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그룹 지원 안받고 대기업 수준 성장한 회사 지난 10년간 NHN 1곳뿐
대기업이 자금력 동원… 中企 유망사업 빼앗아…
기업가 정신 부족도 문제
'MP3플레이어 세계 시장점유율 1위(30%), 국내 시장점유율 1위(50%).'MP3플레이어 제조업체 레인콤(현 아이리버)의 2004년 기록이다. 레인콤은 IT붐이 한창이던 1999년 직원 7명과 자본금 5000만원에서 출발, 설립 5년 만에 매출 4500억원대의 중견 기업으로 컸다.
당시 신흥 IT기업의 신화는 레인콤뿐 아니었다. 2004년 팬택앤큐리텔도 2조원대 매출을 돌파하며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91년 창업 초기 6명에 불과했던 임직원이 800명을 넘어섰고, 40여개국에 제품을 수출했다.
하지만 이듬해 두 기업에 시련이 닥쳐왔다. MP3플레이어 시장과 휴대폰 단말기 시장에 모토로라·애플·삼성전자 같은 '골리앗' 기업들이 뛰어들었다. 레인콤의 MP3플레이어 국내 시장점유율은 30%대까지 떨어졌고, 해외시장에서는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2006~2007년 영업적자를 내더니 결국 사모펀드에 팔려갔다. 레인콤의 성장 신화는 일단 무대 뒤로 사라졌다.
팬택 역시 대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6년 616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하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한국경제의 미래를 짊어질 신흥 대표기업으로 주목받았던 두 회사가 좌절을 겪은 이유는 무엇일까. 통신업계 관계자는 "당시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대기업들의 가격 공세가 거셌다"면서 "싹(중견기업)에서 줄기(대기업)가 나오려 하니까 초반에 아예 싹을 자르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이들 기업의 오너들이 단기간에 회사 덩치를 키우려는 욕심도 성장을 멈추게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또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커가는 '대기업 성장 신화'가 사라지고 있다. 15일 본지가 한국증권거래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공정거래위원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을 통해 지난 10년간 대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국내 기업들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했다.
1790개 상장 기업 중 99년 말 종업원 1000명 미만에서 올해 9월 말 현재 1000명 이상으로 성장한 기업은 21개(1.2%, 99년 900명대 종업원 수는 제외)에 그쳤다. 그러나 이 중 정부나 그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창업을 통해 자력으로 대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곳은 더 적다. 녹십자·한미약품·웅진코웨이·엔씨소프트·한국신용정보·NHN·하나투어·피앤텔·태산엘시디·서울반도체·심텍·희림종합건축 등 12곳에 그쳤다. 특히 99년 300명 미만의 중소기업에서 현재 1000명 이상으로 큰 기업은 웅진코웨이, 엔씨소프트, NHN, 태산엘시디, 희림종합건축 5곳이었다. 매출액까지 대기업 수준인 1조원(2008년 기준)을 넘긴 기업은 웅진코웨이와 NHN 두 곳에 불과했다. 웅진코웨이와 NHN은 각각 1989년과 1999년에 설립됐다. 다시 말해 지난 10년간 창업을 통해 대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상장기업은 NHN 한 곳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10년간 시가총액 30위권에 진입한 기업은 얼마나 될까. 현대모비스·롯데쇼핑·신세계·하나금융지주·현대건설·LG·NHN 등 12개 기업이 시가총액 30위에 신규 진입했다. 그러나 30대 그룹이나 금융기관, 공기업을 제외하면 역시 NHN이 유일했다. 국책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06년 보고서에서 "1994년 5만6427개 중소 제조업체 중 2003년까지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이 75개(0.13%)에 그쳤다"고 분석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30대 그룹 구성도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기존 재벌 그룹들이 그룹 분할한 것을 제외하면 30대 그룹에 새롭게 편입된 그룹은 대한전선·오씨아이 두 곳에 불과하다.
대한전선은 1955년 설립돼 남광토건·온세텔레콤 등을 인수하며 계열사를 30개로 늘렸고, 오씨아이는 1959년 설립된 동양화학공업에서 출발해 계열사가 19개로 늘어났다. 1950년대 이후 지난 50년간 창업을 통해 30대 그룹 대열에 들어선 그룹이 사실상 없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한국의 기업들이 성장을 못 하다 보니 산업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기업 수도 크게 줄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분석에 따르면, 종업원이 300~999명 사이인 '중견기업'의 수는 외환위기 당시였던 1997년 2308개에서 2007년 2275개로 감소했다. 종업원 1000명 이상인 대기업 수도 546개에서 407개로 줄었다.
◆성장판이 막힌 이유
전문가들은 소규모 기업이 중간 규모 이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는 '동맥경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동맥경화의 주된 이유로 지난 정부 이후 저성장 기조가 정착되면서 경제 규모는 커지지 않은 반면 과당 경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정영훈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매출액이 1000억원 이하 적은 시장일 때에는 중소기업들끼리 경쟁하지만, 매출액 5000억원이 넘어서는 시장으로 커지면 대기업들이 껴들기 마련"이라며 "중소기업과 중견기업들이 자금력과 마케팅을 앞세운 대기업들에 시장을 뺏기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벤처기업 신화를 일궈낸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은 "남들과 어떻게 다른 사업을 할까 생각하는 게 아닌, '저 사업이 잘되니까 나도 따라 해야지'하는 한국 기업가들의 미성숙한 기업가 정신을 뜯어고쳐야 한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공정거래가 이뤄지고 중소기업 간 제 살 깎아 먹기식 과당경쟁을 해결하도록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