1570~1629]을 배향하였다. 『조선환여승람』과 『교남지』에는 이때 신지제, 이민성과 함께 김광수(金光粹)[1468~1563], 신원록(申元祿)[1516~1576]이 함께 배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여지도서』는 김광수와 신원록은 1685년(숙종 11)에 배향하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장대 서원 중건기」에는 장대 서원이 1610년 신지제가 세운 강학 공간이라는 것은 동일하나, 그 이후의 역사는 다소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신지제가 죽고 37년 뒤인 1662년(현종 3) 경현사를 세워 그를 향사하고, 그 다음해인 1663년에 이민성을 함께 배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702년(숙종 28)에 사(祠)를 서원으로 승격하고, 한 고을의 선현을 다른 사당에 모실 수 없다는 사림의 의론을 모아 앞서 이산 서원(尼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던 김광수와 신원록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 배향하였다고 한다. 1868년(고종 4) 8월에 조정의 명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8년 사묘를 짓고 1996년 강당을 지었다.
화산서원
단촌면 수일상길 23
1855년 의성 지역 사림들이 모여 태종을 보필하여 공을 세운 마천목을 향사하기 위해 오천영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 1915년[1925년으로 기록한 자료도 있다] 영당을 개수하여 숭절사(崇節祠)로 고치고 강당인 소훈당(昭勳堂)을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976년 이 지역 유림들이 발의하여 중건하고 화산 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마천목의 장자 마승(馬勝)을 배향하였다. 1986년 훼손된 숭절사와 동명문을 중수하였다.
울 진 군(5)
고산서원
근남면 행곡리
1628년(인조 6)에 임유휴(任有後)가 집안의 재앙을 만나 이곳에 내려와 고산(孤山)에 정자를 신축하고 20여 년간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의 사후인 1673년(현종 14)에 제자들이 고산사(孤山祠)를 창건하여 임유휴를 봉안했다. 그 뒤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한 오도일(吳道一)은 김시습(金時習)이 자주 다녀간 행곡리 주천대(酒泉臺)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봉별묘(東峰別廟)를 세우고 구암사(龜巖祠)라 하였다. 그 당시 현령에게 아첨하는 자가 있어 재임 당시인 1693년 오도일의 생사(生祠)를 지었다. 그가 죽은 뒤 1715년(숙종 41) ‘孤山(고산)’이라는 사액을 받고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때 철폐되었다. 위패는 땅에다 묻었으며 학위전(學位田)은 향교에 헌납하였다. 현재 서원건물은 가정집에 현판을 달고 있는 궁색한 입장이다.
노동서원
기성면 황보리
1816년(순조 16) 울진 지역의 유림들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1913년 그 자리에 강학소를 설치하고 다시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921년 중건하였다.
명계서원
기성면 정명리
1671년(현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황응청(黃應淸)과 황여일(黃汝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881년 서원유지에 강학소(講學所)를 세워 교육을 계속 실시하였다. 그 뒤 지방유림이 힘을 모아 1983년에 복원하였다.
운암서원
기성면 기성로 77
1826년(순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제(金濟)와 손순효(孫舜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충절사(忠節祠)·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64년에 사우인 충절사와 강당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계서원
울진읍 고성3길 31-68
1856년(철종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말익(張末翼)과 장양수(張良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울진읍 무월리에 월계사(月溪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62년에 ‘월계(月溪)’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그 뒤 1924∼1925년에 지방유림의 협력으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청도군(9)
금호서원
이서면 흥선리
임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운룡(李雲龍)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은막리의 명대 마을에 상충사(尙忠祠)를 창건하여 장군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여 왔으나 1814년(순조 14년)에 류량(柳亮) 등 사림들 4백여명이 발의하여 이서면 금촌리에 영정을 이안해 왔다. 1868년(조선시대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동년에 남은 강당을 당시의 연지(지금의 풍야지)안 대월산 기슭에 이건 하여 효충사(孝忠祠)라 개칭하여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여 오다가 1947년에 장군의 방손인 이임호(李林浩) 사림 2백여명이 발의하여 금호서원을 중창하였다.
선암서원
1568년(선조 1)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의 향현사(鄕賢祠)였는데 1577년(선조 10)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선암으로 위패를 옮기고 선암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흥성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78년(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용강서원
이서면 학산리
충숙공(忠肅公) 박익(朴翊)[1332∼1398]과 임진왜란 당시의 14의사(義士)를 제향하기 위해 1780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호서원
금천면 임당리
1823년(조선 순조23년)에 하주사림의 공의로 임호사(臨湖祠)를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19년에 사림과 성손들이 서파 류필영 선생에게 임호사 유허비명을 청하여 임호사가 있던 자리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을 건립하였다. 1934년에 현 위치인 은호리 마을 안으로 이건하였으며 1977년에는 서당을 복원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자계서원
이서면 서원리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일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518년(중종 13)에 지은 서원이다. 1578년(선조 11)에 다시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15년(광해군 7)에 다시 짓고 김극일과 김대유를 더하여 모셨다. 1661년(현종 2)에 ‘자계(紫溪)’라는 사액을 받아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1871년(고종 8)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복원되었다.
지산서원
이서면 신촌리
1844년(헌종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호(朴虎)·박지현(朴之賢)·박태고(朴太古)·박중채(朴重采)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4년 4월에 복원되었다.
학남서원
각남면 일곡리
1977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황강서원
금천면 갈지리
1895년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 장수인 천만리는 총독으로서 영양사의 명령을 받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명군이 회군할 당시에 조선에 남아서 귀화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화산군으로 봉하였으며, 충장군 시호를 내리게 되었다.
천만리의 후손들이 청도의 금천면 갈지리에 정착하였으며, 천만리를 기리기 위해 황강 서원을 건립하였다.
훈령서원
이서면 신촌리 612
1699년(숙종 2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양무(朴楊茂)의 절의와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계은(朴繼恩)·박맹문(朴孟文)·박란(朴鸞)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서당(書堂)으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송군(3)
병암서원
부남면 구천리
1702년(숙종 28)에 지역 유림에서 건립하였으며 창건하면서 사액(賜額)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2년 복원되었으며, 몇 번의 이전을 거쳐 1993년 본채와 동, 서재 등 3동을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김장생(金長生)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양서원
파천면 중평리
1854년(철종 5)에 전국 유림들이 신현을 배향할 서원을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정으로부터 서원 신설 금지 명령과 이어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8년(고종 25)에 전국 사림의 공의로 충청도계룡산 아래 화해사(華海祠)를 창건하고 신현·신용희·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배향하였다. 그러나 점차 화해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정몽주의 신주는 그 후손이 분리하여 다른 곳으로 모시고, 신현·신용희 부자의 위패는 청송의 서쪽 사수(泗水)로 옮겨 봉안하였다. 1966년 원천석을 추향하고, 사천의 양지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사양서원으로 고쳤다. 2004년에 사양서원을 보수하였다.
송학서원
안덕면 장전리
처음 송학서당을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1631년(인조 9년)에 서당은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1702(숙종28)년 지역의 유림들이 서당을 모태로 하여 송학서원을 창건하면서 서당을 함께 이건·합병하게 되었다.
1868년(고종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에 다시 지었다.
칠곡군(4)
곤란서원
약목면 복성 1리
<복성 1리 풍경 : 사진자료 확보 중>
1773년에 묘우로 건립된 뒤 1783년에 진정(眞靜) 신우덕(申祐德), 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을 봉안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어 강학을 한 곳이다. 그러나 1868년에 훼철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 2004년 이 터에 다시 곤산서원이 복원되었다.
봉양서원
석적읍 중리
<중리의 도시개발로 사라진 서원>
1789년(정조 13) 장용한(張龍翰)과 장유(張瑠)를 향사를 위해 세워졌던 서원으로 기산면 죽전리 강정마을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석적읍 중리로 이건하여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건했으나 택지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현재는 터조차 알 길이 없다.
소암서원
기산면 평복리
1702년(숙종 2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채몽연(蔡夢硯)·채무(蔡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47년(헌종 13)에 장내범(張乃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1932년 3월 4칸의 강당을 복원하여
소암 서당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강서원
북삼읍 숭오리
<숭오리 마을사진자료 확보 중>
문헌이 불비하여 자강 서원의 구체적 건립 사실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칠곡군 북삼읍 인평2리 인평마을 뒷산에 서원이 건립되어 유창을 배향했던 것은 분명하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서원이 훼철된 뒤 금오산 하현 숭오리 숭산 마을로 이건하여 ‘숭양재(崇陽齋)’라 편액하였다. 이곳에는 단칸 건물의 어필각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시기에 이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