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외할머니 불심 영향속 성장
지장보살님 원력에 크게 감동받아
집안에 기도처 마련하고 기도 시작
제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64년 8월경,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천년 고찰 치악산 구룡사에서 10세 때 5계를 받은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제재소를 경영했는데 구룡사 앞산에서 산판을 하셨던 관계로
여름방학이 되면 자연스럽게 구룡사에서 한 달 동안 자연을 벗 삼아서 공부
도 하고 심신도 단련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은 이어져 갔습니다.
주지스님을 따라서 새벽 3시 30분에 시작하는 새벽예불과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하는 저녁예불에 참석해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저의 몸과 마음은 차차 부처님께로 향했고 어린 마음에도 부처님을 닮아가
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은 지금은 작고하고 안
계신 외할머님 김대원경 보살님이었습니다.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영세도 받으셨지만, 불교 집안으로 시집오신
이후에는 시아버님을 따라서 불교를 믿으시게 되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큰외손자다 보니 저를 끔찍이도 귀여워해 주셨고 절에
가시면 항상 큰외손자가 잘 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원을 하셨답니다.
저도 그런 외할머님이 고맙고 존경스러워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연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
할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군사령부 법당 법웅사-청담 큰스님께서 직접 터를
잡아주시고 사명(寺名)도 지어 주심-에서 불교학생회장을 맡으면서 법사
님으로부터 <금강경>과 <법구경> 등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공부하
면서 나름대로 초보적인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에 입대를 해서는 논산에 있는 수용연대와 광주에 있는 상무대 무각사
에서 법사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어렵고 힘든 군 생활을 기도를 통한 불심
으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해 나갔으며, 양평에서는 제대를 하는 1년여
기간 동안에 법당에 나가서 괘도도 직접 제작을 해서 장병들에게 찬불가를
지도하면서 보람있는 군 생활을 잘 마무리 하고 사회로 복귀를 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청년회를 조직해서 불교의 불모지 원주에 부처님의 법음을
전파하는 신심 있는 청년 불자들의 장을 마련하면서 불교성지로서의
면모를 하나하나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가 생기면 유산이 되고 해서 참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외할머님께서 다니시던 절에
서 새로운 법당을 완공하고 부처님도 새로 모시는데 점안식날 부처님 머리
에 올렸던 삼베로 된 고깔을 주지스님께 부탁을 해서 하나를 얻으신 다음,
그 자리에서 반바지를 만들어서 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저의 집으로 가지고
오셔서 제 아내에게 주시며 입으면 효험을 볼 것이니 입으라고 말씀하시고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아내는 종교가 없었고 그다지 신심이 없었던 터라 의아심
을 갖고서 선뜻 입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삼베가 까칠까칠 하니 더욱 입기를
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고 때가 되면 입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안생기고 자꾸 유산을 하는데 자신이 생각해도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는지 한번은 저에게 그것을 입어볼까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서
제가 “남들은 얻으려고 해도 얻기가 어려운 것을 외할머님께서 당신을 생각해서
어렵게 구해서 만들어 주셨으니 성의를 봐서라도 입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
니다.
아내는 이후 반신반의 하면서 반바지를 입더니 100일이 채 안되어서 몸에 이상
한 기운을 느꼈는지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다 오라고 하고서
저도 은근히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서 병원을 다녀오더니 화색
이 도는 얼굴로 임신 2개월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외할머님께 전화를 드려서 소식을 전하고 감사한
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께도 말씀을 드리니 축하한다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즐거움이었기에 부처님께 달려가서 절을
올리면서 “부처님 자식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훌륭하게 잘 키우겠습니다”하고
다짐을 하고서 돌아왔습니다.
부처님께서 주신 그 귀한 큰아들이 지금은 인제군에 있는 포병부대에서 10개월
째 군복무를 잘하고 있으며 일요일에는 법당에 나가서 착실하게 신행생활을 하면
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식을 더 낳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계속해서 유산이 되고나니 전생의
업보인 것 같은 생각에 포기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장손이다 보니 아내가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하루는 아내가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앞으로 아이를 갖기가 힘들고
또 인공수정을 한다고 해도 확률이 10%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습
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로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면 언젠가는 부처님께서 자식을 점지
해 주실 거라고 믿고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지장보살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지장보살님은 죽은 영가
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미륵부처님
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무불시대에 교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부촉을 받았다
는 것을 알면서 감동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옥 중생들을 위해서 지옥문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시는데 그 장삼 자락
이 마를 날이 없다는 이야기도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
은 일체 중생이 성불하기 전에는 나는 결코 성불을 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
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장보살님의 원력에 크게 감동을 받아서 조용한 방에 지장보살님 족자를 모
시고 헌다기와 촛대 그리고 향로를 준비해서 지장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성철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서 평소에 큰스님을 친견
한 적은 없었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에 꼭 참석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아내
와 큰아들과 함께 밤 9시에 원주를 출발해서 새벽 4시에 해인사에 도착했습니다.
대적광전에 들어서니 전국에서 모여든 불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간신히 한쪽
구석에 앉아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성철 스님의 영결식이 끝나고 다비식장에 도착해 다비식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해인사에서 톨게이트까지 무려 8시간이나 지나서야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49재에는 저만 갔다 왔는데 성철 큰스님께서 꿈에 저의 집을 세 번이나 방문하셔서
추운 날씨에 가족이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가셨습니다.
어느 날 다시 제 꿈에 찾아오셨기에 제가 “큰스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니 말을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큰스님께서 오신 김에 화두 하나만 내려 주시고 가십시오”하고 청을 드렸
더니, 그것이 무에 어렵냐고 하시면서 “네 마음에 빛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는 말을 화두로 삼아서 잊지 말고 기억했다가 참선공부 열심히 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시더니 홀연히 가셨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큰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아내가 둘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터에 자신의 몸에 이상한 변화의 조짐을 느꼈는지 아내가 다시
한 번 병원을 다녀와야겠다고 하기에 이번에는 같이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애도 임신 2개월이라고 하면서 먼저 진찰을 했던 그 의사선생님
께서 기뻐하시면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몇 번이고 말씀을 되뇌면서 저희
부부를 축하해 주셨습니다.
둘째가 세상에 나오던 날이 1995년 8월 4일 이었고 생애에 두 번째로 축복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고 귀엽게 노는 모습에 시간 가
는 줄 모르고 지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요. 96년 3월경에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가업인 제재소에 새벽
1시 30분경 원인모를 화재가 났습니다. 당시 저희 네 식구는 깊은 잠에 빠져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는데 갓난아이인 둘째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에 제 아내가
잠에서 깨더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저를 깨우면서 밖을 내다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제재기계가 있고 나무를 쌓아놓은 공장 100여
평이 화마에 휩쓸려서 불길이 하늘을 향해서 치솟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다른 방에
자고 있는 큰아들을 깨워서 우리 네 식구는 밖으로 대피를 했고 소방차가 4대가
도착을 해서 불을 끄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700여 평의 마당은 폐허로 변했고 다행히 지장보살님을 모셔놓은 방
과 안방은 화마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더 다행인 것은 신혼부부가 수퍼마켓을 하면서 세를 들어 살고 있었고 매일 거기서
자면서 숙식을 했는데 마침 불이 나기 전날 친정에 가고 없어서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만약에 둘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세 식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동안 자식을 더 낳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을 했는데 다행히도 부처님께서 이번에도 자식을
보내주셔서 우리 가족의 목숨을 구해주셨고 불법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니 이 불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둘째에게 절을 하는 방법을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데도
불교텔레비전에서 예불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따라하더니 절을 제법
잘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스님을 만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꼭 합장을 한답니다. 또 한 번은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 약사여래 부처님을 친견하려고 입구에 도착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 때가 4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손을 잡고 걸어 올라가서 절을
하고서 다시 걸어 내려왔답니다.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업어달라고 할 텐데 업어주려느냐고 물어봐도 괜찮다고
하면서 걸어서 왕복을 하니까 장모님과 처남 그리고 아내가 무척이나 신기해하고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아마 전생에서부터 불법과의 인연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화마로 인해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낙담과 깊은 시름에 잠겨서
방황하고 있던 차에 이제껏 부처님께서 가피를 내려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으니
은혜에 보답을 하는 셈 치고 기도나 해보자고 하면서 그 날부터 지장기도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원주시에 있는 고찰 국형사로 향했습니다.
차로는 10분 거리이지만 기왕이면 걸어가면서 지장보살 정근을 하기로 하고
1시간가량 걸어서 절에 도착을 했습니다. 우선 <천수경>을 독송하고서 참회를
먼저 하기로 마음을 먹고 절을 하루에 500배씩을 한 다음에 <이산혜연 선사
발원문>을 낭독하고서 지장보살 정근을 1만 번 한 다음 회향을 하고서 다시
염불하면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4시간가량이 소요되는데 처음
1주일은 힘들었지만 묵묵히 참고 하다 보니 이제는 기도가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1일이 채 못 되어 시청 과장으로 근무하는 선배님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 괜찮은 회사에서 지역 사람을 모집하는데 발이 넓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추천을 해달라고 해서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정당의 사무국장도 맡아 보았고 동문회 일과 사회활동도 좀 했던 터라
선배님께서 기회를 주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력서를 준비해서 다시
선배님을 방문했었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시면서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1주일 정도 지나자 선배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약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한 번 회사를 방문해서 상담을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기쁜 마음에 회사로 갔고
거기서 총무이사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회사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들은 다음에 언제 쯤 출근이 가능하냐고 물으시기에 그동안 주변 정리도 해야
하니 10일 정도의 시간을 주시면 가능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럼 그 때 출근
하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속으로 “부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가슴 벅찬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저에게 몇 번씩이나 가피를 내려주시고 어려운
때에 살길을 열어주시니 은혜가 백골난망이옵니다. 앞으로 부처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먹고서 올렸던 국형사를 찾아서
부처님께 준비해간 초와 향 그리고 과일을 올리고서 절을 드렸습니다.
취직 후에도 기도는 생활의 큰 부분
70여 불교카페 가입하고 포교에 열심
“일심으로 기도하면 소원성취 되리라”
선배의 도움으로 취직을 하게 됐지만, 출근하기 전 10일 정도의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것은 지장기도 회향 일이 9일 정도 남았기 때문에 기도를 끝마치고 나서
회사에 출근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회사에서 하루라도 빨리 출근해야 한다고 하면 퇴근 후에 기도를 해서
회향을 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회사에서 배려해 주셔서 무사히 원만 회향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매일 절에서 기도하기가 여건상 어려워서 입제와 회향은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서 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하며 오고가는 차안에서 등 시간이
날 때마다 빠짐없이 기도를 하면서 이제는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고 그 다음 부터는 <천수경>의
정구업진언’부터 ‘개법장진언’까지 하고서 <지장경>을 1품부터 13품 까지
1독을 하고 발원합니다.
그 다음에는 지장보살 정근을 천주를 10번 돌리면서 1만 번하고 그 다음에
다라니를 10번 이상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하고서 회향을 합니다.
물론 한 자리에서 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걸어가면서 아니면 차안에서
등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구애 받지 않고 한답니다.
그리고 불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 인터넷상에 있는 70여개의 불교
카페에 가입을 해서 신행수기도 올리고 부처님 말씀도 전하면서 포교사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는 신행단체에서 포교부장의 임무를 맡아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불가사의한 경험을 한 내용이 많이 있으나 한정된 지면인지라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올리고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인연 있는 많은 불자님들께 발심하고
정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의 가장 큰 꿈이 있다면 작고하신 외할머님을 위해 절을 지어서 은혜에 보답하고
종단에 시주를 하는 것이며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서 포교사가 되어 설법
제일 부루나 존자님과 같이 전국 방방곡곡과 세계를 누비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이생과의 인연을 마감할까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정리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어려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혹은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좌절만 하고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한번쯤은 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전생 업장 때문에 현생
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되면 마지막에는 종교의 힘을 빌려서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에게는 기도와 수행이라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즉 누구나 신심을
갖고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한다면 소원성취를 할 수가 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
에게 맞는 수행법을 통해 깨달음의 길을 향해서 정진을 할 수가 있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자신의 업장이
두텁기 때문입니다. 이 업장을 소멸하지 않고는 소원성취는 물론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법력이 높은 선지식을 만나서 좋은 기도법을 전수받아 열심히 기도정진을 하면 업장
소멸이 빨라지고 소원성취도 앞당겨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장기도
를 권해드리고 싶고 지장기도야 말로 업장소멸은 물론 소원성취를 빨리 이룰 수가
있고 성불의 길을 향해서 가는데 지름길이 되리라 확신을 합니다.
우선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자세부터 올바르게 갖고서 정성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일체의 의심을 버리고 오직 기도에만 매달려야
하며 앉으나 서나 지장보살, 자나 깨나 지장보살, 꿈속에서도 지장보살을 생각
해야 합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다보면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또한 선지식들께서는 업장
소멸과 소원성취는 간절한 기도와 정성이 담긴 보시를 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만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서 진솔한 참회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참회와 기도를 통해서 업장을 소멸한 다음 보시를 통해
복을 지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복이 차차 쌓여지면 소원성취는 저절로 이루어지
게 마련입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하기 싫어질 때가 더러 있고 또 장애가 생겨서 곤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즉 ‘마장’이라는 것인데 대개는 여기서 주저앉고 마는 경우가 있는
데 그러면 이제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수포로 돌아가게 된답니다.
그럴 때는 업장소멸과 소원성취와 가까워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조금도 구애
받지 말고 더욱 용맹심을 내서 기도정진에 몰두를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힘이 든다면 그 때는 영험록과 소원성취 수기집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
듬어 보세요. 왜냐하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마장이 나타나지만 기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에게는 마장이 나타날 리가 만무하거든요.
우리 불자들은 너무도 조급하고 모든 것을 너무 빨리 이루려고 하는 욕심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고 인연이 도래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노력과 신심여하에 따라서 조금은 앞당길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며 최소한
으로 천일기도는 해야만 된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육신은 세월이 지나면 나이를 먹고 늙고 병들어서 죽음을 맞이
하게 되지만 우리의 본바탕인 마음자리는 상주불멸이라 생로병사가 없는 진여의
자리라 말할 수 있겠지요.
금생에 이 몸 받았을 때 제도하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에 인간의 몸을 받아서
수행정진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에는 4난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생에 인간의 몸을 받았고 불연과 전생에 지은 인연공덕으로 인해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전에서 지장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전생의 업장을
깨끗이 소멸하고 금생에 더욱 정진해서 소원성취와 복락을 누리시고 사후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인도아래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왕생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인연공덕으로 56억 7천만년후에 도솔천에서 강림하사 화림원 용화수 아래서
부처님이 되실 미륵부처님 회상에서 다시 만나 설법을 듣고 깨달아 우리 모두
중생고를 벗어나서 성불합시다.
첫댓글 衆生度盡方證菩提...나무지장보살마하살...()()()
글을 읽는동안 가슴이 뭉클하고 뿌듯함을 느꼈습니다...나무지장보살마하살 나무지장보살마하살 나무지장보살마하살...()()()
감사합니다. ~ 나무지장보살 마하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
감명깊게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더욱 더 열심히 기도 정진하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축하드립니다.
나무지장보살 마하살 _()_ 성불 하십시오
나무지장보살 마하살 ()()() 불제자의 바른 모습을 보는것 같아 가슴이 뭉클합니다. 성불사십시오()()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지장대성 위신력. 항하사겁 설난진. 견문첨례 일념간. 이익인천 무량사..나무 서구중생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_()()()_
정말 훌륭하십니다. 좋은 날 맞으소서. _()_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불자님의 진실한 불심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나무지장보살 마하살
한량없는 부처님의 대자대비로 중생을 고통중에서 건져 밝음에 살게해주심을 깊이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성철큰스님은 진짜 성불을 미루시고 중생곁에 계시는거같아요 힘들때 제꿈에도 나와서 웃어주시는데 꿈을깨기가 싫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