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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통문화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전라남도 (57)
강진군(6)
군자서원
작천면 군자리
조선 순조 20년(1820년)경진에 유항재(有恒齋) 김양(金亮:?~1569)선생의 도학(道學)과 절효(節孝) 김호광(金好光:1600-1624) 행정(杏亭) 김신광(金伸光:1608~1666)의 충의(忠義)를 추모(追慕)하기위해 건사(建祠) 향사(享祀)할 것을 발의통문(發議通文)함에 기호유림(畿湖儒林)이 모두 호응(呼應)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찬의(贊意)의 통문(通文)이 있으므로 유항재(有恒齋)선생(先生)의 강도지(講道地)였던 행정동(杏亭洞)(古稱:行義洞)에 건사(建祠)하고 향사(享祀)하였으며 고종 무진(高宗 戊辰:1868年)에 대동훼철령(大同毁撤令)으로 인(因)하여 부득이(不得已) 훼철당(毁撤當)했으며 그 후(後) 설단(設壇)하여 향사(享祀)해왔다. 경자년(庚子年:1960年) 에 이르러 향중유림(鄕中儒林)이 의금(義金)을 모아 신실(神室)과 강당(講堂), 고직사(庫直舍)를 중건(重建)하여 3위(位) 1실(室)에 향사(享祀)해오며 1994년 후손(後孫)들의 의금(義金)으로 외삼문(外三門) 및 주위담장을 신축(新築)하였으며 1994년 성균관 답통(答通)에 의(依)해 도유향사(道儒享祀)로 승격(昇格)하였으며 2008년에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신축하였으며 2009년 행정사(杏亭祠)에서 군자서원(君子書院)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강서원
강진읍 교촌리
<교촌리 풍경 ; 서원사진미확보>
1803년(순조 3년) 강진의 향유(鄕儒)들이 도관찰사(都觀察使)였던 한용구의 승인을 얻어 정읍 노암서원에 모셔져 있던 송시열의 영정을 백련사로 옮겨 봉안하고, 영당의 액호를 남강이라 하였는데 백련사의 영당이 남강서원의 전신(前身)이다.
헌종 4년(1838) 향림들의 발의로 사당에 주자를 정위봉향(正位奉享)하였으며, 1901년 현재의 위치에 신단을 설단하여 주자와 송시열을 향사하는 한편 어필각을 건립하였고, 후에 박광일을 추배하였다.
명곡서원
군동면 용소리
1974년 장흥과 강진 유림들이 발의하여 장흥군 월평리에 창건하고 사호를 “명곡”이라 하였다. 1984년 유림들이 논의하여 본 사우를 군동면 신기리에 옮기고 문헌공 충( 沖)을 주벽으로 하여 문화공 유선(惟善).문청공 자(滋).부제학 만리(萬理).좌승지 위(諱) 우(遇)(號:湖隱)를 배향하고 있으며 성제 최충 등 5위를 향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해주 최씨 세장비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박산서원
작천면 박산
1590년(선조 23) 강진읍 서산리 월남마을에 청연 이후백을 제향하기 위해 서봉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창건하였다. 1924년 호남 사람들의 발의로 현 위치로 옮겨 박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창건 이후 1694년(숙종 20)에는 전라도 진사 김증등이 청액소를 올렸는데 관철되지 않았으나 서원 등록은 1694년 10월 10일에 등록되었고, 1712년 이후백의 제자인 백광훈과 최경창을 추배하며 제향하여 오다가 1725년(숙종 38)에 전라도 유생 김면등이 조정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 역시 관철되지 않았다.
그 후 1868년(고종 5)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924년 본향인 호남 사림의 발의로 현재의 작천면 박산으로 옮겨 복설하고 액호도 ‘박산서원’ 이라고 개칭하였다.
수암서원
성전면 수양리
조선 전기의 문신 이선제(李先齊)를 봉안하기 위하여 1624년(인조 2)에 창건되어 1820년(순조 20)에 수암사(秀巖祠)라 사액되었고,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신실(神室)이 건립되고 1920년에 설단되었다.
주봉서원
옴천면 영산리
조선시대 암행어사를 지낸 정치가요 문장가인 조팽년과 정조 때 성균관 교수를 지냈던 조규운을 제항하기 위해 세웠다. 원래 이 서원은 1624년(인조 2) 도내 유림들이 주봉산 아래에 있는 기좌리 좌척마을에 새웠었으나 1868년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1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고흥군(2)
덕양서원
동일면 덕흥리
1725년(영조 1) 이건명의 넋을 기리고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1768년에 송연악·박유석 등을 비롯한 사림에서 주창하여 유허비를 세웠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3년에 중건되었다. 그뒤 유허비가 퇴락하자 1928년 이건명의 후손인 이정호와 관내 사림에서 협력하여 비각을 다시 세우고 서원을 중건하였다. 이때 당시 중건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선조, 즉 이의천(李倚天)·정동후(鄭東後)·이인기·오광생·노주관(魯周觀)·문약연(文躍淵)·정소송·정난파(鄭蘭坡)·명중화(明重華) 등 9위를 배향하였다.
재동서원
대서면 동서로
1785년(정조 9) 최초 건립 당시 여산 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 유씨 유탁, 영광 정C씨 정연희 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1848년에 유림들이 상서를 올려 서동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868년 전국 서원철폐령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것 같지만 이내 훼철되었다.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 송진부를 추배하였다.
곡성군(5)
구암서원
입면 제월리 130
<들판풍경 : 서원사진미확보>>
1827년(순조 27)에 창건했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된 것을 1902년(광무 6) 지금의 자리에 단을 설치하였으며, 1967년 단이 있던 자리에 사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황거중(黃居中)을 중심으로 황응청(黃應淸), 정홍면(鄭弘溟),황극호(黃克孝), 정복환(鄭福煥) 등이 모셔져 있다
덕계서원
오곡면 오지리
1814년(순조 14)에 곡성현감인 심문영(沈文永)이 서계 남주를 제향하는 사우로 곡성을 신월리 서계동(西溪), 남추 선생의 구지에 사우를 세워 서계사(西溪祠)라 하였고, 1818년(순조 18)봄에 이경(李璥)을 추향하였다. 덕계사는 두 선생의 호인 덕암(德巖)과 서계(西溪)의 글자를 딴 것이다
그 후 1868년(고종 5)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훼철됨에 이경의 위패는 본손이 봉안하고 남추의 위패는 땅에 묻고 유지(遺址)에 설단(設壇) 제향하여 왔다. 1950년 이경의 후손인 이재근이 토지 10두락을 기증함으로서 사우 복설의 기금을 마련케 되어 마침내1959년 현 위치인 오지리로 옮겨 복설하면서 덕계사로 칭하게 되었다.
덕양서원
오곡면 덕산리
1589년(선조 22)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숭겸(申崇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고 사우와 위패만 보존되어 오던 중, 1603년에 사우를 중수하고 1665년에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건물을 중수하였다.
그 뒤 1695년(숙종 21) ‘德陽(덕양)’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4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동서원
오곡면 오지리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와 고려 명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매년 춘추로 두 차례 제사를 지내며 회헌실기목판(회헌 안향의 유작들을 모아 편찬한 목판)이 유형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향의 영정은 고려 1318년(충숙왕 5)에 그려져 문묘에 봉안되었고 이의 모사본 1본이 순흥향교에 봉안되었다. 후일 조선 세조 때 순흥부가 폐부되면서 향교도 폐지되자 서울의 종가로 영정이 옮겨지는 일도 있었다.
도동묘(道東廟)는 안호가 조선 1676년(숙종 2)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인 안향과 중국 송나라 주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으나 처음 창건지이던 오곡면 승법리에서 오지리로 이안하였으며, 1868년(고종 5)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묘각이 훼철되기도 하였다.
1902년 기우만이 도내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주자를 주벽으로 하고 안향을 동벽으로 모시도록 하여 복설하였다.
영귀서원
겸면 현정리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인후(金麟厚)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옥과면 죽림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29년(영조 5)에 유팽로(柳彭老)와 신이강(辛二剛)을 추가 배향하고, 1797년(정조 21)에 허계(許繼), 1846년(헌종 12)에 허소(許紹)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0년전라남도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1965년에는 위백규(魏伯珪)를 봉안하여, 6위를 모시게 되었다.
광양시(1)
신재서원
광양읍 신재로
<광양읍 풍경 : 서원 사진 미확보>
1577~1580년 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鄭淑男)이 최산두(崔山斗)와 박세후(朴世煦)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재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숙종 신미년(1691)에 사민(士民)이 중건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77년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구례군 (1)
방산서원
산동면 이평리
1613(인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전희철(全希哲)·전익희(全益禧)·전명룡(全命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8년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주시(7)
경현서원
노안면 연평리
1583년(선조 16) 지방유림이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금성산 아래(현재 금성시 경현동)에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589년(선조 22)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 등의 발의로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4위를 함께 배향하여 오현서원(五賢書院)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당시 목사로 와 있던 목장흠(睦長欽)과 지방유림들이 합력하여 중건하였으며,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에 김선(金璇) 등의 상소로 ‘경현(景賢)’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에는 기대승(奇大升)과 김성일(金誠一)을 추가배향하여 모두 7위를 모시게 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7년 전라남도 유림이 이 곳에 복원하였다.
미천서원
안창동
17세기 조선시대 명현인 문정공(文正公) 미수 허목의 도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690년(숙종 16)에 나주 금강 미천상에 사우로 건립되었다가 1693년 미천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이후 1799년(정조 23)에는 13대 미천서원 원장을 지낸 번암 채제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채제공은 허목보다 훨씬 후대 인물이지만 허목의 학문을 따르고 미천서원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추배하게 된 것이다. 1711년 홍명한이 중수하고 1715년에는 강당과 재실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724년에 사우를 훼철 당하였다. 이후 서원이 다시 복설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1771년(영조 47) 이전에 사우가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794년(정조 18)에는 왕명에 따라 허목의 영정이 3매 완성되어 이 영정이 1804년 미천서원에도 봉안되었다. 그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2차 훼철을 당하였다. 서원이 훼철되자 영당과 장판각은 허목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주시 삼영동 선산 아래의 영당마을로 옮겨졌다. 1893년에 다시 미천서원의 옛 터인 지금의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이 복설되어 현재의 자리로 영정을 이안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강당도 함께 중건되었다. 1930년 조기중이 강당 일부를 중수하였고 1937년 허영규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봉산서원
남평읍 서산리
1590년(선조 23) 문신이자 유학자로 이조참판·대사헌·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뽑혔던 휴암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봉산서원실기》에는 1650년(효종 1)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1590년에는 사당이, 1650년에는 강당이 추가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67년(현종 8)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봉산서원이 사액되기까지 평소 백인걸의 학덕을 흠모하였던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많은 후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2년 현 위치에 복설되었다.
설재서원
노안면 영평리
문정공 정가신(鄭可臣:?~1298)을 배향하기 위하여, 1688년(숙종享祀宇)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그후 1723년(경종 3)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3년 복원하였다.
월정서원
노안면 금안리
1659년(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의 학덕을 흠모하는 사림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창건하였고, 1669년(현종 10) 사액이 내려졌다. 1787년(정조 11) 중수하였고, 1789년 김계휘(金繼輝 1526~1582),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정철(鄭澈 1536~1593), 홍천경(洪千璟 1553~?)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796년(정조 20) 강당, 1802년(순조 2) 동·서재와 삼문을 중수하였으며, 1832년(순조 32)에도 중수가 이루어졌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철폐되자 옛터(금성산 월정봉 아래)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다가 1974년 현재의 위치(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광곡마을)에 복설하였다.
장연서원
남평읍 풍림리
남평문씨 시조인 무성공 문다성(文多省 ?~?)을 비롯하여 문유(文裕 ?~?), 문극겸(文克謙 1122~1189), 문유필(文惟弼 ?~?), 문익점(文益漸 1329~1398) 등 고려시대 남평문씨 인물 5인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장연서원속지》의 서문에 정조(재위 1776~1800) 대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1년(고종 8) 철폐되었다가 1923년 복설 되었으며, 1975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창계서원
다시면 가은리
1711년(숙종 37)에 창건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871년 훼철되었으며, 1999년 후손과 유림들의 힘으로 옛 서원터에 복원되었다.
담양군(1)
운산서원
수북면 황금리
1722년(경종2) 창평현 금구동에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5)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1933년 현 위치인 대전면 갑향리에 재건하였다. 1972년 재축하였으며, 현재는 남평 문씨에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1799년(정조23)에 주벽으로 문익점(文益漸)을 배향하였다. 2002년 일가들의 성금으로 현재의 자리인 마을입구에 옮겨지어졌다.
보성군(2)
대계서원
보성읍 동암2길
1657년(효종 8)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방준(安邦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 서원은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훼철과 복설이 거듭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안방준 사우에 대한 훼철이 결정되어 이듬해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와 함께 훼철되었으나 그 뒤 1695년(숙종 21)에 이르러 복설되었다.
1704년(숙종 30) ‘大溪(대계)’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780년(정조 4) 화재로 전소된 것을 1784년에 중건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은봉선생기념사업회에서 2012년 11월 같은 자리에 대계서원을 복설하여 조문사, 숭도문, 서원격치재, 은봉유물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다.
용산서원
미령면 덕림리
1607년(선조 4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광전(朴光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07년(숙종 33)에 ‘용산(龍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내왔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가, 1984년 복원하였다.
순천시(9)
겸천서원
주암리 죽림리
조유(趙瑜 1346~1428), 조숭문(趙崇文 ?~1456), 조철산(趙哲山 ?~1456) 등 옥천조씨 3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 호남 사림이 발의하고, 1711년(숙종 37) 건립한 사당이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순천을 관향으로 하고,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김종서(金宗瑞 1390~1453), 박중림(朴仲林 ?~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도 함께 모셨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 옛 터에 복원하였으며, 1955년 중건하였는데 이때 이름을 겸천서원(謙川書院)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1975년 한 차례 더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곡수서원
조례동
조선 명종 때의 선비 정소(鄭沼 1518~1572)를 추모하기 위하여 1712년(숙종 38) 순천 지역 유림 조구년(趙龜年), 유책(柳策), 임진상(任鎭商) 등이 발의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정소의 형 정자(鄭滋 1515~1547)와 친우 조대성(趙大成 1520~1566)도 함께 배향되었다.
원래 이름은 정소의 호를 따서 청사사(菁莎祠)라 하였으며, 현 순천시 저전동의 청사헌(菁莎軒) 자리에 있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향사가 중단되었다가 1958년 현 위치(순천시 조례동 355번지, 조례초등학교 뒤쪽)에 재건하여 곡수서원(曲水書院)이라고 개칭하였다. 현재는 정소와 조대성만 향사한다.
미강서원
배룡면 신대리
조선시대 학자인 배숙(裵璹)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는 배향소이다. 이 서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처음 매곡동에 세워졌었는데 대원군 때인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4년 유림의 논의로 2007년에 이곳에 이건 되었다.
송천서원
별방면 동서리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김일손(金馹孫 1464~1498)과 임진왜란 때의 무신 김대인(金大仁), 김치모(金致慕 ?~?) 등 김해김씨 3인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원래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백록리에 있다가 1954년 현 위치(순천시 별량면 동송리 409-1번지 송천마을)에 복원하여 송천서원(松川書院)이라 이름 붙였다.
옥계서원
연향동
1823년(순조 2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지년(鄭知年)·정승복(鄭承復)·정사준(鄭思竣)·정사횡(鄭思竑)·정빈(鄭0x9A53)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옥천동에 옥계사(玉溪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 그뒤 1953년 유림의 협조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정선(鄭愃)을 추가 배향하였다.
옥천서원
옥천동
1564년(명종 19)에 순천부사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사(精舍)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8년(선조 1)에 ‘옥천(玉川)’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597년에 소실되었다가 1604년허건(許鍵)·심윤(沈玧)·정지추(鄭之推)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1928년에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용강서원
금곡동
순조 21년(1821) 해룡면 중흥리에 학포 양팽손과 장춘 양신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우를 지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70년에 지금 있는 자리에 복원하면서 ‘용강서원’이라 불렀다.
율봉서원
별랑면 우산리
1824년(순조 24)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을 비롯하여 정숙(丁淑), 정승조(丁承祖) 등 영광정씨 3인에게 향사를 위해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창건하였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옛 터에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천서원
상사면 동백길
1827년(순조 27) 호남 유림이 발의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 박세희(朴世熹 1491~?), 박증손(朴曾孫 ?~?), 박대붕(朴大鵬 1525~1592) 등 상주박씨 3인의 유풍(儒風)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1년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옛 자리에 복설하였다.
영광군(4)
내산서원
불갑면 쌍운리
수은 강항(1567∼1618) 선생을 추모하여 강학하던 서원으로 조선 인조 13년(1635)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숙종 28년(1702)에 중수하였으나 1868년에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터만 유지해 오다가, 1974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 소재지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묘장서원
묘량면 운당리
1616년(광해군 8) 향내 유림과 함께 뜻을 모아 현 소재지에 영당(影堂)을 세우고 영정을 이안하여 배향하였다는 기록이 1747년 간행된 <영당사기>에 전해진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사우는 철거되었고, 강당은 그대로 남아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했으며 1919년에는 강당에 사립영신학교를 설립하여 4년 과정의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 후 1928년 후학과 향내 유림들이 사우 복원을 추진하였고, 1934년에 이르러 옛터에 사우를 중건하였다.
무령서원
영광읍 와룡로
1784년(영조 24) 본향유림의 발론으로 김심언, 김해 두분의 충절을 사모하여 처음영광읍 동부면 내천에 사우를 창건하고 기천사라 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3년(광무 7) 설당향사해 오던 중 1933년 현재의 위치에 사우를 복건하였다. 1975년에 영광향교 전교 강길원 등 10여 인이 기천사를 무영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다시 본 서원은 정부당국의 보조로 1975년 개수를 하여 새로 단장을 마친 바 있다.
이흥서원
영광읍 영광로 7길
진주강씨 강성덕, 강희안, 강희맹, 강귀손, 강학손 다섯 선생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서원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이흥사(驪興祠) 등 3칸 사우(祠宇), 내삼문[景仰門] 3칸 이흥서원 강당 모현당(慕賢堂), 목조와가 정면 8칸 측면4칸 팔작집과 팔룡당(八龍堂) 3칸, 외삼문[崇義門] 3칸과 고사(顧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강석덕, 강희안, 강희맹, 강귀순, 강학손의 위패가 봉완되어 있으며 모현당과 팔룡당은 유립의 회합과 학문 강론 및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영암군(2)
녹동서원
영암읍 교동리
1630년(인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덕지(崔德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65년에 최충성(崔忠成), 1695년(숙종 21)에 김수항(金壽恒), 1711년에 김창협(金昌協)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녹동(鹿洞)’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76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렬서원(죽전서원, 심곡서원)
<위치 미확인>
1576년(조선 선조 9)에 이계(李棨)·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와 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지금의 죽전동에 세웠으며, 서원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이라고 불렀지만 그 후 심곡서원, 다시 충렬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장성군 (5)
가산서원
삼서면 영장로
고려 후기 문신 익재(益齋) 이제현( 1287∼1367)과 이제현의 8대손인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498년(연산군 4) 이제현의 5대손인 장수현감 이재인(李在仁 1415~?)이 현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백산촌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익재의 영정을 모셨고, 1559년 후손 이대정(李大貞)이 사우(祠宇) 백산사(白山祠)를 지어 익재의 제사를 모셨다. 세월이 흘러 사우가 퇴락하자 1766년(영조 42) 후손 이언경(李彦慶)이 낭월산 남쪽 기슭의 현 위치(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마을)로 사당을 옮겨 가산서원(佳山書院)이라 하고 이항복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어 영정만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남았다가 1960년 중건하였다.
고산서원
진원면 고산리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서원
장겅읍 장안리
1697년(숙종 2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변이중(邊以中)의 덕행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뒤 1707년에 변경윤(邊慶胤)을, 1728년(영조 4)에 윤진(尹軫)·변휴(邊烋)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74년 전라남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림서원
북이면 부동
심은 이수를 주향하고, 1590년(선조 23)에 향내 유림들의 발의로 장성군 진원면 죽림동에 창건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에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뒤 1814년(순조 14)에 본손이 북이면 부동에 이거하면서 이곳에 이건하면서 정재 윤홍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1946년 현재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필암서원
황룡먄 팔암리
김인후 선생이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현종 13년(167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그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다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장흥군(3)
강성서원
유치면 신풍리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문위세를 향사하기 위하여 1644년(인조 22) 월천사(月川祠)를 세운 데에서 비롯되었다. 1702년(숙종 28) 사우로서의 건립절차와 규모를 새로 마련하였고, 1734년(영조 10)에는 문익점을 추배하면서 그를 주벽으로 하고 문위세를 배향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전라도 유생 600여 명이 이들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에 조정에서 강성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그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고 1894년 후손 문정원·문욱호 등이 설단하였다가 1905년에 강당을 중수하였다. 1929년에는 신실(숭덕사)을 중건하였다.
연곡서원
장흥읍 원소리
1698년(영조2) 영조가 연곡(淵谷)이란 액호를 내렸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달은 헐리고 그 자리에 위패를 안치한 단소(壇所)와 유허비(遺墟碑)가 남아 있었으나 그 후에 중수하였다.
예양서원
장흥읍 예양리
1620년(광해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8년에 신잠(申潛)과 김광원(金光遠)을 추가 배향하고 1681년에 남효온(南孝溫), 1683년에 유호인(劉好仁)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70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평(1)
자산서원
1616년(광해군 8) 지방유림의 공의로 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희생당한 정개청(鄭介淸)에 대한 신원(伸寃)운동이 일어나면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7년(효종 8)에 서인계의 집권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상소로 1677년(숙종 3)에 복원되었으며, 1678년에 ‘자산(紫山)’이라고 사액되어 1680년에 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관찰사 임규의(任奎毅)와 유경서(柳景瑞) 등의 상소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나두하(羅斗夏)·김덕원(金德遠) 등 유생의 상소로 1689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정대청(鄭大淸)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뒤 이만성(李晩成)의 상소에 의하여 1702년 또다시 훼철되었다. 그 후 1752년(영조 28)에 제동사(濟洞祠)라는 이름으로 중건되었고, 1762년 훼철되었으며, 1789년 다시 복설되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42년 유림 및 후손들에 의하여 유허단향비(遺墟壇享碑)가 세워졌다. 8·15해방 이후 1957년에 복설된뒤 1988년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해남군(3)
미산서원
해남읍 해남리
1630년(인조 8) 지방유림의 공의로 민신(閔伸)·민보창(閔甫昌)·민보해(閔甫諧)·민보석(閔甫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82년(숙종 8) ‘眉山(미산)’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04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춘서원
계곡면 방춘리
1871년(고종 8)에 김정순(金鼎淳)과 김문익(金文翼)이 주도하여 건립한 순천김씨의 강학소이다.
원래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한 순천김씨 선대를 배향하였던 삼상사가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그 자리에 방춘전을 세웠다가 1919년 방춘서원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삼성사가 복설된 후에는 방춘서원의 강학소 겸 강당으로 활용되었다.
해촌서원
해남읍 해리2길
최부, 임억령, 류희춘, 윤구, 윤선도, 백백웅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본래 1652년(효종 3) 임억령 선생 단독 사우로 건립하였으나, 그 후 1689년(숙종 15) 해남유림의 발론으로 최부, 류희춘 선생을 추배하여 오다가 1721년 윤구 선생과 윤선도 선생을 추배하여 5현사가 되었다. 1868년 조정의 영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 설단, 제향하였으며 박백응은 1922년에 추배되었다. 구교리에 있던 것이 현재 해리 금강골 저수지 옆으로 옮겨 자리 잡고 있다.
화순군(4)
도원서원
동복면 연곡길
1670년(현종 11)으로 추정되나 다른 기록에는 1610년(광해군 2)이라고도 하고, 후대에 만들어진 상량문에 의하면 1668년이라고 하여 정확한 창건 연대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다만 1668년에 서원 건립을 시작하여 1670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동복으로 유배를 와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낸 최산두[1483~1535]와, 동복 현감을 역임하고 유학 진흥에 공이 큰 정구[1543~1620], 그리고 말년에 화순에 정사(精舍)를 짓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교육에 공이 큰 안방준[1573~1654] 등 세 분을 모신 서원이었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동복 현감을 지내며 학행의 모범을 보인 임억령[1496~1568]을 추배하여 네 분을 모시게 되었다. 제향 인물의 위차(位次)는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는 최산두를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를 배향으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사액 서원 철폐 명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최산두의 후손을 중심으로 1975년에 유허비를 건립하였고 1977년에 사우를 복설하였으며, 1978년에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수서원
한천면 모산리
1570년(선조 3)에 능성현령 조시중(趙時中)의 협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짓고, 조광조를 모시는 죽수(竹樹)라는 사액을 받고 서원을 세웠다.
1630년 유림들과 조정의 김장생(金長生) 등이 뜻을 모아 양팽손도 추배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겨우 단 을 마련하여 제향하여 왔다. 1971년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1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趙國朝)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이 본래의 위치인 모산리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9년에 동재를,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지곡서원
화순읍 서당길
1584년(선조 17)에 도유림이 조흡(曺恰)의 서원을 전북 고창군 금과면 고례촌에 건립하여 향사하고 명액(命額)을 예천(禮川)이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시에 병화로 인하여 소진되었다. 그 후 1785년(정조 9)에 도내장보(道內章甫)가 연명발통(聯名發通)하여 화순역정(和順櫟亭)에 중건하여 액(額)을 역정서원(櫟亭書院)이라 하고 조흡의 5세손인 조대중(曺大中) 및 6세손 조수성(曺守誠)과 동 조수홍(曺守弘) 그리고 칠세손 조엽(曺熀)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됨에 따라, 화순읍 지곡중록(芝谷中麓)에 별묘를 건립하여 백여 년간 향사하다가 1996년에 별묘가 있는 서원지에 서원을 복설하였다.
해망서원
춘양면 대신리
1508년(중종 3) 돈재 정여해(鄭汝諧:l450~l520)가 그와 스승, 친우관계인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정여해가 1520년에 죽은 뒤 황폐해지자 1871년(고종 8) 향내 유림들이 그 유풍을 계승하고자 정여해를 합하여 5위를 해망단에서 제향하였다. 이어 1934년에는 동복 만경대 건물을 매입해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그 이름을 해망사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서원건물에 해당한다. 그뒤 1979년 유림과 후손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하여 그 이름을 해망서원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