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5.6.22.) 말씀/ 이사야 45:7 빛도 어둠도 지으신 하나님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지 지난 주부터 우리는 헤세의 유명한 책 <데미안>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단락에 보면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대해서 나옵니다. 밝은 세계 사랑과 엄격함, 의무, 경건, 참회 용서,권위,.. 이런 세계에 갇혀 살아가면서 공존하는 어두운 세계를 동경하던 싱클레어가 그동안 보호받던 알에서 깨어나 어두운 세계를 거쳐 전체 세계로 날아가며 참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책입니다. 저는 그동안 이 책이 왜 그렇게 유명한 책인지를 잘 몰랐다가 이번 독서모임을 우해 7번째 읽어가면서 모든 사람이 정말 참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할 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도달해야 할 곳은 아버지 집의 밝은 세계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두운 세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는 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어두움을 알지 못한다면 빛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과 어둠 전체 속성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색채가 없습니다. 어둠이 없어도 색채가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세상의 모든 색채를 만듭니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운 빛깔도 저녁마다 불타는 붉은 노을빛도 수평선 너머 저 먼 바다의 푸른빛도 다 빛과 어둠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둠이 색채를 만든다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빛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데 사실 빛은 어둠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고,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빛만을 긍정하고 밝은 세계만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편협하였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빛과 어둠은 거역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의 관계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의관계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내가 있어서 당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이런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편협한지 모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나와 틀리다고 배척합니다. 상대방은 죽어도 나만 잘 살면 되는 줄 압니다. 대한민국 국회에 여.야가 있는 것은 서로 싸워서 기득권을 빼앗아오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견제 하면서 독불장군식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 내란 사태도 야당의 견제하는 힘이 없었다면 다시 후퇴하여 100년 군부 독재 시대로 들어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숨죽이고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전쟁으로 피를 흘려야했을지 모릅니다. 강한 견제구가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면서 이참에 내란 우두머리뿐 아니라 그런 내란당 여당은 해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어거지 비판하고 헐뜯기만 하는 자들은 없어졋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k 민주주의가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상에 소개되고, 증명되었습니까? 결과론적으로 아이러니하게 저 어두운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또렷하게 어둠 속에 빛나며 발전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견제구로서의 반대당이 없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잘 되면 우리 스스로가 느슨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이 속에서 스몰스몰 올라올 수 있습니다. 오웰의 <동물 농장>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갑질하는 인간을 쫓아내고 동물들이 힘을 합쳐 자유의 동물 농장을 세웠지만, 동불 돼지가 다시 더 지독한 독재자로 인간 흉내를 내며 등장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밉고 얄밉지만은 견제를 위해서 반면 교사로서 야당은 존재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좋은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긴장하고 깨어 서로 상호 견제하며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45:7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처음에 저는 하나님이 하나님은 빛도 어둠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놀랬습니다. 빛만 만드신줄 알았는데 어둠도 만드셨다니? 왜 어둠을 만드셨습니까? 어둠마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어둠은 단지 죄와 악의 개념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은 빛의 배경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빛을 만드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 빛과 밤이 낮과 어둠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편히 쉽니다. 창조 역사 속에 처음부터 어둠이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빛을 빛 되게 하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빛만 있으면 빛이 무엇인지 왜 빛이 중요하지 잘 모릅니다. 어둠이 있으므로 빛이 빛나고 빛의 필요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밝은 세계의 빛만을 고집할 때 우리는 빛고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전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독서로 배우는 니체의 전체 사상, 헷세의 책도 이야기하지만 이 전체 사상을 이해하고 접금하게 되면 한쪽 편으로 치우친 편견에서 벗어나 우주적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 삶도 건강하게 다져지게 될 것입니다. 마스시다 고노스케라는 내셔날 창업주에게 한 직원이 어떻게 회장님은 이렇게 큰 성공을 이루었나요?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가지 일을 하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합니다” ①가난하게 태어난 것,② 못 배운 것,③ 허약한 것...가난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못 배워서 모든 사람에게 배우는 자가 되었고, 허약해서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단련한 결과 90이 넘도록 건강을 유지하며 세계적인 성공 기업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불평하며 원망하는 것들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들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소망이 넘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절망 때문에 하나님 나라 참 소망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난과 부, 실패와 성공, 무지와 앎, 약함과 강함 이런 것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하나입니다. 남자와 여자도 그렇습니다. 따로따로 분리해서 알려고 하면 모릅니다. 남녀가 모두 한 아담에게서 나왔습니다. 남자 속에 여자가 들어있고, 여자 속에 남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데미안에서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라고 무시하고 약자라고 깔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서로 맞지 않는 화성인 금성인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야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삶을 제대로 살 줄 모릅니다. 달콤하고 좋은 삶, 행복하기만 한 삶, 건강한 삶, 부유한 삶, 승리하는 삶…, 이런 삶만 내 앞에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름철 파리,모기, 날파리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항상 배부르고 항상 따듯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항상 쉬고 놀면 얼머나 좋을까? 그럴가요? 못삽니다. 상반적인 것 같지만 빛과 어둠은 하나입니다. 상반된 전체를 사랑하는 것을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세상의 법칙도 보십시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이 한 말씀은 자연의 원리뿐 아니라 삶의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심는 것이 없이 거둠이 있겠는가? 추위가 없이 따뜻함만 느낄 수 있겠는가? 겨울이 없이 여름만 있겠는가? 여름만 있다면,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는 것이다. 낮만 있다면, 밤도 없고 낮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징계를 주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은 평안을 끼치시기 위해입니다. 왜 배고픔을 주십니까? 배부름을 주시기 위해. 왜 외로움을 주십니까? 함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전자가 없으면 후자를 주셔도 좋은 줄 모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 가운데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하시고, 고통 속에 인도하여 하나님을 부르짖어 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 있다는 것도 그런 뜻입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적 복을 사모하게 하고, 목마른 자가 되게 하여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이 원리를 이렇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우리는 형통한 날만 바라지만 하나님은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병행시키심으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난에 처해 봄으로 부요함이 어떤 것인가 알게 되고, 아파 봄으로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슬픔을 겪어봄으로 참으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소망도 커지고, 없어봐야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병행의 원리!’입니다. 이 병행의 원리도 전체 사상을 갖고있는 것입니다. 단면만이 아니라 전체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세계는 과학 문명의 과도한 발전으로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현대 문명을 비판한 작품입니다. 서기 2545년 배경입니다. 이 소설에서 인류 사회는 문명국과 야만인 보호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문명국은 사람들이 출산을 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노화나 병에서 자유로워지고, 경제적인 궁핍도 사라집니다. 인공 수정을 통해 인구를 유지하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입실론 등 다섯 계급으로 나뉜 계급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 ‘멋진 신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는 말살 되고 맙니다. ‘문명국’은 사회의 안정과 전체의 행복을 위해 개인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억압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급도 불만은 없습니다. 태어날 아기는 생산 단계에서 이미 계급에 맞게 지능과 신체 능력이 부여되고, 양육할 때에는 최면 학습을 통해 자신의 일에 순응하도록 조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고민이나 불만이 생기더라도 ‘소마’라는 신경 안정제를 먹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면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입니다. 반대로 이런 신세계에서 볼 때 자연 출생을 하고 자식을 가정에서 기르고, 가족이 있고, 병들과 아프고 힘들어도 참고 마약을 안 하는 그런 나라는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명국 신세계에 야만인 구역에서 자라난 ‘새비지’(야만인)한 명이 끼어들게 됩니다. 야만인 구역을 방문했던 버나드가 알파 계급의 남자와 베타 계급의 여자 사이에서 실수로 태어나 야만인 구역에 버려졌던 존을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존은 오히려 신세계의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습니다. 소마를 던지면서 “당신들 이 약에 속고 있다.”고 외칩니다. 그러다가 지도자에게 끌려가 총통을 만나 대화를 합니다. 이 세계는 안정된 세계고,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잘살고 있는데 자네는 왜 그러느냐고 합니다. 이 책의 압권은 클라이맥스로 죤이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합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합니다. “불행해진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전체 이 작품과 작가가 주는 메시지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서구 문명 중심주의, 과학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을 믿으며 맹신하는 과학 만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고통 불평이 없는 세상이 파라다이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인간은 질병이 있고, 고통이 있고, 죄도 있고 죽음도 있고, 살고 죽는 것이 있어도 자유 속에서 빛과 어둠이 다 있는 전체적인 것을 느끼고 사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 어떻게 완성되어지는가 그 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행복하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복의 동산은 너무 아릅답습니다. 온갖 과일이 풍요롭고. 자연 환경이 아름답습니다. 선악과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다 먹고 저주를 받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저주 받은 땅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추방당한 인간을 위해서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약속하고 보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주시고 생명나무와 모든 자유를 주시고는 또 선악과를 주셔서 결국 유혹을 받아 저주받고 쫒겨나게 하셨을까? 선악과가 없으면 죄를 짓지도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을텐데.. 그리고 또 한가지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아셨을까 모르셨을까? 모르셨으면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을까? 결국은 모든 것을 아셨고, 그것을 대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천국은 죄가 없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타락하여 어둠을 체험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에덴동산은 어둠이 없고 죄가 없고, 아무런 노동이 없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둠이 없이는 우리는 빛을 모릅니다. 내가 타락한 죄인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주받은 땅에서 땀 흘려 밭을 갈지 않고 에덴의 풍요와 배부름의 만족이 무엇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사단의 시험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얼마나 지고한 선이시며 사랑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무런 문제는 없지만 에덴 동산에 인간은 멋진 신세계처럼 로봇과 같은 존재에 불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빛을 창조하시고 어둠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구원과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하였다 구원받은 인간은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저 천국에서는 이런 나를 구언하신 하나님게 할렐루야 감사 찬송하며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멋진 신세계 책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자유의지 인간성이 말살당하고 아무런 문제 없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신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약을 투여하여 모든 것을 잊고 환각에 빠지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원 합니다.” 이 새비지(야만인)의 고백은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평안에 이르고, 죄를 통해서 구원의 행복에 이르고, 약하고 부족한 죄인으로 신에게 이르는 자가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치하게 여겼던 것들, 나와 무관하다고 소흘이 여겼던 이웃들, 상처, 고통, 가난, 실패 ,절망, 육체의 죽음 등에 대해서...나의 성숙한 삶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무시히지 않고, 내 주변의 작은 것 하나 소흘이 여기지 않고 이 한 주간도 빛과 어둠을 창조하신 하나님,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새겨보고 더욱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러한 우리를 통해서 삶의 주변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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