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역사상의 군주들을 평가할때 우리는 '좋은 왕 vs 나쁜 왕' 프레임에 빠지기 매우 쉽다. 가령 모 위키에 들어가보면 왕들을 암군 명군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분류해놓은걸 볼 수 있는데, 이런 극도로 단순한 이분법적 평가는 역사를 학문적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소위 '무능과 유능'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맥락에서가 고려되지 않으면 지극히 추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군주 개인의 역할이 중요한 군주제 사회더라도 그 개인이 모든 것을 통제할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지금까지 써온 글들에서 여러번 언급한 바이지만, 이런 단순한 이분법이 통하기에는 인간사회와 역사가 너무나도 복잡하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몇번 영국사의 몇몇 군주들에 대한 최근의 학술적 논의들을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어떤 군주의 치세를 평가하는게 이러한 암군 vs 명군 프레임이나 선악 구도로 바라보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었다. 특히 지난번에 썼던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학계 평가는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같은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최근 평가도 이러한 복잡함 내지는 명쾌한 평가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엘리자베스 1세는 말 그대로 명군 중의 명군이자 영국의 국민영웅으로 극찬을 받아왔다. 기존 평가는 엘리자베스를 앞뒤로 한 일련의 폭군과 무능한 왕들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홀로 빛나는 식이었다. 물론, 대중적 레벨에서 이러한 평가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한번 형성된 국민영웅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대중적 시각은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강대국의 기틀을 닦았으며,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해서 재정을 튼튼히 했고(그래서 사치, 방탕한 제임스 1세와 달리 의회와 충돌할 일이 없었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등등이었다.
그러나 현재 영국 사학계의 평가는 매우 다르다. . '종교적 관용'과는 거리가 먼 여왕의 가톨릭 탄압과 아일랜드 학살은 이미 메리 1세 관련 글에서 다루었으므로 넘어가고 이번 글에서는 주로 국정운용과 관련된 부분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재정문제
근대 초의 정부를 논하려면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시기는 근본적으로 현대적인 개념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중앙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도 상당히 제한되어있었고, 중앙의 의지를 신속하게 각 지역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도 제한되어있었다. 따라서 16-17세기의 군주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책을 세워나가는게 최선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구조 변화나 개혁은 점진적일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어떠한 장기적인 비전에 따라 진행해 나가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엘리자베스 이전까지 튜더 군주들은 비교적 행정 시스템을 잘 만들어온 편이었다. 헨리 8세는 본인이 끊임없이 대외전쟁에 나서고 싶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치세 중에 비교적 효육적인 전비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 전반적인 재정을 상당히 악화시켰다. 지난번 글에 서술했듯이, 메리 1세는 이 망가진 재정을 비교적 잘 재건했고, 동시에 대외교역에 대한 효율적인 징세 체제와 관세 세스템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엘리자베스가 물려받은 정부였다.
엘리자베스는 이 체제와 메리 시대의 재정 정책 기조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때 파산 직전까지 간 재정 회복을 마무리지었다는 것은 분명한 성과였다(물론 기반은 메리 1세가 만들었고, 시작도 메리 1세가 했지만).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는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16세기 말-17세기 초는 유럽 각국의 경쟁이 과열되던 시기고 각국은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물력를 제대로 파악하고 동원하기 위한 체제 정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 헨리 8세와 메리 1세의 재정 시스템은 그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만든 체제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어디까지나 16세기 초중반의 필요에 맞춘 적합한 체제였다. 상황이 바뀌면 이 체제도 수정을 해나가야 했다. Ronald Hutton 선생의 지적대로, 엘리자베스의 정부는 이 '업데이트'에 실패했다.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부의 측정은 여전히 헨리 8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납세자들은 재빠르게 탈세 스킬을 늘려갔다. 엘리자베스 치세 대표적인 실세 중 하나였던 윌리엄 세실 경은 심지어 자기 연수입이 고작 133 파운드라고 신고한 적도 있었다(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는 4000 파운드에 달했다). Hutton 선생 지적대로 가장 큰 책임은 이 체제를 건드릴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은 엘리자베스 자신에게 있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심각한 경제적 문제였다.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돈 나갈 일은 많은데, 수입은 늘지를 않았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인플레이션 시대라 왕실 자산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은 사실상 더 줄어든 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부족한 수입에 대한 보충을 재정개혁이 아니라 왕실 자산 매각과 빚이라는 임시방편으로 해결해나갔다. 그녀의 치세 중에 무려 900,000 파운드에 달하는 가치를 가진 왕실 영지가 매각되었다.
그러나 이것까지고는 전쟁 비용 대는데 어림도 없었다. 나머지는 의회에서 거두는 특별세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본래 잉글랜드 정치에서 의회 세금은 왕의 정식 수입(앞서 언급한 왕실 자산, 관세 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비상사태때 거두는 것이었다. 이것이 엘리자베스 치세때에 거의 상설세금화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앞서 언급했듯 재정 시스템 '업데이트'가 안되다보니, 정확히 산출된 국가의 부에 따라 과세가 되지를 않았다. 수입원을 둘러싼 의회와 이후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 간의 갈등은 유명하지만, Barry Coward 선생과 Peter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그 갈등은 이미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부에 생겨난 것이었다.
'검소한 여왕'의 진상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등과 같은 대중교양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흔히 나온다. "엘리자베스는 돈 한푼 쓰는것도 아껴썼기 때문에 의회에 손벌릴 일도 별로 없었고, 왕권도 강했지만 제임스 1세는 호화사치한데다가 측근들에게 마구 베푸는 기분파라 돈이 딸려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매우 다르다.
첫째. 엘리자베스가 의회에 손 벌릴 일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앞 문단에서 확인한 바 있다. 특히 재정 구조의 문제점이 점점 드러나는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엘리자베스는 의회 세금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치세 후기의 의회에 대한 J. E. Neale의 연구에 드러나듯이, 엘리자베스에 대한 의회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심지어 여왕이 죽기 전에도 '잉글랜드 의회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엘리자베스가 이 모든 문제점을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사망하는 바람에 당장 큰 욕을 먹지 않았을 뿐이다.
둘째. 엘리자베스의 궁정 정치가 상당히 검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 찬양할 일이 아니다. 이 점은 근대 초의 정치 매커니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근대 초의 궁정은 단순히 왕과 귀족들이 사교행사를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정치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론의 장이었고, 국정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왕에게 전달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정치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의 궁정-이런 엔터테인먼트만이 궁정의 기능은 아니었다
또한 중요한 기능은 근대 초 정치의 중요한 요소인 왕의 후원(royal patronage)이 분배되고, 베풀어지는 장소였다. 이건 현대적 관점으로 '정실인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근대 초의 유능한 군주들은 이 후원이라는 요소를 적시에 제대로 베풀어서 자기 세력을 만들고 그것을 정책 입안 및 추구의 힘으로 삼았다. 사실 동서를 막론하고 이시기 관료들의 봉급은 대단히 빈약했다. 따라서 궁정귀족들은 왕이 챙겨주는 연금이나 후원금 없이는 생계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조선시대 정치사를 봐도 이와 유사한 매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공식적 챙겨주기' 없이 정식 봉급을 늘리면 될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근대 이전의 재정 구조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검소함'은 이러한 후원에도 상당히 인색했다는 점을 수반한다. 어쩔수가 없는게, 엘리자베스 자신이 재정 구조를 손대지를 않아서 왕실 수입이 빈약하니 챙겨주고 싶어도 챙겨줄 돈이 없었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검소함은 본인이 돈이 많은데도 검소함을 실천한게 아니라, 근본적인 재정 개혁을 하지 않은 탓에 돈이 부족해서 검소하게 살수밖에 없었던 것이 더 진상에 가깝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여왕의 후원이 부족하니, 빈약한 봉급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귀족과 관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탈세와 부패에 의존하게 되었다.
반면에 그동안 사치하고 방탕했다고 비판받아온 소위 '기분파' 제임스 1세는 오히려 근대 초 군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후원'이 중요하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Coward and Gaunt, 2017) 이는 근대 초 국가의 운영에 필수적인 주요 귀족들과 국왕의 협력관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필수적이었고, 그래서 제임스 1세는 이를 아낌없이 베풀었다.(물론 제임스 1세는 어렵게 평화를 재구축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때처럼 대외전쟁에 들어가는 비싼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후대에 비판받은 것과 달리, 제임스 1세의 이러한 관대한 후원은 스튜어트 초기 시절 정부 시스템이 매끄럽게 돌아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엘리자베스 행정부-성과와 한계
행정부 운용에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기민한 정치력과 본인이 가진 카리스마를 통해 적어도 헨리 8세보다는 더 안정적인 정부를 이끌어나갔다. 이 부분은 Hutton 선생을 비롯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마냥 칭송만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우선 이 시기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추밀원(Privy Council)과 왕의 궁정(Court)이다. 이 둘의 기능한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정치와 토론의 장이면서 행정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스페인 대사와 회담하는 잉글랜드 추밀원
이런 중앙정부 운용과 지방 통치에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모두 자신이 총애하는 측근들을 이용한 통치를 했다. 소수의 측근들에 의존하다보니 그녀의 추밀원은 점점 더 규모가 작아졌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대를 이어서 집무했다. 한번 신임을 받아 추밀원의 구성원이 되면 거의 죽을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으니, 일단 정부는 헨리 8세때와 같은 급격한 변동 없이 안정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는 정치는 다른 많은 귀족들의 정치적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드러나게 된다. 소수의 측근 정치를 하다보니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라도 온전히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추밀원의 멤버들이 자신 모르게 증거를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는데, 상당부분 사실이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의 표본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던 세실 경의 문서 조사 결과 그는 상당히 더러운 정치적 술수를 써가면서 여왕을 속이고 때로는 조종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비측근 귀족들의 불만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측근이 총애를 얻으면 그의 분파가 추밀원, 혹은 궁정을 사실상 지배했는데, 이 역시도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이쯤 되면 현대 학자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정치가로서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대략 드러날 것이다. Hutton 선생에 따르면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의 큰 특징은 거의 '병적인 보수성'이다. 이것은 단지 옛 정책을 고수하거나 신중하다는 뜻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즉위한 뒤, 일단 익숙해진 상황을 바꾸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엘리자베스 치세의 성과와 한계점들은 모두 여기서 나왔다.
우선 제일 먼저 언급한 재정 문제가 그것이다. 그녀는 메리 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한번 이렇게 재정을 안정화시키자 그것을 추가로 개혁하는 것은 끝까지 피했다. 둘째로, 한번 익숙해진 사람을 바꾸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의 총신들이 대부분 죽을때까지 추밀원의 자리를 지키고, 그 아들들이 대를 이어 관직을 이어가는 것은 이 보수성에서 기인한다.
앞서 보았듯, 이러한 점들이 그녀의 능란한 정치술과 결합하여, 그 치세가 근대 초 영국사에서 보기 드문 정치적 안정기를 누리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이후 내전과 혼란기를 겪은 영국인들이 엘리자베스 시대를 황금시대로 회고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필요한 개혁까지도 뒤로 최대한 미루거나 임시변통으로 해결하도록 해서 만든 것이라는 커다란 한계점을 갖고 있었고, 그 덤터기는 후대 왕들이 죄다 뒤집어썼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 "후대 군주들을 희생시켜서 단기적인 성공을 거둔 군주"라는 평가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국민의 사랑을 받은 여왕?
사실 엘리자베스에 대한 최근 평가가 학계에서 크게 박해진 것은, 정확히 메리 1세에 대한 평가가 상승한 이유와 일치한다. 한두 세대 뒤 역사가들의 칭송 및 비난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과 행정문서를 뒤져보니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것과 상당히 다른 면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동시대인들의 기록들을 조사하던 학자들은 온갖 불만 사항이 가득 적힌 문서들을 발견했다. 여왕의 총애에서 제외된 궁정인들의 불만(엘리자베스가 소수의 측근에게 조종당한다는)과 퓨리턴의 불만, 탄압당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엘리자베스의 측근이라 할수 있는 관료들이 남겨놓은 문서였다. 여기에는 여왕에 대한 불만과 때때로는 불경한 표현까지 가득 담겨있었다.
사실 '블러디 메리'의 이미지가 동시대 평가라기보다는 상당히 후대 개신교 사가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바로 윗 문단에 서술했듯, 엘리자베스의 '황금시대'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치세 후반의 불만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여러 동시대 자료가 증명한다. Coward와 Gaunt 선생이 지적하듯, 1603년 여왕이 사망했을때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최근 학계에 의해 제기된 비판점만 보면 엘리자베스 1세가 상당히 형편없는 군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여성 군주라는, 그것도 남편이 없는 여성 군주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즉위하여 대단히 어려운 시기에 안정적으로 정국을 장기간 이끌었으며, 한정된 자원만 가지고 상당한 치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여왕 개인도 대단히 명민하고 능란한 정치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 의해 지적된 점은 그녀의 시대가 문제가 없는 '황금시대'는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녀는 분명 임기응변에 강하고,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끌어내서 당면한 문제들을 극복해나가는 능력은 강했지만, 이를 위해서 장기적인 안정성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특히 그녀의 보수성은 임기응변적 해결을 넘어서 근본적이고 시스템적인 접근을 크게 방해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후 세대에게 큰 짐을 던져준 셈이 되었다. 그런면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수정주의적 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Chrisopher Haigh 선생의 평 "멀리 떨어져서 보면 뛰어난 자질이 많아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결점 투성이인 군주"는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또한 그녀의 치세를 '황금시대'로 만들기 위해, 그녀 못지 않게 능력이 있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앞뒤의 다른 군주들이 그동안 지나치게 폄하되어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엘리자베스가 명군이냐 암군이냐'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할 말이 없다. Hutton 선생의 말대로 튜더 시대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현재 엘리자베스에 대한 합의된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말하고자 싶은 바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평가는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의 치세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군주의 역할과 업적에 대한 시각 또한 얼마나 다양해질수 있는가를 대단히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Barry Coward and Peter Gaunt, The Stuart Age England 1603-1714 (London, 2017).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Susan Doran and Thomas Freeman (eds), The Myth of Elizabeth (basingstoke, 2003).
Christopher Haigh, Elizabeth I (Harlow, 1999).
John Guy (ed.), The Reign of Elizabeth I (Cambridge, 1995).
첫댓글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점들이네요... 초고퀄의 글을 이렇게 무료로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이 글 어디서 올리셨나요? 분명 읽은적이 있는데...
제 이글루스 블로그, 역개루, 부흥에 올렸었습니다. 그 외라면 누군가 불펌을 했을지도요.
@mr.snow 음... 아무래도 스노우님 이글루스에서 본것 같습니다.
오 잘 읽었습니다 ㅎㅎ 새로운 것을 배우네요.
그럼 박정희 같은 케이스 인가요?
감사합니다~
흠 하긴 한국사에서 일반 대중에게 까이는 인조도 학자들세계에서는 평가가 갈리니(심지어 '선조' 조차도 선조대왕이라 부르는 분도;;) 역사인물에 대한 이분법적인 평가는 확실히 지양해야 할 것 같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ㅎㅎ
역사적 인물, 사건, 집단, 국가 모두 종합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감사합니다.
이런말 하긴 뭣하지만 이분법적 사고는 한국 현대사의 영향인 듯 하네요. 스노우님이 관련없는 현대사 언급을 싫어하실 듯 하지만 제가 봤을 땐 기존 한국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주류에 어긋나면 빨갱이니 뭐니 하면서 매도하니 어떻게 좋든 싫든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영향은 쌍방인듯 합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가 이분법으로 굳어져버렸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크 이런 글 좋습니다 오랜만에 글 줄줄 재밌게 읽었네요 ㅎ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보기 힘든 고퀼의 글을 손수 올려주셔서 ㅠㅠ
감사합니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선조와 인조를 마냥 개새끼 하는 경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