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이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이 유입된 이래로 20세기의 우리 한국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의미는 너무나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대답을 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철학이라는 말을 너무나 다양하고 혼잡스럽고 애매모호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철학이라는 말이 그 모든 다양함과 혼잡함, 그리고 애매모호함을 담고서도 충분히 역할을 할만큼의 범위와 넓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이유는 철학은 존재를 다루기 때문이다. 즉 모든 있는 것들의 있음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이해의 전통이 서양과 동양이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존재에 대한 이해의 표현이 다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1) 각 시대마다 각각의 문화권마다 달리 표현되지만 '철학'이라는 하나로 이해되는 바로 그것은 각각의 인간 현존재가 그때마다 존재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며, 이 노력은 존재의 부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존재이해는 존재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인간 현존재의 각각은, 그리고 어떤 문화권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 공동체는 그 각각이, 그리고 인류전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부름을 듣고 각각의 대답을 그때에 맞추어 하는 것이다.2) 한국의 신채호는 존재의 부름을 역사가로서 그 시대에 따라 그 시대정신에 응답함이라고, 그리고 마치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와 독일의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존재의 부름과 인간 현존재는, 다시 말해 존재와 사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공속(共屬:함께 속함)하고 있음3)을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가 된 것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희랍철학의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拿破崙 : 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큰 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 읽던 시절에 도산서원(陶山書院) 부근에 태어났더라면, 물러가 송시열(宋時烈)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洪景來)가 되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가 되었을는지 모르는 일이거니와, 도양(跳揚:뛰어오름이라는 뜻으로서 탁월한 독창성과 뛰어난 지혜를 의미) 발달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원과 사각형을 그리는 쇠로서 기준이 되는 규칙을 의미)만 삼가 지키는 퇴계가 되라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한다면 이도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낳는 원료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4) 이미 현존하고 있는 현존재에게 존재하라고 부르는 그 부름, 그리고 그것을 듣고 응답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부름을 이기상 선생님은 '존재의 바람'으로, 그리고 이 부름에 대한 응답을 존재의 바람을 느끼고 그 바람에 이끌려 가는 '사람의 길'로 표상하고 있다.5) 바로 이러한 사람의 길이 유가철학(儒家哲學)에서는 배움의 길이며 익힘의 길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움과 익힘은 삶의 기쁨이다.6) 공자는 "배우고 늘 익혀가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7)라고 유가철학의 핵심 경전인 『논어』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배움의 길에는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바로 다음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된 사람이 아니겠는가?"8)라고. 이와 같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고 내면에 기쁨을 간직한 채로 찾아가는 이 길은 그 과정 속에 당혹감과 놀라움이 그리고 고통이 동반되게 되어 있다. 모른다는 인식,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 이 양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당김, 그리고 그것을 또 하나로 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배움의 길을 간다. 그리고 그 길에서 스스로가 하나의 길이 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을 빠져 나오도록 하는 그 빛과 그 빛을 향해 가는 인간의 의지가 묘사된다. 그리고 빛을 보고 이데아를 보고,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 마명보살이 대승(大乘)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고 깨달은 자가 계속 나타나도록 하려고 하는 것처럼9), 다른 죄수들에게 사물의 진상을 설파하고 이데아의 세계로 이끌려 하지만 알아주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이 서 있는 곳은 사실에 있어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동굴의 세계이다. 동굴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이데아를 향한 도상에 있는 것이고, 현자는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동굴 안의 다른 죄수들을 이데아의 세계로 향하도록 이끌려고 한다. 도상에 선 존재, 길 위에 있는 존재로 표상되는 인간 현존재는 바로 고려 시대의 한 고승이 고향으로 표상되는 존재의 부름에 귀의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명절 때만 되면 엄청난 교통체증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향해 즐겁고 기쁜 길을 나서듯이 무겁고 힘들고 먼길이지만 즐겁고 기쁜 길을 나서는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은 일연(一然 : 1206-1289)과 동시대에 생존한 원감국사 법환(圓鑑國師 法桓 : 1226-1292)은 이와 같은 존재를 향한, 존재의 부름에 귀의하는 즐거움을 고향에 돌아가는 즐거움으로서 선시(禪詩)로 노래하고 있다. 고 향(故鄕) 심우당(審雨堂) 그 앞에 천지는 넓고 유선침(遊仙枕) 베고도 깊고도 긴 꿈. 나그네 길 즐겁기야 즐겁기로니 고향에 돌아감만이야 그 어찌 하리? 審雨堂前天地활 遊仙枕上歲年長 縱然客路猶堪樂 爭似催裝返故鄕10) '존재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고, '존재에 속해 있으며 그 안에서 살고', '존재를 배우고 익힘',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감'은 모든 학문들의 원천이며, 다양한 학문들은 사물들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기쁨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이며, 철학에, 존재지혜에, 삶의 지혜에 그 원천을 두고 있는 것이다.11)
2. 서양철학의 끝[終極] 철학이라는 말은 사실에 있어 서양철학을 동양에서 수입하면서 '필라소피(Philosophy; Philosophie; φιλοσο?ια)'라는 말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대학의 철학과의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대학의 철학교과 과정의 3/4 이상이 서양철학 교과이다. 그런데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서양철학이 한국에 수입되어 전국의 대학에 철학과가 생겨 본격적으로 왕성한 학문활동이 있어온 이후로 근 20년이 지나고, 한국의 신채호가 우리 정체성의 존망의 위기를 지적(『조선상고사』, 1925)한 이후로 75년이 지나고 2000년을 목전에 둔 1999년 현재에 서양철학을 전공한 많은 학자들이 '이땅에서 철학하기'를 시도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우리의 철학을 하려고, 다시 말해 원효가 그랬듯이, 그리고 퇴계가 그랬듯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건네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12) 우리는 서양철학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과학기술문명의 지배하에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조선 말기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대화 즉 서양철학에 뿌리를 둔 사회문화와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동안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해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서구 문화권에서는 전지구적으로 대동소이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채호는 이와 같은 위기를 75년 전(1925)에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 이후는 서구(西歐)의 문화와 북구(北歐)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문화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잘 씹고[저작(詛嚼)하여] 소화하여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13) 그런데 하이데거는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Das Ende der Philosophie und die Aufgabe des Denkens」에서 철학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철학은 유럽적 사유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해되는 철학으로서 그러한 유럽적 철학의 종말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방법론에,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의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속에서 철학의 연원에 대한 글을 보자.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을 이끌어낸다. 즉 우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감행하려고 할 때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철학에 대한 멋대로의, 그리고 우연적인 생각 속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이 물음을 뚜렷이 방향을 잡을 길 위에로 옮기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믿을 만한 방법으로 우리의 물음을 규정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할 것인가? 내가 지금부터 가리키려고 하는 길은 바로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길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길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이 길을 간다.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만 「철학」이란 말은 충분히 자주 사용되어 온 낱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철학」이란 말을 더 이상 낡아 닳아빠진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 대신에 「Philosophie(철학)」이란 말을 그 근원으로부터 받아들인다면, 이 말은 「????????? (필로소피아)」로 들리게 될 것이다. 이제 「철학」이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말해진다. 그리스말은 「그리스」말로서 하나의 길이다. 한편 이 길은, 오래 전부터 이미 우리들이 이 말을 말해 왔기 때문에 우리 앞에 있다. 반면에 우리는 이 말을 이미 언제나 듣고 또 말해 왔기 때문에 이 길은 이미 우리 뒤에 있다. 그러므로 필로소피아(?????????)라는 그리스말은 우리가 그 도상(途上)에 있는 하나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 철학에 대한 많은 역사적 지식을 지니고 있고 넓힐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길을 오직 애매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철학이란 그리스 정신의 실존을 처음으로 규정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 뿐 아니라 필로소피아란 또한 우리의 서양적·유럽적 역사의 가장 속 깊은 근본 특징도 규정한다. 흔히 듣게 되는 「서양적·유럽적 철학」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Tautologie)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이란 그 본질의 근원에 있어서 무엇보다 그리스 정신을, 그리고 오직 이것만을, 자기를 키워나가기 위해 요구하는 어떤 무엇임을 말한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철학의 그리스적인 본질은 그 자체의 근대적-유럽적 시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관념에 의해 인도되고 지배된다. 이러한 관념의 지배는 중세(中世)에 의해 매개된다. 물론 이것으로써 철학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된다고, 즉 계시(啓示)와 교회의 권위를 믿는 것으로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철학은 그 본질상 그리스적이라는 주장은, 오직 서양과 유럽만이 가장 고유한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철학적」임을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여러 과학은 가장 고유한 서양적 역사 과정, 즉 철학적 역사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과학은 온 지구상의 인류의 역사에 특별한 인상[die spezifische Prägung]을 줄 수 있는 것이다.14)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철학'이라는 말은 그리스적 철학이며 그리스 철학에 연원을 둔 서구라파의 철학은 바로 서양철학이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은 서양철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서양의 과학기술의 승리에 근거를 둔 세계문명의 시작을 서양철학의 종말과 동일시하고 있다. "(서양)철학의 종말은 과학적-기술적 세계와 그러한 세계에 맞는 사회질서를 통제 가능하게 정비하는 것이 승리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서양)철학의 종말은 서양적 유럽적 사유에 근거하고 있는 세계문명의 시작을 의미한다."15) 바로 서양철학의 그 시작시기에서부터 이러한 끝이 예견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세분화하고 쪼개고 분류하고 대상화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철학적 방법론 속에 오늘날과 같은 서양철학의 끝감이 예정되어 있던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가 "서구(西歐)의 문화와 북구(北歐)의 사상에 의해 우리가 그 문화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잘 씹고 소화하여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라고 외치면서 새 시대의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잘 씹고 소화하여 꽃피울 것을 갈망하듯이,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이 걸어온 길에 대한 이와 같은 잘 씹고 소화하는 반성[사유]을 통해 다시 그 본질을 찾아가는 길을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철학을 예비하는 자를 위한 철학자로서의 하이데거의 메시지가 있다. "Das Ende"의 의미는 그의 사유의 양상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이중적 구조, 둘의 단일성의 구조의 또 하나의 전형이기도 하다. 즉, 서양철학은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더 이상 갈곳이 없다. 이것이 끝감이다. 이것이 "Das Ende"의 일차적 의미이다. 다음의 또 하나의 의미는 그것이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존재를 하이데거는 "진동하는 사태"로서 언어로서 잡을 수 없다고 하듯이, 이 "끝감"의 사태는 그 고정된 의미만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유의 전형은 동양의 역철학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역철학(易哲學)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것의 끝은 가능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다. 역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이 변화에는 변화하지 않는 법칙성이 있다. 즉, "어떤 것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온다[物極必反]," "마치면 시작함이 있다[終則有始]," "그 도는 반복된다[反復其道]," "영원하여 그침이 없다[恒久不已]" 등등의 그 자체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16) 끝[終極]은 새로운 시작이 이미 도래한 의미의 끝이기에, 완전한 끝, 절대적 끝이 아닌 끝이다. 자원적(字源的)으로 종(終)은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는 실의 양 끝을 묶은 모양을 본 뜬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끝나고 다른 것이 다시 시작함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극(極)은 형성문자로서 극(극)과 목(木)이 합쳐진 것이다. 극(극)은 '힐문하다' '추궁하다'의 뜻이고 여기에 목(木)이 더해져 가옥의 용마루의 의미가 있다. 용마루라는 것은 바닥과 더불어 그것으로부터 그 가옥이 시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끝[Das Ende]'을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의미로 고대 독일어에서 장소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7) 그래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끝[Das Ende]'은 역철학적 의미에서의 '종(終)', '극(極)'과 유사성이 있다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역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 '종극(終極)'으로 'Das Ende'를 번역해 본다. 서양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고, 한국에서의 한국철학은 한일합방 이후의 국권 상실과 더불어 한국문화와 철학의 상실을 계속해서 경험하다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3. 한국사람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상실해오면서도 우리가 상실해 오지 않은 것이 있다. 한국이 있다. 그리고 한국말과 문자가 있다. 그리고 한국사람이 있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마치 공기가 너무나 자명해서 그 존재의 발견이 그 오랜 세월 속에 묻혀 있었듯이, 그리고 존재가 존재함에 대해 너무나 자명하고 보편적이어서 더 이상 사유할 필요가 없고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방법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문책받듯이18), 그렇게 한국사람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것인가? 그것이 너무나 자명해서 더 이상 사색을 요구하지 않는 것인가?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19)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무한한 생명력과 내 안의 생명력을 연결-지탱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하늘과 땅의 기운을 통해 살아 있고, 그것[천지(天地)]과 하나임을 생각하는 것이다.20) 그런데 한국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박휘근의 하이데거의 글을 인용하는 다음 글을 보자.21) 하이데거는 그가 「하늘(天), 땅(地), 신(神)적인 것, 죽을자(命)로서의 인간」이 함께 어울려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사방(四方/Geviert))」, 즉 「죽을자로서의 인간에게 맞갖는 「집(Wohnung)」과 「거기에 삶/거처함(Wohnen)」에 대해서,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의 거처함(Wohnen)」과 (「집」을) 「짓는 일(Bauen)」과 「사유함/생각함(Denken)」이 상호간에 지니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사색하는 짧은 글 「Wohnen - Bauen - Denken([집에]살기 - 짓기 - 생각하기)」 속에서 「짓는 일(Bauen)」에 대해서 「일」이 어떻게 「존재」와 서로 함께 속해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대 독일어의) Bauen(짓다), (고대 독일어의) Buan(짓다), (산스크리트어의) bhu(있다/이다/존재한다), beo(?)는 다른게 아니라 사람들이 (독일어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즉 「ich bin/나는…있다/이다」, 「du bist/너는…있다/이다」, 명령법 「bis, sei/그래라」라고 말할 때의 「bin/있다/이다/존재한다」이다. 그렇다면 「ich bin/나는 있다/이다/존재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bin/있다/이다」라는 단어가 속해있는 「bauen/짓다」라는 단어의 옛 의미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ich bin/나는 있다/이다/존재한다」, 「du bist/너는 있다/이다/존재한다」라는 것은 : ich wohne/나는 (여기, 이 집에) 산다, 거처한다, du wohnst/너는 (여기, 이 집에) 산다, 거처한다. 어떻게 네가, 그리고 내가, 다시 말해서 우리들 인간들이 땅위에 있는/존재하는 양상이 바로 Bauen(지음), Wohnen(삶, 거처함, 머무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죽을자로서 땅위의 머무르는(sein) 존재를, 다시 말해서 (땅위에) 사는/거처하는(wohnen)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짓다(bauen)라는 말의 고어(古語)는 인간이란 그가 사는(wohnen)한에서 있다(sei)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산다(wohen)라는 말은 동시에 : (경작지의 작물을) 보호하고 가꾸고 키움, 보육함, 밭을 경작하고 포도를 경작함(농사를 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작함/지음(bauen)은 단지, 그 스스로로부터 열매를 맺는(스스로 무르익는/zeitigt) 그와 같은 성장함(Wachstum)을 보호할 뿐인 것이다. (밭을) 갈고 가꿈이라는 의미에서의 지음(Bauen)은 무엇을 만들어 냄(지음/Herstellen)이 아닌 것이다. 배를 만들음, 성전(聖殿)을 지음은 이와는(경작함이라는 의미에서의 지음과는) 달리 그 일을 (사람들이) 스스로 해내는 것이다. 보육(保育)하고 가꾼다는 의미에서의 지음(bauen), 다시 말해서 라틴어의 colere, cultura(경작함/* Kultur(교양,문화))와 건(축)물을 세움, (라틴어의) aedificare(세움, 건축, 건립/* 교화하다, 감화하다, 신앙심(믿음)을 일으키다(起信))라는 의미에서의 지음(bauen)) 이 두 가지 양상의 「지음」은 모두다 원래적인 지음(Bauen), 즉 삶(Wohen/거처함, 머무름)에 속하는 것이다.22) 한국사람은 살고 있다.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처하고 있다. 한국의 한국됨은 한국사람의 살고 있음, 한국사람의 거처함을 통해서 가능하다. 한국사람의 한국사람됨은 한국사람으로 살음으로 해서 가능하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사람과 한국정신을 돌보고 가꾼이들 속에, 그리고 이러한 돌봄 안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함께 한국사람과 한국과 한국정신이 함께 속하고 있다. 「단군신화」속에 보여지는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 속에서, 원효의 불교수용의 완성 속에서 보여지는 "홍익중생(弘益衆生)"23)의 정신 속에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속에서 보여지는 『훈민정음언해』의 "내 이랄 爲윙하야 어엿비 너겨"24)라는 귀절 속의 정신 속에서와 같은 면면한 한국의 정신 속에서 한국사람들이 한국사람으로서 고유하게 살아오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25) 그리고 이런 정신의 흐름과 더불어 한국사람들이 한국말을 사용하고, 한국 땅에서 살면서 한국 땅에서 나는 야채와 쌀을 먹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테레비를 보고, 한국에 있는 주변의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한국의 대학을 다니고, ··· 등등 이와 같이 한국에 살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한국사람의 한국사람됨을 가능하게 해준다. 거기의 이 일들이, 우리가 생각하면서 가꾸면서 매일 매일 소중하게 사는 일이며, 이러한 일들이 있음으로서의 삶, 즉 사유와 있음이 함께 속하는 삶을 사르는 사람으로서의 사람을 가능하게 하고, 한국사람으로 살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일들이 주의를 기울임,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돌보고, 배려함 속에서 일다운 일이 되고, 이와 같은 일다운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다. 이와 같은 사람다운 사람이 살음과 생각과 사랑과 존재와 함께 속한 사람이고, 천지와 더불은 사람이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으로 살음이 바로 '천지의 덕과 더불은[與天地合其德]' 삶을 사는 것이고, 존재의 고유함에, 살음의 고유함에 고요히 고이는 것이다. 한국사람에게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하는 한국이 바로 고향이며 돌아갈 그곳인 것이다. 한국사람에게 존재의 부름은 가장 고유한 한국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사람으로서 그때마다 살아 있고 존재하는 현존재로서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이다.
4. 삶의 지혜 앞 절에서 보았듯이 우리말의 삶은 서양 형이상학에서의 있음과 가치적인 것 중에 가장 가치적인 의미의 가치영역에서 동가(同價)적인 말이다. 삶의 지혜가 바로 존재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입문』에서 밝히고 있는 "제22절 「있다/이다(sein)」라는 동사가 지니고 있는 세 개의 어간의 어원학적 기원과 그 일치성에 대하여"를 살펴보고 한국인들에게 삶이 바로 서양형이상학에서의 있음과 함께 속하고 있음을 사유해 보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말해질 두 개의 어간은 인도-게르만어에 속하는 어간이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있어서 「있다/이다(sein)」라는 단어에 상응하는 단어들 속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1) 원래적이고 가장 오래된 어간은 「es」이며, 산스크리트어의 「asus」이다. 이것은 삶(das Leben), 살아 있는 것, 즉 그 스스로 서 있고, 가고, 쉬는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 자립적인 것(das Eigenständige). 산스크리트어에 있어서 여기에는 동사적 형태, esmi, esi, esti, asmi가 속해 있다. 여기에 상응해서 그리스어에는 ε?μ?(에이미) 그리고 ε?ναι(에이나이)가 있으며, 라틴어에는 esum 그리고 esse가 있다. 같은 어간에 속해 있는 것으로서는 sunt, sind 그리고 sein이 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인도-게르만어들 속에는 「ist」(?στιν(에스틴), est ······)가 그 시작에서부터 계속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2) 다른 또 하나의 인도-게르만어의 어간은 bhû, bheu이다. 이 어간에는 그리스어의 열려 펼쳐짐, 다스림, 스스로로부터 그 위치에 이르름 그리고 이와 같은 위치, 품위에 머무름을 의미하는 ??ω(퓌오)가 있다. 이 bhû는 ??σι?(피지스)와 ??ειν(퓌에인)에 대한 통상적인, 피상적인 해석에 따라 자연(Natur) 그리고 「생장한다(wachsen)」처럼 설명되었다. 초기 그리스 철학과의 대화에서 얻어진 더 원래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생장한다(wachsen)」라는 것은 열려펼쳐진다(aufgehen)로, 이것은 다시금 거기-있다(出席/Anwesen) 그리고 나타나보인다(Erscheinen)로 규정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새로운 한 가지 사실로서는 사람들이 ?α-(파-), ?α?νεσ?αι(파이네스타이) 등과 관련해서는 어간 ?υ-(퓌-)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σι?(피지스)는 빛 안으로 열려 펼쳐지는 것(das ins Licht Aufgehende), ??ειν(퓌에인)은 빛남(Leuchten), (빛이) 비침(Scheinen)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 비침(나타나보임/Erscheinen)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Zeitschrift für vergl. Sprachforschung, Bd. 59 참조). 같은 어간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라틴어 완료형의 fui, fuo가 있으며, 독일어의 「bin」, 「bist」, wir 「birn」, ihr 「birt」(14세기에 사라짐)가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bin」 그리고 「bist」와 함께 명령법 「bis」가 전해지고 있다(「bis mein Weib, sei mein Weib(내 아내가 되어 다오)」). 3) 세번째 어간은 단지 「sein(있다/이다)」라는 게르만어 동사의 변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 wes ; a. ind.(고인도어), vasami ; germ..(게르만어), wesan, wohnen(거주하다, 산다), verweilen(머무른다), sichaufhalten(체류한다) ; 이 ves에는 Fεστ?α(훼스티아), F?στυ(화스투), Vesta(고대 로마의 아궁이 및 가정神), vestibulum이 속해 있다. 이것들로부터 독일어의 「gewesen」, 그리고 「was, war, es, west, wesen」이 형성되었다. 「wesend」라는 분사(das Particip)는 아직도 an-wesend(출-석/出-席하고 있는), ab-wesend(부-재/不-在하고 있는)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명사 「본질(Wesen)」은 원래 무엇-이라는 것(Was-sein), quidditas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앞에-있다(Gegenwart/현재), 출-석하고 있다(An-wesen), 부-재하고 있다(Ab-wesen)라는 의미에서의 Währen(존속하다, 지속하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라틴어의 prae-sens 그리고 ab-sens에 나타나는 「sens」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Dii con-sentes」라는 말은 모든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하고 있는 신(神)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세 어간으로부터 우리는, 그 원래적인, 쉽게 눈앞에 그릴 수 있는(anschaulich)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확정적인 의미들을 가려낼 수 있다 : 살다(leben), 열려 펼쳐진다(aufgehen), 머무른다(verweilen).26) 존재는 있음을 말하는데, 그 있음이 바로 한국사람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한국말에서는 살음이다. 살음은 (生命의 불꽃을) 사르는 것이다. 그래서 환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사름이 지속하는 한에서 바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아는 자가 삶앎이며, 바로 사람인 것이다.27) 그래서 『중용』에서도 "하늘의 명(命)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하고, 도(道)를 닦음을 가르침[교(敎)]이라 한다"28)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람다움이 목숨[명(命)]을 사르는 것이고 이 목숨을 사름을 통해서 사람은 사라지고 사람이 사라지는 한에서 참사람이 사는 것이다. 참사람의 살음은 그래서 죽음, 사라짐에 늘 언제나 그때마다 함께 속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완성은 죽음의 완성이 된다. 사람은 죽어야 산다. 그리고 참 의미의 죽음이야말로 참 의미의 삶이다. 우리는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산다.29) 「한 일이 行(행)해짐에 따라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고, 그 하나하나의 일이 모두 眞理(진리) 그대로이다.」30) 여기서 元曉(원효)가 말하는 行(행), 그것을 우리는 일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行動(행동)이며, 行爲(행위)라고 해도 좋다. 또 行(행)하는 것을 修行(수행)이라고 하므로 그렇게 이해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現實逃避的(현실도피적), 非生産的(비생산적), 隱遁的(은둔적), 退영的(퇴영적) 行脚(행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실로 「修行(수행)」이라는 산스크릿트 原語(원어)자체가 그 뜻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修行(수행)의 原語(원어)는 bh?vikata이다. 그리고 이 말은 bh?라는 動詞語根(동사어근)에서 派生(파생)한 낱말이며, bh?는 「있다」, 「이다」, 「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래서 이 bh?vikata는 「있게끔 하는 것」, 「이게끔 하는 것」, 「되게끔 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不足(부족)투성이이며 過剩(과잉)투성이이다. 過(과)·不足(부족)은 한결같이 다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眞實(진실)한 나 不在(부재)」의 狀態(상태)에서 「眞實(진실)한 나」 「한결같이 참된 나」를 있게끔 하고, 實現(실현)하게끔 하는 것, 그것이 「修行(수행)」이란 말이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生産(생산)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것이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를 自身(자신)의 日常的(일상적) 經驗(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다.31) 한국에 유입된 불교를 7세기에 완성시킨 원효와 이기영의 설명을 통해, 매순간 죽고 매순간 사는 것이 온전한 의미의 한 일을 하는 것이고, 이 한 일이 모두가 진리 그대로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삶은 '진실한 나' '한결같이 참된 나'를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이기영은 말하고 있다. 바로 매 순간 순간 그 (명(命)을) 온전하게 사름이 진실한 살음이고 그 사름의 살음 속에서 삶을 아는 자, 즉 삶앎으로서의 사람은 진실한 나, 한결같이 참된 나가 된다. 그때에는 그 매 순간의 사름이 진리 그대로이다. 그리고 매 순간의 살음[行:bh?vikata]이 바로 존재와 함께 속하고 있음을 이기영의 산스크리트 원어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조선의 전통과 학문을 익혔으며 서양의 학문도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며,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며 익힌 이광수는 그의 『원효대사』에서 신라의 국명이기도 했던 '사라(斯羅)'는 어원이 '상아'이고 이 '상아'는 '사나'가 되고 '사라'가 되었다고 그의 뛰어난 소설가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사'가 물이고 이것이 움직이면 사라가 되고 사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의 특징이 지식이라는 것이다. 사라는 술, 소리, 사람, 살림이라고 하고 있다.32) 여기서의 '사-'가 생명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앞의 설명에서 보여주는 (命을) 사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생각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생각은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다. 생각하다와 사랑하다의 두 가지 용례로 쓰이는 현대어에 비해 15세기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만도 "사랑하다"는 "생각하다, 그리워하다"로 사용하고 있다.33) 그것은 두 의미가 한 사태 속에서 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혹은 한 의미의 사태에서 다른 의미의 사태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무엇 또는 어떤 이를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 또는 그에 대한 그리움과 생각은 깊어지게 된다. 사름을 통해 밝힘이 가능하고 밝힘은 그것이 밝아져 시각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들어오고 인식적으로 파악되기에 앎을 의미하며, 거꾸로 앎은 인식과 관련이 있고 바로 이러한 인식이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 무엇에 대해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 것이 그것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命을) 사름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와 관계된 한국말은 고대한국인들의 존재의 지혜인 생명, 사르다, 살다, 생각하다, 사랑하다 그리고 밝음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 속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여전히 그 의미가 살아 있는 사유와 삶 그리고 존재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앞으로의 우리의 과제로 제안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까지 그 안에 의미를 간직한 채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가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한국사람들의 고대세계의 존재 지혜는 이처럼 오늘날에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가지고 추적하고 그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오늘날의 한국사람들의 사유의 깊이를 더해주고 삶의 지혜를 밝혀, 다가오는 2000년대의 삶의 지혜를 드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할 것이다. 하나의 달이 수많은 강에 비치듯이[月印千江], 고대 한국인들 이후 계속해서 존재의 빛이 한국인들에게 비치고 그리고 한국인들이 존재의 빛을 밝혀왔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존재의 빛이 비치고 밝히고 또 미래의 한국인들에게 비치고 밝힐 것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오늘날 쓰고 있는 언어 속에 우리 한국인들의 존재해옴의 방식이 그 안에 존재의 지혜가 살아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하이데거가 '존재와 사유가 함께 속한다'고 하듯이, 우리말의 사태에 맞갖게 이제 우리는 '존재는 삶과 함께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이제 있음은 너무나 자명하여 질문을 하는 것이 방법적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바로 이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에 있어 그러한 간주를 넘어서 존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대상화하여 사유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한국인들이 그 안에서 거주하며 그것을 사르며 그것을 사랑하며 생각했기에 사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유가 곧 그 삶인 있음이 하나로 있다. 사유가 곧 삶이며, 삶이 곧 있음인 삶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고 언제나 늘 이미 밝혀진 것으로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끊임없이 또 밝혀져야 할 늘 새로운 과제로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1) M. 하이데거 :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틀」, 이기상 역,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1999 가을학기 세미나, p. 10 참조; M. Heidegger : Zur Sache des Denkens, Tübingen, 1969, p. 7 참조. 2) 한국하이데거학회 편: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철학과 현실사, 서울, 1995 참조. 3) M. 하이데거: 「동일률」, 이기상 역,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1999 가을학기 세미나, 참조. 4) 신채호: 『조선상고사』Ⅰ, -총론-, 일신서적출판사, 서울, 1995, pp. 46-47. 5) 이기상: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철학과 현실사, 서울, 1999 참조. 6) 박정근: 「儒家哲學에 있어서 삶과 배움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이문출판사, 대구, 1994 참조; 박정근: 「아름다운 삶」, 『삶·윤리·예술』, 이문출판사, 대구, 1997 참조. 7) 『論語』「學而」,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8) 『論語』, 「學而」, "人不知而不온, 不亦君子乎" 9) 『大乘起信論』,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참조; 감산: 『감산의 기신론 풀이』, 오진탁 옮김, 서광사, 서울, 1992, p. 21 참조; 원효: 「대승기신론 소·별기」, 『한국의 불교사상』, 이기영 역, p. 67 참조; 이기영: 『원효사상』, 홍법원, 서울, 1993 제6판, p. 74 참조; 원효: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은정희 역주, 일지사, 서울, 1992 4쇄, p. 55 참조; 원효: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一』p. 10 참조. 10) 이원변 편저: 『高麗高僧漢詩選』, 동국대학교부설 역경원, 서울, 1978, pp. 56-57. 11) M. 하이데거:「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틀」, p. 7. 참조; 현대의 과학기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형이상학에서 형이상학의 본질에로 한걸음 물러섬은,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현재에 대한 통찰을 감안해 볼 때, 이 시대의 기술공학과 그 기술공학적 서술과 해석에서부터 비로소 사유되어야 할, 현대기술의 본질에로 한걸음 물러섬을 의미한다." 같은 논문, p. 4. 12) 이기상 외: 『이땅에서 철학하기-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 모색하기-』-우리사상연구소 논총 제2집-, 솔, 서울, 1999 참조. 13) 신채호: 『조선상고사』Ⅰ, -총론-, p. 8. 14) M. 하이데거: 『철학이란 무엇인가?』, 최동희 역, 삼성출판사, 서울, 1983, pp. 35-37. 15) M. 하이데거: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 이기상 역,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1999 가을학기 세미나, p. 3. ; M. Heidegger : Zur Sache des Denkens, Tübingen, 1969, p. 65, - Das Ende der Philosophie und die Aufgabe des Denkens. 16) 김원명: 「『周易』에서 變化와 人生의 意味」,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 p. 36, 38. 참조; 『周易』, 풍卦 「彖傳」, 蠱卦 「彖傳」, 復卦 「彖傳」, 恒卦 「彖傳」 참조. 17) M. 하이데거: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 이기상 역, p. 2. 참조. 18) M.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서울, 1998, pp. 15-16 참조. 19) 이기상: 「'존재의 역사'와 새천년-있음에서 살아 있음에로」, 『계간 사회비평』 제21호, 1999 가을, p. 62 참조; 이기상: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pp. 417-418 참조. 20) 이것은 역철학(易哲學)의 삼재(三才)사상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다. 박정근: 「儒家哲學에 있어서 삶과 배움의 의미」, pp. 275-276 참조. 21) 박휘근: 『한국인의 존재지혜 Ⅰ-「단군신화」와 한국인의 존재지혜』,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1998 가을학기 세미나, pp. 125-126. 22) M. Heidegger : - Bauen Wohnen Denken -, Vorträge und Aufsätze, Neske, 4e., 1978, p. 141 : "Bauen, buan, bhu, beo ist nämlich unser Wort 'bin' in den Wendungen : ich bin, du bist, die Imperativform bis, sei. Was heißt dann : ich bin? Das alte Wort bauen, zu dem das 'bin' gehört, antwortet : 'ich bin', 'du bist' besagt : ich wohne, du wohnst. Die Art, wie du bist und ich bin, die Weise, nach der wir Menschen auf der Erde s i n d, ist das Bauen, das Wohnen. Mensch sein heißt : als Sterblicher auf der Erde sein, heißt : wohnen. Das alte Wort bauen, das sagt, der Mensch s e i, insofern er w o h n e n, dieses Wort bauen bedeutet nun aber z u g l e i c h : hegen und pflegen, nämlich den Acker bauen, Reben bauen. Solches Bauen hütet nur, nämlich das Wachstum, das von sich aus seine Früchte zeitigt. Bauen im Sinne von hegen und pflegen ist kein Herstellen. Schiffsbau und Tempelbau dagegen stellen in gewisser Weise ihr Werk selbst her. Das Bauen ist hier im Unterschied zum Pflegen ein Errichten. Beide Weisen des Bauens - bauen als pflegen, lateinisch colere, cultura, und bauen als errichten von Baueten, aedificare - sind in das eigentliche Bauen, das Wohen, einbehalten. 1. 우리말의 「일으키다」, 「세우다」(학교를 세우다/나라를 세우다) 참조; 하이데거: 『시와 철학』, 소광희 역, 박영사, 서울, p. 116, 200 참조. 2. (농사를) 「짓다」에 관하여 박정근 : 「유가철학에 있어서 삶과 배움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이문출판사, 대구, 1994 참조; 퇴계 : 성학십도(聖學十圖), 第三 小學圖, - 元亨利貞 - , 『한국의 유학사상』, 삼성출판사, 서울, 1993 p. 257 이하 참조. 3. 칸트가 말하는 「건축술」과 「도식(圖式/청사진)」에 관하여 : 칸트 : 『순수이성비판』/선험적 방법론 참조; M. Heidegger : 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 Vittorio Klostermann, 4e., 1973, p. 85 이하 참조; Y.A. Kang(강영안) : Schema and Symbol - A Study in Kants's doctrine of Schematism, Free University Press, Amsterdam, 1985 참조. 4. 하이데거: 『형이상학입문』, 박휘근 옮김, 문예출판사, 서울, 1997, p. 120 이하, - 「있다/이다(sein)」라는 단어의 어원 - 참조; 강학순: - 하이데거의 신의 문제/ 3. 하느님과 사방 세계 - 안상진 외 지음: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문제』, 철학과 현실사, 서울, 1996, p. 445 이하 참조; F. 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이기상/강태성 옮김, 문예출판사, 서울, 1997, p. 400 이하 - 예술작품의 보존 - 참조. 23) 『大乘起信論疏記會本卷一』, p. 8. 24) 兪昌均 編著, 『訓民正音』-제4. 언해(諺解)-, 螢雪出版社, 서울, 1988, p. 121. 25) 박휘근: 『한국인의 존재지혜 Ⅰ-「단군신화」와 한국인의 존재지혜』,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1998 가을학기 세미나 참조; 一 然: 『三國史記』 참조; 이기영, 『원효사상』 참조; 박휘근: 『원음(圓音)과 로고스(λογο?)의 영원한 무관계(無關係)에 관하여』, 1995 참조; 兪昌均 編著, 『訓民正音』-해제편-, 참조. 26) M. 하이데거: 『형이상학입문』, 박휘근 옮김, 문예출판사, 서울, 1994, pp. 121-122. 27) 이기상: 「'존재의 역사'와 새천년-있음에서 살아 있음에로」, p. 62 참조; 이기상: 『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pp. 417-418 참조. 28) 『中庸』,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29) 박정근: 「儒家哲學에서 삶과 배움의 의미」 참조. 30) 『大乘起信論疏記會本卷一』, p. 9. "隨修一行, 萬行集成. 其一一行, 皆等法界." 31) 이기영: 『원효사상』, pp. 71-72. 32) 이광수: 『원효대사』, 又新社, 서울, 1981, pp. 206-208 참조. 33) 허 웅 편저: 『용비어천가』-제78장-, 螢雪出版社, 서울, 1987 초판 2쇄, p. 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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