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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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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롤란의 주(主) 피라미드인 테오칼리를 습격하는 에스파냐군
17세기에 그려진 테노치티틀란 점령도
1523년, 현재의 멕시코 거의 전부를 호령하였던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 에스파냐와 틀락스칼라의 동맹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아즈텍 제국은 멸망하였다. 전쟁사 속에서 많은 전투가 있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문명과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전투는 많지 않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테노치티틀란의 함락은 ‘거시적 차원에서 역사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투(Battle with macrohistorical impact)’가 분명하다.
아즈텍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들 역시 빙하기 때 베링해협을 건너 아시아에서 넘어온 몽골리안들의 후손인 것은 분명하다. 이 몽골리안들의 후손들은 북미와 남미 곳곳에서 대부분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수렵과 채집단계의 경제를 영위하였다. 초기 농경단계에 들어간 집단들도 있었지만 이는 보충수단이었을 뿐 아메리카 원주민 대부분은 수렵과 채집으로 대변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수렵과 채집과 부락 공동체가 대부분인 아메리카에 예외는 있었다. 세계 어느 곳이건 간에 ① 대규모 농경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② 공동체의 위치가 주요 교역로에 위치하여 있어 수많은 물자가 오가게 되면 당장 필요한 것보다 식량이나 물건이 많아지게 되고 결국 이러한 물자는 저장되고 축적된다. 그리고 그 ‘잉여물자’에 대한 소유권이 주장되면서 ‘재산’이란 개념이 생긴다. ‘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은 스스로를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특별하다고 여기게 되고 특별한 지위를 누리려고 한다. 이러한 지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계급’이 만들어지고 이는 다음 대의 후손들을 통하여 계승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소위 귀족들이 생겨나고 귀족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자가 ‘군장’이 된다. 그리고 점령과 정복을 통하여 더 많은 땅과 백성과 더 넓은 교역망이 군장의 손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생성되는 물자로 군장을 보좌할 전문적 인력을 고용하게 된다.아울러 더 많은 정복전을 해야하니 단순히 군장의 몸을 보호하는 근위대 이상의 ‘군대’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들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조직을 관장하는 ‘관리’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을 통할하기 위하여 군장의 권력이 강해지고 다른 귀족들을 확실히 누르면서 그 지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지위가 세습되는 강한 군장, 즉 군주(왕)이 등장한다.
다소 긴 설명 같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형성이 된다. 남북아메리카 대부분의 사회는 이러한 과정이 완성되지 못하여 대부분의 집단이 부족공동체에 머물러 있게 되지만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북부에서는 옥수수와 감자의 높은 생산성과 활발한 교역으로 인하여 많은 물자가 오가게 되고 위에 설명한 과정을 거쳐 수많은 도시국가들과 함께 거대한 영역국가들이 생겨났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현재의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 남미 북부 페루와 칠레에 걸쳐 있던 잉카 제국, 그리고 전성기에는 현재 멕시코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던 아즈텍 제국이었다.
아즈텍 제국은 에스파냐인들이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존재하여온 유구한 나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중부 아메리카(Mesoamerica)에는 서양의 역년(歷年)으로 따지자면 이미 기원전에 해당하는 시기부터 문명국가들이 생겨났으며 이 지역의 역사 전체로 볼 때 아즈텍 제국은 상당히 늦게 생겨난 신생국가였다. 아즈텍인들이 현재의 멕시코 수도인 씨우다드-데-메히코(멕시코 시티)근방에 나타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아즈텍인들이 이 지역에 오기 전부터 많은 원주민 세력들이 멕시코 지역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여기에는 지금의 유카탄 지역에서 도시국가를 이루어 융성하였던 마야, 그리고 중부지역에서 많은 도시와 신전을 남긴 테오티우아칸 등이 있다. 마야는 모두 8-9세기경까지 융성하였다가 그 이후 쇠락하기 시작하였는데 “문명의 붕괴”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에 의하면농경에 의한 주변환경의 변화가 마야 문명 쇠퇴의 주원인이라고 적고 있다. 이에 비하여 테오티우아칸 등의 경우는 그 원인이 분명치 않다. 100년경에는 그 유명한 ‘태양의 신전’, 200년강에는 ‘달의 신전’을 지은 테오티우아칸은 흑요석(黑曜石) 무역에 기반하여 약 5세기경까지 번성하다가 약 8세기경에 쇠퇴하였다. 그 쇠퇴한 원인을 두고 이전에는 북부에서 이민족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는 설이 유력하였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로는 반란에 의한 내부 붕괴설이 힘을 얻고 있다. 아울러 테오티우아칸을 건설한 주체 역시 예전의 토르테카설이 힘을 잃고 테오티우아칸 사회는 ‘다민족(Multiethnic)’사회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토르테카’는 사실 부족명이 아니라 아즈텍 제국의 공용어였던 나우아틀어로 ‘장인’이라는 뜻이다. 즉 사회에서 건축과 예술작업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을 ‘토르테카’인들이라고 부른 것이지, ‘토르테카’라는 민족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테오티우아칸의 사회적 구성을 들여다보면 그 구성종족에는 자포테크, 오토미, 미츠테크, 나우아등이 있다. 바로 이 나우아인들이 후일 아즈텍 제국을 세우게 된다.
BC 600년경 중부 아메리카 주요 도시
테오티우아칸이 무너지자 나우아인들을 포함한 테오티우아칸의 백성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일부는 인근의 도시국가인 촐롤란(Chololan 또는 Cholula), 초치칼코(Xochicalco), 카카츠틀라(Cacaxtla)에 정착하였다. ‘톨테카’로 불린 장인들을 포함한 집단은 멕시코 시티 동북방 약 90km 지점에 있는 툴라에 정착하여 다시 테오티우아칸의 문화를 재현하였다. 툴라는 이후 크게 번성하여 그 문화적인 영향력이 유카탄 지역과 중앙아메리카까지 미쳤으며 마야는 이때의 문화적 파급효과로 인하여 일종의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치첸잇사를 비롯하여 많은 마야의 도시에서 툴라 지역 예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테오티우아칸 이주민들이 툴라로 들어올 때 그들의 영도자가 ‘케찰코아틀’이라는 것이다. 케찰코아틀은 일종의 반신(半神)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으며 툴라의 전성기를 이끌다가 북쪽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툴라를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동쪽으로 떠나면서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그러나 북쪽에서 들어온 야만인들 역시 구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우아’계의 집단이었으며 기존의 세력들과 잘 융합하여 현재 멕시코 시티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우악(아즈텍어로 “큰 물 사이의 땅”; 에스파냐어 명칭은 El Valle de Mexico)의 대호(大湖)주변에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아나우악은 현재 멕시코시티였던 큰 호수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13세기에 이르러 아나우악의 도시들은 과거의 테오티우아칸과 마찬가지로 크게 번성하였으며 ‘토르테카’ 장인집단이 대규모로 거주한 쿨우아칸은 예술작품들로 가득한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아나우악 중간지역에 있는 도시 아즈카포찰코(Azcapotzalco)는 쿨우아칸과는 달리 다양한 집단이 같이 몰려살았는데 군사와 행정관리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하여 기타 다른 도시들보다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아즈텍 제국 전성기의 테노치티틀란
아즈텍인들은 아나우악에 들어온 나우아 집단 중 가장 늦게 이주한 집단이다. ‘나우아’세력은 대략 6세기경에 지금의 미국 서남부/멕시코 북서부에서 멕시코 중부로 이주하여 왔다. 아즈텍이란 말은 나우아인들의 언어인 나우아틀어로 ‘아스트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정확히 아스트란이 어딘지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분명한 것은 아즈텍 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멕시코 북부에서 현재의 멕시코 시티 인근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즈텍이란 이름은 후일에 붙여진 이름이며 아즈텍인들은 스스로를 ‘메치카(Mexica)’라고 불렀다. 현재 멕시코의 국명은 이 메치카에서 기원한다.
아즈텍인들이 아나우악에 들어온 것은 약 13세기인데 이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 주변의 도시국가 주민들은 이들을 위험한 이방인들로 여기고 근처에 보이기만 하면 공격하여 쫓아냈다. 이들은 비록 같은 나우아 계통이었지만 아나우악 사람들과 달리 ‘문명인’들이 아니었기에 야만인 취급을 받고 쫓겨 다녔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큰 호수 안 남들이 쓸모없는 땅으로 여기고 있던 무인도로 들어가 살 수 밖에 없었다. 아즈텍 제국 멸망 이후 일단의 가톨릭 수사들이 모은 구전(口傳) 역사에 의하면 아즈텍인들이 호수 안의 버려진 섬에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것은 서기로 1325년경이다.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이후에도 아즈텍인들은 세력이 약하여 주변국들의 용병노릇을 하면서 전투경험을 축적하고 힘을 키웠다. 그 후 주변도시국가인 텍스코코와 틀라코판과 동맹을 맺고(아즈텍 삼국연합) 주변의 정복에 나선다. 아즈텍은 점점 강성하여져 100여년 후에는 주변의 도시국가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함은 물론, 되려 주변도시들을 제압하고 무릎 꿇리기 시작하였다. 1450년경 모크테주마 1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부 멕시코 전부를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현재 과테말라 국경까지 영토를 넓힌다. 1519년에 에스파냐에서 건너온 콩퀴스타도르(Conquistadores, 정복자)들을 만났을 때 아즈텍은 세워진 지 200년이 채 되지 않은 ‘젊은 국가’였고 그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인구 20만의 대도시였다(당시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의 인구는 12만 정도였다.)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는 에스파냐 병사들은 야만인의 소소한 부락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도시들을 능가하는,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의 모습에 압도당하였다. 그 당시 에스파냐인들이 남긴 기록에 에스파냐인들의 경외감을 잘 드러나고 있다.
“병사들 중에는 콘스탄티노플, 이탈리아 각 지역, 그리고 로마를 비롯하여 세상 곳곳을 돌아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테노치티틀란의 시장같이) 크고, 사람 많고, 잘 관리되고 잘 정돈된 시장을 본 일이 없었다”
당시 에스파냐인들의 기록도 그렇고 일반적인 인식으로도 아즈텍인들은 호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테노치티틀란에 자리잡고 주변의 도시국가들과 계속하여 싸워야 했고 주변 세력들을 대신하여 싸워주면서 차차 호전적으로 변해간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도 물론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즈텍인들이 호전적으로 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서력 기원으로 15세기에 아즈텍을 이끌었던 사제의 종교적 ‘개혁’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3 도시 동맹’은 단순한 협약이 아닌 전쟁의 결과이다. 서기 1428년부터 1440년 사이에 테노치티틀란을 다스린 이츠코아틀 왕은 이미 동맹을 맺은 도시인 텟츠코코의 왕 네자후알코요틀과 힘을 합하여 틀라코판의 왕 아즈카폿잘코를 굴복시킨 후 세 도시간의 동맹을 맺었다. 이 “3도시 동맹(Triple Alliance)"가 만들어지면서 아즈텍은 아나우악에서 최강이 되었고 이어 다른 도시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면서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처럼 아즈텍을 군사적인 강국으로 만든 것이 이츠코아틀이라면 아즈텍의 종교를 만든 것은 이츠코아틀의 조카이자 측근인 대사제 틀라칼라엘이었다. 그는 아즈텍 이전에 아나우악를 지배하였던 톨테카 집단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고 이에 기반한 개혁으로 새로이 강국이 된 아즈텍 사회의 융성을 이끌었다. 그러나 틀라칼라엘은 이전 토르테카 집단이 섬기던 예술과 장인(匠人)들의 신 테즈캇리포카와 케찰코아틀을 대체하고자 하였다. 이에 아즈텍 집단을 태양의 후손들로 강조하는 신화체계를 세우고 그들이 믿어오던 태양의 신인 위칠로포츠틀리(Huitzilopochtli)를 새로운 주신(主神)으로 내세웠다.
에스파냐에 의한 정복후 정리된 구전역사(Codex)에 묘사되어있는 위칠로포츠틀리
톨테카 집단이 평화로운 신인 케찰코아틀을 섬기면서 외웠던 기도문 역시 위칠로포츠틀리를 위한 기도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틀라칼라엘은 태양신 위칠로포츠틀리의 힘이 미치는 지역을 넓혀야 그 힘이 강해진다는 주장을 하였다. 아울러 위칠로포츠틀리는 태양으로서 “생명의 주관자”였고 그 영적인 기능을 유지하려면 피의 희생을 치뤄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인신공희(人身供犧)는 아즈텍족이 오기 전에 중부 아메리카 지역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틀라칼라엘이 인신공희의 전통을 시작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트라칼라엘은 아즈텍의 정치적 세력의 확장을 태양신 위칠로포츠틀리와 연결시켰다. 결국 아즈텍 제국의 영역확장은 다른 의미에서 더 많은 제물을 확보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테즈캇리포카와 케찰코아틀은 선주민(先主民)들이 모시던 신들이었기에 아즈텍의 신을 우위에 놓는 신화체계를 만들어 정치적으로 아즈텍인들을 새로운 사회의 상위계급으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이 때문에 이후 아즈텍 제국에서는 하루에 많으면 수백 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위칠로포츠틀리의 제단에 바쳐졌고 이는 아즈텍인들이 ‘야만인’들로 인식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젊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초상화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게 되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태어났을 때 에스파냐는 격동기였다. 에스파냐를 구성하는 여러 왕국 중 가장 큰 두 나라인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1479년에 나라를 합쳤고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마지막 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를 멸망시키면서 현재의 에스파냐가 생겨났다. 코르테스는 1485년에 카스티야의 메데인(Medellin)에서 났고 14살에 살라망카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여 법학과 라틴어를 공부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배운 법지식을 이후 멕시코 정복 후 얻은 영지를 늘리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소년시절의 코르테스는 새로이 생겨난 에스파냐의 후원으로 아메리카를 탐험하고 돌아온 콜럼버스와 다른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그만두었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이 발견된 대륙으로 건너갈 기회만 노렸다. 그러다 먼 친척인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총독인 니콜라스 오반도 카체레스의 후원을 얻어 1504년에 히스파니올라로 건너간다.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한 18세의 코르테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원(莊園)을 얻음과 함께 조그마한 도시의 관리가 된다. 이어 1506년부터는 당시 총독인 오반도를 따라 히스파니올라의 미개척 지역을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전쟁경험과 행정경험을 동시에 쌓게 된다.
이후 코르테스는 1511년에 히스파니올라 총독의 부관인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Velazquez de Cuellar)를 따라 쿠바 원정에 나섰다. 26세에는 새로이 정복된 쿠바의 식민행정부에서 재무관(財務官)의 서기관이 되었고 그 능력을 높이 산 쿠바 총독 벨라스케즈는 그를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이후 쿠바 식민지의 수도인 산티아고의 시장이 되었고, 쿠바 전역에 있는 인디오들을 무시로 징발할 수 있는 ‘엔코미엔다(encomienda)’의 권리가 주어졌다. 이 과정에서의 쿠바 내 그의 위상은 높아졌고 벨라스케즈가 그를 시기하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틀어졌다. 그러나 벨라스케즈의 처제인 카탈리나와 결혼하면서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벨라스케스는 1519년에 멕시코 내륙의 식민화를 위한 원정대를 구성하면서 코르테스를 그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실 코르테스는 총독의 심복이자 산티아고의 시장이었고 쿠바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어 상당히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의 야심은 단순히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자라면서 그 이야기를들었던 탐험가들을 능가하고 싶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코르케스는 그의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1519년에 원정대와 함께 쿠바를 떠나 멕시코로 향하였다.
코르테스의 원정이전에 코르도바(Francisco Hernandez de Cordoba)와 그리할바(Juan de Grijalva) 등에 의한 멕시코 원정이 있었으나 그리할바는 해안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코르도바는 주로 유카탄 반도 지역을 탐험했기 때문에 멕시코의 내륙은 에스파냐인들에게 아직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상태였다. 코르테스가 떠나기 직전 벨라스케즈는 코르테스의 인증을 갑자기 취소하고 출항을 불허하였으나 코르테스는 다른 지역에서 선원과 배를 모아 11척의 함선에 500명의 인원을 태우고 벨라즈케즈의 명령을 사실상 거부하면서 멕시코로 떠나 1519년 2월경에 유카탄 반도에 도착하였다.
코르테스는 이곳에 표류하여 살고 있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修士)인 아귈라르(Geronimo de Aguilar)를 만나게 된다. 아귈라르는 코르테스와 합류하였고 코르테스는 트리니다드 섬으로 가서 배와 선원들을 추가로 확보한 다음 멕시코 동남부 타바스코 지방에 상륙하여 원주민들과 싸워 이기고 20명의 여인들을 받아 이들을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 20명 중에는 이후 라-말린체(또는 도냐 마리아)라고 불린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마야어와 함께 아즈텍 제국의 공용어인 나우아틀어에도 능했고 마야어를 할 줄 알았던 아귈라르와 말이 통하였다. 이는 코르테스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는데, 라-말린체와 아귈라르를 확보함으로써 비록 중역(重譯)이기는 하였지만 멕시코 내륙의 집단들과 소통이 가능하였고 그들과 협상이 가능하였다. 이 둘이 없었으면 코르테스의 내륙진출과 정복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라-말린체는 이후 코르테스의 정부(情婦)가 되었고 이 둘 사이에는 역사기록상의 ‘첫 번째 메스티조(Mestizo)’라고 하는 마르틴 코르테스가 태어난다. 마르틴은 코르테스가 사망한 후 그의 영지를 물려받게 된다.
타바스코를 떠난 코르테스의 원정대는 현재의 멕시코 동부 해안에 있는 베라크루즈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변에 살고 있던 토토나크족을 만나 협상을 하였고 이때 라-말린체와 아귈라르는 제 몫을 다하였다. 군장인 치코메코아틀을 설득하여 아즈텍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대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코르테즈는 이때 법적으로 총독의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의 신세였지만 그는 이전에 배운 법을 유용하게 쓰게 된다. 그는 상륙한 곳에 베라크루즈란 마을을 세운 다음(La Villa Rica de la Vera Cruz)이 마을의 의회를 통하여 ‘아델란타도’란 지위를 부여받았다. 아델란타도는 어떠한 지역에 공동체가 세워지면 에스파냐 왕실로부터 해당 지역의 군사와 행정, 그리고 사법권을 받아 정복과 통치를 동시에 행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델란타도들은 총독의 통치권 하에 속하지 않았고 코르테스는 매우 합법적으로 벨리스케즈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렸다.
아즈텍 황제 모크테주마 2세의 판화초상
이윽고 코르테스는 베라크루즈를 떠나 내륙으로 진입하였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단 그가 끌고 온 원정대 중에는 쿠바 총독 벨라스케즈에게 충성을 하는 자들이 남아있었고 만약 이들이 다시 배를 타고 쿠바로 돌아간다면 벨라스케즈가 보낸 군대와 싸우게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막기 위하여 코르테스는 원정대가 타고 온 배를 모두 부수어버리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결국 그를 따라온 원정대는 좋건 싫건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군하면서 또 다른 원주민 집단과 마주쳤는데 지금의 멕시코 시티 동부에 살고 있는 틀락스칼라였다. 틀락스칼라는 아즈텍 제국의 전성기에도 자신들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즈텍과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있었고 이 때문에 아즈텍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에 마주쳤을 때 에스파냐군은 틀락스칼라와 수 차례 충돌하였고 이기기는 하였지만 에스파냐군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에스파냐군은 결국 산 위로 몰려 농성을 하는 처지까지 몰렸으나 틀락스칼라의 군장은 에스파냐군의 무기와 투지가 의외로 강력함을 보고 산 위의 에스파냐군에게 제안을 하였다. 자신들과 함께 아즈텍과 싸우자는 것이었다. 코르테스는 내륙의 거대한 나라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는 하였지만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틀락스칼라의 수적인 우위에 눌려 구석에 몰린 코르테스에게 틀락스칼라 군장인 치코텐카틀의 제의는 매우 솔깃한 것이었다. 물론 틀락스칼라는 에스파냐인들의 황금에 대한 탐욕을 알지 못하였고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는 이리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원수인 아즈텍을 쳐 없앨 생각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틀락스칼라군의 포위가 풀린 후 코르테스는 틀락스칼라에 20일동안 머물렀고, 휴식을 취하면서 틀락스칼라 고위층에게 가톨릭을 전파하였고 많은 소군장 여러 명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이때 에스파냐인들의 행태는 황금에 대한 물질적인 탐욕과 함께 그들이 야만으로 여기던 원주민들에게 ‘더 높은 신앙’인 가톨릭을 전파하려는 모습이 뒤섞여있었다. 이때 아즈텍의 황제인 모크테주마 2세는 동쪽에 이상한 족속이 상륙하였으며 그들이 아나우악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아나우악 남쪽의 대도시인 촐롤란(톨룰라)으로 전갈을 보내 에스파냐군 행렬을 맞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실 모크테주마는 촐롤란으로 하여금 에스파냐군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많다. 코르테스를 동행하고 있던 라-말린체는 촐로란의 긴장된 분위기를 수상하게 여기고 몰래 촐롤란의 귀족부인을 한 명 납치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여자는 촐롤란의 전사들은 에스파냐군이 밤에 쉬고 있을 때 야습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고 실토하였다.
코르테스는 아직 아무런 일도 잃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도발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촐룰라측을 먼저 기습하기로 하였다. 아즈텍 황제의 편에 서있는 촐롤란은 틀락스칼라에게도 적이었고 틀락스칼라와 에스파냐군은 그 날 저녁 주저하지 않고 촐롤란을 기습하였다. 에스파냐군이 먼저 기습할 줄 몰랐던 촐롤란은 그대로 당했고 일설에는 3만이 넘는 촐롤란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도시는 불 타 없어졌다 한다. 모크테주마는 그의 계획이 실패한 것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결과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에스파냐-틀락스칼라 동맹군은 이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대로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였다.
에르난 코르테스를 동행하였던 에스파냐 군인 베르날 디아즈(Bernal Diaz)가 정복전쟁이 완료된 후 정리한 [新 에스파냐 정복에 대한 진정한 역사(La Historia verdadera de la conquista de la Nueva Espana)]에 의하면 에스파냐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즈텍 제국에서는 이상한 징조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지고 위칠로포츠틀리의 사원에 불이 나 불타 없어지고 불의 신(火神)인 치우테쿠흐틀리의 사원에 벼락이 떨어져 사원이 부서졌다. 남자가 밝은 대낮에 해를 바라보면서 자위(自慰)를 하는가 하면 테노치티틀란 근처의 호수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떤 여자가 한 밤중에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라고 외치며 흐느꼈고 머리 두 개 달린 남자가 테노치티틀란 시내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황제 모크테주마 2세는 거울을 보다가 전사들의 환영을 보았다.
이러한 징조는 세계 다른 나라에서 망국 직전에 일어났던 징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그 나라의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있었으며 후세인(後世人)들에 의하여 부덕한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아즈텍 제국에 일어났다는 이러한 징조들은 대부분 에스파냐인들에 의하여 아즈텍 제국은 응당 망했어야 했다는 정당화의 차원에서 거론된다. 이러한 징조들이 일어났는지도 확실치 않고 일어났더라도 아즈텍 제국의 멸망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
코르테스가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하였을 때 아즈텍 제국은 썩어서 망하기 직전의 국가도 아니었으며 쇠락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건국한지 200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황제 모크테주마 2세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늙은 왕이 아니라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력적인 정복활동을 벌인 강한 군주였다.
![]() 아즈텍 제국 전성기 영토 | ![]() 테노치티틀란 상상도 |
아즈텍인들이 코르테스를 ‘케찰코아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주장 역시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즈텍인들과 같은 나우아 계통인 틀락스칼라족은 코르테스가 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아즈텍인들 역시 에스파냐를 타라스칸이나 틀락스칼라 같은 ‘외부인’으로 여겼을 뿐, 아즈텍인들이 남긴 구전이나 기록 그 어디에도 코르테스를 ‘돌아온 케찰코아틀’로 여겼다는 증거는 없다. 위의 이야기는 아즈텍이 멸망한 후 에스파냐인들이 지어낸 것이다.
황제 모크테주마는 코르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배를 보여주며, ‘그대와 같이 나도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노라’라고 하여, 코르테스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아즈텍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이 어쩌지를 못했던 것은 에스파냐인들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확히 어떠한 대상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촐롤란인들을 부추겨 에스파냐인들을 죽이려 한 시도가 실패한 뒤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심하였다. 코르테스를 맞기 전 모크테주마(원래의 명칭은 “모쿠테조마”이지만 여기서는 잘 알려진 모크테주마를 사용한다)는 고위 귀족들과 고참 전사들과 함께 에스파냐인들을 맞아들일지 말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일부 귀족들은 강대한 외부인들을 도성으로 끌어들이는데 반대하였지만 일단 에스파냐인들에 대한 공격시도가 실패하였으니 이들을 일단 테노치티틀란으로 끌어들이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면서 에스파냐인들은 테노치티틀란 남쪽 익스타팔라판에서 호수위로 쌓은 둑길을 건너 1519년 11월 8일에 테노치티틀란으로 입성한다.
아즈텍 멸망 이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베르나르디노 데-사하군(Bernardino de Sahagun) 수사가 아즈텍 사관(史官)들의 구전 역사를 모아 만든 [新 에스파냐 역사총서(La 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Nueva Espana)], 소위 피렌체 사본(Florentine Codex)에 의하면 모크테주마는 자신의 궁전에서 나와 둑길에서 코르테스를 맞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이시여, 우리의 땅에 오셨음을 다시 기뻐하며 환영합니다. 메치코(멕시코)의 산과 물에 대하여 궁금하셔서, 그리고 제가 잠시 맡아놓고 있는 그대의 권좌에 앉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즈텍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을 신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기록일 뿐이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모크테주마는 태양왕으로서 매우 오만하게 행동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른 나라의 황제들이나 왕들과 다르지 않았으며 자신을 그의 백성과 다른 존재로 보았다. 일반인들은 그를 만질 수 조차 없었고 식사할 때도 사람들과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발을 드리우고 그 뒤에서 따로 식사하였다. 물론 그 이전의 황제들은 모크테주마와 같은 특권이 없었으며 모크테주마의 ‘특권’은 사실 모크테주마가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하여 새로이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즉 이전의 황제들이 ‘귀족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면 모크테주마 2세는 진정한 황권(皇權)을 다지기 위하여 황제를 보다 신성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모크테주마 2세가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깎아 내리면서 코르테스를 ‘신’으로 받들었다는 것은 신용하기가 어렵다.
앞서 말하였듯이 에스파냐 병사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면서 그 규모와 함께 시장의 모습에 압도당하였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그라나다와 리스본의 인구가 7만정도에 불과하였으니 인구 20만이 1350헥타르의 면적에 모여사는 대도시인 테노치티틀란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을 맞아들이는 아즈텍인들의 관점에서도 신기한 것이 있었고 특히 에스파냐인들이 타고 있는 말은 아즈텍인들에게 신기함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에 의하면 구대륙(유라시아)와 신대륙(아메리카)사람들이 만났을 때 아메리카에는 소수의 라마나 구아나코 등을 제외하고는 사육하는 동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식용으로 작은 개나 다른 동물을 키우기는 하여도 기승(騎乘)이 가능하거나 많은 짐을 실어나르는 운송의 용도로 쓰이는 짐승이 없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도시의 규모는 해당 도시와 다른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도로망의 규모에 비례한다. 테노치티틀란의 인구가 20만인데 비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7만을 넘는 도시가 없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당시 아즈텍 제국의 교통망이 소위 ‘정복자’들의 고향인 이베리아 보다 우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운송용의 수레나 동물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교통망은 모두 인력(人力)으로 유지되었다. 과거 로마나 몽골, 조선시대의 도로와 같이 아즈텍의 도로에는 역(Station)들이 있었으며 여행자들은 이러한 역에서 쉬면서 식사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인력만으로써 멕시코만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진 교통망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아즈텍인들은 특별히 짐승들을 길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이 에스파냐인들의 말을 처음보았을 때 그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즈텍 사관(史官)들의 구전 역사를 모아 만든 ‘피렌체 사본(Florentine Codex)’ 속 ‘꽃의 축제’ 삽화
“그들의 사슴이 병사들을 태우고 앞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면갑(綿甲)을 입었고 손에는 가죽 방패와 쇠로 된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검(劍)은 사슴들의 말에 걸려 있었다 (…) 이 사슴들이 뛸 때는 큰 소리가 난다. 마치 돌덩이의 비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발굽으로 땅을 딛으면 땅에 큰 상처와 구덩이가 생긴다. 발굽이 닿는 곳마다 땅이 마구 갈라진다...”
모크테주마 2세는 일단 에스파냐인들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에 들어온 3000명의 기타 부족 전사들을 부왕(父王)이었던 아야차카틀의 궁으로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코르테스는 모크테주마에게 에스파냐 왕인 카를 5세에 대한 충성의 증거로 황금을 요구하였으며 테노치티틀란의 주(主)신전에서 아즈텍의 신상(神像)을 뜯어내고 성모상(聖母像)과 성 크리스토발의 상을 놓으라고 하였다. 모크테주마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과 귀족들의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코르테스의 병사들은 대개 에스파냐와 쿠바에 있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엄청난 보물을 약속한 코르테스의 말을 믿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문명인으로서 ‘문명’을 전파하는 것보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로서 그들의 신앙을 퍼뜨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많은 보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었다. 결국 코르테스는 모크테주마의 환대에도 아랑곳없이 혹시라도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인들이 그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를 막기 위하여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바로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인 모크테주마를 인질로 잡는 것이었다. 모크테주마의 시종들과 시위(侍衛)들이 이를 막으려 하였지만 강철갑옷에 큰 칼로 무장한 에스파냐 병사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코르테스는 모크테주마를 사로잡고 그에게 다시 엄청난 양의 황금을 요구하였다.
모크테주마를 인질로 잡은 것은 이후 에스파냐인들이 모크테주마를 통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효과도 있었으니 일단 아즈텍 전사들이 함부로 황제가 있는 궁전을 공격할 수 없었고, 아울러 황제를 굶겨 죽일 수도 없기에 궁전을 포위하여 굶겨 죽이는 작전을 구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에스파냐군과 함께 입성한 수천 명의 틀락스칼라 전사들까지 먹여야 되는 상황에서 테노치티틀란 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모크테주마의 궁전에 있던 코르테스에게 이 시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으니, 코르테스는 그의 상관이었던 쿠바 총독 벨라스케즈가 코르테스를 체포하기 위하여 부하인 판피요 나르바에즈(Panfilo de Narvaez)에게 원정대를 딸려 보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코르테스는 일단 나르바에즈와 장거리 협상을 하는 척하면서 전령들에게 아즈텍 제국에 가득한 황금과 보물에 대한 소문을 흘리게 하여 나르바에즈의 원정대 병사들 사이에 동요를 일으키려 하였다. 몇 개월 이후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코르테스는 부하인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궁전의 수비를 맡긴 다음 250명을 이끌고 나르바에즈와 싸우러 떠났다. 코르테스가 흘린 소식 때문에 나르바에즈의 병사들은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싸움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르바에즈의 병력은 900명이었지만 코르테스가 밤에 야습을 하여 나르바에즈를 공격하자 그 병사들은 그대로 항복하였고 나르바에즈는 어두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르바에즈의 병력 대부분은 코르테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다시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갈 코르테스의 휘하에는 1100명의 병력이 있게 되었다.
코르테스가 나르바에즈와 싸우러 간 사이 테노치티틀란에서는 큰 사단이 일어났다. 수비를 맡고 있던 알바라도가 축제를 위하여 사람들이 모이자 이들을 공격하였고 대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축제를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아니면 어차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아즈텍의 전사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정복 후 남은 원주민들의 구전에 알바라도가 자행한 학살의 생생한 모습이 전해진다.
코르테즈의 부장 알바라도. ‘슬픔의 밤’ 전투의 원인이 된 대학살극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춤추는 자들 사이에 난입하여 북이 울리고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고수(鼓手)를 공격하였고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 다음에는 고수의 목을 베었고 북치던 자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갔다.
그 다음에는 축제에 왔던 자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칼로 찌르고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내리쳤다. 어떤 자들은 뒤에서 공격 당하였고 바로 창자를 쏟으면서 쓰러졌다. 다른 자들은 머리를 자르고 잘린 머리를 여러 조각내었다.
다른 자들은 어깻죽지를 내려쳐 그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에스파냐군은) 또 다른 사람들의 허벅지를 베고 그 종아리도 벴다. 또 어떤 자들은 배를 갈랐는데 이들의 창자가 땅 위에 쏟아졌다. 공격 당한 자중에는 달아나는 자도 있었는데 창자를 땅에 질질 끌고 갔고 어떤 자는 창자에 발이 걸렸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달아나려 해도 무사히 달아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때 죽은 자들 중에는 아즈텍의 고위 전사들과 귀족들이 많았기에 아즈텍군의 지휘체계가 엉망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바라도의 공격과 학살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던 아즈텍인들과 에스파냐군과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코르테스가 돌아왔을 때 인질로 잡혀있는 모크테주마조차 에스파냐군과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 모크테주마는 이때 그의 동생인 쿠잇라후악을 풀어준다면 궁전 밖의 백성들이 이를 선의(善意)로 받아들이고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코르타즈가 쿠이라후악을 풀어주자 마자 쿠잇라후악이 황제로 등극하였고 에스파냐군에 대한 총공격이 이어졌다.
에스파냐군의 대포와 강철 무기는 아즈텍 전사들에 대한 우위를 보장하여주었지만 아즈텍 전사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아즈텍군의 인해전술이 밀려 궁전의 외벽이 점령당하고 에스파냐군은 점차 좁은 궁지로 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군 병사들 중 다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모크테주마를 이용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그를 종용하여 백성들과 전사들 앞에 나서게 하였다. 모크테주마는 만약 에스파냐군에게 길을 열어준다면 에스파냐군은 테노치티틀란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분노한 전사들 중에서 더 이상 모크테주마의 명령을 듣고 싶은 자는 없었다. 전사들과 백성들은 모크테주마를 향하여 돌을 무수히 던져댔고 모크테주마는 무수히 날아오는 돌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결국 모크테주마는 3일후에 죽고 에스파냐군은 탈출하는 것 이외에는 살 길이 없었다.
피렌체 사본(Florentine Codex) 중 아즈텍 전사들 삽화
코르테스가 선택한 길은 길이가 가장 짧고 테노치티틀란에 들어오기 전, 우군으로 확보한 도시인 틀라코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아즈텍군은 육지로 나가는 둑길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에스파냐군을 막으려 하였고 에스파냐군은 장애물이 설치된 곳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즈텍 전사들을 물리치고 장애물을 허문다음 다음 장애물로 이동하는 식의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궁전에서 나와 둑길입구까지 가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가는 도중에 있는 운하에 있는 다리들은 모두 아즈텍인들이 부수어버린 뒤였고 이 때문에 장애물을 허물로 이를 다리가 있던 자리로 밀어넣어 다리를 만드는 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전에 무어인들과 싸웠던 병사들 조차 이처럼 사납고 완강한 적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싸웠던 노련한 군인들도 이 인디오들보다 차라리 프랑스왕의 대포와 맞닥뜨리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참 싸우고 있던 와중에 아즈텍인들이 갑자기 휴전을 제안했다. 에스파냐인들이 잡고 있는 고위사제를 풀어주면 싸움을 멈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고위사제를 풀어주자 마자 공격을 다시 시작되었다. 아즈텍인들은 싸움을 멈추려던 것이 아니라 황위에 오른 쿠잇라후악의 공식 등극에 필요한 의식을 위하여 사제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재개된 공격에 밀려 에스파냐군은 다시 궁전으로 후퇴하였다. 코르테스는 병사들에게 목재로 임시교량을 만들게 한 다음 둑길로 다시 싸우면서 나아갔고 둑길이 끊겨진 위로 교량을 놓았다. 그 다음 알바라도의 지휘하에 150명의 병사로 하여금 후위를 지키게 한 다음 생존자들을 건너게 하였다. 그리고는 끊겨진 곳으로 나아가 대포와 활의 사격으로 맞은 편의 아즈텍 전사들을 흩트리고 다시 건넜다. 이 방법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어서 에스파냐군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듯싶었으나 황금에 눈이 어두운 에스파냐군은 너무 많은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고 이 때문에 탈출속도가 늦어지면서 더 많은 아즈텍군과 싸워야 했다. 수월할 수도 있던 탈출은 악전고투로 변하였고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군 1100명중 600명이, 틀락스칼라 전사 3000명중 2000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이 날의 전투는 이후 La Noche Triste, 즉 “슬픔의 밤”으로 불리게 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에스파냐군은 이번에는 주변의 아즈텍 동맹세력에게 쫓겨야 했다. 여기에 테노치티틀란에게 추격해온 병력까지 겹치면서 에스파냐군은 전멸의 위기에 몰렸다. 만약 계속하여 소규모 접전으로 에스파냐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였더라면 전멸하였을 것이나, 직접 추격군을 이끌고 나온 신임 황제 쿠잇라후악은 평원에서의 정면대결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실수였다. 시내에서의 좁은 공간에서는 기병의 위력이 발휘될 수 없었기에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의 기마병력을 과소평가하였다. 비록 스무 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에스파냐의 기병은 평원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하루 종일 싸우고도 오히려 아즈텍군은 에스파냐군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었고 결국 아즈텍군의 지휘관이었던 귀족이 에스파냐 기마병에게 격살당하였다. 쿠잇라후악은 서둘러 병력을 후퇴시켰고 코르테스와 에스파냐군 생존자들은 틀락스칼라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틀락스칼라에서 코르테스는 상처를 치료하며 그의 기지인 베라크루즈에 사람을 보내 자메이카에 배를 띄우라고 하였다. 탄약과 마필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코르테스는 이처럼 잃어버린 군대를 다시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와 동시에 둑길에 의존하지 않기 위하여 13척의 소형선박을 건조하였다. 아울러 틀락스칼라와 함께 주변세력을 정리함과 동시에 보다 많은 동맹을 확보하였다. 매년 아즈텍의 인신공희에 멀쩡한 청년들을 빼앗기는 도시들은 역시 복수를 위하여 에스파냐-틀락스칼라의 편에 섰다.
한편 코르테스가 군대를 다시 만들고 있던 와중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는데 이전 나르바에즈의 원정대에 섞여있는 흑인 노예로부터 시작된 괴질이 퍼진 것이다. 이 괴질은 주변지역을 순식간에 휩쓸었고 이 병에 대한 면역이 없던 인디오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후일 천연두로 밝혀진 이 괴질에 인디오들의 마을과 도시들은 초토화되었고 마침내는 테노치티틀란으로 퍼져 아즈텍의 세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신임황제인 쿠잇라후악 역시 병사(病死)하고 모크테주마의 사위 중 한 명인 쿠아후테모크가 새로이 황제가 되었다.
1520년 12월, ‘슬픔의 밤’이 일어난 지 5개월 후, 코르테스는 군세(軍勢)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여기고 다시 군을 이끌고 나섰다. 일단 테노치티틀란을 둘러싸고 있는 테츠코코호(湖)의 주변도시들을 모두 점령하여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지원세력을 없앴다. 테츠코코호 주변이 정리된 후 코르테스는 1521년 4월경 기병 86기, 118명의 노병(弩兵), 700명의 보병, 그리고 5만의 틀락스칼라 지원군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의 공격에 나섰다.
코르테스는 그의 군을 넷으로 나누어 두 개의 군은 그가 ‘슬픔의 밤’ 때 빠져 나왔던 타쿠바와 코요아칸을 점령하게 하고 나머지는 테노치티틀란 남쪽의 이츠타팔라파로 보냈다. 네 번째는 그가 만든 13척의 선박을 운영할 수병(水兵)들이었다. 코르테스는 이미 건조한 선박들을 해체하여 테노치티틀란 근처에서 다시 조립, 소규모의 함대를 만들었고 이 함대는 그가 직접 지휘하였다.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려는 찰라에 틀락스칼라의 추장 중 한 명이 아즈텍 쪽으로 붙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에스파냐군은 먼저 5월 26일에 테노치티틀란으로 식수를 공급하는 수로를 끊어 수비군을 옥죄었다. 5월 31일에는 테노치티틀란에 대한 압력을 해소하고자 수많은 아즈텍 전사들이 수백 척의 카누에 나누어 타고 에스파냐 함정들을 공격하였다. 마침 바람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왔다갔다하였고 코르테스는 오전 내내 교전을 회피하였으나, 오후 들어 바람의 흐름이 일정해지자 배를 돌려 아즈텍 카누들을 공격하였다. 비록 배 한척 당 대포 한 기밖에 없었으나 화기가 없는 아즈텍 카누들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아즈텍 카누군단은 몇 시간 후 궤멸 당하고 에스파냐 함대는 테츠코코 호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직 둑길은 아즈텍 전사들에게 장악되어있었고 에스파냐/동맹군이 테노치티틀란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이때 에스파냐 함정 중 하나가 둑길이 크게 끊어져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그 틈으로 배를 몰아 둑길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에스파냐 함대는 둑길 양 옆에서 아즈텍 전사들을 사격할 수 있게 되었고 대포의 사격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아즈텍 전사들은 도시 안으로 몰리게 되었다.
먼저 에스파냐의 노병들이 테노치티틀란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여 사원을 공격하였으나 아직도 아즈텍 전사들의 수는 많았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군이 테노치티틀란을 둘러싼 육지와 호스를 모두 장악하면서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싸움은 이후 10주간 지속하게 된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아즈텍 전사들은 이전에 잡혔던 에스파냐 군인들을 피라미드 사원 위에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치고 죽임으로써 에스파냐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야만인’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에스파냐군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결과만 낳았다.
호수를 장악한 함대의 지원을 받아 에스파냐군은 서서히 모든 방향에서 둑길을 장악해갔다. 일부 아즈텍 전사들이 잘린 에스파냐인들의 머리를 가지고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와 주변지역을 돌면서 지원군을 모으고자 하였으나 아즈텍으로 붙을 기미가 보이는 도시들은 주변을 돌고 있던 틀락스칼라 전사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압되었다. 마침내 몇 주의 지리한 싸움 끝에, 둑길의 끊긴 부분이 에스파냐인들에 의하여 다시 연결되었고 테노치티틀란 내부로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아즈텍은 계속되는 인해전술로 에스파냐군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전사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틀락스칼라군에 의하여 번번히 격퇴되어 아즈텍의 반격은 힘을 잃어갔다.
1521년 8월 13일에 마지막으로 테노치티틀란을 지키고 있던 15000명의 아즈텍 전사들에 대하여 에스파냐/틀락스칼라 동맹군의 총공격이 이루어졌고 1만 5천의 전사들이 모두 전멸하면서 동맹군은 마침내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찬 테노치티틀란을 함락시켰고 아즈텍 제국의 역사는 이로서 종말을 고하였다.
멕시코가 에스파냐에 멸망한 사건과 관련하여 최근까지의 추세는 반(反)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을 모르던 평화로운 민족이 탐욕스런 유럽인들에게 짓밟힌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멕시코는 전쟁을 모르는 평화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은 아니었다. 아즈텍 역시 강력한 정복국가, 강대국으로서 주변집단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누가 침략자고 선의의 피해자냐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하면 테노치티틀란 공방전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한 것은 단순히 전투에서의 승리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일찍이 몽골리안들의 후손들이 아시아로부터 건너온 이래 아메리카는 인디안/인디오(원주민이란 명칭은 너무 모호하여 그대로 인디안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한다)들의 땅이었다. 구대륙과는 태평양과 대서양, 두 대양(大洋)을 사이에 두고 있어 유라시아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대양을 횡단할 능력을 획득하면서 아메리카에 나타나게 되었고 새로운 정복지를 찾는 콩퀴스타도르들 앞에 아메리카의 원주문명은 멸망하였다. 이후 아메리카는 원주민의 땅으로 남지못하고 남북 아메리카 공히 유럽계 이주민들에 의한 문화가 깊이 이식되었다. 테노치티틀란의 전투는 아메리카가 유럽인의 대륙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진정한 문명사적 전쟁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