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첫번째 정식 여성 군주, 메리 튜더는 영국의 역대 국왕들 중 가장 저평가된 군주 중 하나다. 메리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잔인하고 미신에 찬 광신자, 종교적 불관용의 상징, 고집세고 무지한 국왕이었으며, 그녀의 치세는 폭력과 혼란으로 점철된, 완전한 실패로 평가받아왔다.
그리고 국내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례로, 비교적 근래에 출간된 한 국내 영국사 개설서에서도 '메리 튜더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등극했으나, 가톨릭 신앙으로 회귀하여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그녀는 광신자였다'는 요지로 서술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그러나 현재 영국 학계의 인식은 상당히 다르다. 최근 들어 메리 튜더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그녀의 치세에 대한 전혀 새로운 평가에 대해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면밀한 사료 분석을 통해 기존의 해석이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음을 밝혀내면서 가능해졌다. 기본적으로 메리 1세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메리 사후 개신교 사가들이 남긴 역사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당연히 이 사서들은 프로파간다성이 강하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전국에 퍼져있는 아카이브들을 뒤져 찾아낸 동시대의 자료들, 특히 행정문서들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예전과는 상당히 다른 연구결과를 내고 있다.
휘그 역사관의 문제점
영국사 해석에 있어서 20세기 초중반까지 주류의 위치에 있었으며, 아직도 대중적인 인식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역사해석은 바로 '휘그 역사관'이다. 이 해석의 특징은 영국사의 과정이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의 확대, 계몽주의, 입헌 군주제로 귀결되는 길이었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휘그파 역사가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개신교와 연관시켰고, 영국의 정체성은 바로 이 개신교 정체성이라고 보았다. 이들에게 개신교는 곧 개인의 자유와 관용이었고, 가톨릭은 억압과 절대군주제, 불관용을 상징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와 단절된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린 메리 튜더는 영국사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 있어서 일종의 '반동'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학문적 방법론으로서 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결과론적이며,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이다.
문제 1. 메리 튜더의 종교정책은 과연 국민들을 실망시켰을까?
영국이 궁극적으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결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모든 과정이 개신교화라는 잣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이 최종적으로 개신교 국가가 된 것은 결코 시작부터 정해진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리 튜더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국이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될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네"라고 대답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여기서, 흔히 사실로 여기는 서술의 오류가 드러난다. 위에 인용한 개설서처럼, 많은 이들이 잉글랜드가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성공회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메리 튜더의 가톨릭 부흥 정책은 많은 반발을 샀다고 당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공주 시절의 메리 튜더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는 정반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Doran 선생을 비롯한 여러 튜더 시대 전문가들이 공동 저술한 최근 연구서에 명시되어있듯이, 메리 1세의 즉위 당시, 잉글랜드 국민들의 종교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이었다. 헨리 8세의 개혁,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의 강력한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할 무렵 잉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아무래도 국왕과 엘리트들이 많이 거주하는 런던, 그리고 켄트 지역이 그나마 개신교 비율이 높은 지역이었지만, 런던에서도 개신교 신자들의 비율은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는게 현재 학자들의 중론이다.
이 점은 헨리 8세 치세에서는 수도원 폐쇄에 항의하는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도 가톨릭 탄압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있었지만, 메리 튜더의 치세 중에는 그런 움직임 없이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사실,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중 종교를 전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와이어트 반란은 개신교 성향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기는 했으나, 종교를 직접적인 명분으로 내걸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증거는 메리 튜더와 펠리페 2세의 가톨릭 부흥정책이 매우 성공적이었고 지지도도 높았음을 가리킨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메리 튜더가 몇년만 더 살았다면, 현재 영국은 아마도 가톨릭 국가였을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메리의 종교정책을 단순히 '역사의 반동'으로 설명하려는 것 역시 옳지 않다. 메리는 예전 휘그 역사가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무지한 사람이 아니라, 인문주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군주였다. Whitelock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가 되살린 잉글랜드 가톨릭 교회는 단순히 과거의 교회를 복고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유럽 대륙에서 이루어지던 가톨릭 개혁의 성과를 충실히 담아낸 '개혁된 가톨릭 교회'였다.
문제 2. 메리 튜더는 불관용적인 광신자였나?
영화 <엘리자베스>와 그 후속편 <골든 에이지>에서 각각 지나칠 정도로 악마화되거나 희화화된 캐릭터가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다. 이러한 비판에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가톨릭주의가 아니라 반극단주의다. 내가 보기에 엘리자베스는 펠리페 2세보다 관용을 상징한다." 이와 유사하게 인기소설 <울프 홀>의 저자는 토머스 모어 경을 타인의 양심을 무시하는 불관용적인 광신자로 그렸다.(물론 전공 학자들은 이를 비판했다) 이러한 해석은 프로테스탄티즘을 관용의 진보와 연관시키는 (학계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주류에서 물러난)전형적인 휘그 사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가톨릭-불관용, 개신교-관용'이라는 도식은 옳은가?
당연히 아니다. 이 단순한 도식은 물론이고, 이 작품들에서 묘사되는 '양심의 자유 및 관용'에 대한 시각도 현대적인 관점을 과거에 투사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이 당시의 종교정책 문제는 현대에 이야기하는 양심의 자유와는 상당히 다르다. 종교개혁의 시대였던 근대 초의 종교, 그리고 그 종교(본문의 주제에서는 더 정확히 표현하면 같은 종교 내의 다른 종파)가 구성원들에게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 명문화된 교리는 통치 이데올로기일뿐만 아니라, 국가가 유지되는 원리였고, 국민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녹아든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근대 초 유럽국가들을 종파주의 국가(Confessional State)라고 부른다.
16세기 유럽에서는 한 국가에 하나의 공식 종파만이 존재할수 있었다. 타종교는 오히려 관용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국교인 그리스도교 내의 다른 종파는 관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종교개혁 이전, 중세의 가톨릭 교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한 집단이었다. 교회의 권위를 정면 부정하지 않는 한 다양한 이설도 잘 포용하는 편이었고, 유럽 내의 유다교에도 인접한 이슬람에도 의외로 관용적일때가 상당히 많았다. '그리스도교 유럽'이라는 정체성에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적 상황은 전혀 달랐다. 가톨릭-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은, 같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상대방을 '거짓'으로 규정하며 국교의 지위를 노리는 두 종파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세때와 마찬가지로 타종교는 관용할수 있었다. 그러나 종파주의 국가에서 지배종교 내의 다른 종파는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나마 관용이 주어지는 것은, 한 종파가 우세하나 다른 종파를 완전히 누를 만큼 강성하지 못했을 경우, 혹은 군주의 신앙이 국민 다수의 신앙과 다를 경우 정도였다. 당연히 이런 경우는 고상한 관용의 정신이 아닌, 정치적 필요에서 나온 타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불관용인가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한쪽이 결정적으로 우세해지면 다른 한쪽을 극단적으로 탄압했다. 단지 이후 영국이 개신교 국가가 되면서 메리 튜더의 탄압에만 포커스가 맞춰지고, 개신교 순교자들만 기념되었을 뿐이다. 최근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메리 튜더 치세에서 재판받고 화형당한 3백여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에 비해, 엘리자베스와 헨리 8세 시대에 공식적으로 처형당한 많은 가톨릭 순교자들, 반가톨릭 정책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가 학살당한 백성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군대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그동안 놀랄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다.
사실, Roger Manning, Wayne Lee 등의 저서에 잘 서술되었듯이, 한국에는 잘 안 알려져있지만 엘리자베스가 추진한 16세기 아일랜드 정복전쟁은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잔혹한 전쟁이었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가톨릭 근절'을 외치며 아일랜드의 전투원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몇몇 학자들은 엘리자베스의 아일랜드 전쟁에서 표출된 잔인성은 콘키스타도르의 아메리카 정복을 능가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해 휘그파 역사가들은 메리 튜더의 처형은 광신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인 반면, 엘리자베스의 처형은 잠재적 반역자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이었을 뿐이라고 옹호했지만, 위에서 설명했듯이 근본적으로 둘의 종교정책은 전혀 다르지 않다. 차이점은 메리 튜더가 단명하여 자기 정책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한 반면, 엘리자베스는 장수하면서 자신의 종교정책을 끝까지 관철시켰다는 것 뿐이다. 역시 많은 피를 뿌리면서.
사실 모 위키에서 메리 1세 항목에 최근의 재평가 내용이 추가될때마다 누군가가 악착같이 삭제를 하면서 "어쨌거나 메리 1세는 화형을 시킨게 가장 큰 문제다. 화형은 종교적인 이유로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정치적 처형과는 다르다"라고 우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뭐 사실관계만 따지면 맞긴 하다. 엘리자베스는 화형은 시키지 않았다. 대신에 교수척장분지형을 내렸다(...-_-) 교수척장분지형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 깁슨이 당한 그 사지절단형이다. 그리고 이 '교수척장분지형' 대상자 중에는 단순히 '가톨릭 미사를 집전한 죄'도 포함되었다. 몇몇 엘리자베스 옹호자들은 이때 처형당한 가톨릭은 잠재적 반역자라 정당하다고 항변하기도 하지만, Hutton 선생을 비롯해서 대다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 엘리자베스 시절에 처형된 가톨릭 신자들 대부분은 단지 '자신들의 신앙행위를 계속한 죄'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영화 <엘리자베스>나 소설 <울프 홀>등과 같은 대중문화에서 종종 가톨릭은 불관용과 억압, 개신교는 관용, 종교의 자유를 대표하는 것처럼 그려지며, 이는 뿌리깊은 휘그사관의 영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 역사학에 의해 그려진 16세기 종파주의 국가의 종교적 상황은 그러한 단순한 도식이 필요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다. 메리의 즉위 당시 강경파 개신교는 가톨릭보다 하등 관용적이지도 않았고, 타종파와 공존할 의지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실제로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가 즉위할 무렵 런던의 강경파 개신교도들은 이러한 뜻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메리가 그동안 금지되어온 가톨릭 미사를 허용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자 강경파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성당 앞에 고양이의 목을 매달아 세워놓는가하면, 미사가 집전되는 와중에 쳐들어가서 신부를 칼로 찌르고, 가톨릭 종교행렬을 공격하는 일이 빈번했다.(물론 개신교가 여전히 소수파이던 상황에서, 이는 개신교에 대한 여론을 상당히 악화시켜서 오히려 메리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상황이 절대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정치가로서의 메리 튜더
이에 대해서 다시한번 모 위키의 한 사용자는, "똑같이 탄압을 했어도 군주로서 누가 더 업적을 남겼는가가 중요한거다. 엘리자베스는 탄압은 했지만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고, 메리는 탄압만 했지 별반 업적이 없다"라고 강변하며, 필자의 수정을 다시 되돌린바 있다. 업적만 있으면 탄압을 해도 괜찮다는 논리도 이상하지만. 무엇보다도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학자들의 중론은 "흔히 생각해오던 것보다 덜 극단적이고 덜 광신적이었으며, 흔히 생각해오던것보다 더 유능한 군주"다.
주지하다시피 메리 튜더는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부터가 권력투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여성 군주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즉위한 뒤 메리는 짧은 재위기간이지만 상당히 안정적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온갖 음모가 횡행하던 16세기 영국에서 지위의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정국을 이끌었다는 것 자체가 통치자로서의 상당한 역량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여성 군주라는 약점을 덮기 위해 메리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포함해 상당히 정교한 통치술을 발휘해야 했다. 이러한 작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잘 배워서 그대로 오래오래 써먹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메리 1세가 정치가로서 이루어낸 성과는 무엇일까? 사실, '엘리자베스에 비해 메리는 업적이 없다'는 선입견 자체가 아르마다 침공 격퇴로 대변되는 거창한 전투 같은 사건사에 지나치게 매몰된 관점이다. 정치적, 구조적인 면에서 메리가 남긴 업적은 상당하다.
첫째로, 메리의 가장 큰 업적은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 시대를 거치면서 엉망진창이 된 재정의 건전성을 회복한 것이다. 흔히 헨리 8세가 수도원 폐쇄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해서 국왕의 힘을 키웠다고 알려져있지만, 그는 그러한 돈을 죄다 별 성과도 없는 대외전쟁에 소모해버렸다.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서머셋 공작은 이러한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집권했다면 잉글랜드는 파산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흉작과 막대한 세금, 종교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무려 8,500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메리는 즉위하자마자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의 복구까지 하려고 했으니 돈 나갈 일은 더 많았다.(당연히 때려부수는건 돈이 별로 안들지만, 다시 짓는건 돈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메리는 뛰어난 정치력과 행정능력을 보여준다. 그녀는 우선 재정기구의 간소화를 실시하여, 헨리 8세가 남겨놓은 정부 부처들을 통합하고 재조직하였다. 사실 이때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기구는 장미전쟁 당시 만들어진 임시 체제의 상설화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메리의 재정개혁은 이 상황을 마침내 종식시켰다. 동시에 메리는 관세를 올려서 수입원을 늘렸는데, 놀랍게도 이에 대해 의회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돈 문제로 일어난 의회와 왕의 알력을 보면 알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메리는 런던의 상인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 구축에 성공하여, 이들로부터 필요할때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늘어난 수입과 개선된 신용을 물려주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망가진 재정은 엘리자베스 치세중에 완전히 회복된다. 이는 종종 엘리자베스의 업적으로만 생각되었지만, 그 기반은 메리가 마련한 것이었다.
두번째로 국방정책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메리가 남겨놓은 유산 역시 상당하다. 그때까지 잉글랜드의 군대는 중세적인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유사시에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가신단을 거느리고 참전하고, 여기에 용병부대가 합세하는 식이었다. 메리는 이런 체제를 종식시키고 대신 방어를 각 카운티별로 할당된 민병대 체제로 바꾸었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았다. 흔히 메리의 실책으로 뽑히는 칼레의 상실은 따지고보면 별 전략적 의미가 없었지만, 이 군제개혁은 이후 영국 군사사에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번째로. 제프리 파커 선생이 지적하듯, 해군 육성도 메리 치세의 중요한 업적이다. 이후 영국 군사사의 주력으로 활약하는 해군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헨리 8세의 공으로 돌려진다. 그러나 정작 헨리 8세는 무분별한 재정 운용 때문에 말년으로 가면서 해군은 사실상 버려진 상태가 된다. 이 해군을 재건하고 신세대 전함을 건조하여 이후 영국 해군의 주력으로 활약하게 한 것은 메리 1세의 정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정책을 살펴보면, 앞서 보았듯 에드워드 6세 시절의 사회정책은 말 그대로 재앙에 가까웠다. 그 실패는 16세기 영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본 반란을 낳았다. 덕분에 메리는 빵 가격이 최고로 치솟은 상황에 즉위해야 했다. 따지고보면 안 그래도 여성 군주라는 핸디캡이 있는데, 정치 사회 종교 군사 모든 면에서 메리만큼 최악의 상황에서 즉위한 군주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메리는 상당히 효과적인 정책으로 상황을 많이 안정시켰다. 곡물가 안정을 위해서 메리는 곡물 수출을 금지시키고, 비축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농업 및 목축을 개선시키는 일련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엘리자베스 시대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그녀의 치세는 전통적인 관점이 말하던 불안하고 폭력적인 시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기근이나 전염병이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동시대 개신교인들의 관점과 달리, 당연히 둘 다 그녀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장기적인 영향은 주지 못했다. 칼레의 상실이 실책으로 꼽히지만, 이것은 영국에 실질적으로 큰 타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칼레의 가치는 이전의 왕들과 헨리 8세가 추구했던 '대륙 진출'의 통로였다. 그러나 영국의 국력과 당시 정세상 아무리 전투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어도 이 진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다. 게다가 칼레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어차피 거의 다 칼레 주둔군 유지비용으로 나갔다. 애초에 전쟁에 참전한게 실수고, 메리가 무지하고 감정적이라 남편 따라 참전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최근에 국내에 나온 <영국에는 영어가 없었다>라는 책에도 그렇게 서술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메리는 이 전쟁에 말려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휘그사관이 말하는 '감정적이고 무지한 여왕'이 아니라 대단히 냉철한 정치가다. 그러나 애초에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던 영국을 참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도록 몰아넣은 것은 사실 프랑스였다. 메리 대신 다른 왕족으로 잉글랜드 왕위를 갈아치울 목적으로 침공을 시도했던 것이다. 사실 그 결과 생 캉텐 전투에서 잉글랜드-스페인 동맹군이 프랑스군에 멋진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 전쟁에서 체면을 구기기만 한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메리의 치세 동안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메리 사후에 펠리페 2세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원망은 "저 양반이 영국에 자주 오지 않는바람에 우리 여왕님이 상심해서 일찍 돌아가시게 했다"였다.(물론 정말 그래서 메리가 일찍 죽은것이라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누누이 서술했듯이 메리는 휘그 역사가들이 그린 펠리페에게 홀딱 빠져서 정신 못차리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 냉정하고 명민한 정치가였다. Hutton선생이 지적하듯, 메리는 펠리페와의 결혼협상도 철저하게 잉글랜드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냈다. 이 시점에서 메리는 이미 건강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였다)
마치며
이상이 소위 '블러디 메리'에 대한 최근 연구성과의 요약이다. 최근 연구 성과가 가리키는 메리는 광신에 눈먼 폭군과는 거리가 멀다. 리더십이 떨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때이른 죽음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권위에 대해 그 누구도 성공적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결국, 메리의 치세에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정책들이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물론 이것은 종교정책 한정이다. 경제, 사회정책은 본문에 설명했듯 엘리자베스가 그대로 계승해서 큰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나칠 정도로 폄하되었던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녀의 단명과 뒤이은 엘리자베스의 장수였다.
참고문헌
Eamon Duffy, Reformation Devided: Catholics, Protestants and the Conversion of England (London, 2017).
John Edwards, Mary I: The Daughter of Time (London, 2016).
Jeremy Black, A Short History of Britain (2nd ed. London, 2015).
Geoffrey Parker, Imprudent King: A New Life of Philip II (New Haven, 2014).
Susan Doran and Thomas S. Freeman (eds.)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 (London, 2011).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Anna Whitelock, Mary Tudor: England's First Queen (London, 2009).
Robert Tittler and Norman Jones (eds.) A Companion to Tudor Britain (Chichester, 2009)>
J.J. Scarisbrick, Henry VIII (London, 1997).
Eamon Duffy, The Stripping of the Altars: Traditional religion in England, c.1400-1580 (London, 1992).
첫댓글 말씀대로 요새 모위키의 해당항목의 설명이 너무 자주 변하던데... 자세한 설명 감사히 읽었습니다.
거긴 워낙 틀린 설명이 많아서 저도 한때는 손을 몇번 댔었는데 지금은 손 놨습니다. 바쁘기도 하고 열심히 써도 누군가가 바꿔버리면 답이 없거든요.
프레임으로 뭐든지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사관을 극단주의로 분류해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사회에 퍼지면 민주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성장하겠죠.
안타깝게도 이분법적 역사관은 한국사회에 너무 심하게 뿌리내리고 있지요...
다른 말이지만 역시 종교를 바꾸려면, 지배층의 개종이 필수적인 거 같군요. 그런 면에서 예수회의 동아시아 진출 방식은 상당히 영리했던 거 같네요. 후임으로 들어온 다른 수도회의 전도 방식과 그 결과를 비교하면....
하지만 영국 왕실과 별개로 영국민들이 개신교로 개종하는것은 대단히 길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mr.snow 뭐, 따지고보면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나 우마르 이후의 이집트도 비슷하지 않았나요?? 지배층 종교가 바뀌었지만 피지배층 종교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변화된 거 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ㅎㅎ 잘 몰랐던 메리여왕에 대해서 좀 더 알게되어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 아줌마가 장수했더라면 영국은 카톨릭 국가였을것이라...
역사가 바뀔 뻔했군요. 영국이 카톨릭이면 미국, 캐나다, 호주등도 카톨릭이고, 오늘날 개신교가 우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도 카톨릭일텐데... 무려 인구 20억명의 초거대 종파가 탄생할뻔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역사를 바꾼 명줄이지요.
잘읽었습니다.... 새로운 이면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