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이 빌빌댔던 조선후기의 종친들과는 많이 비교가 되는군요.
이런 종친등이 있으니 세조의 정치에 힘이 실릴 수 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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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3권, 13년 8월 4일 정유 4번째 기사
이날 닭이 울 때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선봉(先鋒)이 되고, 다음에 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과 대장(大將) 어유소(魚有沼)가, 다음에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행군(行軍)하여 거산역동(居山驛洞)에 이르니, 적병(賊兵) 약 5천여 명이 이미 먼저 마흘현(麻訖峴)에 웅거하여 남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고, 북쪽으로 태산(太山)에 이르는 15여 리에 걸쳐서, 기치(旗幟)를 많이 휘날리고 팽배(彭排)를 줄지어 즐비(櫛比)하였다. 강순(康純)이 평로 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과 김교(金嶠) 등과 더불어 회의(會議)하고, 사자위(獅子衛)의 사대(射隊)와 맹패(猛牌)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웅거한 산 아래에 줄지어 진(陣)치고 적병(賊兵)이 와서 충돌할 것을 방비(防備)하게 하고, 거산평(居山平)을 순시(巡視)하여 진(陣)을 베푼 곳에 표(標)를 세우고서 돌아와 거산평(居山平)의 동쪽 냇가에 이르러서 어유소(魚有沼)의 군사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어유소(魚有沼)의 군사가 이르니, 또 여러 위(衛)로 하여금 목채(木寨)를 세우고 진(陣)을 설치하게 하고 편비(褊裨)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산 기슭으로 나아가, 적(賊)과 더불어 1백 보(步) 쯤 거리에서 상대(相對)하였다. 장차 올라가 공격(攻擊)하려고 하는 것처럼 최적(崔適)·김용달(金用達)·지득련(池得蓮) 등으로 하여금 적진(賊陣)으로 말을 달려가서 큰 소리로 더불어 말하여 화(禍)와 복(福)을 개유(開諭)하게 하였다. 최적(崔適) 등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적장(賊將) 김극효(金克孝) 등이 이르기를, ‘귀성군(龜城君)이 만약 온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이시애(李施愛)를 잡아서 기(旗) 아래에 바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준(浚)이 말하기를,
“적(賊)의 꾀를 추측하기 어려우나, 그러나 내가 가서 보고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알아보겠다.”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가서 지득련 등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외쳐 말하게 하기를,
“귀성군이 이르렀으니, 너희들이 속히 와서 배알하라.”
하였다. 김극효 등이 먼저 험한 곳을 점거하였음을 스스로 믿고 마음으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여 대답하기를,
“나는 가기가 어려우니, 귀성군이 군사를 버리고 오라.”
하고, 말이 상당히 불손(不遜)하였다. 혹은 꾸짖고 욕하는 자도 있으니, 적(賊)이 기(旗)를 휘두르면서 싸우려고 하였다. 준(浚)과 강순(康純)·박중선(朴仲善) 등이 대로(大路)를 경유하고 허종(許琮)은 대로(大路)의 남쪽 중봉(中峰)을 경유하고 우공(禹貢) 등은 대로(大路)의 중봉(中峰)을 경유하고, 어유소(魚有沼)는 바닷가의 동쪽 고개[嶺]을 경유하고 김교(金嶠) 등은 북쪽 산 아래를 경유하여 나란히 진군(進軍)하였다. 준(浚)은 전각(戰角)을 불어 독전(督戰)하니, 모든 군사(軍士)들이 일제히 응(應)하여 개미와 같이 붙어서 위로 공격하였다. 적(賊)이 힘써 막고 포(砲)를 쏘고 돌[石]을 굴려 화살이 비오듯이 내려왔다. 관군(官軍)이 포(砲)를 쏘고 난사(亂射)하면서 더불어 싸운 지가 한참 오래 되었다. 신시(申時)에 우공(禹貢)의 군사가 돌격(突擊)하여 산 고개로 쫓아 올라가서 적(賊)이 웅거한 봉우리를 빼앗으니, 적(賊)들이 물러가 다음 봉우리에 의거(依據)하였다. 김교(金嶠)와 이숙기(李淑琦) 등이 추격(追擊)하여 참획(斬獲)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이시애가 중봉(中峯)에 웅거하여 정예(精銳) 군사 2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팽배(彭排)를 줄지어 세워 세겹으로 하니, 준(浚)이 여러 장수(將帥)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이시애가 죽을 힘을 다하여 힘써 싸웠으므로 견고하여 격파할 수가 없었다. 유시(酉時)에 이르러 어유소(魚有沼)가 동봉(東峯)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어 싸우면서 진군하여 고개 위에 이르러 적의 좌견(左臂)에 임하여 진(陣)에 돌격(突擊)해서 한쪽 면(面)을 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일시에 분격(奮擊)하고, 북을 둥둥 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니,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震動)시켰다. 드디어 대파(大破)하니, 적들이 낭패(狼狽)하여 이시애(李施愛)는 홀로 몸을 빼어 말에 올라 도망하였다. 병장(兵仗)을 버리고 숨어서 도주하니, 스스로 서로 밟고 밟히었고, 관군(官軍)이 승리를 틈타 추격하여 여주을령(汝注乙嶺)에 이르렀다. 참수(斬首)가 2백여 급(級)이었고, 사로잡은 것이 13인이었고, 궁시(弓矢)·개장(鎧仗)·기치(旗幟)·안마(鞍馬)를 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해가 이미 어두워져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싸움이 처음에 벌어질 때 조석문(曹錫文)·한계미(韓繼美)가 남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군루(軍壘)를 쌓아서 군사를 기다렸다. 다음날 대군(大軍)이 이성(利城)으로 향하다가 다보동(多寶洞)에 이르니 길 가와 산 기슭에 초막(草幕)을 많이 지어놓고, 버려진 아이가 있었으므로 적병(賊兵)에게 사로잡혔는지를 물으니, 말하기를,
“이명효(李明孝)가 말하기를, ‘남쪽 군사들이 오면 장차 이 도(道)의 인민(人民)을 다 죽일 것이다. 너희들의 아록(衙祿)은【북쪽 사람들이 처자(妻子)를 ‘아록’이라 이른다.】 우리 군사(軍士)의 뒤에 있으면 죽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홍원(洪原)·북청(北靑) 사람들의 아록(衙祿)은 모두 이곳에 이르러 초막(草幕)을 짓고 삽니다.”
하였다. 대문참(大門站)에 이르러 바라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뒤덮혔으니, 바로 적(賊)들이 이성(利城)의 창고(倉庫)를 불태운 것이었다. 준(浚)이 손효윤(孫孝胤) 등으로 하여금 불을 끄게 하여 곡식 2백여 곡(斛)을 겨우 얻었다.
첫댓글 그러나 한명회등의 구신파에 의해 사라지는 비운의 인물이죠....
남이도..-_- 근데 남이는 성격이 좀 안 좋았다네요..
세조도 역시 왕족이기에 왕실이 강력하게 국가를 지배하길 바랬죠. 그러나 한명회등은 권력을 나누갖길 바랬죠.